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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레토 법칙과 농테일 법칙
(가)
수세기 동안 비수학적인 조건에서 이해되어 왔던 게임 이론 중 가장 유명한 게임은 홉스와 루소의 사상 또는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에서 표면화된 죄수의 딜레마이다. 이 게임에는 수많은 변형이 있지만 그 기본 개념은 모두 동일하다.
두 명의 범죄자가 체포되어 따로따로 감방에 갇히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강도 살인의 혐의가 있지만 경찰은 분명치 않은 증거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경찰은 범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만일 범인들 중 한 명이 다른 사람보다 먼저 고백할 경우, 그 사람은 기소 면제를 받고, 다른 사람은 사형 집행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배신하지 않을 경우, 둘 모두 강도죄만 적용받아 5년형을 복역하게 된다. 범죄자 각각이 취할 합리적 행동은 최대한 빨리 ‘변절하는’ 것이다. 이때 변절은 ‘협력의 실패’ 또는 ‘배신’의 의미로 쓰인다. 비록 협력할 경우 둘 중 아무도 사형에 처해지지 않겠지만 그런 행동은 당사자 입장에서 보면 비합리적이다.
이 게임은 수학적으로 처벌이 아닌 보상으로 표현할 수 있다. 나와 마이클이 놀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나와 마이클에게 동시에 1과 2의 숫자 중 하나만을 쓰라는 지시가 내려진다. 만일 내가 1을 쓰고, 마이클도 1을 썼다면 둘 모두 5달러씩 받는다. 만일 내가 2을 쓰고, 마이클이 1을 쓴다면 나는 20달러를 받지만, 마이클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 만일 내가 1을 쓰고 마이클이 2를 썼다면 나는 아무 것도 받지 못하고 마이클이 20달러를 받는 반대 상황이 벌어진다. 만일 둘 모두 2를 썼다면 모두 1달러씩 받는다.
나는 어떻게 행동할까? 다음과 같은 추론에 따라 나는 아마 2를 쓰게 될 것이다. 만일 마이클이 1을 쓰고 내가 1을 쓴다면 나는 5달러를 받는다. 그러나 만일 내가 2를 쓰면(마이클이 1을 쓸 경우) 나는 20달러를 받는다. 따라서 이 경우, 2가 더 낫다. 만일 마이클이 2를 썼다면 어떻게 될까? 내가 1을 쓴다면 난 아무 것도 받지 못하지만, 2를 쓴다면 최소한 1달러는 번다. 따라서 마이클이 1을 쓰든 2를 쓰든 나는 2를 쓰는 쪽이 유리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의 딜레마는 보상 체계의 완전한 대칭성 때문에 마이클도 똑같이 생각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가 이기주의를 따른다면, 그도 역시 2를 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결국 1달러밖에 받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협력했다면 둘 모두 5달러를 받았을 것이다.
- 리처드 코치, <80/20 세계를 지배하는 자연 법칙>
(나)
1996년에 최근 10년 간 쓰여진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인 리들리의 <미덕의 기원>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생물학과 경제학에서 주된 교훈을 이끌어온 협력과 미덕에 관한 논고이다. 또한 비즈니스를 위한 심오한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리들리는 이기적 유전자와 진화 생물학 개념에 독특한 변형을 가했다. 그는 사회가 우리의 유전자 및 우리의 진화에 따른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인류는 개인 간 복잡한 상호 관계가 함께 하는 거대한 집단으로 조직되고 다른 동물들과 질적으로 다르게 협력한다는 차원에서 독특한 존재이다. 이것은 진화 중에 가장 고차원적이고 성공적인 형태이다.
사회의 이익은 노동의 분화와 사회화에 좌우되는데 현대인들은 사회의 이익이라는 것을 행복의 극단으로까지 끌어올렸다. 리들리는 다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복잡한 사회에서 번영하려면 거대한 두뇌가 필요하다. 거대한 두뇌를 획득하려면 복잡한 사회에 살아야 한다. 인간의 두뇌는 다른 동물들의 두뇌보다 우수할 뿐만 아니라, 선의를 교환하고, 사회적 삶의 혜택을 받기 위해 상호 이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매혹적일 정도로 다르다.”
(중략)
결국 리들리는 정치철학지 후쿠야마의 주장을 모방하여 핵심적인 인간적 요소는 상호 신뢰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정신은 이기적 유전자에 의해 건설되었지만, 사회적이고 신뢰적이며 상호 협조적이도록 건설되었다.”
그의 이 메시지는 실제로 인간 진보의 과정을 후퇴시킬 수도 있는 경제학설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음을 암시한다.
만일 우리가 스미스, 맬더스, 리카도,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밀튼 프리드먼이 옳다고 선언한다면, 그래서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주의에 의해 동기 부여가 된다고 한다면, 바로 그 선언에 따라 사람들에게 좀더 이기적이 되라고 격려해야 하는 것일까?
리들리에 따르면 좀더 효과적인 메시지는 ‘인간 정신이 포함하고 있는 상당수의 본능은 사회적 상호 협조, 또는 친절하다는 평판을 추구하는 쪽으로 배치되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사회적 자유의지론’으로 명명할 만한 내용을 열정적으로 호소하며 글을 맺는다.
“사회 질서의 근본은 우리 두뇌 속에 있다. 우리는 그러한 본능들을 끌어내기 위한 우리의 제도를 세워야 한다. 이는 분명히 동등한 사람끼리의 교환을 장려하자는 의미이다. 국가 간 교역이 그들 사이의 친교에 대한 최상의 방법이듯이, 자치권과 권능 부여권을 가진 개인끼리의 교환은 최상의 상호 협동 방법이다. 우리는 동등한 사람들끼리의 사회적, 물질적 교환을 장려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신뢰의 원료이고 신뢰는 미덕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 리처드 코치, <80/20 세계를 지배하는 자연 법칙>
(다)
베블런은 다른 형태의 사회도 주목했다. 폴리네시아인과 고대 아이슬란드인의 사회, 쇼군이 지배하는 봉건적인 일본 사회에는 잘 정의된 유한계급이 있었다. 여기에서 유의해야 할 것은 이 계급의 사람들이 무위도식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그 사회에서 가장 분주한 계급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약탈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강제로 또는 술수를 써서 자신들의 부를 탈취했을 뿐, 땀을 흘리거나 기술을 사용하여 부를 직접 생산하는 일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비록 이 유한계급이 생산적 봉사는 하지 않고 사회로부터 부를 취하기만 했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행위는 사회의 전적인 승인 하에 이루어졌다. 그 사회는 그러한 비생산적 계급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부유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찬양할 만큼 대단히 공격적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사회는 유한계급으로 올라온 사람들을 낭비가 심한 자나 쓸모 없는 자로 보지 않고 오히려 강자나 능력을 가진 자로 우러러보았다.
그 결과 일에 대한 태도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강제로 부를 탈취하는 유한계급의 활동은 명예롭고 위엄 있는 행위로 여겨졌다. 그와 대조적으로 순수한 노동은 비천한 것이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고전 경제학자들은 일을 지겨워하는 마음이 인간의 본성에 내재해 있다고 여겼지만, 베블런은 한때는 명예로운 생활 방식이었던 일이 약탈 정신의 영향으로 가치가 격하된 것이라고 보았다. 폭력과 잔인한 무용을 칭찬하는 사회는 인간의 노고를 미화할 수 없다.
베블런은 현대 사회 속에서 과거의 유산을 보았다. 유한계급은 그 소임을 바꾸고 수법에 세련미를 더했지만 목표는 변하지 않아 여전히 노동하지 않고 물품을 약탈했다. 물론 그 계급은 전리품이나 여자들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그럴 정도의 야만성은 이제 탈피했다. 대신 유한계급은 돈을 추구했다. 그리하여 돈의 축적이나 돈의 요란한 또는 섬세한 과시는 토인들의 움막집에 걸어놓은 머리가죽에 해당하는 현대적 재료가 되었다.
유한계급은 아직도 옛날과 같은 약탈 유형을 따랐다. 뿐만 아니라 개인적 힘을 찬양하는 옛날의 태도가 이 계급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사회에 비친 유한계급의 구성원은 아직도 호전적이며 무서웠고 그 밑에 깔린 평민들은 우월한 유한계급을 모방하려고 들었다. 이것이 터무니없는 소리로 들리는가? 우리는 자신이 야만인이라는 생각에 거부감을 느끼며 야만인과 비교당하면 저항을 느끼고 야만인을 경멸한다. 그러나 좀 이상한 점은 있지만 베블런의 관찰에는 일말의 진리가 담겨 있다. 우리 사회에는 의젓한 사무직에 비해 육체적 노동을 멸시하는 풍조가 있다. 적어도 성공한 고용직 사장의 경우 합리적인 수요와 필요의 범위를 넘어서는 부를 축적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거죽만 문명화된 야만인이라고 우리 인간을 파악한 베블런의 개념은 유한계급이 왜 존재하는가 그리고 소비지출 기준으로서 과시가 왜 용인되는가를 설명하는 이상의 공헌을 했다. 그것은 사회 응집력의 본질을 파악하는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초기의 경제학자들 역시 사회를 구성하는 계급들의 각기 다른 이해 관계에도 불구하고 사회를 결속시켜 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데 별로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만약 마르크스의 견해가 옳고 프롤레타리아가 자본가와 서로 화해할 수 없을 정도로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존재라면 즉각적인 혁명 발발을 막은 것은 무엇인가? 베블런의 논리가 그 답을 제공한다. 하층계급은 상층계급에게 칼을 겨누지 않는다. 그들은 만져지지는 않지만 아주 강력한 공통된 태도의 끈으로 묶여 있다. 노동자들은 경영자를 없애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과 경쟁하려고 할 뿐이다. 그들은 주인이 하는 일보다 자신들이 하는 일이 다소 덜 ‘근사하다’는 일반적인 평가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들의 목표는 상층계급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위로 올라가는 것이다. 유한계급의 이론 속에는 사회적 안정 이론의 핵심이 들어 있다.
- 로버트 L. 하일브로너, ‘베블런의 눈에 비친 야만 사회, <세속의 철학자들>
(라)
<일곱 가지 유혹>(감독 해롤드 래미스, 2000년)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영화는 직장에서 왕따인 리차드(브렌든 프레이저)가 악마와 거래를 하면서 겪는 에피소드로 이뤄져 있다. 이 영화에서는 리차드가 영혼을 판 대가로 악마는 일곱 가지 소원을 들어 준다. 리차드는 악마의 힘을 빌려 꿈에 그리던 인물로 변신한다. 돈과 권력이 있는 스페인의 부호로 변신하고 소원대로 자신이 짝사랑하던 여인과 결혼까지 한다.
영화는 이때부터 재미있어진다. 악마는 리차드를 부자는 부자이지만 마약 거래상으로 만들었다. 게다가 그의 아내는 바람까지 피운다. 부자가 되고 싶다고만 했지 어떤 부자가 될 것인지, 그 구체적인 계획을 정하지 않아서 문제가 됐던 것이다.
그래서 다음 소원으로, 모든 여성들이 흠모하는 잘 생기고 낭만적인 시인으로 변신시켜 달라고 소원을 빌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 결과는 엉뚱하다. 멋진 시인이긴 하지만 게이가 된 것이다. 다시 남성적이고 강한 최고의 프로 농구 선수가 되고 싶다고 했더니, 이번에는 성적 콤플렉스를 겪고 있는 사람이 된다. 이런 식으로 배우, 대통령까지 되지만 결과는 늘 예상을 빗나간다. 평소 이상형으로 꿈꾸던 사람들로 변신하고 싶다고 소원을 빌었는데, 실제로 그렇게 되고 나면 늘 뭔가 부족하다. <일곱 가지 유혹>은 현실에서는 누구나 원하지 않은 문젯거리들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브루스 올마이티>(감독 톰 새디악, 2003년)도 마찬가지다. 주인공 브루스(짐 캐리)는 원하는 것을 모두 할 수 있게 됐어도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 브루스는 뉴욕 방송국의 뉴스 리포터다. 직장에서 인정받지 못하며 하는 일마다 꼬여 늘 불만이다. 그런데 어느 날 신으로부터 제안을 받는다. 그가 휴가를 가는 4일 동안 전능한 능력을 줄 테니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보라는 것. 브루스는 이때부터 갖가지 일들을 벌이지만 하는 일마다 엄청난 재앙을 만든다. 브루스가 욕망하는 것들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불행을 안기거나 피해를 입히는 파급효과를 낳는다. 예를 들어 늦은 밤 브루스는 좀 더 둥글고 큰 달을 보고 싶다는 애인을 위해 아무 생각 없이 달을 살짝 지구 쪽으로 끌어온다. 물론 애인은 깜짝 놀라며 감동한다. 하지만 그 다음 날 해안 지역은 간만의 차가 크게 벌어지면서 침수 피해를 입는다. 신의 역할을 맡은 브루스가 좋은 일을 하겠다고 전 세계 사람들의 기도를 모두 들어주었더니, 로또 당첨자가 수천 명이 나와 당첨금이 17달러로 떨어지기도 한다. 결국 도시에서는 폭동이 일어난다.
모든 사람들의 욕망을 충족시키려 하니 폭동이 일어났다는 내용은 경제학적으로 설득력이 있다. 경제학이 희소한 자원으로 모든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충족시키기는 불가능하다는 기본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모두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똑같이 나눠주면 각자에게 돌아가는 몫은 무의미할 정도로 작아진다. 아니면 서로 치고 받고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영화의 내용이 좀 유치하고 엉성해 보일지라도 의미 있는 설정인 셈이다.
- 박일한, <경제 in 시네마>
[논제1] 제시문 (가)에서 ‘죄수의 딜레마’가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서술하시오.
(400자 내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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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해설
사회를 개인의 본성이 투영되어 있는 구조라 가정할 때 사회를 지탱하는 이념들도 개인의 심리적 동기를 분석함으로써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의 본성은 이기적인가 아니면 이타적인가, 개인의 삶은 주체적인가 아니면 타율적인가 하는 물음을 통해 사회와 시장이라는 경제 행위의 장을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분석할 수 있다.
제시문 분석
(가) 죄수의 딜레마는 극단적인 비유를 통해 개인의 선택이 이기심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말한다. 서로가 신뢰했더라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불신하기 때문에 차선을 결과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개인에게 올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려는 동기 때문이다. 죄수의 딜레마는 인간 행동의 기저에 개인의 이기심이 자리잡고 있음을 설명하는 이론이라 할 수 있다.
(나) 리들리는 인간 질서의 근본을 ‘상호 신뢰’에 두고 있다. 상호 신뢰가 없다면 오늘날과 같은 고도로 조직화되고 문명화된 사회가 성립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부분적으로는 이기적인 욕심을 부리고 파괴적인 행위를 하기도 하지만 ‘상호 신뢰’가 없었다면 이렇게 발달한 사회를 이룰 수 없었다고 보고 있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인간성의 바탕이기에 그것을 사회로 확장시켜 신뢰의 사회를 구축해야 미덕이 바탕이 되는 바람직한 사회가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 베블런은 유한계급의 기능을 언급한다. 유한계급은 과거의 귀족이나 벼슬아치와 같은 지배계층으로 실질적인 노동을 하지 않으면서도 부유하고 권력까지 보유하고 있다. 유한계급은 현대에 와서 돈을 추구하는 것으로 그 성격을 바꾸긴 했지만 여전히 존재한다. 베블런의 이론이 독창적인 점은 이렇게 유한계급(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이라는 대립적인 존재로 사회가 구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성을 유지한다는 점이다. 대립적인 두 계층이 서로 갈등한다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오히려 하층계급이 유한계급을 모방하고 그 지위에 오르려고 욕망한다고 가정함으로써 희소가치를 둘러싼 다툼에도 불구하고 사회 질서가 유지되는 이유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라) <일곱가지 유혹>은 다른 사람의 것을 모방한다고 해서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개인은 자기보다 나은 다른 사람과 스스로를 비교함으로써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되고,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잘못된 인식임을 영화를 통해 보여 주고 있다. <브루스 올마이티>는 이 사회가 필연적으로 얽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의 요소를 바꾸기만 해도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수 있고, 또 그 변화가 바람직한 것만도 아니다. 진정 자신이 원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고 자신의 삶을 인정하는 데에 행복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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