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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안자유(安自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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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순흥(順興) |
성씨 | 안(安) |
자 | 계홍(季弘) |
생년 | 1516 |
몰년 | 1588 |
신분 | 문반 |
왕대 | 왕력 | 년 | 월 | 일 | 관력 | 형태 | 해당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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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 | 12 | 1557 | 5 | 26 | 주서(注書) | 현직 | |
명종 | 16 | 1561 | 11 | 16 | 호조 좌랑(戶曹佐郞) | 현직 | |
명종 | 17 | 1562 | 6 | 6 | 병조 좌랑(兵曹佐郞) | 현직 | |
명종 | 17 | 1562 | 7 | 15 |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 현직 | |
명종 | 17 | 1562 | 12 | 1 |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 현직 | |
명종 | 18 | 1563 | 2 | 29 |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 | 현직 | |
명종 | 18 | 1563 | 3 | 26 | 경기 도사(京畿都事) | 현직 | |
명종 | 18 | 1563 | 11 | 12 | 지평(持平) | 현직 | |
명종 | 19 | 1564 | 3 | 26 | 병조 정랑(兵曹正郞) | 현직 | |
명종 | 19 | 1564 | 8 | 1 |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 현직 | |
명종 | 20 | 1565 | 3 | 4 | 병조 정랑(兵曹正郞) | 현직 | |
명종 | 20 | 1565 | 10 | 30 | 이조 좌랑(吏曹佐郞) | 현직 | |
명종 | 22 | 1567 | 5 | 11 | 헌납(獻納) | 현직 | |
명종 | 22 | 1567 | 5 | 21 |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 | 현직 | |
명종 | 22 | 1567 | 6 | 24 |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 현직 | |
선조 | 0 | 1567 | 11 | 6 | 집의(執義) | 현직 | |
선조 | 1 | 1568 | 10 | 4 | 집의(執儀) | 현직 | |
선조 | 7 | 1574 | 7 | 21 | 좌부승지(佐副承旨) | 현직 | |
선조 | 9 | 1576 | 8 | 23 | 황해 감사(黃海監司) | 현직 | |
선조 | 21 | 1588 | 7 | 20 | 지돈령(知敦寧) | 현직 | |
선조 | 2 | 1569 | 6 | 1 | 대사간(大司諫) | 현직 | |
선조 | 16 | 1583 | 1 | 1 | 대사헌(大司憲) | 현직 | |
선조 | 21 | 1588 | 7 | 1 |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 현직 |
1세 | [子] 안자미(安子美)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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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 | [ 子] 영유(永儒) | ─ | [ 子] 영린(永麟) | ─ | [ 子] 영화(永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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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 | [ 子] 득재(得財) | ─ | [ 子] 득인(得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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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 | [ 子] 희서(希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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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 | [ 子] 석(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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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 | [ 子] 헌(軒) | ─ | [ 子] 축(軸) | ─ | [ 子] 보(輔) | ─ | [ 子] 집(輯) | ─ | [ 子] 을수(乙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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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 | [ 子] 종기(宗基) | ─ | [ 子] 종원(宗源) | ─ | [ 女] 정량생(鄭良生)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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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 | [ 子] 경온(景溫) | ─ | [ 子] 경량(景良) | ─ | [ 子] 경공(景恭) | ─ | [ 子] 경검(景儉) | ─ | [ 女] 유후(柳厚)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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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 | [ 子] 순(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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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세 | [ 子] 숭직(崇直) | ─ | [ 子] 숭선(崇善) | ─ | [ 子] 숭신(崇信) | ─ | [ 子] 숭효(崇孝) | ─ | [ 女] 이숙치(李叔치) | ─ | [ 女] 조혜(趙惠) | ─ | [ 女] 김준례(金遵禮)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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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 | [ 子] 훈(訓) | ─ | [ 子] 의(誼) | ─ | [ 女] 김숙(金潚) | ─ | [ 女] 조석문(曺錫文)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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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 | [ 子] 우연(友淵) | ─ | [ 子] 우상(友商) | ─ | [ 子] 우석(友晳) | ─ | [ 女] 이영기(李永期) | ─ | [ 女] 안상계(安桑鷄) | ─ | [ 女] 이지형(李止형) | ─ | [ 女] 심순도(沈順道)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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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 | [ 子] 점(點) | ─ | [ 子] 임(임) | ─ | [ 女] 이순(李諄) | ─ | [ 女] 이석강(李石剛) | ─ | [ 女] 권균(權勻)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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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 | [ 子] 자희(自禧) | ─ | [ 子] 자우(自祐) | ─ | [ 子] 자복(自福) | ─ | [ 子] 자유(自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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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 | [ 女] 이성란(李成鸞) |
安自裕
판서공(判書公) 휘 자유(自裕) 선조의 고뇌와 생애
병 태 자문위원
우리 순흥안씨는 명망 높은 사대부(士大夫) 집안이다. 문과 급제자를 연구한 학자는 11대를 연이어 급제자를 낸 가문으로 우리 안씨를 칭찬하고 있다.
우리 3파는 4세 밀직공 휘 석(碩) 할아버지부 터 10세 문숙공 휘 숭선(崇善) 할아버지까지 7대를 연이어 문과에 급제한 찬란한 가문이다.
2대를 건너뛰어 13세 휘 혼(混·龍安公派), 14 세 휘 자유(自裕·參議公派), 14세 휘 명세(名世 ·參判公派), 15세 휘 함(馠·參判公派), 15세 휘 지(祉·參判公派)께서 3대를 이어 문과 급제를 하였다.
14세 휘 명세께서는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로 을사(乙巳) 난세에 춘추직필(春秋直筆) 로 간신의 미움을 받아 1548년(명종 3) 31세에 젊은 나이로 사형을 당하였으니 오늘날 계담서원(桂潭書院)에 배향(配享)하여 그 충절을 기리고 있다.
14세 휘 자유(自裕)께서는 참의공 휘 훈(訓) 할 아버지의 증손자이고 휘 우석(友晳) 할아버지의 손자이다. 부친은 휘 임(恁)이시고 모친은 정부인 안동김씨이다.
판서공의 벼슬로 위 삼대가 증직을 받았다. 판서공은 4형제인데 장형은 휘 자희(自禧)로 부호군이고, 둘째 형님은 휘 자우(自祐)로 별제 (別提)인데 13세 휘 후(煦) 할아버지의 계자(系子)로 들어가 3파 안문의 종손이 되었다. 셋째 형님은 휘 자복(自福)으로 생원(生員)이며 담양전씨(潭陽田氏) 장인집으로 내려가 살며 충남 청양(靑陽) 정산(定山) 집안의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 장인이 학문이 높았던 성균사성(成均司成) 전구주(田九疇)선생이다. 판서공은 자 (字)는 계홍(季弘)이고, 1516년(中宗 11, 丙子) 에 한양에서 출생하였으며 고집이 세고 절개가 굳었으며 실없는 농담을 하지 않았다. 두 살 아래인 한림공(翰林公^휘 名 世)와는 8촌간이니 바로 문숙공(文肅公)의 현손(玄孫)들이다. 왕래 도 잦았으며 문과 급제를 목표로 같이 공부하는 사이였다.
한림공이 1544년(中宗 39, 甲辰)에 먼저 문과에 급제하였다. 두 살 위인 판서공께서도 당연히 응시하였으리라 생각되지만 쉽게 급제하지 못한 것 같다. 바로 위의 형님 휘 자복(自福)께서 생원(生員), 4촌인 휘 세우(世遇)께서 진사 (進士)로 소과(小科)에 급제한 것을 보면 대과 (大科) 급제의 꿈을 안고 공부하신 분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림공께서 급제 후 한림에 뽑히고, 춘추관기 사관(春秋館記事官)으로서 사관(史官)이란 영예를 받은 것을 보고 판서공께서는 부러움이컸을 것이다. 그러나 3년 남짓 지난 1548년 명종 3년 2월 14일 한림공은 남대문 밖 당현(唐峴)에서 사형이 되는 참극이 벌어졌다. 기시형(棄市刑) 이었다.
판서공께서는 청천벽력 같은 비보에 사형장으로 향하는 길거리로 달려갔다. 세교가 깊었던 토정 이지함(土亭 李之函)은 한림공의 손을 잡고 영결하고 옷을 찢어 혈서를 써서 절개를 기리고 미친 사람같이 어디론가 달려갔다.
판서공께서는 비감에 가슴이 메이고 눈물이 비오듯 했다. 흐느끼며 술을 따라 권했다. 한림공께서는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고 술을 받아 마 셨다.
그리고 말했다.
“아, 형님! 잘 있으시오”
“어찌 이럴……” 판서공은 말을 잊지 못했다. 한림공은 판서공을 비롯한 집안사람들을 보고 나직히 말했다.
“부디 자식들은 글을 가르치지 마시오”
다른 기록에는 아들을 보고“ 과거를 보지 말거 라” 하였다고 한다.
판서공은 시신을 수습하여 양주(楊州)로 장례 지내는 일까지 가족 일가들과 같이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판서공은 서책을 덮고 침식을 잊은 채 두문불 출하였다. 성인의 말씀을 외우고 치국평천하의 큰 꿈을 키웠던 지난날이 저주스러웠다. 정의가 꺾기고 도의가 땅에 떨어진 시국이 한탄스러웠고 대윤(大尹), 소윤(小尹) 갈라져 이전투구(泥田鬪狗)하는 조정에 의분을 삭일 수가 없 었다.
“공부는 해서 무엇하랴. 과거는 보아서 무엇하 랴” 책을 던지고 붓을 꺾었다.
8촌 동생의 비참한 최후가 눈앞을 가려 몸을 떨고“ 동생, 경응(景應 : 한림공의 字)아” 부르짖으며 통곡하는 날이 계속되었다.
영리하고 의리있고 정답던 한림공을 잊을 수 없었다. 자초지종을 생각해 보았다.
한림공은 재당질(7촌)인 휘 함(馠)과 함께 1544년 중종 39년 갑진(甲辰)에 문과에 급제했
다. 판서공도 이때 응시했으나 급제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안함은 한림공보다 14세나 위인 1504 년생이다. 그의 아버지 세형(世亨)은 윤임(尹任)과 사돈을 맺어 딸을 그의 아들 윤흥인(尹興仁) 에게 시집을 보냈다. 또 딸 둘을 전주이씨 종실에 출가시키고 딸 하나는 영의정 김근사(金謹思)의 아들에게 출가시켰다. 무엇보다도 실권자인 윤임의 비호 아래 방자한 행위를 서슴없이 행한 것 같다.
그러나 명종이 즉위하자 윤임에게 등을 돌려 윤임·유관·유인숙 3대신을 죄를 주자는 자리에 참석하여 적극 찬성하여 안함은 추성위사보 익공신(追誠衛社保翼功臣)에 녹훈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대윤의 잔당으로 지목되어 유배를 당했다.
안함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조카 덕대(德大)를 양자로 하였다. 명종조 초의 실권자 윤원형 (尹元衡)의 첩 정난정(鄭蘭貞)은 활개치는 암탉 이었다. 난정의 딸을 덕대의 아내로 삼았다. 안함은 윤원형의 힘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형조정랑(刑曹正郞)의 벼슬에 올랐으니 세상 사람들이 비루하게 여겼다.
안함과 윤원형의 권모술수는 이에 그치지 않 았다. 안함의 매부에 황대임(黃大任)이 있는데 두 사람은 권력을 공고히 잡으려고 황대임의 딸 이 고질병이 있는 것을 숨기고 문정황후를 움직여 세자빈(世子嬪)으로 삼았다.
그러나 문정황후가 죽고 세력을 잃자 1565년 윤원형과 난정은 멀리 황해도 강음(江陰)으로 내려가 불안한 나날을 보내다가 음독자살하였 다. 안함과 황대임도 조정에서 쫓겨났다. 족보에 의하면 16세 덕대(德大)로 그치고 뒤가 이어 지지 않으니 명문의 화를 당했던지, 도망쳐 이름을 감추고 산 것 같다.
실록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안함은 거칠고 비루하여 용렬한 사람이다. 윤임과의 인친관계로 떨쳐 일어나 등용되기 시작한 초기에 청현(淸顯)의 반열에 끼었다. 윤임이 죽어서 타고 오를 연줄이 없어지자 그의 아들을 윤원형의 첩 소생인 딸에게 장가들여 벼슬길의 매개로 삼았다. 녹봉에 연연하여 행여 떨어져 나갈까 근심하며 붙쫓아 받드는 사람을 이리 바꿨다 저리 바꿨다 못하는 짓이 없어 사람들이 비루하게 여겼다”(1564년 명종 19년 10월 13일)
안함은 판서공과는 9촌 당질이다. 판서공은 8 촌 동생의 사형과 9촌 조카의 권력에 아부하는 악행 사이에서 가슴이 찢어지는 통분과 번뇌에 시달렸다.
충효우제(忠孝友悌)하고 청백(淸白)을 숭상한 선조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판서공은 을사사화의 직접 동기를 생각하자 청천벽력을 맞은 듯 실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 4촌 진사 공 형님이 밀고를 하다니?…… 아! 하늘이여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울부짖었다. 가슴을 쳤다.
판서공은 백부가 한 분 계시고 사촌형이 한 분 계신데 진사 급제를 했다.
1545년 7월 1일 인종이 승하(昇遐)하고, 7월 6 일 명종이 즉위했다. 시일이 지나며 대윤(大尹) 파가 역모를 꾸민다는 풍설이 나돌았다. 그러던 중 경기관찰사 김명윤이 윤임(尹任) 등이 불손한 음모를 하고 있다는 글을 올렸다.
그런데 9월 6일 진사 안세우가 정원(政院)에 나와 변고를 고했다.
“역적 윤임이 계림군(桂林君·李瑠)을 추대하 여 세우려고 불궤(不軌)를 도모할 적에 서간(書簡)을 전달한 종은 모린(毛麟)뿐인데 지금 신 (臣)의 어미가 피접(避接^병중에 자리를 옮겨서 요양함)하고 있는 처소로 숨어들어 왔기에 매 부 운산령(雲山令^李理)으로 하여금 그를 감시 하도록 하고 와서 아뢰는 바입니다. 만약 이 자를 신문하면 윤임의 진상을 알 수 있을 것입니 다. 그리고 윤임의 첩 옥매향(玉梅香), 종이(終伊)와 환노(宦奴) 연이(年伊)와 모린의 남편 연 동(年同)등 네 사람도 윤임의 심복입니다.” 라 고 하였다. 이어 진술하기를“ 모린의 말에 인종이 승하하신 뒤에 유관(柳灌)의 통서(通書)를 환노 연이(年伊)가 주어 대내(大內)로 가지고 들어 갔다는데 그 통서를 내가 가지고 가서 건네주었다. 그리고 윤임은 옥매향(玉梅香·尹任의 첩)이 흉모를 누설할까 두려워하여 항상 방에 가두어 두었는데, 그가 귀양가던 날에 문밖의 포막(圃幕^채마전에 세운 작은 농막)에 앉아 그의 아들 윤흥의와 사위 이덕응과 공모하기를‘ 옥매향을 데리고 가지 않으면 우리의 계획이 반드시 탈로 날 것이니 급히 잘 달리는 말을 보내어 그를 싣고 오라’ 고 하였다 했으며, 또 윤임이 평소에 이 기 ·임백령·황헌·최보한 등을 축출하지 못한 것을 항상 통분하게 여겼다 하였고, 그 사이의 음흉한 모의와 비밀스런 계책에 대해서는 정숙의(鄭淑儀·인종의 후궁)의 계집종 도난(道難)이 알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라는 내용이었다.
안세우의 고발로 대궐 뜰에서는 신문하는 참극이 벌어지고 소윤 일파는 확실한 증거를 얻었다고 만족했다. 9월 15일 김명윤´안세우는 고발한 상을 받았는데 안세우는 6품관의 벼슬을 주고 가옥 한 채와 죄인의 노비 10명을 하사 받았 다. 12월 20일 공조좌랑(工曹佐郞)이 되었다.
1547년 1월에 호조좌랑이 되었다가 사직 당하고 1548년에 태천현감(泰川縣監), 공조정랑, 개성부 경력(經歷) 등을 지냈다가 1556년 9월 13일 파직되었다.
1548년 11월에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추록되 기도 했다.
사신(史臣)은 이런 글을 붙이고 있다.
“안세우는 사람됨이 키가 작고 못생긴데다 조급하고 경망스러워 사람들이 모두 천하게 여겨 더불어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1545 년 9월 6일)
“김명윤·안세우는 다만 파리나 개 같은 무리인데 기회를 틈타 부화(附和)하여 그 공을 얻으려 한 것이다.” (1547년 10월 11일)
“세우는 윤임의 족인(族人·아마 윤임의 아들 윤흥인이 안씨(안세형)의 사위임으로 말한 것 같다.)으로 윤임이 국문(鞠問) 당할 때 윤임이 자기집이 반드시 적몰(籍沒·죄인의 재산을 관 에서 몰수 함) 당할 것이라 생각하여 가재(家財) 를 세우에게 맡겼다. 세우가 재물을 받고 윤임 의 종(모린)을 꾀어 그 집안의 일을 대략 물어 말을 만들어 녹공(錄功)에 참여했다.” (1556년 9 월 12일)
훗날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김명윤·안세우는 이사(二邪^사악한 두 사람. 을사사화에 관계된 못된 자를 이흉(二匈)·삼간 (三奸·이사(二邪)로 요약했다.)이다.” (謏�聞瑣錄^曹伸)
1545년 주세붕(周世鵬)선생은 사현정을 돌아 보고 감격하여 비를 세워「 일가충효우제청백지 풍(一家忠孝友悌淸白之風)」이 있다했다. 그런 데 그 자손이 어긋날 수 있단 말인가? 판서공은 조상님 앞에 얼굴을 들 수 없었고, 죄책감에 몸 둘 곳을 몰랐다.
“윤원형이 권력에 눈이 어두워 제 형인 윤원로 (尹元老)를 사형에 처하게 했다. 이 패역한 세상을 어찌 할꼬?” 판서공의 고뇌와 죄책감은 몇 달을 두고 계속했다.
한림공이 사형을 당한 지 4개월만인 1548년 6 월 한림공과 막역한 사이인 부수찬(副修撰) 윤걸(尹潔)이 잡혀갔다. 윤걸은(1517~1548) 호를 취부(醉夫)라고 할 만큼 술을 좋아했고 시문에 매우 뛰어났다. 한림공보다 2년 먼저 문과에 급제했다. 한림공의 죽음을 슬퍼하고 분개했다. ≪국조인물지(國朝人物誌≫에는 윤걸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윤걸은 능원위 구사안(綾原尉 具思安^中宗의 三女 孝順公主의 夫)과 더불어 한림공과 깊이 사귀었다. 구사안은 한림공을 구할 힘이 있었다. 윤걸은 한림공이 처형된 것이 너무 슬펐다. 어느날 남산 고개에서 구사안과 술을 마셨다. 그리고 구사안에게 물었다. 안명세가 무슨 죄를 져서 죽었는가? 그리고 시를 지었다.
삼월이라 장안에 온갖 풀이 꽃다울제
(三月長安百草香)
흐르는 강물도 넘실넘실 하는구나
(漢江流水正洋洋)
성대의 무궁한 뜻 알고자 한다면
(欲知聖代無窮意)
왕손의 춤추는 소매자락 긴 것을 보아라.
(看取王孫舞袖長)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 한없는 정권욕에 묻혀 있는 대궐을 비웃는 뜻이 은연중 나타나 있다.
1548년 6월 24일 구사안이 입궐하여 밀고 했다.
“좌랑 윤걸의 망칙한 말입니다. 윤걸이 내가 논박(論駁)을 입는 것은 한스럽지 않으나 안명세 같은 사람은 그의 평생 소행이 지극히 단정 하고 심지(心志)가 몹시 견고하여 그의 사필(史筆)은 무슨 일이건 정직하게 썼었는데 끝내 대 죄(大罪)을 입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문정왕후(文定王后)는 심히 노하여 장(杖)100 대, 3천리 밖으로 유배를 보내게 했다. 귀양 가는 도중에 다시 불려와 심한 문초를 더 받다가 죽고 말았다.
일설에는 도중에 구사안을 만나 불러 세우고 “이 무슨 짓이냐?” 꾸짖는데 구사안이 말에 매를 치며 피하다 말이 놀라 뛰는 바람에 말에서 떨 어져 죽고 말았다 한다. 구사안이 일을 꾸며 한 짓으로 스스로 이런 일을 당하여 어찌 윤걸보다 먼저 죽고 말았는가? 하늘도 무심치 않구나.(구사안이 죽은 것이 1562년이니 죽은 것이 아니라 큰 부상을 입은 것으로 생각된다.)
판서공은 좌찬성 민제인(閔齊仁)의 일도 잊을 수 없었다. 민제인은 간신들이 안명세가 기록한 사초(史草)를 고치려고 했을 때 적극 반대하다가 미움을 받아 공주로 귀양 갔다가 그 곳에서 죽고 말았다. 1549년 일이다.
판서공은 윤걸·민제인 같은 분은 한림공을 위해서 목숨까지 잃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미웠다. 찢어지는 울분을 새길 수도 없었다. 더욱이 당내(堂內)의 불의한 소행에 치가 떨렸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죽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가슴을 치며 하늘을 원망할 뿐이었다.
을사사화에 이은 민심의 동요는 대단했다. 어린 왕의 뒤에서 온갖 권력을 휘두르는 문정왕후를 비난하는 원망은 하늘을 찔렀다. 거기에 사관 안명세를 죽이고 좌랑 윤걸을 죽이니 흉흉한 분위기가 온 나라를 억눌렀다. 흉년이 들었다. 가뭄이 잇달았다. 조정은 세력 다툼으로 불안했 다. 판서공은 책을 던지고 하늘을 우러러 원망 하고 땅을 굽어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는 죄인의 심정이었다.
1548년 4월의 일이다. 사형당한 유관(柳灌)의 종 갑이(甲伊)는 정순붕(鄭順朋)의 종이 되었다. 갑이는 정순붕의 환심을 사면서 옛 주인 유관의 원수를 갚고자 은밀히 일을 꾸몄다. 열병이 유행했는데 열병으로 죽은 사람의 뼈를 얻어 정순 붕의 벼개 속에 넣었다. 정순붕은 시름시름 앓다가 1548년 4월 21일 죽었다. 갑이는 붙들려고 백을 했다. 옛 주인 유관의 억울한 죽음의 한을 갚고자 했노라 고백했다. 집안 명예를 위한 정 순붕의 아들은 사건을 드러내지 않고 갑이를 내 쫓았다.
판서공은 한림공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의 장인 사도정(司䆃�正) 이은우 (李殷雨)가 정 순붕을 찾아가 부탁했으나 냉담하고 인정이란 조금도 없었던 것을 알고 있었다.
판서공은 하찮은 여종 갑이가 옛 주인의 억울한 한을 풀어주는 일에 크게 감명 받았다.
“내 동생의 원한을 풀어 주어야지” 다짐했다. 이런 다짐이 싹트는 가운데 세월은 흘러갔다. 이래서 다시 책을 펴고 먹을 갈았다.
1556년 명종 11년 41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 했다. 병진별시(丙辰別試)였다. 한림공이 1544 년에 급제하였으니 실로 12년만이다.
1557년 명종 12년 3월 25일에 승정원(承政院) 주서(注書)가 되었다. 승정원은 왕명을 받드는 관청으로 지금의 비서실에 해당된다. 승지(承旨)들의 밑에 있는 관직으로 정7품이었다. 한림 공이 정자(正字) 검열(檢閱) 등 정9품의 낮은 벼슬에 있었던 것과 비교해 보면 대단히 높은 자리이다.(한림공이 비록 낮은 품직이나 춘추관 기사관(春秋館 記事官)을 겸한 청요직(淸要職) 이었다)
당시 임명 기록에는“ 안자유는 선을 향하는 마 음이 있었으나 의논과 시비를 좋아했다.”고 기록하고 있어 정의(正義)를 중요시한 인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문제가 일어났다. 사헌 부와 사간원에서 파직 상소가 올라왔다.
“주서 안자유는 벼슬에 나선 처음에 먼저 조급히 승진하려는 마음을 품고서 세력 있는 곳에 붙쫓는 과실이 큰데도 외람되이 밀접한 자리에 있으므로 공론이 많으니 파직 시키소서” 벼슬을 받은지 두 달만이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다. 그 상소는 받아들여져 파직되고 말았다.
깊이 생각하건데 판서공은 많은 나이에 빨리 승진하려는 생각이 있었겠고, 모시는 상사에게 잘 보이려 애썼을 것이다. 그러나 뛰어난 일 처리로 상사의 신임이 두터웠고, 자연히 동료의 질시의 대상이 되어 초반에 밀려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판서공은 허탈감에 빠졌고 뛰어난 실력을 인 정 받기보다 질시의 대상이 된 억울한 감정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아마도 한림공의 뛰어난 재주와 충직한 마음이 화를 당한 일을 생각하며 바로 마음을 다잡고 수양과 학문에 정진하였을 것이다.
은인자중(隱忍自重)하는 뼈아픈 세월이 흘렀다. 9촌 조카가 되는 안지(安祉)가 있었다.
1522년생이니 판서공보다 6세 아래다. 충의공 (忠義公·파조가 友益)의 손자 통훈대부(通訓大夫) 진원현감(珍原縣監)을 지낸 휘 세관(世寬)의 아들이다. 재주가 뛰어났다. 1557년에 성균관 에서 제술(製述) 시험을 보았는데 안지가 으뜸 이었고, 왕 앞에 나아가 강경(講經^경서를 강의 함) 시험을 보아 칭찬을 받았다. 일가간이라 판서공과 왕래가 있었을 것이며 1559년 37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예문관 검열(檢閱)이란 요직을 받았다. 명예로운 일로 가문의 영광이었다. 그런데 사소한 실수로 1560년 8월에 파직되고 말 았다.
두 사람은 슬픈 운명을 서로 위로하며 후일을 기약하였을 것이다. 학문이 두 분 다 깊었으니 성현군자의 가르침을 되새기고 독서에 몰두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4대조 5대조가 되는 문숙공에 대해서 존경과 흠모의 정을 쏟았을 것 이다. 아울러 판서공은 8촌 되는 아우, 검열공은 9촌 되는 아저씨 한림공을 추모하고 명예회복의 방법을 생각하는 시간도 가졌으리라 생각한다.
왕은 유능한 판서공을 잊지 않았다. 4년 반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명종은 판서공을 다시 불러 1561년 11월 16일 호조좌랑(戶曹佐郞·정6 품)에 임명했다. 그 후 병조좌랑·사헌부 지평(持平)을 맡았다.
다행히 안지도 2년만인 1562년 8월에 조정으로 돌아와 사간원(司諫院)의 정언(正言·정6품)이 되었다. 두 일가 숙질간의 교제는 늘어나고 기쁨은 가득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1563년 11월 판서공이 두 번째 경기도사(京畿都事^종5품)가 되었을 때 안지는 병조좌랑(兵曹佐郞^정6품)으로 같은 날 명을 받았다. 도사란 중앙에서 임명한 관찰사의 보좌관이다. 안지는 ≪왕조실록 ≫에서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족보에 1564년에 ‘수의(繡衣)로서 북관(北關)하다’ 했으니 추측 컨대 병조좌랑으로 있다가 함경도로 수의어사 (암행어사)의 명을 받고 나가 순행하다가 불귀의 객이 된 듯하다. 후사가 있음에도 묘가 실전 되었으니 어찌된 일인가? 애석하기 짝이 없고, 판서공의 슬픔 또한 형언키 어려운 정도였을 것이다.
판서공은 그 후 좌랑·지평·헌납·의정부의 검 상(檢詳·정5), 의정부의 사인(舍人·정4)으로 계속 요직을 맡았다.
명종은 22년간 재위하다가 1567년 6월에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하였다. 이 해 11월에 사헌부의 집의(執義·정3)로 있다가 1569년 선조 3년 6 월에 사간원의 수장인 대사간(大司諫·정3)이 되었다.
약 5년간 이름이 보이지 않고, 다만 1571년 선조 4년 4월 20일 춘추관에서 찬진(撰進)한 ≪명 조실록≫ 편수관 명단에 <통훈대부 홍문관 직제학 지제교 겸 경연시강관(通訓大夫 弘文館 直提學 知製敎 兼 經筵侍講官)>이라 있으니 홍문 관에서 근무하고 정3품이었다.
1574년 7월 21일에 승정원(承政院)으로 들어가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어 정3품 당상관(堂上官)이 되었다. 임금을 가까운 곳에서 모시는 중요한 자리이다. 5개월이 지난 11월경에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갔다. 중요한 임무가 맡겨졌다. 종계개정(宗系改正)의 일이었다. 이조 건국 초에 윤이(尹彛) 이초(李初)가 농간을 꾸 며 명나라 ≪태조실록≫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조선의 태조가 고려의 권력있던 신하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잘못 기록된 것을 정정 해 달라는 요구를 꾸준히 해 왔던 일이었다. 이것이 받아들여져 이미 실록과 회전에 바르게 수록된 것을 판서공은 먼저 환국하는 사신을 보내어 임금에게 알렸던 것이다. 왕은 몹시 기뻐하여 승정원으로 하여금 사은사(謝恩使) 보낼 일을 의론하도록 하였다. 이로 보아 판서공은 왕의 큰 치하(致賀)를 받았으리라 생각된다.
1574년 9월 1일자 기록을 보면 판서공의 인품을 짐작할 수가 있다.
“안자유가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박영준은 남의 종이다’ 하니 그 사람이‘ 어찌하여 그런가?’ 하자 대답하기를‘ 박공은 능히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삼으니 남의 종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였다. 박영준이 전후에 걸쳐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오직 남의 뜻에 따라 인재를 추천하고 스스로 안했기 때문에 그와 같이 말한 것이다.”
여기에서 판서공의 자기 소신, 자기 신념이 강 했음을 볼 수가 있다.
2년 후인 1576년에 황해도 감사(監司)로 나갔다. 품계는 종2품이다. 전에 경기도사로 잠시 외직에 있긴 했지만 이번이야말로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황해도 외직이었다. 품계는 종2품이지만 절도사(節度使)를 겸하고 황해도의 경찰권·사법권·징세권 등을 행사하여 절대의 권력을 가진 자리였다. 일찍이 1392년에 6대조 양도공께서 황주(黃州)의 목사로 봉직했던 일을 생각하며 성심을 다하여 직책을 완수했을 것이다. 이 황해 감사 임명 이후 근 7년간의 일이 전혀 알 수 없으니 안타깝다.
1583년 1월 2일 대사헌(大司憲·종2)에 제수되 었다. 훗날 조정에서 토론이 있을 때 판서공을 인용했으니 다음과 같다.
‘안자유는 대사헌으로 오늘날 사람들이「 법이 있지만 제구실을 못하고 편지가 바로 법이 되어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법대로 시행하지 않고 권세자의 편지 부탁으로 법이 좌우된 것을 지적 한 것임.) 안자유는 꾸밈이 없고 곧은 인물이라 서 그 발언이 이와 같았던 것입니다.’(1605년 선조 38년 8월 1일)
‘전일 안자유가「 우리나라는 법을 법으로 삼지 않고 간찰(簡札·간지에 쓴 편지)을 법으로 삼는 다」 하였는데 참으로 격언이다’(1606년 선조 39 년 2월 12일)
대사헌으로 임명되고 1년이 지났을 1584년 선조 17년 2월21일 임금은 안자유를 청렴한 절조 (節操·굳게 지키는 지조)가 있다하여 특별히 공조판서(工曹判書·종1품)에 제수하였다. 족보손록에 이조판서는 잘못인 것 같다.
판서공은 임금 앞에 나아가 정숙하게 절을 올리고 사면을 간구하였으나 왕은 이렇게 대답했 다.“ 경은 청렴하고 부지런한 절조가 다른 사람 보다 뛰어났다. 이런 큰 덕이 있어 본직을 제수 한 것이니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선조대왕께서 이토록 극찬하였으니 판서공의 인품이 얼마 나 훌륭하였던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판서 공의 재직기간은 얼마였는지 알 수가 없다.
1586년 10월 공주(公州) 주학(州學) 제독관(提督官)으로 제수된 조헌(趙憲^1544~1592)이 붕 당(朋黨)의 시비와 학정의 폐단을 논한 상소문 중에“ 이준민(李俊民)·안자유(安自裕)는 헌걸 차고(대단히 뛰어나) 기위(奇偉·기이하고 큼)한 선비로서 조금도 사심(私心)이 없는 사람인데 한번 이이(李珥)를 어질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모두 사가에서 두문불출하였으며……(東人이 李珥를 배척하던 시대였음)” 라고 기록하고 있다. 훌륭하다고 이이를 칭찬한 것이 동인의 미움을 사 두문불출한 것이다. 헌걸차고 기이하고 뛰어났던 인품을 알 수 있다.
1587년 12월 조정에서 왜국에 사신을 보내려 하자 고향 보은에서 지내던 전교수(前敎授) 조헌이 보내지 말 것을 청하는 긴 상소문을 지어 청주 감영에 올렸으나 받아 주지 않으므로 급히
먼 길을 걸어 대궐에 이르러 올렸다. 그 글 가운 데 판서공이 나오고 있다.
‘왜인(倭人)을 제어하는 계책은 속히 남금(금 같이 귀중한 물건)을 왜관에 뿌리고, 한편으로는 홍성민(洪聖民)·이준민(李俊民)·안자유(安自裕)… 등 유아(儒雅·고상하고 박학한 문인) 에 종사하는 자를 불러서 장신(將臣)의 계책을 가지고 토론하고 윤색해서 조유(調柔)의 술책을 잘 할 것이며…’라 하여 국가 대사에 원로로 자문에 응하는 높은 자리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다음 해 1월 5일의 비망기(備忘記)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지금 조헌의 소(疏)를 보니 (중략) 또 국군(國軍)의 일을 의논하려면 안자유(安自裕) 등을 불 러드려야 한다. 이들은 다 질실(質實·질박하고 순실함)하고 유아(儒雅·유교의 바른 의리를 지님)하여 함께 일을 의논할 만하다고 말하였다.’
동서의 당쟁은 깊어지고 북쪽에는 여진이 있고 남쪽에는 일본이 있어 침략의 기회를 엿보는 중대한 시기를 당하여 조정은 방비책을 논의함 에 국가 원로를 불러 의논하였다. 판서공은 청렴하고 절조가 있고 실정에 밝고 학문이 깊어 자주 임금 앞에 불려나간 것이다.
판서공은 나이가 74세로 노쇠한 몸이요. 귀가 멀어 불편하였으나 늘 정성껏 보필을 아끼지 않았다.
이 사이 벼슬은 돈녕부지사(敦寧府知事^정2 품)였다. 왕실과 가까운 친척들의 친선을 도모하는 관청이다. 연로한 고관들이 주로 임명되 었다.
1588년 선조 21년 7월 20일 졸하였다. 선조수 정실록(宣祖修正實錄)에는 선조 21년 무자 7월 에 졸기(卒記)가 기록되어 있다.
『지돈녕부 안자유가 졸하였다. 자유는 을사사화 때의 사류로서 안명세와 가장 친하였다. 안명세가 화를 당하자 자유가 연류되어 중도에 폐기 된지 10년이었다. 금상(今上·선조)의 조정에서 삼사(三司·司憲府와 司諫院·弘文館을 이름)의 직위에 오래도록 있었고 더러 전조(銓曹)와 좌랑(佐郞)에도 참여하였었다.
인품이 고집이 세고 절개가 굳어 다른 사람을 허여하는 것이 적었고, 남과 농담이나 정에 넘친 말을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동료들이 모두 꺼려서 어렵게 여겼다. 대간(大諫)이 되어 서관(庶官)으로서 직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자를 탄핵 논박할 적에는 고려하거나 꺼리는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친우나 자질로 아침저녁 친밀하게 지내는 자라도 일체 사적인 일로 감히 요구 하지 못했다. 조정에 벼슬한지 50여년 동안 한번도 자제를 위해 벼슬을 구한적이 없었다. 전 관(銓官·文武官의 전형을 맡아 보던 官員)이 물으면 말하기를‘ 우리 자질은 재능이 없어서 벼 슬하기에 합당하지 않다’하고 끝내 거론하지 않았다. 조정에는 당원(黨援·동류의 도움)이 없었고, 자리에는 손님이 없었으며 늙어서는 다시 귀가 먹어서 벽을 면대하고 문을 닫고 집에 있었다. 어느날 대각(臺閣·조정)에 오르면 탄론
(彈論)이 거듭 나오니 사람들이 어떻게 듣게 되었는지를 괴이하게 여겼다. 상(上·임금)이 그가 청렴한 절조가 있다하여 권주(眷注·은총을 베풂)를 특별히 내려 품계를 승진시켜 포상하였다. 이때 와서 죽었는데 자식이 없었다.』
‘안명세와 가장 친한 사이로 연류 되어 중도 폐기되었다’ 했으니 어떻게 연류된 것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사관인 안명세를 죽인 것은 큰 잘 못이라는 공론을 일으켰거나 조정에 항의하는 일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런일로 종형 세우와 8촌 세형 9촌 함 등의 미움을 받았을것으로 짐작된다.
성격이 강직하고 청렴하고 원칙을 주장하며 불의를 참지 못하는 까닭에 친구가 적고, 섬기기 어려운 상관으로 경원(敬遠)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사(私)를 버리고 공(公)을 앞세우는 공복(公僕)이었으며 왕에게 충성을 다하는 신하로 은총을 입었다.
기위한 모습이었으나 늙어 귀를 못 듣게 되었으니 만년을 두문불출하며 외롭게 지냈다. 거기에 후사(後嗣)마저 없었으니 얼마나 고독했을까 짐작되고도 남는다.
딸이 하나 있으니 예안(禮安) 이성란(李成鸞)에게 시집갔다. 시부는 사섬시정(司贍寺正·정3 품)인 이응로이고, 시조부가 좌의정 이명(李蓂)이다. 그는 한림공이 화를 당한 해에 이기(李芑)이 횡포를 탄핵했고, 이조참판 때에는 경연에서 을사사화로 화를 입은 사람의 신원(伸寃)을 주장하여 왕의 승낙을 얻기도 하였다. 이러니 판서공은 사돈간에 장인과 사위간에 의기가 서로 투합되는 사이였을 것이다. 이 사위가 고독한 장인을 모셨고 사후 장례를 치루고 외손 봉사를 했을 것이나 오래지 않아 끊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오늘날 판서공의 묘지를 알 수 없을뿐 아니라 묘지(墓誌) 하나 전하는 것이 없으니 안타깝고 죄스러울 뿐이다. 판서공 이후로 판서 반열에 오른분이 우리 3파에는 없다. 순흥안씨 전체로도 1명이 있을 뿐이니 판서공 안자유 선조는 얼마나 훌륭하신 분인가.
선조 3년 1570년에 한림공은 복관(復官)이 되었고, 그의 두 아들 천지(千之)·백지(百之)는 현감이 되었다. 그 무렵 판서공은 대사간으로 있었으니 응당 한림공 신원에 힘썼을 것이며, 두 아들의 장래를 도왔을 것이다.
40년전 형장으로 향하는 한림공을 붙잡고 술 한잔 건네며 하직하던 처참한 광경을 되새기며 판서공은 숨을 거두었을 것이며, 황천에서 한림 공의“ 형님! 참으로 장하십니다. 형님은 조정의 명신(名臣)이셨습니다.” 찬사를 받았을 것으로 믿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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