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뗄래야 뗄 수 없는 다비도프와 바, 두 번째 이야기
혹시 바호퍼란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으신가요. 바호퍼는 하룻동안 바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각 바마다 가지고 있는 특유의 분위기와 그곳에서 만들어진 칵테일을 즐기는 이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바호퍼는 최대한 여러 곳에서 바 특색을 지닌 다양한 칵테일들을
맛 보아야 하기 때문에 한 곳의 바에서 오로지 한 두잔의 술만 마신 뒤 다음 바로 이동합니다.
바호퍼는 이런 식으로 일반인들보다 더욱 많은 바와 칵테일들을 경험하게 되는데요. 바 문화와
칵테일이 좋아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이들인 만큼, 술에 대한 남다른 미각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죠. 때문에 바텐더들에게는 바호퍼들이 반가운 손님이자 공감을 나눌 수 있는 친구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긴장해야 하는 ‘평가단’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존재입니다.
오늘은 다비도프와 바에 얽힌 두 번째 이야기로 바로 이 바호퍼에 대해 들려드릴까 합니다.
저 역시 바와 칵테일을 사랑하는 사람 중에 하나로서 바호퍼가 아닐까 하는데요.
물론 고급 평가단 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바에 가는 것 자체를 굉장히 좋아하는 편인데요.
바호퍼에게 독특한 바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참새의 방앗간 같은 느낌이죠.
며칠 전 브라질식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한 바를 다녀왔는데요. 그 독특한 분위기에 이끌려
저도 모르게 안으로 들어서게 됐죠. 가로수길의 ‘꼬모로코’라는 곳인데요. 다이닝 바이기에
낮에는 주로 음식을 판매하고 저녁이 되면 바가 주를 이루는 곳입니다.
저는 이날 마티니를 주문했는데요. 마티니는 칵테일 술 중에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만드는 사람의
기호에 따라 천차만별로 맛이 달라지는 술이죠. 그래서 마티니는 그 종류만 해도 무려 250여가지나
된다고 하는데요. 이날 저는 다른 리큐르나 술을 섞지 않은 클래식 마티니를 골랐습니다.
클래식 마티니는 다른 것을 섞지 않고 오로지 진과 버무스로만 맛을 내기 때문에 가장
드라이한 맛을 내는데요. 클래식 마티니처럼 드라이한 칵테일을 좋아했던 바호퍼의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독일 퓌센에서는 모든 바텐더들이 긴장하는 바호퍼가 있다고 합니다.
그는 바에 자리를 잡으면 다비도프를 꺼내 놓고 올드팔이나 엑스트라 마티니처럼 굉장히
드라이한 술을 주문한다는데요. 술이 나오면 그는 다비도프 담배와 함께 그 술을 마신다고
합니다. 여기까지의 모습은 그가 기민한 바호퍼라고 예상하기 어려운데요.
하지만 바로 이때부터가 이 바호퍼의 촉수가 기민하게 돋아나는 시점이라고 합니다.
드라이한 술일수록 알콜 특유의 알싸하고 독한 맛은 배가 되는데요. 여기에 시가를
모토로 만들어져 깊은 맛을 내는 다비도프가 더해지면 혀에 느껴지는 알싸한 자극은 배가 됩니다.
이렇게 자극을 받은 혀는 이후에 어떤 칵테일을 마셔도 감각이 예민해져 맛의 미세한
차이를 날카롭게 캐치해 낼 수 있는 것이죠.그래서 드라이한 술과 다비도프를 피운 이후에는
바텐더의 진면목을 평가할 만한 술을 주문한 뒤 맛을 가늠해 보는 것입니다.
만약 그 이후로 이 바호퍼가 바를 다시 찾지 않으면 그 바는 절대 성공하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다고
합니다. 그의 발길이 끊긴 곳은 바텐더의 역량과 자질이 부족하단 뜻이기에 결국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고 만다는 뜻이죠. 그래서 퓌센의 바텐더들 사이에서는 평범하지만 드라이한
술에 다비도프에 남자를 조심하라는 말이 농담처럼 돌곤 한다고 합니다.
저 역시 독특한 바에 발길이 이끌려 드라이한 마티니 한 잔에 다비도프를 태우고 있으니
꽤나 영향력 있는 바호퍼가 된 것 같아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 같더군요. 달콤하고 화려한
칵테일 보다는 때로는 진하고 알싸한 술로 진정한 ‘술맛’을 느껴 보는 것도 신선하고 재밌는 일이죠.
영국의 처칠 수상은 드라이한 마티니를 매우 좋아한 걸로 유명한 사람이죠. 마티니는 버무스의 양이
적을수록 드라이해 지는데 처칠은 버무스 병을 바라보기만 하면서 드라이 진을 즐겼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왠지 진한 남자의 향이 느껴지는 듯한 이야기죠.
저는 이날 꼬모로코에서 브라질식 케밥과 칵테일 몇 잔을 더 마신 뒤에야 그곳을 나왔는데요.
취기가 올랐던 것인지 진정한 남자가 된듯한 유치한 자아도취에 빠져 한참을 머물러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뭐, 어떻습니까. 마초스럽고 어린아이 같다고 싫어할 여성분들도 있겠지만
남자들이라면 때로는 이런 기분에 취하고 싶을 때가 있으니까요. 여러분도 한번쯤 진한
칵테일 한 잔에 좋아하는 담배를 피우며 분위기에 취해 ‘진정한 술 맛’을 느껴
보시는 건 어떨까요. 다만, 여성분들이 없는 곳에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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