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선과 현대인들의 생활
< 내 삶의 방향 >
미국은 종교적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 그리고 자기 나름의 행복 추구의 권리를 찾아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이민자들의 나라다. 60-70대년대에 자라난 젊은 미국인들은 종종 30대 이상, 특히, ‘기득권’에 속하는 기성층은 아무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눈을 열어줄 만한 무엇, 혹은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달 착륙을 비롯하여 ‘위대한 사회(the Great Society)''''가 이룩한 그 모든 물질적 진보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내면적 본성을 깨우치는 법이라든가, 진정한 자아를 찾는 방법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무런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자라난 필라델피아의 한 부유한 곳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넓은 잔디밭과 두 세 대의 차를 보유한 차고가 있는 집을 소유하고 있었다. 내 삶에서 부족한 것이란 거의 없었다. 부모님은 다량의 독서를 장려하셨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의사나 변호사가 되기를 바라셨다. 대부분의 내 친구들은 16세 즈음 벌써 차를 몰고 다녔고, 몇몇은 학교에도 차를 끌고 다녔다.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 나는 과학 과목을 즐겼는데, 특히 생물학과 화학을 좋아했다. 나의 지식은 점차 증가했으나 내면적으로는 여전히 어떤 해답을 열심히 추구하고 있었다. 나는 왜 이 세계에 살고 있고,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와 같은 질문은 풀리기 보다는, 학년이 감에 따라 다만 커져 갈 뿐이었다. 내가 축척한 온갖 지식에도 불구하고, 나는 종종 방황했고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선생님이나 교수님들과 상담을 하기도 했지만, 알게 된 것이라곤 단지 대학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학문적 경계선 밖의 것에 대해 묻는 것을 꺼린다는 것이었다.
어느 시점에서 나는 요가와 힌두음악, 명상에 의지하여, 영적 영양분에 대한 나의 갈증을 달래 보았다. 보스턴에 있는 라마크리슈나 베단타 협회(베단타 학문을 배우는 센터)를 다녔다. 거기서 한 스와미(힌두교승려)를 만났는데, 그는 내게 ‘진리는 하나다. 성인들은 그것을 다양하게 부른다.’ 라는 가르침을 알려 주었다. 센터의 제단에는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유대교, 불교를 포함한 다양한 종교들의 갖가지 상징물들이 있었다. 나는 스와미에게 물었다. “불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는 대답했다. “불교를 찾지 마세요. 살아있는 부처를 찾으세요.” 그의 대답은 나를 놀라게 했고, 그때로부터 나는 내게 진리를 가르쳐줄 살아있는 부처님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를 궁구했다.
티벳 불교 전통의 ‘다름마다투’를 포함한 여러 불교 명상 센터를 방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가르침은 좀 어렵게 느껴졌고 내게 적합한 것 같지 않았다. 얼마 후 캠브리지 선원에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한국인 숭산 큰스님과 그의 제자들을 만났다. 큰스님께서 법회에서 학생들의 질문에 열린 마음으로 응대하시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았고, 나도 그를 만나 대화할 수 있었다. 나는 물었다. “열심히 수행하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그는 답했다. “ 내려놓게! 모두 내려 놓게나! 이것이 열심히 수행하는 것이네” 그의 대답들은 아주 간명했고, 또한 유머까지 있었다. 나는 이 선원에서 다른 대중과 함께 수행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법사로 인정받은 그의 제자들을 만났는데, 모두 다른 까르마(업)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곧 숭산 큰스님이 ‘대중생활’ 이라고 부르는 것이 뭔지 이해하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상황과 조건, 견해를 가지고 있다. 어떤 이는 스님이고, 어떤 이는 학생이고, 어떤 이는 사무실에서 일한다. 어떤 이는 항상 맑은 마음상태를 유지하고, 어떤 이는 자주 어려움에 처하거나 불만족 한다. 어떤 이는 여자들의 패션을 좋아하고, 어떤 이는 싫어한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생각한다. ‘ 내 의견이 옳아!’ 라고, 한결같이 !
미국인은 미국인의 견해를 , 아시아인은 아시아인의 견해를 , 유럽인은 유럽인의 견해를 가지고 있다. 다른 견해는 다른 행위를 낳고 , 다른 행위는 다른 까르마를 초래한다. 따라서 자기 견해를 고집하면 자신의 까르마를 제어하기 힘들고 , 결국 자신의 삶 자체가 어려워진다. 나쁜 견해가 지속되면 나쁜 까르마가 지속된다. 선원과 같은 공동체 속에서 함께 수행하고 생활하다 보면 각자 처음에는 수많은 강한 ‘좋아함’과 ‘싫어함’들을 가지고 들어왔다가 차츰 그것들을 제거해 가게 된다. 함께 사는 것, 함께 행동 하는 것은 ‘내’ 의견, ‘내’ 조건, ‘내’ 상황을 지워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우리는 빈 마음이 되고 흰 종이로 되돌아간다. 그때서야 우리의 참된 의견, 참된 조건, 참된 상황이 나타난다. 함께 절하고 함께 염불하고 함께 식사할 때, 우리의 여러 개인적 마음들은 하나의 마음이 된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폭풍 후의 바다와 같이 잔잔해진다. 물결은 점점 작아지고 우리의 마음은 마치 맑은 거울과 같아져서 우리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진리가 된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쉬워진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에 비치기 때문이다.
일단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자, 나는 내 조국이나 사회를 포함한 그 어떤 것보다도, 대중, 즉, 모든 존재를 위해 진정으로 내 삶을 바치고 싶었다. 비록 이생에서 고통 받는 모든 존재들을 구하기란 역부족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다른 존재들에게 고통이 아닌 행복을 주는 삶을 사는 것이 나의 유일한 바람이 되었다.
스승께서는 자주 말씀하셨다. “어떤 행동도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왜 하느냐이다. 너의 방향이 분명하면 그때는 너의 모든 행동이 항상 법을 가르친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존재를 구할 것이다. 또한 ‘분명한 방향+노력하는 마음=깨달음’이다. 따라서 방향은 매우 중요하다!
지금 내가 계룡산 국제선원 무상사의 주지로서 강하게 느끼는 것은, 세계가 아주 빨리 변하고 있다는 것과 서로를 고무시켜 법을 공부하고 수행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들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마음을 활짝 열어놓고 법에 대한 정안을 얻고자 열심히 수행하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한국에 남아 계속 수행할 수 있도록 장려해준 나의 스승과 모든 사부대중께 너무나 감사한다.
2009년 7 월 8 일 무상사 주지 무심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