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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최명숙 자매)
[우리의 참된 정체성과 그 은혜]
안녕하십니까? 멀리에서 오시느라고 수고하셨는데, 지금 오후 2시 시간인데 제가 졸지 않게 잘 좀 재미있게 말해야 되는데 잘 될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멀리 떨어져 있는 나를 이렇게 다시 보게 돼서 너무 반갑고 감사합니다. 오시느라고 수고하셨습니다. 제가 오늘 봄집회의 주제가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이 말씀이잖아. 요한복음 14장 3절 말씀. 그래서 이것을 저 처음 시작을 저보고 하라고 지명을 받았는데, 제가 그 말씀이 떠올랐어요. 요한복음 아니 아니 고린도전서 1장 30절 말씀이 떠올랐어요. 그래서 그걸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이 말씀이 떠올랐는데, 제가 오늘 아침에 갑자기 그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스도 예수' 이렇게 말하니까 좀 종교적이구나, 그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리가 기독교인을 크리스천이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이 기독교인이 너무나 왜곡됐기 때문에 이 말이 좀 종교적이네, 이 생각이 딱 들면서 제가 제목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라고 적었는데, 그러면서 '아, 목사님의 두 문장이 얼마나 더 심플하고 우리에게 이렇게 깊이 바로 다가오고 쉬운 말씀인가' 그 생각이 깊이 들더라고요.
지금 이 고린도전서 1장 30절 말씀하고 목사님의 두 문장하고는 딱 똑같은, 일치되는 말씀이거든요. 이거는 이미 바울이 그때 본 것을 써놓은 곳이고 지금 이 생명의 세계가 발전해서 지금 우리가 이 시대에 이것을 쓰면 우리는 "너희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특별한 피조물로 지어진 피조물이다. 그 피조물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예수 안에 있는 나고 너고 여러분이다." 이렇게 말을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정말 이 말씀 안에 우리의 모든 정체성과 하나님의 목적과 사람의 용도가, 사람의 길이 다 있구나, 그 생각이 깊이 들었고 제가 긴장하면 좀 목이 마르니까 이 그리스도 예수. 그런데 이제 제목을 그리스도 예수라고 했으니까요, 이 왜곡된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가 바로잡아서 얘기를 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부름받은 우리]
그리스도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구약에서는 왕과, 제사장 그다음에 선지자에게 하나님이 기름을 부으셔서 그 사람을 하나님을 대신해서 썼잖아요.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라는 거예요.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인데 기름 부음을 받았다 이 말인 거죠.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부름받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어졌고 그리스도 예수를 목표로 지어졌고, 그렇게 지어졌다는 거죠.
우리가 부름받아 올 때, 저는 늘 첫자리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 부름받아 올 때 누구에게 부름받아 왔나? 그리스도 예수라는 사람이 와서 부름을 받은 거예요. 누가 하늘의 소식을 가지고 왔나? 한 사람을 만났는데 하늘의 소식을 가지고 온 거예요. 그 소식을 듣고 우리가 살아났잖아요. 사람인데 나와 똑같은 사람인데 하늘의 소식을 가지고 왔어요. 저는 이 얘기를 할까 말까 생각했는데 또 하고 싶더라고요. 내 첫자리 얘기를 하려고 하니까 조금 눈물이 나려고 하는데 제 첫 자리가, 우리가 다 알지만 그 목사님이 우리 CCC에서 집회하실 때 그 75년 저는 10월 9일로 항상 기억하고 있어요.
처음에 오셔서 처음에 하신 말씀이 "나는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그 말씀이었어요. 그런데 그 뒤에 인제 또 내용이 있죠. 전부 다 다 아실 거예요. 그런데 그 내용 다시 한번 얘기해 볼게요. 그게 목사님이 "여자들은 결혼하면 부부 사이에 여자들이 남편에게 가장 요구하는 한 가지가 뭐냐, '당신이 나를 사랑하느냐' 그 말이라는 거예요. 남편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에 가장 본질적인 것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당신이 나를 사랑하느냐' 그 말이라는 거예요." 우리가 그걸 압니까? 모르죠. 대학생인데. 그런데 목사님도 그 질문을 받았는데 "결혼했으니까 사랑하는 거 아니냐" 이렇게 대답을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날 아침에 목사님이 그게 알아졌다는 거예요. '내가 아내를 사랑한 적이 없는 사람이구나. 아내를 사랑한 적이 없는 사람이구나' 이렇게 알아졌다고 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나는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이 말이었어요. 저는 그냥 직관적으로, 제가 뭘 알아서 그런 것이 아니고 정말 이 말에 엄청 감동이 됐어요. 제가 알 수 없는 감동인 거죠. 그러니까 직감적으로 제가 뭐가 왔을까요? 우리가 딱 그게 느껴졌겠죠. '아, 이것은 땅에 있는 사랑이 아니로구나. 그러니까 부부 간의 사랑, 그다음에 친구 간의 사랑, 이성 간의 사랑 그 얘기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니로구나.'
'아니 목사님이 우리를 공휴일날 불러서 말씀을 하시는데 음 그 얘기를 하시려고 부르신 게 아니로구나. 다른 사랑을 말씀하셨구나.' 제가 그게 직관적으로 제가 그때 저한테 들렸던 것 같아요. 정말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서 내가 그 사랑의 말을 듣는데 그냥 제가 그 사람 안으로 그냥 휙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그 사람 안으로 빨려 들어갔어요. 그런데 나중에 인제 우리가 더 근원적인 말씀을 들었잖아요. 더 근원적인 말씀이 창세기 1장 26절 말씀이잖아요. 이것이 내가 들은 내 개인의 말이면 제가 얘기할 필요가 없더라고요. 그런데 이것은 만유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더라고요.
[심히 보기 좋은 사람, 하나님과의 연합]
창세기 1장 26절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사람을 심히 보기 좋다 하시고 그날을 축복하고 거룩하다 하시고 안식하셨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너무나 그날 기분이 좋으셨다는 거죠. 사람을 지으시고 그게 무슨 말이냐? 사람을 지으시고 그렇게 사랑에 빠졌다는 거죠. 사랑에 빠졌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이 그 사람이 어떻게 우리에게 왔나? "말씀이 육신이 되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보니 아버지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실재가 충만하더라." 야, 그 사람이 은혜로 저에게 다가왔어요.
그래서 그 사람이 저를 불렀고 그 사람 안으로 내가 들어가게 됐고 그거는 저도 모르는 일이었죠. 그 사람 안에서 살았고, 살았고 우리가 그래서 떨어지는 하늘의 양식을 먹고 정말 우리의 땅에 있는 문제들이 해결이 되고 우리가 그런 걸 많이 경험을 했잖아요. 정말 이것이 그래서 목사님의 처음에 그 말씀이 이것은 저의 경험이지만 이게 저만의 경험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구나. 그래서 우리가 그 근원적인 사랑 안으로, 우리를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 심히 보기 좋다 하신 그 근원적인 사랑 안으로 우리가 들어간 거죠.
그래서 저는 그래서 제가 처음에는 목사님 안으로 제가 부름받았어요. 그런데 지금 목사님 안으로 부름 받아 와서 지금 우리가 어디로 부름 받았나? 예수 안으로 받았죠. 그다음에 우리 마지막에 어디로 갔어요? 하나님 안으로, 하나님 안으로 갔어요. 우리가 태어난 곳이 하나님 품속이죠.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래요. 우리 모든 사람은 어떤 사람도 하나도 다 빠짐없이 사람이라면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 이게 사실이에요. 사실, 우리가 나를 만들지 않았잖아요. 우리를 만드신 이가 있다는 거잖아요.
그래서 우리의 영원한 고향은, 그래서 우리 육신의 고향은 우리 부모님 품속이지만 우리 존재의 영원한 고향은 하나님 품속이잖아요. 그래서 이 사람, 이 사람, 사람을 왜 이렇게 하나님이 지으셨나? 당신과 연합할 존재.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되게 하기 위해서. 사람을 왜 지으셨나? 당신과 연합해서 당신의 생명을 분배하고 당신의 생명으로 통치하도록 하려고 그래서 그 생명으로 살게 하려고 그래서 사람을 지으신 거잖아요. 그래서 그 지으신 사람을 동산에 두시고 모든 양식을 주셨어요. "마음껏 먹어라." 지금 우리 교회하고 똑같아요. 마음껏 먹어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어요. 자유롭게 먹어라. 그런데 선악과를 먹지 마라. 그렇죠? 우리도 똑같아요.
[위치 이탈의 한계와 구속의 필요성]
우리도 지금 교회 안에서 마음껏 먹어도 되는데 선악과를 먹지 마라. 저는 수요일날 정식이가 간증을 했는데 자기가 처음에는 자기에게 양식이 안 되는 걸 먹고 불평을 많이 했다 이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자기에게 양식이 안 되는 독초는 먹지 않는대요. 그렇게 얘기하더라고요. 이게 동산이 회복된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야 참 신기하구나.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정말 우리가 이런 세계에 왔나' 우리는 그때 선악과를 먹고 이탈한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이제는 독초를 먹지 않는 사람이 됐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게 발견이 되니까, 독초를 먹지 않는 사람이 된 거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처음부터 우리가 이랬으면 그렇게 살았을 텐데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아담 안에서 태어났잖아요. 아담 안에서 태어났으니까 우리는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저도 목사님을 만나서 정말 우리가 앞에 윤도 형제가 보이니까 얘기하지만 정말 목사님 말씀도 잘 들리고 목사님 말씀도 잘 깨달아지고 많은 과정을 거치면서 제가 목사님 말씀이 저에게 이렇게 한두 말씩 새겨지는 그런 경험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해서 성육신이 된 줄 알았어요. 저는 '아 그렇게 목사님 말씀이 새겨지면 성육신이 되겠거니'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그 위치 이탈한 노선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알고 하는 것은 한계가 있더라고요.
한계가 있고 마지막에 내가 필요가 없어지지 않는 그 막다른 일이 있더라고요. 그 한계가 있더라고요, 그 한계에서는. 그래서 '내가 뭐가 될 것인가', 그 양식을 먹은 거잖아요. '내가 뭐가 될 것인가', 그 양식을 먹은 게 선악과 양식이잖아요. 선악과 양식인데, 그래서 이 사람은 그래서 구속이 필요한 거예요. 구속이 필요한 거야. 위치 이탈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안에서 아무리 잘하고 아무리 희생하고 봉사하고 충성하고 사랑을 베풀어도 다 나를 위한 거더라고요. 하나님의 목적에 해당되지 않는 거더라고요. 결국은 내 의가 되는 거더라고요. 그래서 우리는 구속이 필요한 사람이죠.
구속이 필요한 사람. 제가 그 요한복음 14장 이제 이 말씀을 몇 번 이렇게 읽어봤어요. 읽어보면서 그 예수님이 지금 이 십자가로 가는 길이잖아요. "너희는 아버지를 믿으니 또 나를 믿어라. 내가 가서 처소를 예비해서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겠다." 이렇게 말씀을 계속 하시면서 내가 아버지께로 가서 처소를 예비해서 나 있는 곳에 있게 하겠다, 이렇게 말씀하셔서 고 뒤에 하신 말씀이 뭔가 하면 그거예요. "내가 가는 것을 너희도 알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이번에 그걸 보면서 '어째 우리하고 이렇게 똑같나? 어찌 우리하고 목사님 관계하고 이렇게 한 치도 틀리지 않을까?' 목사님이 '내가 가는 길을 너희가 알아야 될 텐데' 그거였잖아요.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그래서 우셨잖아요. '내가 이렇게 말을 해도 쟤들이 못 알아듣는다' 하시면서. 그거하고 똑같은 거더라고요. "내가 가는 길을 너희가 알 것이다." 이렇게 말을 했는데 도마가 "그 길이 어딘지 모릅니다. 길을 보여주십시오."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이렇게 말씀하셨거든요. 그러니까 빌립이 또 뭐라 했냐면 "그럼 아버지를 좀 보여주십시오." 이렇게 얘기를 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또 예수님이 어떻게 얘기하시냐면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이렇게 말을 했는데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을 다 자기 안에 품고 있는 분이잖아요. 품고 있으니까.
나를 알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신 것 같아요. 그런데 제자들은 지금 계속 동문서답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제가 이거를 딱 보면서 '야 정말 이 구속복음은 우리가 이 말을 할 때 우리도 정말 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예수를 말할 때 우리가' 저도 그 말이 뭔지 몰랐거든요. 뭔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냥 그 안에는 있었어요. 있을 수밖에 없죠. 어디 갈 데는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그 안으로 부름받았기 때문에 갈 데는 없어요. 있었는데, 이건 완전히 판이 다른 판이잖아요. 판이 바뀌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제 이거를 보면서 예수님이, 예수님이 완전히 하나님과 연합된 자리가 어딘가 이제 그거를 이제 제가 생각해 보니까요. 예수가 요단강에서 침례 받고 올라올 때, 침례 받고 올라올 때 하늘에서 소리가 있어서 이런 말이 있었잖아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어라." 그 자리가 완전히 그러니까 예수와 하나님이 완전히 연합된 자리더라고요. 요단강에서 침례받고, 그러니까 예수의 죽음이 발표됐을 때 하나님이 완전히 연합이 됐더라고요. 그래서 그것을 보고 제자들이 그렇게 얘기한 거 아닙니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딱 이렇게 얘기한 거잖아요. 그 계시를 딱 본 거잖아요. 저도 거기서 그 생각이 들었어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여기에는 사람이 분명하진 않구나. 사람이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어.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우리는 신이라고 생각하지 하나님의 아들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잖아요.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아, 그 연합된 자리 그 자리가 보였을 때 계시로 본 것이고.' 그다음에 그것이 예수님이 말씀할 때 이렇게 얘기했죠. 그것을 알게 하신 이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고, 그러니까 베드로가 그 말을 했는데 자기도 모르게 한 말이더라고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그것을 알게 했지, 알게 한 것이다, 이렇게 말을 했더라고요.
[말씀이 육체가 되어: 온전한 피조물의 계시]
그게 베드로의 말이 아니었더라고요, 계시. 그래서 '정말 사람이 완전한 피조물로 드러나는 자리 그 자리가 참 비밀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렇게 봤지만 그 사람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잖아요. 우리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거죠. 그런데 요한은 그 뒤에 "말씀이 육체가 되어" 이렇게 말을 했거든요. "말씀이 육체가 되어" 그래서 다른 거죠. 벌써 요한은 말씀이 육체가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이렇게 얘기를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예수님, 예수님은 그 세례 받고 올라오실 때 하나님과 연합된 사람이구나.
제가 이제 그렇게 생각이 되고 그 이후에 마귀에 이끌려서 시험을 받았잖아요. 시험을 받았는데 그 시험을 완전히 물리쳤는데 그 시험을 완전히 물리친 것이 피조물의 위치를 사실 드러낸 거잖아요. 그렇지만 그때까지는 그거를 우리가 몰랐, 제자들도 몰랐던 거죠. 몰랐던 거죠. 그래서 베드로가 그렇게 고백할 때는 거기에서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것 같아요. 예, 그런데 요한은 이제 다르죠. 쓸모없는 육체, 말씀이 육체가 됐다. 쓸모없는 육체가, 육체가, 육체 덩어리가 하나님의 집이 되었다. 요한은 그렇게 얘기를 한 거죠. 그래서 정말 그 이 예수를 보고 요한은 은혜와 실재가 충만하더라, 충만하더라 이렇게 얘기를 했거든요.
그 생명과 형상이 하나 됐다, 이렇게 얘기를 했단 말이죠. 그래서 이게 우리와 목사님의 관계와 제자들의 관계가 어찌나 이렇게 똑같은지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그래서 그 위치를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예수는 그 위치를 만천하에 공개하게 되신 거죠.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예수 그 예수는 완전한 사람으로 드러났어요. 그래서 그 요한의 말이 "놋뱀을 본즉 살아나리라" 그거잖아요. 놋뱀을 본즉 살아나리라. 정위치에 있는 사람을 보면 살아난다.
정위치에 있는 사람이 예수가 십자가로 가시면서 계속 이렇게 가고 있는데, 제자들은 전부 다 다 인제 헷갈리고 있는 이 자리에서 '야 이 정위치에 있는 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예수가 완전히 십자가에서 끝나고 그 예수가 공개됐잖아요.' 그 위치가 만천하에 공개됐어요. 장대에 달린 놋뱀, 놋뱀으로. 그래서 이 "놋뱀을 본즉 살아나리라" 그 말씀이 이루어진 거죠. 그래서 우리가 정말 이 정위치에 있는 사람을 보고 살아나는 것, 무엇이 살아나나? 저도 무엇이 살아나나? 나의 정체성이 살아난다는 거죠. 나의 정체성.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어진 나의 정체성, 흙으로 지어진 나의 정체성. 그 정체성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예수 안에서 정확히 살아났어요. 그래서 정말 이 자리가, 예수님, 예수님의 이 자리가 사람을 참사람 되게 하는 자리잖아요. 참사람 되게 하는 자리. 그래서 우리는 부름받을 때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부름받았어요. 우리가 태어나기도 이 안에서 태어났고 이 안으로 부름받았어요. 나를 부른 사람 안에 내가 포함돼 있는 거죠. 포함돼 있는 거. 이 포함돼 있는 것인데 우리가 목사님 안에 포함돼 있었잖아요.
포함돼 있었는데, 이 포함돼 있는 자리, 위치, 위치. 포함되는 자리, 하나 되는 자리, 연합하는 자리, 그 자리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예수 안에서 너무나 명백하게 드러났다는 거죠. 명백하게 드러났어요. 그래서 저는 그래서 내가 나를 부른 그 사람 안에 포함돼 있었죠. 목사님 안에 포함돼 있었어요. 포함돼 있었는데, 사실 목사님이 저를 이끌고 십자가로 가신 거죠. 내가 십자가로 간 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완전히 하나님과 사람이 완전히 해체된 그 자리에서 보니까 피조물의 위치가 너무나 명백하게 드러나는 거예요.
[만유를 포함하는 넓고 온전한 피조물의 위치]
피조물 위치가 너무나 명백하게 드러났어요. 그래서 정말 이 구속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예수는 이 고린도전서 1장 30절 말씀이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잖아요.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에요. 어떤 사람도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어요. 이 안에 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렇지만 이 사람이 이탈했잖아요. 이탈했기 때문에 "이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
이 사람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하나님과 연합된 사람이 십자가에서, 십자가에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그 연합이 완전히 분리됐잖아요.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사람은 사람이고 이 자리에서 사람의 위치를 너무나 명백하게 보여주셨구나. 목사님도 우리에게 그 사람의 위치를 너무나 명백하게 마지막에 보여주셨구나. 그 자리에서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사람의 위치를 보여주는 것이 그 자리가 바로 우리에게 지혜도 되고 거룩함도 되고 구속함도 되고 구속함도 되고 되는 그 자리더라고요.
그래서 정말 이 목사님을 만나서 생명의 길을 오면서 저는 너무 이 길이 정확하다, 이 생각이 늘 들었어요. '아 어떻게 하늘의 양식이 우리에게 왔고 우리가 그것으로 너무나 부족함 없이 살았는데 이 예수가 희미했다. 예수가 희미했다.' 이 예수가 이렇게 우리하고 똑같은 사람인 것이 희미했다는 거잖아요.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으시나?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너희는 저의 말을 들어라" 이렇게 말하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그 사람을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그 위치 안에서 너무나 온전하게 확실하게 드러내셨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 자리를 확실하게 드러내셨고 또 우리 앞에 가신 목사님이 그 자리를 확실하게 드러내셨고 우리가 그렇게 고백했잖아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렇게 고백을 한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이, 사람의 위치가 어떤 사람인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사람의 위치 그 자리에,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기름 부음이 있다는 거죠. 그래서 이 위치는 한없이 넓은 위치예요. 너무 넓어요. 저는 엄청 좁은 사람이거든요. 무지 좁은 사람이야.
아주 개인주의적이고 좁은 사람인데, 좁은 사람인데 이거 개인적인 성향하고 전혀 상관이 없더라고요. 위치는 넓어요. 위치는 만유를 포함하는 위치예요. 위치는 만유를 포함하면, 그래서 야 신기하네. 신기해요. 저의 기질과 전혀 상관이 없고 누구의 기질과도 전혀 상관이 없어요. 이 위치가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위치예요. 그래서 목사님이 마지막에 "만유가 그 안에 있다. 만유가 그 안에 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이 자리 안에 모든 사람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이 나로 증명이 되더라고요. 다른 생각이 없어요. 모든 사람이 다 그 자리예요. 이 자리를 우리가 보냐 안 보냐 그거죠. 보는 것은 우리가 계속 얘기를 해야 되는 거더라고. "왜 우리를 하나님의 표현체로 지었나?"
이 말을 계속하라고. 이 사람의 자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다. 별 볼 일 없는 사람의 자리인 거예요. 성격도 나빠요. 기질도 더러워요. 친절한 것도 없어요. 다정한 것도 없어요. 그런 건 전혀 아니에요. 이 위치예요.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사람의 이 위치. 위치는 무진장 넓은 위치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가서 처소를 예비해서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겠다." 이 넓은 위치, 끝없는 위치, 끝없는 이 위치 안으로 우리를 모두 부르셔서 우리를 이 안에서 한 사람만 남게 하신 우리의 주님을 영원히 찬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