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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은 며칠전 2011년 1월 20일 재심사건 선고공판에서 조봉암을 무죄 선고했다. 그가 이승만정권에 의해 간첩죄로 사형당한지 52년만의 일이다.
그동안 남에서는 그를 ‘공산주의자’ ‘빨갱이’로 외면했고, 북에서는 한동안 ‘변절자’, '전향자‘로 외면했다.

< 1959년 조봉암 재판 장면 >
공
교롭게도 그의 말년은 북에서 박헌영의 말년과 비교된다. 둘 다 한국전쟁 이후 1950년대에 체제에 의해, 정적의 손에 의해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직후 1950년대에 남한에서 이승만정권의 ‘진보당’탄압과 조봉암의 처형은 비슷한 시기 북한에서
김일성 권력의 ‘남로당’탄압과 박헌영의 처형과 거의 동시대 사건이라고 볼 수 있는데, 1950년대 남북에서 벌어진 이 두 사건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물
론 두 사람을 단선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이 걸어온 길, 지향했던 바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걸어온 길과 정치노선에 일정한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한국전쟁 직후 남과 북 각각의 정치권력이 그 두 사람에게
행한 역사적 행위의 의도는 비슷했다.
그 두 사건을 함께 비교서술함으로써, 오늘날 분단사 재인식의 새로운 접근에 작은 문제의식을 던져본다.
조
봉암은 1898년생이다. 박헌영은 1900년생이다. 나이로는 조봉암이 두 살 많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거의 동년배라고 할 수
있다. 조봉암은 경기 강화출신이고, 박헌영은 충남 예산 출신이다. 조봉암은 다섯 형제 중 넷째 아들이었고, 박헌영은 서자(庶子)
출신이다.
둘
다 3ㆍ1운동에 참여했다. 조봉암은 서울 YMCA중학부에 다녔고, 박헌영은 경성고보를 다녔다. 박헌영은 경성고보 재학중
YMCA청년부에도 다녔는데, 거기서 서로 알게 된다. 둘은 그 시기 대부분의 의식 있는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러시아혁명과
3.1운동의 영향으로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에 관심을 갖고 뛰어들었다. 둘은 똑같이 상해에서 활동도 했고, 비슷한 시기 일본도 갔다
왔다.
1925
년 4월 17일 조선공산당이 창건될 때 둘은 당원으로서 함께 했고, 이튿날 조선공산당 산하 청년조직으로서 결성된 고려공산청년회에 둘
다 간부로 선임되었다. 박헌영이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였고, 조봉암은 국제 담당으로서 코민테른에 파견될 대표로 선출되었다. 그 후
둘 다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수학하였다. 둘 다 모스크바 상해 국내를 오가며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을 하다가 조봉암은
1932년 상해에서 체포되어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간 장기 복역하였다. 박헌영은 1925-27년 투옥되었다가 보석으로 풀려나 부인
주세죽과 함께 국외로 탈출하였고, 1933년 다시 상해에서 체포되어 6년간 복역하였다. 조봉암은 복역중 첫 번째 부인을 상처했고,
박헌영은 복역중 첫 번째 부인 주세죽과 헤어졌다. 박헌영은 1939년 석방 후 지하에서 활동을 계속했고, 조봉암은 소극적이었다.
해방직전 조봉암은 또 다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에서 해방을 맞았고, 박헌영은 전남 광주 은신처인 벽돌공장에서 해방을
맞았다.

< 박헌영 >
해
방직후 둘은 처음에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에 참여했다. 주도는 박헌영이 했고, 조봉암은 연고지인 인천에서 지방조직에 참여하는
형태였다. 박헌영은 감옥에서 나온 1939년 ‘경성콤그룹’을 결성하면서 사실상의 국내 사회주의운동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둘은 장기 복역하기 전까지 함께 활동하고 그 과정에서 마찰을 빚기도 했다. 특히 박헌영이 조봉암에 대해 사업 작풍과 소극성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러한 갈등은 해방직후에도 이어져, 박헌영은 조봉암에 대해 처음부터 거리를 두었고, 조봉암은 나름대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 둘은 결정적으로 1946년 5월 갈라섰다.
조
봉암은 1948년 남한 정부수립에 참여했고, 박헌영은 북한 정부수립에 참여했다. 박헌영은 김일성 다음으로 영향력이 있었고,
조봉암은 점차 이승만 다음으로 남한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조봉암은 초대 농림부장관을 맡으며 남한 농지개혁을
주도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평화통일 노선을 표방했다. 이승만의 무력통일노선과 대조적이었다. 박헌영은 김일성과 함께 한국전쟁을
계획하고 실행했다.
둘
다 간첩으로 몰렸는데, 북의 김일성권력과 남의 이승만권력이 각각 한국전쟁을 치르며 약화되고 책임성 문제로 위협이 되는
시기였다.. 이승만은 조봉암을 북과 내통했다는 죄를 뒤집어 씌웠고, 김일성은 박헌영이 미제간첩이었다는 죄를 뒤집어 씌웠다. 그런데
둘은 한국전쟁 직후 각각 김일성 권력과 이승만 권력의 강력한 도전세력, 위협세력이기도 했다. 김일성과 이승만은 각각 체제
내부로부터 전쟁 책임성에 대한 압력을 받고 있었다. 박헌영과 조봉암은 둘 다 체제 안정의 희생양이었다. 한국전쟁으로 어수선한
정국에서, 위태로운 기존 권력의 유지 보존을 위해, 칼자루를 쥔 권력자의 타켓이 되었다.
스
탈린도 1920년대 소련공산당 내에서 권력을 장악해 가는 과정에서 정적과 반대세력을 제국주의 첩자로 몰아 숙청해 나갔다. 스탈린은
1930년대 1917년 혁명 당시 당 중앙위원이었던 지도자급 구성원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단 한 사람만 남았는데, 그 남은 한
사람이 바로 스탈린 자신이었다. 1917년 혁명당시 중간급 간부들도 제국주의 첩자 내지는 반대세력 누구누구 ‘주의자’라는 식으로
중앙 지방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숙청 처형되었다. 1936년 시기 소련 사회에서는 더이상 1917년 혁명 주도 및
지도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스탈린의 '반동적 광란’으로 시베리아 중국 대륙 등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도 상당수
희생되었다. 박헌영의 첫 부인 주세죽, 박헌영과 함께 조선 사회주의운동 초창기부터 열성적으로 활동했던 김단야, 님웨일즈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장지락)도 바로 그런 분위기 속에서 희생되었다. 권력이 불안한 시기, 못된 권력들은 정당하게 대중의 뜻에
따라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정적에 대해 자신들이 대립하고 있는 체제의 ‘앞잡이’ ‘첩자’로 몰아
제거하는 것이 동서고금의 관행이었다. 정당하지 못한 권력들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든 그랬다.

<1928년경 박헌영과 주세죽, 딸 비비안나/딸
은 박헌영이 1927년 감옥에서 보석으로 풀려나 주세죽의 고향 함흥에서 요양을 하다가 감시하는 일제경찰을 피해 두만강을 건너
모스크바로 가는 시베리아 열차 안에서 출산하였다.김정구가 부른 '눈물젖은 두만강'이라는 노래가사가 박헌영의 두만강 건너는 일화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둘
다 사법살인이었다. 그 법이라는 것은 사회구성원의 다수인 대중의 이해를 대변하는 법이 아니라, 권력자의 보조기능에 불과했다.
조봉암은 ‘국가보안법’에 의해 처형되었고, 박헌영은 ‘공화국법’을 위반한 죄로 처형되었다. 박헌영은 평양 인근 숲속에서 권총으로
사살되었고, 조봉암은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죽었다. 박헌영은 1956년 7월 19일이었고, 조봉암은 1959년 7월
31일이었다. 둘 다 상대 체제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체제 내의 과거 한 때의 뜻을 함께 했던 자들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물론 남에서 조봉암의 노선이, 북에서 박헌영의 노선이 절대적으로 옳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그
둘을 죽인 체제는 둘 다 계급 사회(국가) 수장들인 김일성과 이승만이었고, 그들이 운영하는 국가는 사회의 다수 구성원의 이해가
관철되는 국가가 아니라, 소수 지배계급의 이해가 관철되는 국가였다. 하나는 가짜 '자유민주주의' 체제였고, 다른 하나는 가짜
'사회주의' 체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