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둔황 막고굴(莫高窟)의 수난(受難)
AD 4세기, 중국 전진(前秦) 시기에 처음 조성되기 하여 약 1,000년간에 걸쳐 조성된 굴은 무려 1,000여 개나 되어서 천불동(千佛洞)이라고도 불리는 돈황 막고굴은 숱한 수난을 겪게 된다.
이 막고굴의 수난이 시작된 것은 제17굴인 장경굴(藏經窟)이 발견되고 나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청(淸)나라 때인 AD 1900년, 이곳 막고굴의 관리를 책임지고 있던 도교 태청궁(太清宮)의 도사(道師) 왕원록(王圓籙)은 기금을 모아 허물어진 막고굴을 보수하고 있었다.
당시 일을 도와주던 양씨가 우연히 16호굴의 벽에 틈새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벽 뒤에 작은 공간(방)이 있는 것을 발견한다. 벽을 허물고 들어가 보니 가로 2.8m, 세로 2.7m, 천정(天井) 3m의 자그마한 공간에 놀랍게도 5만여 점의 유물이 차곡차곡 보관된 것을 발견한다.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 16굴 벽에 뚫린 구멍이 17호 장경동 / 도사 왕원록(王圓籙)
보관 유물은 경전(經典), 고문서(古文書), 서화(書畫), 공예품(工藝品) 등이었는데 신라 혜초(慧超)스님이 쓴 인도 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도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왕원록(王圓籙)은 수차례 중국 고위직들에게 보고하고 보존 및 관리를 건의하였지만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고 그냥 보관하라고만 하였다고 한다.
문화재 도둑들 ⇒ 러시아 올텐부르크 탐사단 / 오렐스타인(영국) / 폴 펠리오(프랑스) / 오타니 고즈이
그리하여.....
1906년, 영국의 역사학자 오렐스타인(Aurel Stein)이 이곳에 들러 약 1만 점의 유물을 가져간 것을 필두로, 1908년에는 프랑스의 폴 펠리오(Paul Pelliot)가 6천여 점을 가져갔다고 한다.
거기에 일본도 합세하여 후일 정토진종(淨土眞宗/西本願寺)의 종주(宗主)가 된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까지 젊은 시절 탐사대를 조직하여 돈황 막고굴의 유물을 약탈한다.
왕원록(王圓籙) 또한 중국 정부에서 막고굴 보수비용을 대주지 않자 몇 푼 안 되는 돈에 유물을 일부를 팔아서 막고굴 수리비용으로 충당하였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장경굴(藏經窟)뿐만 아니라 다른 굴들도 크고 작은 도굴과 도난 등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심지어 러시아의 고고학자 올덴부르크(Oldenburg)는 2회에 걸쳐 석굴 벽화를 뜯어갔고, 미국 예일대학의 워너(L. Warner)는 벽화와 벽에 붙어있는 불상까지 떼어갔다고 한다.
현재 막고굴(莫高窟) 17호 굴 장경동(藏經洞)에 보관되었던 유물들은 영국대영박물관에 1만여 점이 있고, 프랑스가 가져간 6천여 점은 파리 국립도서관과 프랑스국립박물관에 나누어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신라 혜초스님이 쓴 왕오천축국전은 파리 국립도서관에 있다고 하고, 그 밖에 레닌그라드에 1만여 점, 일본에 2천여 점, 중국 북경에 1만 점 정도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