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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받으셨다.
믿음이 연약한 자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 의견은 '토론하다, 논쟁하다, 상상, 추리, 사고'등의 뜻이다. 믿음이 연약한 자의 생각을 비판하지 말라는 뜻인데 그렇다면 믿음이 연약한 자는 어떤 사람일까? 이 구절에 두가지 믿음이 나오는데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과 채소만 먹는 믿음이다. 바로 연약한 믿음은 채소만 먹는 믿음이다. 먹는 자와 먹지 않는 자는 서로 업신여기거나 비판할 필요가 없다. 이미 하나님께서 그를 받으셨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을 받으시고 예배를 받으셨다는 뜻일 것이다. 이 말씀은 코셔, 넌코셔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것을 먹는 것은 돼지고기를 먹는 신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부정한 음식을 먹는 것이 큰 믿음이고 채식주의자는 작은 믿음이다라는 말은 전혀 논리적이지도 않다. 논리가 되려면 '돼지고기를 먹는 넌코셔냐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코셔냐' 이거나 '고기를 먹느냐 채식만 하느냐'일 것이다. 이것은 분명 후자이다. 그리고 사실 부정한 동물은 음식이 아니다. 왜냐하면 음식의 사전적 의미는 '먹을 수 있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먹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먹지 못하는 자가 연약한 믿음이고 채식주의자라면 말씀하신 모든 것을 먹는 자는 큰 믿음일 것이다.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고 하셨지 먹어야 한다는 의무는 아니므로 둘다 불법은 아니다. 요즘은 채식주의자가 더 사랑이 많고 인류애, 동물을 사랑하고 지구를 위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나친 육식은 물론 좋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육식을 허용하셨기 때문에 비판할 수 없다. 물론 우리 몸에 고기가 필요하도록 창조하셨다. 사실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는 것이다. 그러나 채식주의자의 의견을 업신여기고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또한 불법은 아니기 때문이다 (롬14:1-3)
2 비판하지 마라 세우시는 능력이 주께 있다.
모든 것을 먹는 자이든, 채식주의자든 그들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감히 하나님의 종을 비판할 권리는 없다. 왜냐하면 내가 그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세워질 수도 있고 넘어질 수도 있다. 그의 때에 하나님께서 세우실 것이다. 그러나 그를 비판하고 있다면 하나님을 비판하는 것과 같다. 그는 자신의 때가 아직 되지 않았거나 하나님의 손에 훈련받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판하기 전에 스스로를 먼저 살피자.(롬14:4)
3 비판하지 마라 자기 마음으로 확정하라
어떤 사람은 이날을 저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길 수 있다. 사실 원어의 뜻은 각각의 날을 분별하는 자와 비슷하게 여기는 자로 이해할 수도 있다. 5절의 정확한 뜻은 6절이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닐을 중히 여기는 자와 중히 여기지 않는자이다. 날을 중히 여기는 것은 날에 주목하고 관심을 두는 것이다. 예슈아 당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산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위해 사는 자 같았다. 여기서는 날에 집중하지 않는 것이 샤밧을 안지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포커스를 어디에 두느냐를 의미한 것이지 샤밧의 의미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사도 시대에 문제는 언제가 샤밧이냐가 아니라(이건 오늘날 이방인 교회에서만 문제이다) 샤밧을 어떻게 지키느냐의 문제였다.(주인으로서냐 종으로서냐...)
또한 마음으로 확정하라고 말씀하시는데, 마음은 '사고, 감각, 의지의 측면'을 말하고 확정하는 것은 '확실히 알고 믿고 증명하는 것'을 말한다. 즉 자신이 날에 집중하든 하지 않든 확실한 근거를 성경을 통해 확증해야 하며 생각과 의지로 수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롬14:5,6)
4 비판하지 마라 심판대 앞에 서리라
하나님께서는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 물론 잘못을 경책하지 않는다면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물으실 수도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모두 자신이 아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 이 구절에서는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형제를 비판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형제를 업신여기는 것이고 멸시하고 무시하는 것이다. 주로 우린 세치밖에 안되는 혀로 비난을 한다. 그러나 그날에 모든 혀는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자백할 것이다. 심판의 기준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심판을 두려워하며 서로 비판하지 말고 자신의 말로 형제가 넘어지게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롬14:10-13)
5 근심하여 망하게 하지 말라
어떤 것이든지 스스로 속된(부정한)것은 없다. 부정하게 여기는 사람에게 부정한 것이다. 음식으로 인해 형제가 근심하게 한다면 (슬퍼하게 한다면) 내가 그 형제를 망하게 하는 것이다. 이 구절의 의미는 돼지고기를 부정하게 여긴다면, 그 사람에게 부정할 뿐이고, 돼지고기 때문에 형제를 근심하게 하는 사람은 형제를 망하게 하는 거라고 책망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돼지고기는 스스로 속된 것일까? 스스로 속되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그 뜻은 속된 것으로 창조된 것이 아닌데, 속되다고 여겨지는 것을 말한다. 이 구절은 돼지고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돼지고기는 성경적으로는 음식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오해해서는 안된다. 여호와께서는 돼지를 음식의 범주에 넣지 않으셨다. 처음부터 음식으로 창조하지도 않으셨다. 먹을수 없고 먹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거룩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돼지고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음식인데도 부정하다고 여김으로 해서 형제를 근심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지금도 이런 문제가 있다. (롬14:14,15)
# 먹기에 합당한 음식을 이스라엘에서는 '코셔'라고 부른다. 코셔의 사전적 의미는 '적당한, 합당한'이다. 즉 성경에서 여호와께서 규정한 먹기에 합당하고 적당한 음식이 코셔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코셔 인증서를 랍비가 발급하며 코셔 인증서가 없는 상품은 판매가 제한된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에서 말씀하신 기준에서 넘어가 인증서 자체에 집중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정한 것이 들어가 있지 않은 것이 분명해도 인증서가 없으면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코셔 인정받은 것은 테이스터스 초이스 커피가 대표적이다. 다른 커피가 부정해서가 아니라 랍비의 발급서의 문제이다 이와 같은 기준이 적용되면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는 그 누구도 코셔를 지킬 수 없다는 비논리가 적용된다. 그러므로 코셔를 하고 있다고 말해도 인정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선한 의도로 코셔 인증서가 시작되었어도 성경을 벗어난다면 그건 율법이 될 수 없다. 이러한 기준이 이방에 사는 율법 준행자들을 슬프게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몇년전 이스라엘에서 크리스챤 행진에 참여한 적이 있다. "우리는 이스라엘과 함께 서겠습니다."라는 구호와 함께 그때 방문하는 열방의 나라가 참여하는 놀라운 대회이다. 이때 많은 사람이 행진을 구경하는 유대인 아이들에게 나누어줄 사탕을 준비하고 길을 가면서 아이들에게 사탕을 선물한다. 유대인 아이들은 서서 이 사탕들을 많이 받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이들이 돌아간 후 바닥에 수많은 사탕들이 떨어져있다. 아이들이 그 사탕들을 모두 버리고 간 것이다. 그 이유는 다름아닌 코셔 인증을 받지 않은 사탕이라서 먹지 못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린 코셔라는 기준을 말씀에 두지 않고 랍비에게 둔다면 우린 믿음의 형제들을 슬프게 하고 근심하게 하고 하나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이 율법이지만 율법을 잘못 적용하면 심지어 망하게 할 수도 있다고 성경은 경고하는 것이다.
6 선한 것이 비방을 받게 하지 마라(롬14:16-18)
그렇기 때문에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해야 한다. 예슈아께서는 자신을 선하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선한 분은 오직 여호와 한분이라고 선언하셨다. 또한 사도 바울은 율법과 계명이 선하고 진리이고 거룩하다고 선언했다. 이것을 코셔를 지키느냐 마느냐고 해석한다면 우리 입장해서 고려함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당시 문제는 코셔를 지키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지나치게 지키기 힘들게 만드는 '붙잡지도 만지지도 맛보지도 말라'라는 금욕주의의 문제였다. 선한 것이 우리 때문에 비방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지 선한 것을 지켜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지키기 어렵고 복잡하게 만들수록 의로움과 샬롬과 기쁨이라는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나게 하고 선한 복음이 욕을 먹게 하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인증을 받아야만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인정된 것이 아니다. 그 인증은 랍비가 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코셔를 지키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성경대로 코셔를 지키는 것이 의로움, 거룩함이고 샬롬이고 기쁨인데 우리의 잘못된 기준을 추가함으로 벗어나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유대인의 입장이라면 과연 지금의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가 관습적으로 먹는 돼지고기, 개고기, 추어탕, 순대국, 해물칼국수, 오징어 등등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할까? 먹지 말라고 함으로 그들을 근심해야 할까? 우리가 먹지 말라고 함으로 하나님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을까? 먹고 마시는 문제가 그리 중요하지 않을까?
물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먼저이다. 그리고 먹고 마시는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우선 4가지로 피와 음행을 멀리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안식일마다 모세의 글을 읽고 가르친거처럼 우린 무엇이 코셔인지 배워야 할 것이다. 코셔를 말함으로 근심하지 말게하라는 말씀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는게 먼저인만큼 사도 바울의 가르침처럼 가장 급한 죄악을 끊게 하고 차근차근 율법을 가르치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복음은 언제든지 억지로가 아니다. 할례 조차도 강요하지 않은 것처럼 각자 자유의지로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고 그 결정에 책임을 질 수 있도록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인간을 지향해야 한다.
7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 악하다 (롬14:19-21)
만물이 모두 깨끗하다.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 악한 것이다. 여기서 다시 만물이 나온다. 만물이 깨끗한데 거리끼는 사람 때문에 교회(공동체)가 무너지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막는다고 경고하고 있다. 다시 음식을 거리끼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자. 어떤 음식을 말하는 것인가? 부정한 음식인가? 아니다. 부정한 것은 음식이 아니다. 즉, 만물은 온 세상에 있는 오만가지 부정한 것들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음식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한 음식으로 창조하셨는데 정한 음식을 먹고 죄를 짓는다면 그 음식은 그에게 악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음식은 고기와 포도주이다. 만약 고기와 술이 죄를 짓게 하거나 넘어지게 하고 약하게 한다면 차라리 고기와 포도주를 먹지 않는 것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선하게 창조하신 음식이라도 죄를 짓는 기회로 사용하는 음식이라면 그에게는 악한 것이 될 수 있다.
8 옳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정죄하지 않는 자 (롬14:22,23)
복있는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스스로 정죄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다. 즉 자신이 하는 일이 옳다고 확신하는 사람, 정죄감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확신 가운데 일하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가? 자신이 스스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존감일 것이다. 이 구절은 단순히 자신을 정죄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자신이 확신 가운데 행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이다. 음식을 먹을 때도 성경에서 확증을 얻지 못한다면 죄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무엇을 옳다고 말씀하시는지 악하다고 말씀하시는지 알고 확신가운데 사는 것이, 믿음을 따라 사는 것이고 복된 삶인 것이다. 이러한 복된 자를 우린 쉽게 자신의 기준으로 정죄할 수 있다. 복된 자들을 근심하게 하고 넘어지게 하고 그들을 저주할 수 있다. 만약 복된 자들을 저주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큰 악이겠는가!
9 혀는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사람을 더럽힐 수 있으며 삶의 수레바퀴 즉, 인생을 지옥에서 살게 할 수 있는 독이 가득한 악이다. 그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고 또한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저주할 수 있다. 우리가 만약 누군가를 비판함으로 그의 인생을 지옥에 가둘 수 있다면 그 심판은 얼마나 크고 두렵겠는가? 사람의 인생을 지옥불에 던지는 죽이는 독이 될 수 있다. 혀를 이용하여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동시에 혀를 사용해서 세상을 저주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린 혀를 훈련하여 사람을 세우고 선한 것을 창조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 혀를 길들이는 자는 온몸에 굴레를 씌울만큼 온전한 자이다. 혀를 사용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성장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훈련이다. (약3:6-10)
10 망하게 하는 말이 있다
혀를 잘못 사용하면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망하게 할 수 있다. 똑같이 가나안 땅을 정탐했지만 정탐한 12명중 10명은 그 땅을 악평하고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라고 말하여, 온 백성이 지도자를 원망하게 만들었고 약속의 말씀을 주신 여호와를 멸시한게 되어 원망한 모든 자들이 결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무슨 말을 하느냐 믿음의 말이냐 불신의 말이냐에 따라 우리의 생사가 달라진다. 자신만 죽는 것이 아니라 듣는 모든 자들을 죽게 만들 수 있다. 그러니 말에 대한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가? (민13:32,33 민14:1-23)
11 살리는 말이 있다.
요압이 한 성벽을 치려고 토성을 쌓았다. 그때 한 지혜로운 여인이 요압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자신은 이스라엘의 화평하고 충성된 자중 하나이고 이 성읍은 여호와의 기업이라고 그런데 왜 치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이 여인은 즉각적으로 요압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로 요압을 설득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니 그분의 거룩한 기업을 없이하지 않으심을 의지하고 호소한 것이다. 그때 요압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성읍을 없애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왕을 배반한 사람을 없애는 게 목적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그녀는 요압과 하나님을 원망하며 죽을 수 있었지만 이 여인은 소통을 선택했다 그리고 지혜로운 소통은 그녀와 성읍을 죽음에서 건져냈다. 그곳에 수많은 남자들, 높은 지위에 있는 관직자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지혜로운 한 여인의 말(소통)로 그 성읍을 살렸다. 우린 소통을 포기하고 원망하여 하나님을 멸시하고 망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지혜로운 소통을 포기하지 않으며 훈련하여 자신을 살릴 뿐 아니라 도시를 살리게 되는 큰 일을 할 수 있다. 이 소통의 훈련은 매일 매일 가장 가까운 남편과 아이들과 하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다. 우리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혀의 권능을 잘 훈련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자 혀의 소통은 결국 온 몸에 피가 돌게 한다.(삼하20:15-22)
12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는 말
나발이라고 하는 완고하고 행실이 악한 어리석은 자가 있었다. 그는 다윗을 보고 주인을 떠난 악한 종이라고 비난하였고 먹을 것을 주지 않고 멸시했다. 그로인해 다윗은 그와 온 집안에 남자들을 죽이려고 작정하였다. 그러나 지혜로운 아내 아비가일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다윗을 찾아가 하나님의 뜻대로 그를 높이고 축복했다. 부부가 하나님의 뜻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 복음이다. 그러나 배우자가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지 않을 때는 결코 하나 될 수 없다. 심지어 아비가일의 남편을 죽이시고 다윗이라는 새로운 남편을 주시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말이 얼마나 중요한가? 나발은 말 때문에 죽이셨고 아비가일은 말때문에 축복을 받았다. 물론 문제가 말에만 있지 않다. 우리 마음에 가득한 것이 말로 나온다. 그러므로 말 실수를 조심하기 전에 먼저 마음을 바르게 고쳐야 할 것이다.(삼상25:3~33)
13 완벽한 사람이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다. 만약 목사이면서 교사인 사람이 100프로 자신의 일을 감당한다면 그는 몇점이라 말할 수 있는가? 100점이다. 그러나 선지자에게 그는 빵점일 수 있다. 복음 전하는 자의 눈에 그는 점수에 한참 못미치는 20점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직임은 선물이다. 누구나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선물에 따라 부르심을 따라 합당하게 행해야 하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린 결로 서로 용납할 수 없고 하나될 수 없다. 하나님은 한 사람에게 모든 은사를 주지 않으셨다. 그렇지 않으면 우린 결코 하나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혀로 서로를 판단하고 정죄하면 안된다. 또한 스스로도 정죄하면 안된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은사를 주신 목적은 성도를 완전하게 하기 위함이다. 온전한 사람이 완벽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우린 복음 전하는 자로 살지 않아도 완벽한 성도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교사로 가르치지 않아도 완벽할 수 있고 예언하는 능력이 없어도 완벽한 사람, 성도가 될 수 있다. 그러니 제발 죄책감에 시달리지 말자. 완벽함이라는 신경쇠약에 시달리지 말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완벽함은 예슈아를 향한 믿음과 지식에서 하나되어 예슈아의 장성함에 이르는 완벽을 말하는 것이다. (엡4:1-13)
14 이방인처럼 살지 말자
우리가 예슈아를 알고 믿음에서 하나될 때(사도로 선지자로 복음 전하는 자로 목사와 교사의 모든 은사를 통해) 우린 교리의 여러 흐름에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해 은사가 서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성도가 자라도록 도움을 주고 사랑으로 세우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은사가 필요하고 성도를 세우는 목적은 한가지 이다. 이방인처럼 허망하게 살지 말라는 것이다. 그들은 생명에서 떠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배우고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는 궁극적 이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궁극적인 이유는 성도를 이방인처럼 살지 않고 진정한 유대인처럼 살도록 가르치는 것에 있다. 진정한 유대인은 말씀에 순종하는 예슈아처럼 사는 것이다. 돈때문이 아니라 의로움을 위해 사는 자들이다(엡4:14-18)
15 한마음과 한입이 되기까지 인내하자
우리는 로마서 14장을 날이 중요하지 않고 먹고 마시는 것도 중요하지 않으므로 샤밧 때문에, 코셔 때문에 서로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고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비판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를 그분의 때에 세우실 것이고 세우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바로 그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비판하지 않고 서로의 연약함을 용납해야 하는 이유는 불순종을 용납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용납은 진정한 샬롬이 아니며 하나됨이 아니다. 로마서 15장에서 그 이유를 말하고 있다. 우리가 비판을 받고 정죄를 당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내하고 성경을 통해 위로받고 소망을 갖는 이유는 마침내 우리의 뜻(감정과 의견)이 같아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한 마음과 한 입이 되도록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그 날이 올 것이다. 사도바울이 이방인에게 먼저 4가지를 금하라고 가르칠 때도, 처음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생각과 마음이 동일하지 않았다. 그러나 샤밧 때마다 회당에서 율법을 배운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결국 유대인과 한 마음과 생각을 갖게 된다. 우리가 여호와의 법도를 따르고 그 법도로 다스려질 때 말씀이신 예슈아를 머리로 둔 지체로서 진정 하나가 될 것이다. (롬15:4-6)
샤밧 예배: 토요일 10시 30분
헌금 계좌: 농협 301 0293 8190 01 레올람토라
대전시 동구 가양동 39-11 2층 레올람 토라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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