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4년 8월 12일 화요일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
[김용호] [오전 2:56] 굿모닝입니다~^^ 오늘도 주님이 함께 하시는 멋진 하루~!!
[정진호] [오후 12:13] 군대에 부적응자가 이렇게 많은 이유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자살자들이 계속 나오네요.
[김용호] [오후 12:13] 그러게요. 크게는 전체적으로 우울증 환자가 많아졌고 작게는 입영 대상자 숫자가 줄어 웬만하면 현역판정을
내린다고 하네요.
[정진호] [오후 12:16] 모병제 이야기가 요즘 나오기 시작하던데 공론화가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생각되데요.
[김용호] [오후 12:16] 모병제가 되면 이런 일은 크게 줄겠지요.
[정진호] [오후 12:17] 직업으로 군 생활을 할 사람은 대우 잘해주고 가기 싫은 사람은 돈으로 때우고, 공평하지 않나요? 우리 애는
이렇게 이야기하데요. 그래도 군대라도 갈 수 있어서 그 시간만큼 실업자를 면하는데 안 가게 되면 그 많은 실업자를 어떻게 할 거냐구요. ㅋㅋ 안 갈 사람들이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을 구할 수 있으면 돈으로 낼 수 있겠지만 직업을 구하기가 어려운 게 또 문제가 되네요. 그렇다고 모든 청년을 직업군인 만들 수도 없구요. 진퇴양난이네요.
[김용호] [오후 12:23] 정치를 예술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겠네요. 자기에게 유리한 판단을 내리기는 쉽지만 모두에게 유리한 판단
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온 국민이 사사건건 이해관계가 다른데 어떻게 국민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건지...
다수결의 원칙을 말하지만 다수결에는 큰 함정이 있습니다. 극단적인 예가 나찌 정권인데 탄생할 때 국민투표 찬성률이 90%가 넘었다고 합니다. 다수결이 합리적인 방법이 되기 위해서는 구성원 전체가 합리적인 투표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불가능한 전제가 있지요.^^ 그래서 민주주의의 원칙이 다수결과 함께 소수 의견에 대한 존중 더하고 있는데 이것도 사실 하나마나한 이야기지요. 완전히 모순되는 원칙 두 가지를 쥐고 있는 셈이니까요. 거기에 군중심리라는 것까지 발동될 때가 있으니 정답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정치는 예술이 아니라 아슬아슬한 줄타기라고 하는 것이 맞겠네요.^^
제가 합리적인 투표를 말했는데 과연 어떤 것이 합리적인 판단인지는 사실 아무도 모릅니다. 몇 년 지나면 “아~ A가 합리적이었구나~” 하다가 몇 십 년 지나면 “아~ 아니구나 오히려 B가 합리적이었구나~” 할 게 뻔하지요.^^ 이럴 껄, 저럴 껄 하면서 그렇게 사는 게 인간이라 하겠습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도 마찬가지인 거지요.
역사 이론이 그것들을 다루고 있지요 사회학도 마찬가지이겠구요. 그러고 보니 사회학자가 될 뻔한 집사님과 역사학자가 될 뻔한 제가 대화를 나누고 있군요. 그러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었지만요.^^
세상 사람들이 저렇게 무수하게 끔찍한 시행착오들을 해왔으면서도 줄기차게 희망을 품고 사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형벌이 얼마나 치밀한 형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도무지 지치지들을 않아요.^^ 인류가 지금까지 수란 수는 다 써본 셈이니까 이제는 소수일지라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에 좀 귀를 기울일 때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져봅니다. 가톨릭과 개신교가 그것을 죽어라고 훼방하고 있긴 하지만요.^^
세상에 도무지 답이 없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대안을 주셨는데 어거스틴이란 인간이 그것은 대안이 아니라고 규정해버렸고 가톨릭과 개신교는 어거스틴이 맞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고....
우리가 서 있는 위치가 참 묘한 위치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아득한 위치지요. 기드온이 서 있던 위치와 흡사하네요.
“큰 용사여. 나가서 미디안에게서 네 민족을 구하라~”
“아이고 무슨 택도 없는 그런 말씀을~”
“주님의 교회 내 제자들아. 나가서 20억의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불가시교회가 아니라 가시교회라고 외치거라~ 어거스틴이 틀렸고 가톨릭과 개신교가 모두 틀렸다고 말이다~”
“윽~~~ 우리가요?”
“무슨 소리냐~ 기드온은 혼자서도 시작했다.”
“그럼 우리에게도 표적을 보여 주세요~”
“뭔 표적을 또 보여 달라는 거냐~ 그 많은 표적들을 보여주었으면 됐지~”
“알겠습니다. ㅜ.ㅜ”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아멘~!! 우리를 내버려두시면 절대 안 됩니다. 주님~”
“어허~!!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예. 우리는 연약합니다. 주님~”
“안다. 너희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실제로는 더 연약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삼겹 줄은 끊어지지 않느니라. 내가 너희를 모아놓은 이유다. 기드온은 혼자 시작했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그리고 내가 벌레 같은 너희를 산을 부수는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계로 만들어 사용할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강한 자들이 되는 겁니까?”
“아니~ 내가 직접 들어 쓸 때만 그렇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실망스러우냐?”
“아니 뭐 꼭 실망스럽다기보다 뭐 그게 그.....”
“너희를 보호하기 위해서니라. 너희는 능력을 소유하게 되면 감당할 수 없는 존재니라. 은사를 받았다고 펄펄 뛰다가 그 때문에 결국 쓰러진 인간들을 무수히 보지 않았느냐.”
“아 예. 그럼요. 사도 바울께서도 자신이 약할 때 강하다고 고백하셨는데 우리야 뭐~ 감사합니다.”
[최해준] [오후 2:34] 능력을 소유하게 되면 감당할 수 없는 존재 - (한숨과 함께) 아멘~!
[김용호] [오후 2:35] 아멘~!!
[김용호] [오후 3:47] 스카이라운지 도착~ 햇볕은 따가워도 그늘은 시원하네요. 절기가 참 무섭습니다. 하늘의 절기는 하나님 뜻대
로 정확히 움직이고 세상 사람들도 하나님이 주신 형벌로 인해 서로 물고 먹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어찌된 일일까요?
1. 결핍의 형벌과 사망의 형벌은 서로 물고 먹으라고 주신 형벌은 아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2. 개개인이 고통 속에서 살다가 죽으라고 주신 형벌인데 사람들이 스스로 취득한 선악 판단이 그 고통과 결합하면서 서로 물고 먹는 악행까지 저지르는 거지요. 판사가 감옥에 보낼 때 감옥에 갇혀 있는 고통을 당하라고 보낸 것이지 그 안에서 서로 싸우라고 보낸 것은 아니지요. 서로 물고 먹는 것은 형벌에 포함된 것이 아니었는데 못된 인간들이 오바를 한 거지요.
3.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은 형벌을 잘 감당하라는 뜻이 아니고 출옥시키기로 하신 새로운 하나님의 뜻입니다. 노아 때만 해도 무지개 언약을 주시면서 "어려서부터 악한 너희를 어쩌겠느냐" 하셨는데 아브라함을 선택하시는 순간부터 새로운 뜻을 드러내셨지요.
(창 18:17-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처럼 아브람의 선택 순간부터 하나님의 새로운 뜻이 계시된 것입니다. 양과 이리가 함께 먹는다고 비유된 새 집단,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의 등장이지요. 아브람이 선택된 것이 기원전 2090 년쯤이었는데 그 2090년 동안 구약 공동체인 이스라엘이 삽질을 했고,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후 2014년째 신약공동체인 기독교회가 삽질을 해오고 있습니다. 징글징글 하군요.^^
[정진호] [오후 4:05] 이렇게 보면 될까요? 노아 때 미리보기를 보여주시고 아브라함 때 예고편을 보여주시고 예수님이 오셔서 본 영
화가 시작되는데 새로운 피조물들이 각각 영화에 출현하는 거구요.
[김용호] [오후 4:09] 본 영화가 시작되고 2014년이 지났는데 아직 주인공들은 나오지도 않고 복선만 깔고 있는 셈입니다. 초반에 사
도들이 잠간 나왔다 들어갔고 이어서 바로 서구 기독교라는 조연이 나타나서는~~ ㅋㅋ
제가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사도들을 무시해서가 아닙니다. 사도들은 개인 차원의 약속이 이루어진 존재들이라고 인정되지만 당시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는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거든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서로 싸우기도 하면서 사도들의 애만 태우지요.
[정진호] [오후 4:13] 사도들의 시나리오는 거기까지만인 거지요. 그 다음은 다음 주자에게 바톤이 넘어온 거구요.
[김용호] [오후 4:13] 그렇게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됩니다. 서신으로 신약성경의 계시를 완성하는 것이 사도들의 주 사명이었다
고 보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바톤을 서구 기독교라는 조연들이 가로채서는~~~ ㅋㅋ 여기까지 온 거지요.
[정진호] [오후 4:15] 사도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는 메뉴얼은 성경에 적어 놓았으니 이제부터는 너희가 알아서 하나님 나라
를 만들어 보아라. 이런 걸까요?
[김용호] [오후 4:16] 뭐 중간에 기특한 사람들이 몇 나왔었다고 인정합니다만 본격적인 스토리는 아직 시작되지 않은 것이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아직 영화에 안 나왔으니까요. 이 영화의 주인공은 개인이 아니고 공동체거든요. 산 위의 동네처럼 분명하게 등장한다고 시나리오에 써있으니 아직 주인공 집단이 안 나온 것이 분명한 사실입니다. 물론 산 속에 있었을 수는 있지만 시나리오와 안 맞지요.
엉뚱하게 로마 가톨릭 집단, 개신교 집단이 출현하는 바람에 관객들이 그들이 주인공인가보다~ 하고 영화를 보고 있습니다. 60년 전부터는 진보기독교라는 변장한 집단이 출현해서 왼쪽 객석에 앉은 관객들의 환호성을 받고 있지요. ㅋㅋㅋ
[정진호] [오후 4:23] ㅎㅎㅎ
[김용호] [오후 4:24] 진짜 주인공 집단은 출현을 대비해 강훈련을 받고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ㅎㅎㅎ 아이고~~~
[정진호] [오후 4:24] 그 관객들도 문제지요. 자기들이 영화에 나올 생각은 안하고 감상만 하려고 하는 거니까요.
[김용호] [오후 4:25] 맞습니다. 영웅을 보려고 앉아 있는 거지요.^^
[정진호] [오후 4:25] 주인공 집단은 지금 영화아카데미에서 박박 기고 있다는 소문이.... ㅋㅋㅋ
[김용호] [오후 4:26] 좌로 굴러 우로 굴러 ㅎㅎㅎ 스턴트 대역도 없답니다. ㅋㅋ 지옥 훈련~^^ 일단 영화에 출연하면 그 순간부터
20억이나 되는 집단과 맞짱을 떠야 하기 때문에~ ㅜ.ㅜ 유격 훈련, 공수 훈련, UDT 훈련까지 받고 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ㅋㅋㅋ
[정진호] [오후 4:31] 훈련이 너무 쎄서 이미 많이 나왔다는 소문이....
[김용호] [오후 4:32] 홈런~ ㅋㅋㅋ 집사님 말씀을 듣고 한참 웃다보니 마음 한 켠이 먹먹해지네요.
[정진호] [오후 4:34] 정금같이 만드시려고...
[김용호] [오후 4:35] 아멘~!! 사실 지금까지 주인공 급들이 꽤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세월을 잘못 만나서~~~ 이 영화에서
개인은 주인공이 될 수 없거든요. 주변에 온통 불량 서클들뿐이었으니 그 사람들 개개인이 어쩔 도리가 없었던 거지요.
그래도 그 와중에 과도기의 자기 사명을 잘 감당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거지요. 주인공 집단 출현 전에 미리 나와서~~ 물론 완벽한 악역도 많았구요. 예를 들자면 콘스탄틴과 어거스틴 같은~~
[김용호] [오후 6:22] 여기서 교만과 겸손과 섬김의 관계에 대한 수다 나갑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가지고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들이므로 교만할 틈도 없지만 겸손할 틈도 없습니다. 섬기기에 온 정신이 팔려 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 앞에서는 겸손이 아니라 벌레니까 죽은 듯이 있게 마련이구요.^^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1. 우리가 완벽한 것이 아니니 겸손해야 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2. 우리가 틀릴 수도 있는 것이니 겸손해야 하지 않겠는가?
3. 우리보다 앞선 사람이나 공동체를 만날 수도 있으니 겸손해야 하지 않겠는가?
겸손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겸손이 있고 배우기 위한 겸손이 있지요.
1.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겸손은 죄악된 행동이니까 패스~^^
2. 우리가 틀릴 수도 있는 경우를 대비한 겸손은 다른 사람과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의 문제이므로 하나님 앞에서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인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으므로 역시 패스~^^
3. 우리보다 앞선 사람이나 공동체를 만날 경우에는 그 쪽에서 우리를 섬기려고 종노릇을 할 것이므로 감사함으로 섬김을 받으면 됩니다. 역시 겸손할 기회는 없겠지요? 그런데 만약 우리보다 앞선 줄 알았던 개인이나 공동체가 우리에게 겸손을 요구하거나 우리를 교만하다고 꾸짖으면 그냥 조용히 그들에게서 떠나면 됩니다. 우리가 본 받을 것이 없는 자들이란 것이 그 순간 확인되기 때문이지요. 물론 혹시 우리가 오히려 그들에게 본을 보이며 그들을 섬겨야 하는 때는 아닌지 확인은 해야겠지요.
[정진호] [오후 6:41] 겸손하냐 뻔뻔하냐가 섬김의 수단으로 필요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것이지 겸손 그 자체가 미덕은 아니라는 말
씀 같네요.
[김용호] [오후 6:42] 예 .전략상 필요할 경우는 있습니다.^^ 사람 사이의 교만과 겸손은 갈등이나 투쟁과 관련된 행동 수칙입니다.
즉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테크닉인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인 것은 오로지 섬김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보다 어린 사람을 만나면 우리가 섬기고, 우리보다 큰 사람을 만나면 우리가 섬김을 받습니다.
제가 앞에서 20억과 맞짱을 뜨게 된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맞짱이란 섬김의 우스개 표현인 것이지요. 그리스도의 제자가 가는 길에는 충돌이란 없습니다. 섬기거나 섬김을 받거나 아니면 피하거나 셋 중 하나인 것이지요. 따라서 교만할 기회도 없지만 겸손할 기회도 없는 것입니다.
[정진호] [오후 6:47] 공동체 밖에서야 뻔뻔한 방법을 사용해야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공동체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겸손하게 섬기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요? 나의 뻔뻔함과 교만이 다른 지체를 시험에 들게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김용호] [오후 6:48] 예. 공동체 안에서야 섬김뿐이지요.^^ 그리고 애초에 전략적 접근 자체가 무의미하지요. 서로 발가벗고 본을 보
이고 본을 받고 하니까요. 공동체 안에서는 아무리 어린 자라 하더라도 푯대를 공유한 자이기 때문에 전략 자체가 필요 없는 거지요.
그러나 공동체에 간을 보러 온 사람은 공동체 안의 사람이 아직 아니니까 그런 사람에게는 전략이 필요할 수도 있지요. 몸뚱이는 공동체 안에 있더라도 아직 외인이니까요.
[정진호] [오후 6:49] 그렇지요. 그리고 세상에 나가서 겸손하면 다들 잡아먹으려 하기 때문에 교만이 더 좋은 방법일 경우가 많을 거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김용호] [오후 6:52] 세상에서 능력을 발휘하면서 교만하게 굴면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입니다. 덕을 보려구요. 낚시질의 한 방법
일 수 있지요.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여전히 육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만은 철저히 경계해야 합니다. 수시로 우쭐한 마음에 빠질 수 있고 또 수시로 주제넘게 상대방을 비웃거나 심지어 정죄할 수 있습니다. (먹고 있는 밥상을 발로 차버리는 등의 전략적 행동은 예외임^^)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하신 말씀을 한 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교대로 깨어서 불침번이라도 서야 합니다.
겸손에 비하면 교만은 오히려 회개하기 쉽습니다. 겸손은 스스로를 속이기까지 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장황하게 수다를 떨어보았습니다.
[정진호] [오후 7:09] 도움이 되네요.^^
[김용호] [오후 7:12] 예수님 말씀 중에 제가 의미를 아직 알지 못하는 말씀이 많지만 그 중에 낮은 곳에 가서 앉으면 주인이 높은 자
리로 부를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거 완전 교활한 처세술로 보입니다. 얼마든지 다른 비유를 드실 수 있었을 텐데 이런 교활한 처세술로 오해받을 수 있는 비유를 드신 이유를 아직 제가 몰라 설교에서 한 번도 인용한 적이 없었습니다.
상석에 앉는 요령 교육이라니~~~
그건 아닐 테니 도대체 무슨 의도로 하신 말씀일까~~
집 주인을 하나님으로 보아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그러다가 꾸중을 들었으니까요. 엄마까지 동원해서 예수님께 청탁을 하다가~ ^^
먼저 깨달은 분이 계시면 즉시 저를 섬겨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우리 수다에 제가 깨닫지 못한 말씀을 기회 될 때마다 하나씩 올리겠습니다. 그럴 때가 된 것 같아요.^^ 고민도 함께 하자구요~^^
[정진호] [오후 7:25] 음~~ 일단 모른다고 봐야지요 ㅋㅋ
[김용호] [오후 7:25] 화이팅~!!!
[최해준] [오후 7:25] ㅎㅎㅎ 화이팅~!!!
[정진호] [오후 7:26] 나도.^^
[김용호] [오후 8:02] 위 말씀은 누가복음 14장 7절~11절 말씀인데 잠언 25장 6절~7절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잠언이야말로 처
세술 차원의 말씀이 많고 또 구약이니 당연한 일인데 예수님이 왜 인용하셨는가가 우리의 고민이라 하겠습니다.
주석을 보니 처세술을 가르치신 것으로 보면 안 된다는 말을 제일 먼저 하고 있군요. 반가워서 계속 읽었더니 사람의 높고 낮음은 하나님이 정하신다는 의미라는 주장들을 소개하고 있네요. 참 주석 달기 누워서 떡 먹기군요.^^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낮은 자리에 있는 자, 심지어 앉지도 못하고 서서 먹는 자가 큰 자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과의 충돌을 놓고 고민했어야지요. 새 하늘과 새 땅에 가서도 섬김은 계속되는 것이니 천당에서의 상급으로 보는 것도 말이 안 되지요. 그런 천국이라면 낮은 자리에 있는 대다수의 영혼들에게는 지옥이 될 테니까요.^^
모르겠네요^^
누가 나를 좀 섬겨줘요~~
[정진호] [오후 8:12] 죄송합니다. ㅋㅋ
[김용호] [오후 8:12] ㅎㅎㅎ 감사합니다. 해답은 성령께서 언젠가 우리 중 한 사람에게 주실 것을 믿고 이와 관련해 참고가 될 만한
불교 측의 삽질 사례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어제 말씀드린 자료들을 보다가 알게 된 것입니다.
중국에 처음 불교가 들어올 때 이미 왜곡될 대로 왜곡된 대승 불교가 들어왔습니다(우리나라도 당연히 마찬가지였지요). 그러니 당연히 불경들 사이에 모순이 있는 겁니다(장가도 안 가고 불경만 판 사람들이니 그걸 모를 리가 없지요). 그 모순은 아함경과 같은 소박한 초기 경전과 법구경, 화엄경과 같은 고도의 철학적 경전들이 도무지 수준도 다르고 내용까지 다른데 모두가 부처님이 직접 하신 말씀으로 믿어야 하는 입장에서 참 난감한 거지요.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그 때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진 자가 나타납니다. 이름은 천태대사. 천태종을 창시한 사람이지요. 천태대사의 아이디어는 다음과 같습니다.
부처님이 설법을 하실 때 청중의 수준이 항상 달랐다. 그래서 청중의 수준에 맞추어 그때그때 설법을 하셨기 때문에 수준도 다르고 내용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그 고승에게 큰 감사를 드리고 그 후 1500년 이상을 모든 불경이 부처님의 말씀임에 틀림없다고 믿으면서 아함경은 저급한 청중들에게 하신 설법이어서 콧대 높은 모든 자들이 관심조차 두지 않았는데 사본학이 발달하고 또 초기 불교의 가르침을 간직하고 있는 남방불교와 티벳불교와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지금까지 거들떠도 보지 않던 아함경이 유일한 부처님의 설법이고 반면에 높이 떠받들던 불경들이 오히려 후대에 대승불교를 만든 자들이 쓴 것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사람들이 멘붕이 오기 시작한 것이 작금의 불교계의 현실이랍니다.^^
경전 해석에 꼼수를 부리다간 패가망신은 물론 수많은 사람들을 수렁에 빠뜨리게 된다는 무시무시한 살아있는 사례입니다.^^ 어거스틴의 꼼수도 빨리 이렇게 온 천하에 드러나야 하는데~~ ㅋㅋ
[정진호] [오후 8:31] 조만간
[김용호] [오후 8:31] 아멘~!!! 우리는 무리한 해석을 하지 말자는 의미로 옆 동네 불교의 작금의 처참한 사례를 말씀드렸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아담 설교 때 소개해드린 벨하우젠의 4문서설 등의 성과를 뽐내며 보수 정통 신학자들을 비웃어 왔는데 우리가 하려는 일은 그런 사소한 차원의 일이 아닌 것이지요. 가톨릭과 개신교를 바닥부터 뒤집어 확실하게 섬기는 일입니다.
어거스틴의 꼼수를 밝히는 것이지요. 국가교회를 합리화하고자 자행했던 교활한 꼼수를 말입니다. 성경의 계시에서 중심 중의 중심인 하나님의 나라를 제거하고 그 자리에 로마 제국을 모신 그 악랄한 꼼수를 말이지요.
그를 위해 하나님의 의는 윤리도덕과 인간의 양심으로 대치하고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선은 인간의 선으로,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의로 등등 모든 것을 왜곡시켰던 것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