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사랑을 주기만 하는 여인
냉정하게 현실 바라보는 외향적 감각 필요
4남매 맏이인 40대 초반 K 사장은 회사를 물려준 70대 부친에게 점수 따는 유일한 방법이 적당히 떨어져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려서부터 부친에게 지나치게 야단맞으며 받은 상처도 크지만, 어른이 된 지금도 가까이 다가가면 야단치고 눈에 안 띄면 서운해하시기 때문이다.
주기만 하고 받지 못할 때는 상대의 진정성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주기만 하고 받지 못하는 일방적 관계는 마음의 병을 낳을 수 있다.
서영은의 단편 소설 <먼 그대>에 나오는 문자 이야기다. 나이 마흔을 바라보는 문자는 처자식이 있는 한수에게 헌신적이다. 아무때나 불쑥 찾아오는 한수는 주기만 하고 요구할 줄 모르는 문자를 제 실속도 못 챙기는 어리석은 여자로 생각한다.
문자는 한수와의 사이에 낳은 아이도 본처에게 빼앗겼으나 아이의 미래를 위해 참는다. 하지만 한수 내외는 제 아이도 지키지 못하는 어리석고 무능한 여자라고 무시한다.
돈도 한수가 주는 것보다 가져가는게 더 많을 뿐만 아니라 이따금 목돈을 요구하면 문자는 빌려서라도 해결해 준다.
한수는 돈다발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진주 넥타이핀에 명품 구두를 신고 다니면서도 문자에게 베푸는 데는 인색하다. 문자는 출판사에서 교정 일을 하는 최고참이다. 단칸방에 세간살이도 보잘것없다.
치장하는데도 관심이 없고 자신을 위해서는 돈을 쓸 줄 모르는 여자다. 그래도 사랑하는 남자를 생각하면 못 살아도 사는 게 신이 난다. 물건 값을 깎다가도 멈추고 사람들과 다투다 화가 나도 참는 여자다.
자신에게 멀어져 가는 이기적인 한수를 보면 속에서 눈물이 나나 신이 내린 시련이라 생각하고 낙타의 삶을 이어 간다. 문자는 자존감이 낮아서 또는 동정을 받기 위해 무조건 참기만 하는 피학적 여성은 아니다.
문자는 한수가 아니라 한수를 통해 본 자기 내면의 남성을 사랑한 것이다. 문자가 진정성 있는 그녀의 가치를 깨닫지 못한 한수에게 실망했으나 인내하며 사랑으로 대하는 것은 그녀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나 그녀를 착하지만 바보 같은 여자로 보는 한수의 마음에 어느 정도 진정성이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내향적 성격의 문자는 자신이 상대에게 어떻게 비치는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보인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 헌신적이고 사려 깊고 인내심이 강한 자신을 착하지만 제 실속도 챙기지 못하는 어리석은 여자로 본다는 사실을 알고도 외면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좋은 조건의 다른 남자를 만나 보라고 조언하는 문자의 이모 말대로 그녀는 길을 가다 진흙탕을 만나도 비켜갈 생각을 않고 발이 빠져도 그냥 가는 고집쟁이일지 모르겠다.
문자는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외향적 감각이 필요하다. 자신을 가꾸고 실속도 차리면서 주는 만큼 사랑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한수에 대한 기대를 접고 사막을 건너는 낙타의 마음으로 삶의 짐을 지고 간다고 하나 초인이 되기 전에는 우울한 기분을 떨쳐 버리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계속>
글 | 김창윤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