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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교회 선정 단상
지난 24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생명위원회와 기독교환경운동연대가 14개 교회를 2022년 녹색교회로 선정했습니다. 감사하게도 필자가 섬기는 교회도 포함되는 영예를 누렸습니다. 부목사님이 시상식에 참석했는데 녹색교회 명패를 받는 순서를 꼽아보니 우리 교회가 정확하게 100번째 녹색교회라며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면구스러움이 없지 않습니다. 옥상 텃밭을 만들어 주민과 나눈 것, 건물 외벽을 태양광 패널로 교체 시공한 것, 농촌교회와 더불어 친환경 농산품을 직거래한 것, 그리고 코로나 시기 사순절 성서 묵상을 창조 영성의 시각으로 진행하고 이제 겨우 교회 안에 창조질서회복센터를 만들고 이 작은 활동들을 담기 시작했을 뿐인데 녹색교회라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실상부한 녹색교회로 나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자고 성도들과 다짐했습니다. 통계청(2018년)에 의하면 우리나라 개신교회는 5만6879곳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녹색교회는 이제 겨우 100개를 넘어선 것입니다. 지금도 전국 교회들은 붉은 십자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보혈의 붉은 은총과 함께,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을 회복하는 녹색 은총의 빛을 함께 밝혀가길 더 기도해야겠습니다.
김종구 목사(세신교회)
내 멍에를 메고
하나님께서 동물을 만드실 때 새들은 불만이었답니다. 다른 동물은 튼튼한 다리가 넷인데, 자기들은 가느다란 다리 둘뿐입니다. 등에는 거추장스러운 짐까지 두 개나 달렸지요. 투덜대는 새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답니다. 그 짐을 활짝 펴서 창공을 맘껏 날아보아라.
사람은 누구나 감당해야 할 짐이 있습니다. 짐이 너무 무거워 고통스러울 때가 있지요. 그럴 땐 모든 짐을 예수님에게 넘겨버리면 될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마 11:29·새번역) 예수님은 멍에를 메라 하셨습니다. 힘센 황소도 멍에 없이는 빈 수레를 끄는 것조차 힘들지요. 멍에는 짐을 감당하게 도와줍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짐이 참 무겁습니다. 너무 버겁고 아파 내팽개쳐버리고 싶지요. 그런데 어쩌면 그것은 짐이 아니라 은총의 날개인지도 모릅니다. 짐이 무거울 때는 포기할 때가 아닙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의 멍에를 배워야 할 때입니다. 주님과 함께 메는 멍에는 편합니다. 주님과 함께 지는 짐은 어느새 가볍습니다.
서재경 목사(수원 한민교회)
텍사스의 못다 핀 꽃
미국은 또다시 큰 충격과 아픔에 빠졌습니다. 지난주 화요일 텍사스의 롭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총기 사건 때문입니다. 19명의 초등학생과 두 명의 교사가 한 청소년이 난사한 총격으로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너무 가여운 어린아이들. 못다 핀 꽃들인데 가족과 친구들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남겨진 가족과 어린 친구들은 물론, 그 누구도 이 아픔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 세상~.” 지금이 그 오월인데 어린이들이 꿈꾸는 푸르른 세상은 아니어서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어린이들이 꿈을 이룰 안전한 울타리는 텍사스에도 뉴욕에도 서울에도 없습니다. 그들에게 영원히 안전한 곳은 오직 예수님 품 안입니다. 온 세상 어린이의 진정한 푸르른 꿈은 예수님 안에서만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어린이들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하는 것보다 더 긴요한 어른들의 역할은 달리 없음이 분명합니다.
김성국 목사(미국 뉴욕 퀸즈장로교회)
콜링의 세 가지 신기한 경험
저는 29세 때 목사로 콜링을 받았습니다.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가 있었기에 바로 순종했습니다. 이때 세 가지 신기한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는, 친구들과의 관계가 모두 단절됐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렇게 됐습니다. 당시는 핸드폰이 없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외아들이라 친구라면 사족을 못 쓰고 좋아해 하나님께서 미리 딴짓 못 하도록 손을 쓰셨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은, 암기력을 주셨습니다. 제가 원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마음만 먹으면 암기가 쏙쏙 됐습니다. 지금도 설교할 때 원고를 안 보고 설교하는데 이때 주어진 은혜입니다.
마지막은, 말을 잘 못 하게 만드셨습니다. 원래 말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말을 버벅거리게 됐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대로 말이 술술 나오질 않고 한 템포 늦게 나오는 경우가 반복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말수가 줄었습니다. 희한한 것은 설교할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도 설교 때는 안 그러는데 평상시 말하는 데 남모를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라는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콜링에 대한 각자의 시간과 방식이 다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콜링에는 전적으로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혁 목사(좋은나무교회)
쉼
주님은 우리 삶을 무겁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그 사실을 알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 사실을 모를 때는 주님을 원망하면서 살 때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나보다 더 행복하게 사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나만 왜 이렇게 힘들게 사는지…’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좀 더 행복한 삶에 대한 답을 성경에서 찾고 찾았습니다. 주님은 삶의 무게를 가볍게 만드셨습니다. 먼저는 주님이 삶의 모든 짐을 지셨기 때문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인생의 쉼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다음 매일 회개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십계명을 보며 회개합니다. 끝으로 미워하는 사람에 대해 축복 기도를 하면 우리 인생은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말씀 묵상과 회개, 사랑 실천은 제 삶에 쉼을 가져다 줬습니다.
지성호 목사(서울이태원교회)
어리석은 개미
개미에 대한 한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개미는 집단생활을 하는데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물질은 ‘페로몬’입니다. 페로몬은 개미에게 길 안내와 위험 경보, 먹이 위치 안내, 가족 인식, 산란 억제 등의 역할을 합니다. 개미가 페로몬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 생산성이 일시적으로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신기한 건 페로몬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개미가 엉뚱하게 행동하다가 우연이 새로운 먹이에 대한 경로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 개미의 불확실성과 변동성이 오히려 개미 집단의 새로운 먹거리 개발에 이바지하는 셈입니다. 어리석은 개미가 새로운 길을 찾는 인도자 역할을 하는 것이죠.
우리가 가는 길에 수많은 변수와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삶의 변동성이 무한대로 확장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변동성이나 불확실성이 모두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우리에게 새로움과 성장을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시 23:4)는 말씀과 같이 좀 느긋하게 주님께 맡기고 내일로 발걸음을 옮기면 좋겠습니다.
조주희 목사(성암교회)
오늘 우리에게도 회심이 필요합니다
5월 24일은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가 감리교회 운동을 시작한 ‘웨슬리 회심 284주년 기념일’입니다. 웨슬리는 감리교인의 일생을 ‘하늘 가는 길’이라는 말로 정의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 구원받은 사람답게 평생을 하나님 나라를 향해 전진하는 사람을 꿈꿨던 것입니다. 험난한 세상사 속에서 흔들림 없이 푯대를 향해 걸어가는 성도들의 발걸음은 숭고하기 그지없습니다.
웨슬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나이인 33세에 영적 회심을 경험하고 ‘세계는 나의 교구’라고 외치며 감리교회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평생 말을 타고 교회를 벗어나 시장 광산촌 보육원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무려 40만㎞, 지구를 10바퀴 도는 거리를 다녔습니다. 설교 현장마다 구원을 열망하고 성결한 인생을 다짐하는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웨슬리는 이들을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양육하고자 공동체(속회)를 조직했고, 이들 공동체는 영국 사회 갱신의 동력이 됐습니다. 웨슬리의 활동은 유럽의 많은 나라가 유혈혁명을 거쳐 근대시민사회로 발전한 것과 달리, 영국이 무혈 시민혁명을 통해 근대로 나아갈 수 있었던 중요한 배경의 하나로 꼽히기도 합니다. 오늘 대한민국의 갱신을 위해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도 그리스도인들의 회심입니다.
김종구 목사(세신교회)
내 눈에 있는 들보
어떤 사람이 심은 나무가 크게 자라 옆집 밭에 그늘을 드리웠습니다. 두 사람은 다툼 끝에 랍비를 찾아가서 판단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사정을 듣고 난 랍비는 집에 돌아갔다가 내일 다시 오라고 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랍비는 그 나뭇가지를 잘라야 한다고 판결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뻔한 판결을 내릴 거면서 왜 하루를 기다리라 했을까요. 랍비가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다투는 것을 보다가 우리 집 나무가 옆집에 그늘을 드리운 게 생각나서, 먼저 그 나뭇가지를 잘랐습니다. 내 나무를 내버려 둔 채 남의 나무를 자르라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참 지혜로운 랍비입니다. 지도자는 모름지기 그래야 하지요. 지도자뿐 아니라 성숙한 사람의 자세는 그러해야 합니다. 신앙인은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자신은 온갖 불법과 불의를 저지르고도 법과 정의를 세우겠다고 나댄다면 누가 따르겠습니까.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남에게 말하기를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줄 테니 가만히 있거라’ 할 수 있겠느냐?”(마 7:4·새번역) 지도자는 먼저 자기 자신을 뼈아프게 성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인은 먼저 자기 눈에 들어 있는 들보를 깨달아야 합니다.
서재경 목사(수원 한민교회)
승리가 아닌 인내
배우 알 파치노는 1971년 출연한 영화 ‘백색공포’로 뛰어난 연기력을 인정받아 두 번째 작품에서 명장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이 만든 영화 ‘대부’에 주연급으로 캐스팅됐습니다.
대부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스카페이스’, ‘뜨거운 오후’ 등의 히트작이 연달아 터지며 세계적인 배우가 된 알 파치노는 ‘혁명’이란 영화에 출연했는데 1980년대에 300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제작비를 들였지만 수익은 고작 4천만 원도 되지 않았습니다.
큰 충격을 받은 알 파치노는 자신감을 상실해 이후 한동안 영화에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길고 긴 터널 끝에서 다시 자신감을 회복한 알 파치노는 복귀한 뒤 ‘여인의 항기’, ‘도니 브래스코’와 같은 명작들에 출연했고 전성기라고 평가받던 시절에도 받지 못했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뒤 누군가 알 파치노에게 다시 성공하게 된 비결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승리나, 성공을 말하지 마십시오. 인내만이 전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승리는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성됐습니다. 인내를 통한 연단으로 그 승리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십시오, 아멘!!
주님! 주님을 신뢰함으로 인내하게 하소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때가 이를 때까지 감사와 찬양으로 인내합시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첫 번째인 가정
『나와 아내가 복음을 위해 한국으로 올 때 한 약속이 있다.
“아무리 사역이 성공해도 가정이 잘못되면 부질없으니 가정을 최우선으로 삼고 무엇보다 자녀교육을 철저히 합시다.”
나와 아내는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 또 세계선교를 위해 불철주야로 뛰며 정신없이 바쁜 삶을 살았지만 그럼에도 자녀들과의 시간을 내기 위해서 애를 썼고, 자녀들을 위해 낸 시간에는 온전히 자녀들에게 집중했다.
1973년에 열린 빌리 그래함 한국전도대회 때 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함께 방문한 룻 사모님은 통역을 맡은 나를 공항에서 보자마자 자녀가 몇 명이고 이름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며칠 뒤 다시 어떤 자리에서 사모님이 나와 우리 아이들을 만났는데 그때 정확히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주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신기해하는 나에게 사모님은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아무리 바빠도 자녀들과 시간을 보내도록 노력하세요. 아이들은 금방 자라서 부모 곁을 떠난답니다.”』 (김장환 목사 개인 노트에서 발췌 편집)
가정은 어떤 핑계로도 소홀히 할 수 없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터전입니다. 항상 곁에 있다는 안도감에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행복한 가정을 위해 함께 기도하고 함께 노력하십시오. 아멘!!
주님! 하나님이 허락하신 믿음의 가정을 세우는 은총을 주소서.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을 더욱 늘리며 귀한 신앙을 유산으로 남겨줍시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온전히 집중하는 법
세계 테니스계에 길이 남을 수많은 업적을 남긴 미국의 여자 테니스 선수 빌리 진 킹은 테니스계에 등장하자마자 그랜드슬램 타이틀을 3번이나 따냈습니다.
평생 1번도 쉽지 않은 대기록을 3번이나 해냈기 때문에 대회가 끝나고 많은 언론사들이 비결을 물었는데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언제나 눈앞의 일에 최선을 다해 집중합니다. 침대에서 일어나 최선을 다해 옷을 입고 최선을 다해 경기장에 왔습니다. 테니스화 끈을 묶을 땐 온 신경이 테니스화 묶는 일에 쏠려 있고 경기장에 들어서면 시합에만 집중합니다. 비결이 있다면 그것뿐입니다.”
빌리 진 킹은 이후 12개의 그랜드슬램 타이틀을 더 따내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성 테니스 선수가 됐습니다. 그리고 1973년에 역시 윔블던 대회 우승자인 남자 테니스 선수 바비 릭스와 성대결을 펼쳐 승리해 최초로 스포츠 성대결에서 남자를 이긴 여성 선수로 기록되며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할 업적을 이뤘습니다.
온전한 집중은 지금 눈앞에 있는 일에 모든 오감을 쏟는 것입니다. 드리는 예배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과 평안을 누리십시오. 아멘!!
주님! 모든 열정과 성의를 다해 주님만을 예배하게 하소서.
이번 주에 드리는 모든 예배에 100%로 집중합시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신앙을 설득하는 법
협상전문가인 뉴욕주립대학교의 딘 프리트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로마 제국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포기하게 만들려고 콜로세움에 가두고 사자로 협박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최후까지 찬송을 부르며 굴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죽이겠다고 협박을 하는 것은 결코 현명한 설득의 자세가 아닙니다.”
외국의 한 단열재 시공업체가 간단한 공사로 에너지 효율을 몇 배나 높일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해 집집마다 찾아다녔습니다. 획기적인 기술이었지만 찾아간 가정의 15%만이 공사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안 되겠다 싶었던 시공업체는 전문가에게 컨설팅을 받았는데 그 다음부터는 농구공을 들고 다니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지금 이 집의 모든 창문이 닫혀 있지만 사실 새고 있는 에너지를 모두 합치면 창문에 농구공만한 구멍이 나있습니다.”
단지 설명의 방법만 바꿨을 뿐인데 성공률은 무려 61%로 4배나 높아졌습니다.
어거스틴은 남을 설득하기 위해선 먼저 내가 좋게 변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전도에 가장 좋은 방법은 충만한 은혜로 변화된 나의 삶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날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큰 복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아멘!!
주님! 생명력이 있는 말씀으로 날마다 새롭게 변화시켜 주소서.
복음을 위해 더 좋은 모습으로 변화를 시도합시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장애를 만드는 것
뇌성마비를 극복하고 미국 최고의 방문판매원이 된 빌 포터가 미국의 유명한 강연에 초대받았습니다.
강연이 끝나고 질문 시간에 사회자는 포터에게 “성공에 가장 방해가 됐던 장애가 무엇이냐”고 묻자 포터는 “할 말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포터가 질문을 제대로 못 들었다고 생각한 사회자는 같은 질문을 다시 돌려서 말했습니다.
그러자 포터가 갑자기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도대체 몇 번이나 같은 대답을 해야 합니까? 나에게 장애가 된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 다른 질문을 부탁드립니다.”
빌 포터의 장애는 매우 중증이어서 넥타이는 물론 구두끈도 묶을 수가 없었습니다. 근육도 마비가 심해 하루 8시간 이상을 돌아다니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이런 것들이 일을 하는 데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은 다만 물건을 들고 고객의 집을 방문해서 문을 두드리고 친절하게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을 소개하는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어렵고 힘들다고, 나는 할 수 없다고 가만히 있어선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데에 부족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아멘!
주님! 단점을 단점으로 여기지 않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게 하소서.
사람들이 말하는 나의 단점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봅시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매일의 위대함
중국 명나라 시절 만리장성 동쪽 끝의 마지막 관문인 산해관에 달 편액에 글씨를 쓸 명필을 구한다는 소식이 퍼졌습니다. 그동안 단 한 번도 외적이 침입하지 못해 ‘천하제일관’이라 불린 산해관의 편액 글씨가 희미해졌기 때문입니다.
황제인 신종이 특별히 내린 명령이었기에 중국 각지의 내로라하는 서예가들은 모두 산해관에 모였습니다.
유명세가 아닌 오로지 써낸 글씨만으로 평가해 마침내 한 명의 서예가가 뽑혔는데 놀랍게도 그 사람은 산해관 옆 객잔에서 일하는 심부름꾼이었습니다. 관료들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눈앞에서 글씨를 써보라고 했고, 남자는 붓도 들지 않고 옆에 있는 걸레에 먹을 적셔 단숨에 편액에 쓰인 ‘천하제일관’과 똑같은 글자를 써냈습니다.
도대체 어디서 서예를 공부했는지 한 관료가 묻자 남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만 30년을 일했습니다. 일을 하며 저 글씨가 보일 때마다 재미삼아 손가락으로, 행주로 따라 그리다보니 어느 순간 저 글씨만큼은 똑같이 그릴 수 있게 됐습니다.”
하루에 단 한 말씀이라도 삶 속에 실천을 하다 보면 조금씩이라도 예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하루에 말씀 한 절씩이라도 실천해 예수님의 발자취를 최선을 다해 따라가십시오. 아멘!!
주님! 아무리 힘들어도 주님을 닮아가는 일을 포기하지 않게 하소서.
아침에 묵상한 말씀을 하루 동안 반드시 실천합시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상황을 바꾸는 지혜
중국 위나라의 문후왕이 주변국을 침략해 큰 땅을 새로 얻었습니다.
당시 관례상 새로운 지역의 제후는 형제 중 한 명으로 봉해야 했으나 의심이 많았던 문후왕은 형제를 견제하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제후로 봉하려고 했습니다. 문후왕이 고집대로 아들을 제후에 봉하자 대신들은 “현명한 선택이십니다”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하지만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던 임좌가 앞으로 나왔습니다.
“아우를 봉해야 할 자리에 아들을 봉하시니 어찌 어진 임금이 되실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격분한 문후왕은 당장 임좌를 옥에 가두고 큰 벌을 내리겠다며 역정을 냈습니다. 분을 참지 못한 문후왕은 임좌 옆에 있던 책황에게 물었습니다.
“그대도 내가 어진 임금이 아니라 생각하는가?”
“아닙니다. 어진 임금이십니다. 임금이 어질면 신하가 곧고 바른 소리를 할 수 있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방금 전 임좌와 같이 곧은 말을 하는 신하가 있다는 것은 폐하가 어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문후왕은 크게 기뻐하며 임좌를 복귀시킨 후 실수를 사과했습니다.
진정한 지혜는 위기를 모면할 뿐 아니라 더 좋은 상황을 만듭니다. 옳은 일을 행할지라도 느헤미야처럼, 다니엘처럼 상황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을 높이 드러내는 지혜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아멘!!
주님! 주님이 주신 사랑과 평안을 세상에 전하는 성도가 되게 하소서.
옳고 그름을 떠나 상황을 더 좋게 만들 지혜를 주님께 구합시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관심의 에너지
1970년대 영국의 한 대기업에서 업무효율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연구팀은 가장 평균적인 부서를 하나 골라 다양한 변화를 줬습니다. 모든 직원들을 인터뷰하며 성향을 분석한 뒤 먼저 주급을 올려줬습니다. 그리고 조명의 색상과 밝기를 다양하게 조절했고, 점심 메뉴나 회사 내의 음료 배치 같은 생활환경 개선에도 공을 들였습니다. 그리고 각 항목을 조절할 때마다 직원들을 찾아가 느낀 점과 개선점을 물었습니다.
정확히 무엇 때문에 업무효율이 올랐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실험에 들어가기 전에 비해 눈에 띄게 높은 성과가 나타났습니다. 조금 더 정확한 자료를 위해 연구팀은 이제 반대로 혜택을 하나씩 줄여나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모든 혜택을 원래대로 돌렸는데도 업무효율은 거의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추가로 진행된 조사를 통해서 부서의 업무효율을 높였던 것은 다름 아닌 직원들을 향한 ‘관심’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사랑의 표현과 진심어린 후원은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새로 나온 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야 하는 교육부서 어린이와 청소년, 그리고 헌신하는 청년들에게 작은 관심이라도 지속적으로 표현함으로 교회의 좋은 에너지를 순환시키십시오. 아멘!!
주님! 작은 표현과 배려가 한 영혼을 살린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소서.
교회에 적응이 필요한 성도라면 누구라도 먼저 다가가 관심을 표현합시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난 엄마가 내 엄마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샬롬! 지난밤은 잘 쉬셨는지요? 이번 한 주간도 내내 건강하고 평안하시길 빕니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방해하는 7가지 상식’ 중 ‘충돌을 회피하는 것은 결혼생활을 망친다.’입니다. 다툼을 회피하는 부부, 잦은 다툼을 하는 부부, 갈등이 생기기 전에 대화로 중간지점을 찾는 부부 등, ‘다툼’을 대하는 태도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답니다. 이 중에서 최고의 방법은 없고, 부부 둘 모두에게 ‘가장 잘 맞는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난 엄마가 내 엄마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어느 날, 둘째 딸이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 한마디가 하루 종일 제 귓가에서 맴돌았고 저를 기분 좋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지금 10대인 딸 둘을 키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질풍노도’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참 순하고 착하고 순종적인 딸들입니다. 어릴 때부터 아이들이 저를 힘들게 한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진심으로, 저는 ‘행복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그런 우리 아이들을 보고 ‘어떻게 하면 그렇게 키울 수 있느냐?’고 칭찬하면, 저는 부끄러운 마음에 그저 ‘아빠를 닮아 그렇다’고 말하곤 합니다.
사실 고백하자면, 저는 어린아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아기들을 보면 안고 싶어 하거나 그저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젊은 여성들을 보면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굴만 쳐다봐도 울기 일쑤고, 말이 안 통하는 아기들이 저는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피곤한 존재였습니다. 그런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결혼해서 만 25세에 첫아이를 낳았습니다. ‘내가 아이를 낳으면 잘 키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미처 하기도 전에, 저는 엄마가 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어렸기 때문에, 아이를 양육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선택과 판단이 틀리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아이를 양육했습니다.
가정은 ‘많은 시간을 함께 생활해야 하는’ 첫 공동체이기에, 아이도 어느 정도는 저에게 적응해야 함을 인식시키고, ‘무한한 사랑을 가진 완벽한 엄마의 모습이 아닌, 제 모습 그대로, 있는 모습 그대로’ 아이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완벽한 엄마인 척 흉내 내다가 지치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아이가 혼란스러워할까?’하고 생각하니, ‘가장 나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엄마도 사랑받아야 하는 소중한 존재이고, ‘때론 기쁘기도 하고 때론 슬프기도 한’ 평범한 인간임을 아이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건강한 가정을 이루자’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저는 ‘아이가 어릴수록 깊은 감정의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엄마들은 ‘아이가 너무 어려서’ 깊은 대화는 시도조차 안 하고 좀 더 성장하기를 기다립니다. 아이가 어려서 단순하고 유치해도, 진심을 담아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서 대화할 경우, 그 엄마는 자연스레 ‘아이의 제일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말 못하는 아이의 작은 신호에도 반응해주고, 아이의 기쁨과 슬픔을 공유하는 엄마가 된다면, 신기하게도 어느 새 아이도 자라면서 엄마의 마음을 잘 이해해주는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출처; 가정과 건강, 변경은/ 샌프란시스코)
물론, 엄마도 인간입니다. 하지만, 인간이하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할 겁니다. 한 번이라도 그런 모습을 자녀한테 보여주게 된다면, 그 이전의 모든 노력과 수고가 수포로 돌아갈 염려가 많습니다. 제 주변에는, ‘아이가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마치 아이가 모든 말을 다 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이와 대화를 하던 부모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 그 아이는 보통 아이들보다 훨씬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나이 또래 남자아이들이 보여주는 억지나 투정도 없을뿐더러, 부모인 어른들과 제법 대화다운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짜리 어린이가 아빠와 엄마의 친한 친구처럼 지내고 있습니다.(물맷돌)
[아이들도 ‘엄마 최고’라 말하고, 남편도 그녀에게 ‘세상에는 훌륭한 여성들이 많이 있지만, 당신은 그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여성이오.’하고 칭찬한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지만, 두려운 마음으로 여호와를 섬기는 여성은 칭찬을 받을 것이다. 그녀는 자기가 행한 일에 대한 보상을 받고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것이다.(잠31:28-31, 현대인)]
‘다음 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
샬롬! 밤새 안녕하셨는지요? 5월의 세 번째 주말아침입니다. 오늘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방해하는 7가지 상식’ 중 세 번째로, ‘해주는 것만큼 받을 수 있다’입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속담도 있지만, 부부관계에서는 ‘내가 상대를 위하여, 상대가 나를 위하여 이만큼을 해줬다’는 계산이 생기면 ‘불행의 시작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고로, 모든 일은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마음에서 자발적으로 이뤄지는 것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죽음의 중지’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제목부터 저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젊은 환자나 안타까운 사연이 있는 환자가 숨을 거두면, 의사인 저는 ‘사망선언’을 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죽음의 중지’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입니다. 제목에 이끌려 책을 집어든 저는, 첫 문장을 읽고 다시 한 번 호기심을 느꼈습니다. ‘다음 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
어느 나라에서 어느 순간 죽음이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테라스에 국기를 걸어서 ‘죽음의 중지’를 반겼습니다. 아픈 사람도 있고,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도 있고, 교통사고도 일어나지만, 그러나 그 누구에게도 죽음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물론, 노화가 진행되어도 죽지 않았습니다. 불로(不老)가 아닌 불멸(不滅)의 삶이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죽어야 할 사람들 때문에 골치가 아파지고, 세상은 일대 혼란에 휩싸입니다. 누군가는 간절히 죽음을 바라고, 누군가는 죽음이 있는 나라로 도피했습니다. 그리고 소설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을 맺습니다. ‘다음 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은 조사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똑같지만, 두 문장을 읽는 독자들의 마음은 판이하게 다릅니다. 첫 문장이 반가웠다면, 마지막 문장은 절망스러웠습니다.
한 설문조사에서 ‘평균수명이 100 세로 연장되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고 대답한 사람이 43.3%라는 결과를 본 적이 있습니다. ‘오래 사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는 조사결과가 의미하는 것은 뭘까요? ‘대다수 노인의 우울한 노년생활’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는지요? 늙음은 똑같은데 죽음은 늦춰진 시대, 기나긴 노년을 보내야 하는 우리는,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혼란과 갈등’을 그대로 경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폐암수술을 한 60대 중반의 아들이 말기식도암 환자인 90세 아버지를 모시고 오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출처; 천 번의 죽음이 내게 알려준 것들, 김여환 / 호스피스 병동 의사)
아시다시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장수(長壽)’가 축복이던 때가 있었습니다. 거기에다가, 무병(無病)하고 장수(長壽)하기를, 사람들은 소망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조금은 부족한 자식들’ 대신에 당신 스스로가 회갑(回甲)을 준비해서 잔치를 열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회갑을 맞이하기 전까지, 집안에서 돌아가신 분들 중 60을 넘기신 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누가 죽어도 곡(哭)하는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앙을 가진 이들은 내세(來世)를 믿기 때문에 ‘이별의 눈물을 흘릴지언정 울지 않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래서 ‘장례식’이라 하지 않고 ‘고별식(告別式)’이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조금 더 발전해서 ‘천국으로 보내드린다.’고 해서 환송식(歡送式)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신앙인이 아니어도 우는 경우가 극히 드뭅니다. 그것은 살만큼 살고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살만큼 사는 것’을 ‘고종명(考終命)’이라고 해서 ‘호상(好喪)’으로 여기지 않습니까?
아무튼, 이제는 장수(長壽)가 축복이 아니라 불행으로 여기는 ‘이상한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장수가 불행(不幸)이 아니라 옛날처럼 축복(祝福)으로 여기려면, 죽는 그 순간까지 이 세상과 자식들에게 뭔가 도움을 주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오나가나 ‘거추장스런 존재’가 아니라, 이 세상과 자손들에게 ‘유익을 끼치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김형석 교수가 우리의 진정한 사표(師表)가 아닌가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김 교수님은 지금도 글을 쓰시면서 꾸준히 책을 내시고 있습니다. 요양원에서 사는 것도 아니고, 자식들한테 얹혀살지도 않습니다. 당신이 번 돈으로 가정부를 두고 혼자 지내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교수님한테도 가장 힘든 게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고독(孤獨)이랍니다.(물맷돌)
[인생살이 기껏해야 한 70년, 건강하게 살아도 80년인데, 그 인생살이 고통과 슬픔뿐, 덧없이 지나가고 쏜살같이 빠르게 날아갑니다.(시90:10)]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던진 말은 칼날이 되어
샬롬! 지난밤 좋은 꿈 꾸셨는지요? 오늘도 내내 행복한 하루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방해하는 7가지 상식’ 중 두 번째는 ‘공통된 취미가 있어야 좋다’입니다. 물론 좋은 점도 있지만, 취미를 공유하면서 서로 비난하거나 부정적인 대화가 오간다면 오히려 없는 편이 낫답니다. 그러니까, 공통된 취미의 유무가 아니라, 부부간 소통방식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방문을 잠근 것은 동생 자신이었습니다. 무한경쟁 사회에서 끊임없이 문을 두드린 동생. 이력서를 수백 번 고쳐 쓰고 공무원준비로 3년을 보내면서, 이름 앞에 비정규직, 임시직, 인턴 딱지를 붙이면서. 그런데도 응답하지 않는 세상 앞에 동생은 무력해졌습니다.
큰언니가 자리를 마련해준 회사에서 동생은 ‘3년간 괴롭힘을 당했다’고 합니다. 다닌 지 2년이 된 무렵부터, 눈에 띄게 어두워지고 말라갔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동생이 힘들어하는 줄 몰랐습니다. 엄한 엄마 앞에서, 동생은 투정 한 번 부리지 못했습니다.
동생이 회사를 그만두고 우울증치료를 받을 즈음, 우리는 큰언니 지인을 통하여 그간 동생이 당한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동생에게 그만 또 실수했습니다. “아무 것도 아냐. 나약하게 굴지 말고 훌훌 털어버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던진 말은 칼날이 되어 동생 심장에 꽂혔을 겁니다. 동생의 눈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그날, 동생은 방문을 잠갔습니다.
처음엔 ‘막내로 곱게 자라서 그렇다. 배고프면 나올 거다’라고 했지만, 동생은 미동도 없었습니다. 방문을 뗄 생각까지 했다가, 상황이 악화될 것 같아서 이도 저도 못했습니다. 우리 속이 답답한 게 먼저였습니다. 이런 우리의 태도가 동생에게 얼마나 폭력적으로 느껴질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문득 동생이 저에게 한 말이 생각났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떠오르면, 물잔에 검은잉크가 퍼지듯, 방안이 온통 어두워지면서 숨이 막힌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문을 열면 더 큰 어둠이 쏟아질 것 같아 무섭다.’고 했습니다.
햇살이 좋은 날, 부모님과 동생이 지내는 집을 찾았습니다. 오래된 벽지를 뜯어내고, 장판도 새로 깔았습니다. 커튼도 밝은 색으로 바꿨습니다. 어둠이 더 이상 동생에게 덤벼들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알알이 노란 옥수수도 삶았습니다. ‘동생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인데, 왜 잊고 있었을까?’하고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동생의 방문이 살짝 열렸습니다. 그 틈으로 옥수수를 건네니, 동생이 말없이 받았습니다. 복숭아같이 포실하던 동생 얼굴이 푸석하고 거뭇해서 낯설었습니다.
30여 년 전, 동생이 세상의 문을 열고 나온 날을 기억합니다. 엄마가 만삭의 배를 쓰다듬으며 저에게 말씀했습니다. “성남아, 동생 보러갈까?” 저는 맨발로 뛰어나가 동네가 떠나가게 자랑했습니다. “동생 나와요!” 동생이 다시 세상을 향하여 문을 여는 날, 저는 어둠을 헤치고 나온 동생을 대견스레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문을 연 곳에 빛이 가득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출처; 좋은생각, 김성남 / 경북 안동시)
제가 중학교를 졸업했을 땐 구로공단도 없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먼 친척 되시는 분에게 취직을 부탁했더니, ‘공고 졸업장이라도 있어야 어디든 들어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고등학교 갈 형편이었으면 취직부탁을 했을까요? 그러다가 서울에 있는 직업소개소에서 양계장을 소개받아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물을 제 때 주지 않았다’고 따귀만 한 대 맞고 쫓겨나야 했습니다. 물이 있으면, 왜 안주었겠습니까? 물이 충분치 않아서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근본적인 책임은 주인에게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저는 따귀 맞은 값 1만 원을 받아들고 양계장을 떠나오게 되었습니다.(물맷돌)
[그들이 대답했다. ‘아무도 우리에게 일자리를 주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그들에게 말했다. ‘당신들도 나의 포도밭에 가서 일을 하시오.’(마20:7,쉬운성경)]
한국은 더 이상 ‘고래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가 아니다!
샬롬! 지난밤 편히 주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오늘 하루, 건강하고 행복한 날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뉴스를 들어서 아시겠지만, 국내 20세 이상 성인의 30%가 지난해 ‘고혈압 진단’을 받은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고혈압과 합병증을 예방하려면 ‘음식을 싱겁게 먹고, 매일 30분 이상 운동해야 하며, 스트레스를 피해서 평온한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고 합니다.
“한국은 더 이상 고래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가 아니다. 싸움의 승패를 가르는 역할을 할 제3의 고래가 됐다.”
영국의 국제관계학교수인 ‘파르도’ 박사가 최근 이런 내용을 골자로 한 책을 펴냈습니다. 제목은 ‘새우에서 고래로’입니다. 이 책은 ‘지난 1천년 내내, 한국은 열강들 사이에서 눈치껏 운신해야 했다’고 그 배경을 설명합니다. 특히 한반도를 차지하려고 노리면서 문화를 자기네 것으로 바꿔버리려던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시달려온 처절한 과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등이 터졌고, 또 언제 다시 터질지 몰라, 노심초사하던 새우가 스스로 고래가 되었다’고 ‘파르도’ 교수는 말합니다. ‘반도체, 자동차, 선박, 배터리, 휴대폰 등을 발판으로 세계 10대 경제대국이 되었고, 지난 10년간 방탄소년단을 앞세운 K팝음악과, 기생충을 필두로 한 영화 등, 놀라운 문화 소프트파워로 몸집을 키워서 거대한 고래가 됐다’는 겁니다.
그는 한국역사를 중국·일본에 ‘침탈당했던 시대’와, 언어·음식·관습·정체성이라는 뿌리를 되찾은 본질적 ‘한국다움의 시대’로 구분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현재의 경제·문화적 성공의 근간은 일찍이 600여 년 전의 탁월했던 지도자 세종대왕의 한글창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합니다. ‘그림문자인 한자(漢字)를 버리고, 소리를 내는 입 모양을 바탕으로 만든 한글이 한국문화에 대한 접근성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설명도 곁들입니다.
‘파르도’교수는 ‘한국이 경제력·소프트파워·군사력 등 다양한 수단을 결합해서 계속 몸집과 근력을 키워나가야 한다.’면서, 앞으로는 미국·중국 사이에서 등이 터지는 게 아니라, 양쪽이 서로 눈독을 들이면서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좋은 패’를 쥐게 될 것이라고 역설합니다.
그리고 책 말미엔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고 썼습니다. “밝은 미래가 한국을 기다리고 있다. 한국은 이미 제자리를 찾았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 자리를 다져나갈 것이다.”(출처; C닷컴, 윤희영의 News English)
아시다시피,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게 마련입니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짙게 마련이고, 빛을 받는 건물이 클수록 그 그림자도 또한 크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요컨대, 우리나라가 이만큼 부강한 나라가 되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는 데만 77명(공식적인 숫자, 비공식적으로는 200명이 넘는다고도 함)이나 목숨을 잃었고,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큰 힘이 된 월남전쟁에서 죽은 사람이 5천명이라고 합니다. 이분들의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려면, 오늘 우리가 진실로 한국인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그 희생에 보답해야 할 겁니다.(물맷돌)
[사랑은 여기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시고, 우리의 죄를 속하여 주시려고 희생제물이 되게 해주신 것입니다.(요일4:10,표준새번역)]
엄마에게도 예의(禮儀)를 지켜야 합니다.
샬롬! 어젯밤은 편안히 잘 쉬셨는지요? 오늘 하루도 내내 건강하고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오늘부터 ‘행복한 결혼생활을 방해하는 7가지 상식’에 대하여 알아보려고 합니다. 먼저, 성격문제가 결혼생활을 망친다는 생각은 잘못된 거랍니다. 인간은 누구나 완벽하게 합리적일 수 없으므로, ‘자기 성격에 어떠한 문제도 없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본인이 가진 문제점을 인식하고, 그것이 커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엄마와 사이좋을 필요가 없다’는 말을 ‘엄마와 관계가 나쁜 상태여도 괜찮다.’고 1차원적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엄마를 전지전능한 신으로 여기지 마라’는 의미이자, ‘엄마에게도 예의를 지키라’는 주문입니다.
얼마 전, 대학후배와 이런 대화를 주고받은 적이 있습니다. “밖에 있는데, 엄마가 자꾸만 전화해요.” “네가 집에 들어갈 시간이 지났으니까, 그런 게 아닐까?” “알아서 들어갈 건데, 왜 연락해요.” “엄마는 무작정 기다려도 되는 사람이 아니야. 부모에게도 예의를 지켜야 하지 않을까?”
모녀가 전쟁을 일으키는 이유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연락하지 않는 딸과 기다리는 엄마’입니다. 스물이든, 마흔이든, 엄마 눈에 딸은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존재’입니다. 밖에서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따로 살 경우에는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연애라도 하면 남자친구랑 사고라도 치는 것은 아닌지, 별의별 걱정을 다합니다. 그러므로 딸들에게는 엄마를 안심시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문자나 전화로 안부만 들려줘도, 엄마들은 안심합니다. 저는 이 작업을 ‘엄마 안심시키기’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엄마에게 직접 이야기하기가 쑥스럽다면, 문자나 메신저로 다음과 같은 짧은 메시지라도 남겨야 합니다.
“엄마, 요즘 저 이렇게 살고 있고, 잘하고 있어요.”
‘못 미더운 딸’에서 ‘한시름 놓은 딸’로 신분상승이 이루어지는 것을 체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출처; 혼자 잘해주고 상처받지 마라, 정신과전문의 유은정 박사)
우리 사회가 ‘과년한 딸이 밤늦도록 돌아다녀도 안전한 세상’이라면, 엄마들이 그토록 노심초사하지 않을 겁니다. 유튜브를 보면,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 비교적 안전한 사회’라고 합니다. 하지만, 종종 우리나라에서도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안 좋은 범죄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엄마들은 ‘자신의 귀한 딸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봐’ 걱정하고 염려합니다. 그리고 ‘엄마에게도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말은, ‘딸에게도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말과 ‘함께 사용해야’ 합당하지 않겠는가 싶습니다. 또 하나, ‘딸들도 언젠가는 곧 엄마가 된다.’는 사실을 늘 유념해야 할 겁니다.(물맷돌)
[부모가 자식을 옳게 가르치듯이,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가르치셨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새겨두어라(신8:5,현대어, 표준) 부모들은 자녀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화를 돋우지 말고, 주님의 훈계와 가르침으로 잘 키워야 합니다.(엡6:4,쉬운성경)]
사람을 아끼는 일은 인간이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미덕입니다.
샬롬! 지난밤 푹 쉬셨는지요? 오늘 하루도 내내 건강하고 행복하게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제 책상 위에는 모니터가 세 대 있습니다. 그 중 하나에서는, 시냇물소리와 새소리가 온종일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물론, 유튜브 채널에서 선택하여 듣고 있습니다. 마치 숲속에 있는 기분이 들곤 합니다.
우리네 삶은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람이 일평생 살면서 천금 같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지난해에 가까운 지인이 암 진단을 받아 큰 수술을 받았는데, 그야말로 생사를 넘나들며 많은 고비를 넘겼습니다. 다행히 몇 달 후, 그는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어느 모임에서, 그는 자신이 건강을 회복한 소감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는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다.”라는 명언을 인용하면서,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고 하루하루를 건강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일깨워주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아껴야 할 것들이 참 많습니다. 사도 바울도 “세월을 아끼라!(엡5:16)”라고 강조하면서, ‘우리가 살아있는 날 동안, 우리에게 주어지는 많은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중요한 것들이 많은데, 공기와 물, 음식과 옷, 그리고 살 집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갖추어져 있다고 해도,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며 사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아낀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모릅니다. ‘사람이 사람을 아낀다.’는 것은 상대방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아낀다.’는 것은 상대를 지켜주고 보호하는 것이며, 상대가 힘들어할 때에 어깨를 내어주면서 위로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아낀다.’는 것은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며 배려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아낄 때에 상대는 시련과 고통을 이겨내면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아끼는 일’이야말로 인간이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미덕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출처; 가정과 건강, 박재만 / 편집국장)
이사야서 64장 7절에는 ‘우리는 모두 당신의 작품입니다(공동)’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2장 10절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공동, 표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리 유명한 조각가가 만든 작품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작품보다 더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어떤 사람을 대하든지 그가 바로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겁니다.(물맷돌)
[여호와여, 당신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진흙, 당신은 우리를 빚으신 이, 우리는 모두 당신의 작품입니다.(사64:7,공동번역)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엡2:10,표준새번역)]
기분 좋은 한마디에, 마법처럼 그 순간이 따뜻해집니다.
샬롬! 어저께 주일은 은혜로이 잘 보내셨는지요? 오늘부터 시작되는 한 주간도 내내 건강하고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지난 토요일, 아침산책을 나섰는데, 어디선가 달콤한 향기가 날아와 제 코끝에서 맴돌았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니, 저만치에 있는 아카시아꽃이 활짝 피어있었습니다. 그곳의 그 아카시아나무는, 그 꽃향기를 뿜어내어 오가는 사람들의 기분을 상쾌하게 하고 있으니, 그 존재가치를 충분히 발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를 등원시킨 후,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청소도 싹 했겠다. 커피 내리고 고구마 구워먹으면서 책 읽어야지.’ 고요한 시간을 보낼 생각에 “룰루랄라~.” 콧노래가 절로 나왔습니다.
마침 승강기도 1층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버튼을 누르고 문이 열리자, 청소부 아주머니가 보였습니다. 아주머니는 키가 닿는 데까지 손을 뻗어 벽을 닦고 있었습니다. 저는 반짝거리는 바닥에 발자국이 찍힐까봐 까치발을 하고서 올라탔습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마스크를 쓰고 높은 곳을 닦던 아주머니는 숨을 몰아쉬며 인사를 받아주었습니다. 우리 집이 있는 9층까지 올라가는 동안, 아주머니는 쉬지 않고 벽과 거울, 손잡이를 닦았습니다.
“여사님 덕분에 승강기에서 빛이 나요.” “네? 정말요?”
승강기를 탈 때마다 든 생각을 무심결에 말하자, 아주머니 얼굴에서 화색이 돌았습니다. “저는 일한 지 얼마 안 돼서 제가 잘 못하는 줄 알고….” “네? 전혀 아닙니다! 얼마나 깨끗한데요. 진짜예요.”
마침 문이 열려서 내리려는데, 아주머니가 말했습니다.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집에 들어와 커피를 내리는 동안, 아주머니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습니다. 별것 아닌 저의 말을 기쁘게 받아주어 고맙고, 지금까지 아주머니에게 이런 말을 건넨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이 슬프기도 했습니다.
기분 좋은 한마디에, 마법처럼 그 순간이 따뜻해집니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지만, 잘 쓰지 않는 이 마법을 서로 마음껏 주고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출처; 좋은생각, 이은주 / 인천 연수구)
‘말 한 마디 했다’고 해서 세금을 물리거나 경찰이 잡아갈 리 만무합니다. 오히려, 이러한 ‘칭찬과 격려의 말’이 ‘서로의 기분을 좋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칭찬에 너무 인색합니다. 격려보다는 비난하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악플로 인하여 세상을 등지는 일까지 생겨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루 한 마디 이상, 칭찬과 격려하는 일에 마음을 기울였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봅니다.(물맷돌)
[올바르게 살아가려고 애쓰는 자는 그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칭송받으나, 못된 짓만 일삼는 자들은 그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때마다 ‘죽일 놈’이란 소리만 들으리라.(잠10:7,현대어) 죄가 있어서 벌을 받고 참으면 무슨 자랑거리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선한 일을 하다가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을 만한 일입니다.(벧전2:20,현대인)]
먼저,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샬롬! 지난 밤 편히 쉬셨는지요? 5월 들어 두 번째 주말인 오늘 하루도 내내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뽀빠이처럼 시금치를 먹으면, ‘힘을 세게 해줄 뿐 아니라, 치매도 예방해준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답니다. 이런 효과는, 시금치를 비롯한 푸른 잎줄기채소들에서 생겨난다고 합니다.
만약 우리 딸에게 좋은 아빠를 찾아줄 수 있다면, 제가 적당한 남편감을 찾을 수 있다면, 그래서 그런 남자와 함께 할 수 있다면, 우리 세 식구는 정말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저는 ‘우리 딸이 무엇을 필요로 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정말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아빠 찾아주기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제가 ‘엄마’라는 사실을 깜빡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딸을 데리고 어떤 큰 파티에 갔던 날, 제가 ‘엄마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났습니다. 거기서 어떤 남자와 웃고 떠드는 동안, 저는 그만 딸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무대 위 밴드가 ‘미아를 찾고 있다’고 방송을 했습니다. 정말입니다. 저는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였습니다.
알코올중독 치료센터에서 일할 때, 제 나이가 26세였고, 딸의 나이는 네 살이었습니다. 거기서 청소년 문제를 상담하는 동료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저에게 ‘세상의 모든 싱글맘이 들으면 좋을 법한 교훈’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녀는 ‘경력과 약혼자 혹은 배우자나 미래에 대하여 괜한 걱정일랑 집어치우고 지금 당장 아이에게 집중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말하기를 “아이에게 어린시절은 한 번 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자기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데이트하는 것을 미루고 100% 엄마 되기에만 몰두하겠다.’고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저는 이런 식의 조언이 싫었습니다. ‘미혼모’라는 딱지가 가슴에 붙어있는 저로서는 죄의식을 자극하는 말이었습니다. 딸에게 아빠를 찾아줄 수만 있다면 완벽해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데이트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제 곁을 스쳐 지나가는 나쁜 남자 때문에 번민만 가득할 뿐이었습니다.
딸에게 아빠 후보를 소개하고 모두 함께 밤을 보내는 ‘아름다운 가정’을 꿈꾸었지만, 남자들이 그리는 그림에는 딸아이가 없었습니다. 청소년 문제를 상담하는 그 동료는 말하기를 “남자들은 당신을 새로운 상품이나 게임쯤으로 욕망할 뿐이다. 그들이 떠나면 평생 지워지지 않을 흔적만 남는다. 그러니, 먼저 부모가 되라.”고 했습니다.(출처; 행복한 사람은 있는 것을 사랑하고, 불행한 사람은 없는 것을 사랑한다, 레지나 브렛 / 칼럼니스트)
위의 글은 반드시 ‘미혼모’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자녀를 둔 부모라면, ‘깊이 생각해볼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레지나’는 딸에게 좋은 아빠를 찾아주려고 했는데, 직장동료는 그녀에게 ‘먼저 당신이 좋은 엄마가 되어야 한다.’고 충고했습니다. 요즘 우리 주변에는 ‘자식에게 더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에서 돈벌이에 나서는 엄마들이 적잖습니다. 그래서 엄마 역할을 제대로 못해주게 되니까, 그 대신 돈으로 그 빈자리를 메꾸려하고 있습니다. 아, 그러나 지금 자녀에게 꼭 필요한 것은?(물맷돌)
[자녀는 주께서 주신 선물이며 상급으로 주신 축복이다. 젊었을 때 낳은 자식은 용사의 손 안에 있는 화살 같아서, 그런 화살이 많은 사람은 행복하다.(시127:3-5,현대인) 아버지가 꾸짖고 야단쳐도, 우리는 그를 따르고 존경합니다. 그렇다면, 참되게 사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는 하나님의 시련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히12:9,현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