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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열정을 맹세하는 아가씨,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어. |
Unfortunate Coincidence
Dorothy Parker
By the time you swear you're his, |
불행한 우연의 일치
도로시 파커
저는 그의 것이에요, 라고 맹세하며 |
어떤 총각이 한 아가씨를 열렬히 사랑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연애 편지를 보냈다.
사랑하는 그대에게
나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오. 나는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아무리 높은 산도 나를 막지 못할 것입니다. 아무리 높은 산도 넘고, 아무리 거칠고 넓은 사막이라도 건너서 갈 것이오. 그리고 아무리 깊은 바다라도 건너서 당신에게 갈 것입니다.
추신 : 그런데 어제는 약속 장소에 나가지 못해서 미안하오. 어제는 비가 와서 우산도 없고 해서 나가지 못했오.
이 총각의 사랑고백은 진실일까, 거짓일까? 대부분 사람들은 이 고백을 거짓으로 여길 것이다. 그 이유는 뻔하다. 그는 사랑의 두 미덕, 성실과 정직을 어겼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에게 우선순위가 있다면 1위부터 9위까지 사랑이 자리해야 한다. 숨쉬는 것을 포함하여 나머지 모든 일들은 10위권 밖으로 밀려나는 것이 맞다. 진실로 사랑한다면, 뜨거운 열정과 간절한 소망으로 사랑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는 말이다.
남연옥 작, <연가>
세상에는 거짓으로 넘쳐난다. 어릴 적에는 어른들의 말씀을 진리로 여겼다. 그러나 자라고 난 후 그 말씀들 중 상당수가 진리가 아님을 알았다. 그리고 서서히 거짓된 말과 행동에 익숙해졌다.
거짓이 진실로 호도(糊塗)되는 오늘날, 사랑 또한 거짓과 공허함으로 가득차 있다. 연인은 상대에게, 자식은 부모에게, 제자는 스승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며 뒤로는 스스로 그 약속을 저버린다. 이십여 년 전에 <루브:Luv>라는 제목의 연극이 상연된 적 있었는데, 그 제목은 어긋나고 그릇된 사랑을 뜻하는 말이었다. 진실된 사랑(Love)이 사라진 세상에서 사람들은 온통 거짓된 사랑만을 주고 받는다는 요지였다.
결혼식장에서 신랑 신부가 마주 서서 사랑의 맹세를 할 때, 그 숭고한 선언의 순간을 가슴 깊이 새기는 이들이 얼마나 있을까? 무릇 맹세나 서약은 칼날이 달린 포승줄과 같아 그 사람을 묶어 두다가 언약을 어겼을 때 그 차가운 날로 찌르는 무서운 것인데, 축복의 제단 앞에 서 있는 두 남녀는 그 엄정한 맹세를 고이 새기기 커녕, 설레고 행복한 마음으로 하늘을 날고 있다.
최근 종영된 드라마 중에서 인기몰이를 하지는 못했지만, 꽤 구설수에 올랐던 것이 있었다. 바로 <미스 리플리>이다. 그 드라마의 제목은 '리플리(Ripley) 증후군'에서 비롯되었는데, 이 불치병에 빠지면 개인의 사회적 성취욕이 크지만 사회적으로 꿈을 실현할 방법이 없어서, 가상의 공간을 만들어 거짓말을 일삼다가 결국 그 세계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다고 한다. 이 증후군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영화가 <리플리>였는데, 과거 르네 클레망의 걸작 영화 <태양은 가득히:Plein Soleil>를 현대판 버전으로 만든 것이었다. 여기에서 주인공 톰 리플리(Thomas Ripley)는 어느 부호(富豪)의 요청으로 아들을 이탈리아에서 데려오는 일을 맡았는데, 정작 그 곳에 도착해보니 별천지의 상류사회가 펼쳐져 있었다. 그는 부호 아들 디키(Dickey)의 돈으로 방탕한 생활을 하며 자신도 상류사회의 일원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계약기간이 만료되고 디키가 자신을 부담스러워하자, 리플리는 우발적으로 디키를 죽인다. 그런 후에 자신의 장기인 흉내내기와 거짓말, 서명 위조를 이용해 본격적으로 그의 인생을 살기로 결심한다. 영화는 결국 그의 모든 범죄 행각이 드러나면서 법의 심판을 받는 것으로 끝나는데, 이 줄거리를 다시 방송작가가 각색하여 드라마로 꾸민 것이다.
극에서 미스 리플리로 분(扮)한 이다해(극중 인물은 장미리)는 재산이나 학벌도, 운도 따르지 않은 평범한 여인이었으나 성공에 대한 집착과 욕망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어느 날 우연히 거짓말을 하게 되었는데, 그 순간 아무리 노력해도 열리지 않던 문들이 그 거짓말 하나로 활짝 열리는 것을 경험하였다. 그녀는 그때부터 자신의 미모와 거짓 스펙을 이용해 호텔 경영인이나 재벌의 아들들을 유혹하였다. 그녀의 과거는 철저히 숨겨졌고, 뭇 남성들은 그녀의 신비로운 자태를 보고 무릎을 꿇었다. 드라마의 결말은 물론 그녀의 악행이 밝혀지고 죄값을 치루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드라마의 영상과 여러 대사들은 한 여성의 치밀한 거짓 행세가 얼마나 감쪽같이 세상과 남성들을 속일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어 흥미로웠다.
송광연 작, <나비의 꿈>
장미리가 만난 남성들이 쉽게 유혹에 빠진 이유는 그들 스스로가 욕망과 집착의 노예였기 때문이었다. 즉 당사자 두 사람이 욕망의 화신이 되어 '텅 빈 가슴'의 거짓 사랑을 했던 것이다. 진실된 사랑은 무쇠도 녹이는 힘을 가지고 있지만, 가식으로 물들여진 사랑은 서로를 해치고 세상을 어둡게 하는 것이다.
드라마의 인물 장미리가 의도된 거짓으로 세상을 풍미했다면, 소설 <보봐르 부인>과 <크로이체르 소나타>에 등장하는 연인들은 낭만된 거짓 사랑에 취했다가 파멸을 맞고 있다.
구스타브 플뢰베르(Gustave Flaubert) 원작의 소설 <보봐르 부인:Madame Bovary>에서 여주인공 엠마(Emma)는 시골 의사의 아내로, 요사이로 치면 유복한 여사(女史)였다. 그녀는 남편의 상당한 수입으로 살림도 살고 가끔 사치도 부렸다. 그러나 정직하고 성실한 남편과 함께 사는 것은 무미건조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녀는 날마다 낭만적 사랑을 꿈꾸었다. 그녀가 소망한 욕망은 자발적인 것이라기보다 소녀시절 수도원의 기숙학교에서 읽었던 수 많은 낭만 문학을 통해 쌓여왔던 것이었다. 그녀는 단 하루라도 좋으니 이 숨막히는 상황을 벗어나 자유롭고 황홀한 사랑을 누리고 싶었다. 소설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독백한다.
뭐라 해도 그녀는 행복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 인생에 대한 이 불만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의지했던 모든 것들이 차례로 무너지는 건 무슨 까닭일까? 하지만 만일 어딘가에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면, 열정적이고 품위있는 성격, 천사와 같은 시인의 마음 하늘을 향해 애조띤 축혼가를 부르는 청동 하프같은 마음, 이런 것들을 지닌 사람이 있다면, 그러나 그런 사람이 있다면 왜 만나지 못했겠는가? 아! 모든 것은 다 ㄷ거짓이다! 어떠한 미소에도 권태의 하품이 숨겨져 있고, 어떤 환희에도 저주가, 어떤 쾌락에도 혐오가 숨겨져 있다. 황홀한 키스에조차 충족되지 못한 더 큰 쾌락의 욕망에 입술에 남는 법이다.
보봐르 부인은 결국 남편 몰래 외간남자를 끌어 들여 정사를 벌였다. 병원의 수입도 빼돌려 정부(情夫)와 놀아나는 데 소요하였다. 순진한 남편은 그 낌새를 눈치채지 못하였고, 여인은 점점 욕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었다. 무심했던 시골 의사 샤를르 보봐르가 진상을 파악했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사태로 번져 있었다.
톨스토이(Leo Tolstoy)의 소설 <크로이체르 소나타:The Kreutzer Sonata>는 어긋난 질투로 아내를 살해한 남편의 이야기인데, 그 전반부는 변호사였던 포즈드느이셰프(Pozdnyshev)가 아내를 만나 결혼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변호사가 연인을 만나 결혼을 맹세하는 장면은 매우 낭만적이고 즉흥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느 날 달빛 아래 보트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녀 옆에 앉은 저는, 몸에 꼭 달라붙는 스웨터를 입은 그녀의 날씬한 몸매와 물결 치는 머리에 도취되어, 제가 찾고 있던 여인이 바로 이 사람이라고 결정했습니다. 그날 밤 그녀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가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저조차도 고상한 것들만 생각하고 있다고 느꼈으니까요. 하지만 실제로는 스웨터와 곱슬머리가 그녀에게 잘 어울렸을 따름이었고, 가까이서 하루를 보낸 뒤 좀 더 가까워지고 싶었던 것 뿐이었습니다. 저는 환희에 차서 집으로 돌아온 후 그녀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여인이기 때문에 아내로서 손색이 없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구혼을 했지요.
고켈(Alfred Gockel) 작, <로망스>
얼마 지나지 않아 포즈드느이셰프는 여인과 맺은 충동적인 결혼에 대해 깊이 후회한다. 그리고 아내를 멀리하며 바깥으로 돌아다닌다. 상류사회에서 사교적인 모임이 있을 때 아내는 피아노를 연주한다. 하루는 그녀가 바이올리니스트 투르하체프스키(Turhachevski)와 다정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열등감과 질투심에 사로잡힌다. 그의 질투감이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을 때, 그는 아내를 칼로 찔러 죽인다. 사랑을 전제로 하지 않은 낭만적 약속이 결혼생활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결국 파탄에 이르게 한 것이다.
프랑스의 문예 비평가 르네 지라르(Rene Girard)는 그의 저서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인간의 욕망은 타자에 의해 매개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여러 소설들을 두루 섭렵한 뒤 그와 같은 결론을 내렸는데, 소설의 인물들은 대상을 직접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중개를 통해 욕망을 일으키며, 작품의 비극적 결말은 거개가 다 '비추어진' 욕망의 환상에 빠진 연인들이 한 자락 열정의 불길에 휩싸여 충동적으로 맺어진 탓으로 보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욕망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타자에 의해 매개되고 촉발되었다고 한다. 가령 주인공 A가 B를 직접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C의 욕망에 자극받아 B를 사랑하려는 욕망을 갖는다는 식이다. 자신 스스로 사랑을 택한 것이 아니라 주위의 환경과 상황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상대를 사랑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모든 낭만적 고백은 무책임한 거짓이며 무의식적 자기기만이 된다.
소설 속에서 보봐르 부인은 사춘기 소녀 시절의 막연한 열정을, 변호사 포즈드느이셰프는 청년시기의 환상적인 사랑을 꿈꾸었다. 그러나 몽상과 현실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몽상이 깨어지고 열정이 사라지니 사랑 또한 증발해 버렸다. 성급하고 철없는 사랑의 맹세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빠져든 것이다.
실제로 많은 커플들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환상과 착각의 가면을 씌운 채 바라본다고 한다. 내 남편이고 나의 여인이니, 내가 선택하고 결정한 사람이니, 후회하거나 미련을 두기보다 상대방의 허상을 하나 만들어 두고 그것을 바라보며 위안을 삼는다는 말이다. 허상으로 꾸몄기에 서로가 내뱉는 맹세의 말은 거짓이 되어 허공으로 흩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낭만을 담보로 한 사랑은 항상 그 결말이 좋지 않다. 그러나 청춘들은 지금도 결혼을 낭만으로 여기며 그릇된 출발을 하고 있다.
하정우 작, <피에로>
결혼을 앞둔 이들은 보다 현실적이고 이성적으로 결혼생활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저 눈이 아름답게 보이기에, 잘 생기고 심성이 너그러워 보이기에 덜컥 그이(그녀)와 결혼해서는 안될 일이다. 허상을 보고 결혼했기에 거짓 사랑의 맹세만 부도수표처럼 난무할 뿐이다.
위 시의 제목 <불행한 우연의 일치>는 사랑하는 이들이 서로 우연하게 거짓 사랑의 맹세를 나누는 모습을 표상한다. 시의 주인공은 두 사람이지만, 시적 화자(관찰자 및 조언자)는 나이 지긋한 여인이다. 세월의 풍파를 겪은 여인은 청년들이 나누는 사랑의 언어들이 부질없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두 사람을 불러 넌지시 충고하며 타이르고 있는 것이다. 진실한 사랑에는 책임도 따르고 고난을 함께 짊어질 각오도 필요한데, 서로가 각자에게 달콤한 말만 내보이고 있으니, 여간 걱정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불행은 겪기 전에는 깨닫지 못하고, 깨달은 후에는 이미 늦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하랴? 충동으로 맺어졌든 신의와 성실로 합쳐졌든, 사랑이라는 아름답고 귀한 끈으로 두 사람은 평생 같이 해야 한다는 것을.
110910 영원한 열정을 맹세하는 아가씨, 당신.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