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기 위해서는 먼저 죽음이 있어야 한다. 예수는 십자가형으로 십자가에서 죽는다.
먼저 십자가형에 대해 알아보자. 단순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구나. 가 아니라 십자가형에 대한 의미에 대해 알아야겠다. 왜 예수가 십자가형으로 죽었는지 그 이유는 분명하다.
십자가형은 로마 제국의 권위에 도전한 반역자를 응징하기 위해 사용한 극형 방식이었다. 가장 끔찍한 사형이라고도 한다. 그 방식을 사용한 이들, 제국 권력과 종교 권력이 결탁한 공권력에 의한 처형이었다.
예수를 이 십자가로 처형한 이유는 예수의 복음은 당시 구조와 힘에 굴복하지 않은 예수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지배 체제에 도전이었고 정치와 종교 권력자들에게 체제 전복적 위협으로도 여겨졌을 거다.
그러니 예수 십자가는 단순히 예수를 죽이기 위함만은 아니다. 그냥 예수가 마음에 안 들고 죽여야 했다면 더 쉬운 방법도 많았을 거다. 그것도 조용하고 깔끔하게. 단순 살인이 아닌 십자가형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이다. 십자가형은 처형 현장을 군중에게 오랜 시간 노출한다. 그러니 군중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게 된다. 이전 예수의 영향은 공포와 두려움으로 다 사라지게 만들고 로마 제국에 대한 두려움과 힘만 드러난다.
그렇게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이 죽음을 해석해야 할까?
예수는 우리 죄 때문에 죽었다.
'너희는 예수를 십자가에서 죄인으로 처형했지만, 우리는 십자가에서 처형된 그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 그는 죄가 없다. 죄 없는 그를 죽인 너희가 진짜 죄인이다.'
예수를 죽인 자들, 죽게 만든 이들은 분명 있다. 그렇다고 그들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사고로 자살로 죽은 수많은 청년 노동자들의 죽음을 그 기업들에게만 화살을 돌릴 수는 없다. 그 구조 속에 살아가는 우리도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으니. 간접 책임이 있고 그래서 우리 죄 때문에 죽었다고, 우리가 죄인이라고 하는 거다.
예수 십자가와 부활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 십자가는 십자가 죽음이 목적이 아니다. 십자가에 죽기 위해 왔다고 하면 십자가 이전 시간, 사건들은 전부 의미 없는 것으로, 쇼에 불과하다. 게다가 유다를 욕할 이유도 없다.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하기 위한 역할이었을 뿐이지.
예수는 복음을 전하고 민중을 만나고 새 삶을 전해주는 명을 몸으로 삶으로 살아가다 순교한 희생제물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죽음은 희생이고 순교지 대속이 아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는 거다. 대속이란 누군가 하나는 죽어야 하는 것이니 죽어야 하는 누군가를 대신하여 죽은 게 아니라 우리가 예수를 죽인거고 우리 죄 때문에 죽은 거다. 희생과 대속은 다르다. 구분이 필요하겠다. 예수 죽음은 대속이라고 할 수 없다.
부활에 대해서도 역사냐 비유냐 따지기보다 그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역사라고 한다면 그 사건을 사진등으로 기록했다는 것이다. 비유로 간주한다면 역사적 사실에 의존하지 않는 비유로 이해해야겠다. 팩트 여부보다 그 메시지가 중요한 것이고 예수 부활도 메시지이니 의미가 퇴색되지 않아야 한다. 그러니 역사인가 비유인가 논쟁은 유보하고 그 의미에 관해 논쟁하고 생각하자.
당시 예수로 인해 무언가 운동이 일어났다. 그 창시자는 처형 당해 죽었지만 그 운동은 예측을 깨고 소멸하지 않고 계속 이어져 나갔고, 지금에 와서는 로마에까지 퍼지게 되었다. 그 운동이 지속성을 갖고 계승되어 온 것이다.
이 지속성은 권력자들의 예상, 의도와는 아주 반대되는 것이다.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이유도 이 운동을 억제하고 자신들의 의도대로 하기 위함이었으니 예수는 죽었지만 완전한 실패라고 볼 수 있겠다.
부활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예수가 실제로 부활 했다는 순수한 믿음도 필요하겠다. 다만 요한1서에서 말하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한 말씀을 그 예수가 맞는가? 하는 의문은 생긴다. 예수의 죽음과 요한1서 기록 시기는 시간 차이가 꽤나 있으니. 그리고 부활한 예수에 대한 이야기들을 다 직접적 예수로 이해하는게 맞는가?
부활을 육신이 죽었다 다시 살아난다는 의미에 갇히지 않는다면 어떨까. 요한이 말하는 보고 듣고 만진 것은 직접적 예수가 아니라 2세 3세 예수를 만난 것으로. 예수의 운동은 이어지고 있으니 예수로 살고 있는 이들을 만나 예수를 만났다고 하는 거라면 베드로에게 나타났다는 것도 베드로에게서 예수가 드러났다고 볼 수 있겠다.
이렇게 육체적 부활이 아닌 그 사람에게서 예수의 모습이 드러남을 예수가 부활 했다고 하는 거다. 예수의 얼, 정신을 배우고 아는 이들이 삶으로 예수적 삶을 살아갈 때 말이다.
예수는 다시 내려 오지 않았고 대신하여 성령이 오셨으니 예수를 믿었던, 따랐던 사람들이 예수의 정신으로 사는 것을 봄으로 예수의 부활을 말하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강의에서 다루지는 않았지만 이런 맥락에서 부활과 같이 영생도 비슷하게 이해하면 될 거 같다. 부활을 직접적 예수의 육신 부활이 아닌 예수 정신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보고 부활을 말하고 해석했듯 영생도 그런거라고.
내 몸이 죽지 않고 썩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아닌 우리가 받은 하늘 뜻, 공통된 명, 얼을 함께 살아가는 동지, 지체들이 이어 살아감으로. 자녀들과 후대에 전해지는 계승을 보며 영생이라고 해석하면 되겠다. 내가 죽어도 이 뜻이 이어지고 이 뜻을 몸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있을테니 그들을 통하여 영원히 사는 삶인 것이지.
성경을 보며 역사적 사실이 맞는지 아닌지 따지고 논쟁하기보다 내가 믿기로 선택한 것을 몸으로 삶으로 살아가면 그게 믿음인 거다. 역사적 예수란 자기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그 삶에서 예수를 살려 지금! 여기! 내가 예수로 살아가면 그것이 부활이고 역사겠다. 그러니 믿음과 행함은 분리되지 않는다. 믿음은 행함으로 드러나고 몸으로 삶으로 살아가는 것 통해 증명된다.
결국 부활은 몸의 부활이 아닌 내가 예수로 새롭게 사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전의 내가 죽고 시간과 공간의 새로운 배치. 관계의 새로움. 삶의 방식이 새로워지는 것으로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된다면 이게 부활이 아닐까.
첫댓글 훌륭한 요약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