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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다임강연 시리즈: 문학] 2017 계승과 변화를 서듭해온 인류 지성사에 대한 성찰: <임꺽정>, 한국어의 보고 ☞ 강연자: 유종호 전 연세대 석좌교수
유종호 교수는 ‘『임꺽정』에의 초대 - 작가ㆍ시대ㆍ작품’이라는 강연문 제목대로 대하소설 『임꺽정』의 작가 벽초(碧初) 홍명희와 작품 그리고 그 행간을 둘러싼 사회사에 대해 놓치기 아까운 에피소드들과 함께 살핀다. 단도직입적으로는 벽초가 “해방 이전의 문화적 사회적 실천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가장 소중한 성취를 보여주었다”고 평가하며, 또한 그 작품에 관해서는 익히 광범하게 동의된 대로 “『임꺽정』에 나오는 어휘는 놀랄 만큼 풍요하고 그 자유로운 구사는 경탄에 값한다”라는 점을 새삼 절감했다고 이야기한다. 끝으로는 “궁금증, 울음, 웃음이라는 서사의 세 가지 요소를 『임꺽정』은 넉넉하게 가지고” 있어 무엇보다 “성공적인 서사”라 할 수 있는 만큼 필독을 권장하고 있다.
열린연단 강연 (패러다임 32강) – 유종호 전 연세대 석좌교수 유종호 : 문학작품이기 때문에 제가 일부러 인용을 많이 했어요. 그 인용을 보는 것이 정말로 여러분들이 실제로 작품을 한번 읽어보도록 하는 데 있어서 제일 좋은 방책이다 이렇게 생각해 인용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또 이 작가의 어휘 중에서, 정말 왜 우리가 이 책 『임꺽정』을 ‘한국말의 보고’라고 하느냐 하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예를 좀 들었어요. (…) 다만 우리가 한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를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고 특히 작가가 살고 작품이 이루어진 시대를 이해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라는 생각을 해 주변 상황을 좀 적었습니다. (…) 정다우면서도 뭔가 오래 눌러 있을 수 없는 곳이 고향이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되는데요. 이번에 『임꺽정』이라고 하는 고향에 돌아가서 한번 둘러보고 나서는 이 작품은 정말로 단순한 작품은 아니고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면 모두 다 한번씩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지 않고 한국어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외람된 일이다 이런 느낌을 가졌어요. 그래서 그런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열린연단 토론 (패러다임 32강) – 이남호 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 문광훈(사회) : 물론 중요한 게 여러 가지겠지만 벽초 선생이 그야말로 험난한 시절에, 1950년 이전 식민지 시절에 보여주었던 사회정치적인 실천과는 다른 문화적 실천의 가능성을 당 시대의 어떤 분야 안에서 어떻게 대응하면서 행했는가라는 문제의식은 오늘날 우리 문학이나 철학이나 또는 인문학 일반을 행하는 사람에게 아주 중요한 고민의 좌표축이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남호 : 첫 번째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임꺽정』이라는 작품의 양가적 성격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흔히 『임꺽정』과 관련하여 반봉건 의식이나, 민중 의식, 평등 의식을 지적합니다. 유종호 선생님께서도 아까 직접 예를 들어서 설명해주셨듯이 작품의 곳곳에서 신분 사회를 비판하고 평등을 내세우는 주장들이 나옵니다. (…) 이는 분명히 『임꺽정』의 소중한 장점일 것입니다. 그러나 『임꺽정』의 많은 부분에서 봉건적 요소, 반민중적 요소, 사대부 의식, 양반 의식 같은 것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 그러나 제 생각으로는 바로 이런 모습이 임꺽정이라는 인물을 이념의 껍데기가 아니라 생생한 현실적 존재, 인간다운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요약하자면 『임꺽정』의 양가적 성격은 모순된 두 측면을 보여준다기보다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습에 대한 우월한 성찰이며 이 점이 『임꺽정』이라는 작품의 큰 장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강연자 소개 유종호 (전 연세대 석좌교수)
토론자 이남호 / 고려대학교 교수
강연2017.11.11. 강의록 전문 보기 『임꺽정』에의 초대 - 작가ㆍ시대ㆍ작품
그때 시절에 사람이 잘나면 화적질밖에 실상 하잘 것이 없었지요. 더구나 천민이라고 남이 모두 손가락질하는 백정계급에 속한 자이리요. 백정을 벼슬을 줍니까, 백정을 돈 모으게 합니까. 아무 바라볼 것이 없게 되니까, 체력이나 지략이 남에게 뛰어난 자면 도적놈밖에 될 것이 없었지요. 불가사의한 후광 그는 동시대인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일화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것은 전승이 되고 전설이 되어 그에게 어떤 신비감을 부여하였다. 그는 육당, 춘원과 함께 “조선의 삼재사(三才士)”라는 칭호를 젊어서부터 누렸다. 그의 부친은 경술국치 당시 금산 군수직에 있었지만 망국이 된 상황에서 살아 있음의 치욕과 부질없음을 통감하고 자결함으로써 순국의 길을 택하였다. 부친은 어떠한 경우에도 친일 행위를 금하는 당부를 했다고 알려져 있고 실제로 그는 일제 말기에도 떳떳하지 못한 언행을 남겨놓은 바가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반드시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자녀들을 학교를 보내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었다. 당대의 관습으로 열세 살에 조혼한 그는 열여섯에 장남을 낳아 스스로 형제와 같은 부자라고 적고 있는가 하면 아들이 쓴 책에 서문을 얹어놓고 있는 드문 사례를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해방 직후 미군정청에서 국립서울대학교안을 내놓았을 때 그는 학계나 문화계의 중평이라며 서울대 총장 후보로 언론에서 거론되기도 했다. 그가 이렇다 할 학문적 저작을 보여준 바 없었고 세칭 좌파 진영에서 내세운 김태준(金台俊)이 일단 옛 경성대학의 졸업생임에 반해서 이렇다 할 학벌이 없는 처지여서 그런 중평을 얻고 있다는 것이 더욱 불가사의하게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다. 이번에 여러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전기나 상세한 자료를 통해서 그의 삶과 사람됨을 접하고 나서 그에 대한 전설적 세평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큰 보람이다.(주1) 적어도 해방 이전의 문화적 사회적 실천에 있어서 그는 누구보다도 가장 소중한 성취를 보여주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양심의 위기로 가득 찬 구차한 시대에 개명된 지식인으로서 항시 깨어 있는 양식과 의지로서 자신을 지켰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작품과 사람은 별개라는 말을 하는 수가 있고 그것이 억지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벽초는 문학적 성취에 상부하는 인품의 위엄을 지켜낸 희유한 사례이다. 그의 장남 홍기문은 해방 전에 발표된 「아들로서 본 아버지」라는 이색적인 글에서 “총괄해 말한다면 우리 아버지는 용감하게 나아가지는 못하나 날카롭게 보고 굳게 지키는 분이다”라고 적고 있다.(주2) 용감하게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은 정치적 사회적 실천에서 치열하게 저항하고 투쟁하지 못했다는 뜻인 것으로 보인다. 날카롭게 보고 굳게 지킨다는 것은 당시 상황에서 매사를 정확히 파악 인지하고 또 자기 신조나 생각을 굳게 지킨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것이 결코 혈육 간의 두둔이나 안으로 팔 굽히기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1948년 4월 이른바 남북협상으로 알려진 “남북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중도 노선으로 알려진 민주독립당 대표의 자격으로 평양에 간 이후 아마도 그쪽 실세의 요청으로 눌러앉게 되고 8월에는 서울에 있던 가족들이 평양으로 이사해 합류하였다. 1950년 5·30 선거를 앞둔 시점에 차남 홍기무(洪起武)가 내려와 간첩 혐의로 서울서 체포되어 기사화되었던 것을 기억한다. 북에서 계속 고위직에 머물러 있던 그는 1968년 향년 만 80으로 세상을 떴다. 동시대의 고명한 인문적 지식인 육당, 춘원, 호암 문일평, 민세 안재홍, 위당 정인보보다 장수하였던 그의 북에서의 구체적 행적과 처신에 대해서는 객관적 자료가 없으므로 거론하는 것은 적정하지 않다고 생각되어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파란만장한 역사의 풍파에 쉴 새 없이 노출되고 평균수명이 낮았던 20세기 한반도에서 괴테만큼의 수명을 누린 것은 하나의 인간적 위업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견고한 구식 한문 공부 1) 홍명희 연보 1888년, 1세 충북 괴산군 괴산면에서 출생. 1905년, 18세 중교의숙 졸업하고 귀향하여 『춘추』 등 사전을 공부하고 일인 부부에게 일어 회화 배우다. 1918년, 31세 상하이, 베이징 체류 후 7월 귀국, 귀향. 위의 연보에서 유소년기의 사항은 편집자의 끈질긴 요청으로 쓰긴 했으나 투옥 관계로 중단된 42세 나던 1929년에 쓰인 「자서전」을 근거로 하여 요약된 것이다. 1919년 향리 괴산에서 손수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반포하고 만세 시위를 주도하여 체포된 후 출옥하여 서울로 솔가하기까지의 역정을 담고 있다. 출옥 이후 서울에서의 1920년대 및 1930년대의 행적은 단편적으로나마 이왕에 널리 알려져 있었으나 그 이전의 세목은 그렇지가 않다. 위의 축약 연보는 유일 작품 『임꺽정』의 작가로서 또 당대의 대표적 인문 지식인이자 민족 지도자로서의 벽초의 인간적 문학적 형성기를 일목요연하게 하기 위해서 적어본 것이다. 소설은 그해 정월 노는 때에 대고모부의 집에서 『삼국지』 한길을 빌려다 놓고 첫 권서부터 두서너 권은 집안 노인 한 분과 같이 보았다느니보다 배웠고 그 다음 십여 권은 나 혼자서 보았다. 물론 개가 머루 먹듯한 것이라 모르는 것이 아는 것보다 더 많았지만 “조자룡탁쟁상마(趙子龍綽鎗上馬)”를 신이 나서 보았다. 이십 권 책을 건성으로 다 본 것은 닭의 귀신날이 지나서 다시 글을 배우기 시작한 뒤라 선생님에게 고만 보라는 말을 들은 걸로 기억한다. 그 뒤로는 길래 소설 보기에 반하여 『논어』 『맹자』보다도 『동주열국지』 『서한연의』 등속을 탐독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집에는 소설서류가 별로 없을 뿐이 아니라 어른 몰래 보는 까닭에 열네 살에 서울 올라온 뒤에 친구들에게서 빌려다 본 것이 많았었다. 그때도 문리(文理) 부족한 나로서 『수호지』 『서유기』 더구나 『금병매』 같은 것을 어떻게 보았던지 의자궐지(疑者闕之)도 정도가 있지 전문궐지(全文闕之)에 무슨 맛이 있었던지 그래도 밥 먹을 줄 모르고 본 것이 장관의 일이다.(주4) 선생에게서 배우는 사서(四書)보다도 순한문으로 된 중국 소설을 탐독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소년기의 탐독이 뒷날 『임꺽정』을 집필할 때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임은 말할 것도 없디. 더구나 어려서 읽은 문학책일수록 기억 속에 확고하게 각인되는 것이 보통이어서 그 형성적 영향력은 막강한 것이었다고 추정된다. 그의 인문적 지식인으로서의 소양과 고전에 대한 조예가 요즘으로 하면 초등학교 상급반 무렵의 나이에 능통한 경지에 이른 한문 실력에 기본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점에서 그는 육당, 호암, 위당과 비슷하고 춘원, 김동인, 염상섭 등 문인들과 크게 다름을 알 수 있다. 행간의 사회사 유년기의 한문 공부는 가정 내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친척 어른 혹은 독선생이 처음엔 지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러 학생을 집단적으로 가르친다는 의미에서의 공교육 기관에서의 공부는 10대 중반에 처음으로 받게 된다. 1902년 15세에 다녔다는 중교의숙(中橋義塾)(주5)의 숙감(塾監)은 조부가 상없지 않게 여기는 인물인데 그 숙감이 조부에게 권하고 부친이 안식이 있는 터여서 조부에게 말하여 다니게 되었다. 거기서 일본어와 아라비아 숫자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 학교에 만 3년 다녀서 1905년 일어과(日語科)를 졸업하고 귀향하여 일본인 부부에게 일어 회화를 배우게 된다. 당시 괴산에는 양잠의 이익 됨을 알고 일인 내외를 양잠 교사로 데려온 이가 있었다. 이 일인 내외가 양잠 일을 마치고 귀국하게 되었을 때 부친에게 말하여 집에 데려다 두고 일어를 연습하였다. 불과 몇 달 만에 3년 배운 결과가 나타나 일어로 어지간한 말은 서로 통하게 되었다. 집에 있는 마테오 리치의 곤여전도(坤與全圖) 병풍 덕택으로 왜국의 존재를 일찌감치 알았고 일어까지 배웠으나 가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일인 내외가 도쿄가 공부하기 좋다는 말을 해서 구경 갔다 올 생각이 났다. 일인이 양잠한 고치를 일본으로 팔러 간다고 해서 따라갈 생각이 났다. 여기 전후 사정은 사회사적으로도 매우 흥미 있는 대목이어서 자서전 대목을 직접 인용해본다. 공부를 간다면 아버지부터 선선히 허락할는지 모르겠고 구경 갔다 온다면 증조모까지도 구태여 말리지 아니할 것 같아서 구경 간다고 거짓말하고 동경에 가서 떨어져 있어보려고 속으로 작정하고 일본 사람에게만 미리 이 뜻을 통하여 두었다. 내 딴은 층층시하에 허락받기가 어려워서 꾀를 쓰려고 하였던 것인데 우리 아버지가 잠깐 구경만 하고 오느니 몇 해 동안 공부를 해보라고 말씀하고 시골 있어서 증조모의 허락도 아버지가 맡아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동경 유학길을 떠나게 되었다.(주6) 부친 홍범식은 경술국치를 당해서 목매어 자결한 인사이다. 널리 알려진 그러한 일화로 보아 우리는 수구적이고 완고한 한말의 인물로 상상하기 쉽다. 쉽게 말해서 최익현 흐름의 유자(儒者)를 연상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안식이 있는 인물이어서 아들이 중교의숙 다니는 것을 허용한다. 뿐만 아니라 일본 구경을 바라는 아들에게 이왕 가거든 공부를 하라고 권한다. 매우 개명된 안식 있는 명문가 출신의 목민관임을 알 수 있다. 벽초가 중교의숙에서 일어과(日語科)를 나왔다는 것도 흥미 있다. 병조참판을 지낸 조부 홍승목조차 “멧돝 잡으려다 집돝 잃을까” 걱정이 된다면서도 중인 출신의 역관(譯官) 희망자나 공부하던 외국어 공부를 허용한 것은 눈여겨볼 만하다. 일본 유학을 떠나기 전 향리에서 일인 내외에게서 일어 회화 교습을 받았다는 것도 공식 역사에서는 접하지 못하는 사회사적 사실이다. 직접 사정을 들어보는 것이 좋겠다. 이때 우리 동리에 양잠의 이익을 일찌감치 깨달은 사람이 있어서 일본 사람 내외를 양잠 교사로 데려왔었다. 서울서도 일본 사람 구경하려면 진고개를 가야만 하던 때라 괴산 같은 시골 구석에서는 이 일본 사람 내외가 여편네와 아이들의 구경거리가 될 만큼 희귀한 손이었다. 우리 아버지가 나의 일본말 공정을 시험하여보려고 그 내외를 불러다 놓고 따라다니는 통사를 제치고 인사하라고 말씀하셨다. …… 나는 아버지 앞이라 서서 있고 그 내외는 꿇어 앉아 있었다. …… 그 일본 사람 내외가 양잠 일을 마치고 가게 되었을 때 아버지에게 말씀하고 집에 데려다 두고 일어를 연습하였더니 불과 몇 달이 아니 지나서 3년 배운 결과가 나타나 어지간한 말은 서로 통하게 되었다.(주7) 1905년 18세 때 얘기로 러일전쟁이 끝난 해다. 그런데 충청도의 오지인 괴산에서 양잠에 눈을 떠서 일인 내외를 불러들여 양잠법을 배웠다는 것은 내게는 놀랍게 생각되었다. 벽초는 이 일인 부부를 따라 부산서 윤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 오사카(大阪)에 도착하여 며칠을 체류한 뒤 도쿄로 간다. 그런데 동행한 일인이 일본 도착 후 태도가 돌변하여 비위가 상하는데 그 장면은 흡사 소설 읽는 것 같다. 동행한 일본 사람이 현해를 건너온 뒤로 전에 없던 ‘기미’니 ‘고오궁’이니 하는 홀한 언사를 써서 비위가 상하는 데다가 윤선에서나 여관에서나 누구든지 붙들고 이야기한다는 것이 한국이 어떠하다, 한국 사람이 어떠하다, 우리의 있는 흉 없는 흉을 늘어놓으니, 옆에서 듣기 괴란한 때가 많아서 그 사람과 단 둘이 있을 때 낯을 붉혀가며 말다툼한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주8) 도쿄에서 타이세이(大成)중학 재학 중 3년에서 4년으로 승급할 때 벽초는 1등을 하였다. 《만조보(萬朝報)》(주9) 에서 각 학교 우등생을 소개했는데 그의 사진이 났다. 《만조보》 독자인 일본인 순사가 4호 제목의 작은 기사를 발견하고 당시 태인(泰仁)군수였던 부친에게 보여주어 몹시 기뻐한 부친이 자세한 편지와 함께 당신의 사진을 보내주었는데 그것이 “종생 잊히지 아니할 자랑의 하나이다”라고 적고 있다. 그러니까 한일합병 이전에 벌써 충남 시골에도 일인 순사가 주재하고 있었다는 얘기이다.(주10) 합병 이후 상하이에서 체류했던 벽초는 독립운동을 위한 재정적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남양으로 가서 싱가포르에 머무르게 된다. 그 시기에 함께 있던 인물로 김진용(金晋鏞)과 정원택이 있었다. 그중에 김진용은 고무원을 사두었거나 석광(錫鑛)에 투자한 듯한 흔적이 보이는데 이러한 사실을 좀 더 세밀히 천착하면 우리 동포의 해외 활동이 의외로 넒은 것임이 드러날지도 모른다. 경술국치 이후 우리 동포로서 중국, 노령(露領), 만주에서 활동한 이들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연구되어 있지 않아서 이 분야의 연구가 우리 사회사를 밝히는 데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의 형성 벽초가 역사소설 유일 작품을 제외하고 당대 현실을 다룬 어떠한 허구 작품도 남기지 않았고 비허구 산문은 주로 우리 역사와 문화에 관한 것임을 상기할 때 그의 관심이 중국 고전과 소설 또 우리의 옛 책으로 한정되어 있을 것이라는 예단을 부지중 갖게 한다. 그래서 서양의 근대 문학에 대한 폭넓은 독서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뜻밖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는 당대의 어느 문인 작가보다도 서양 근대 문학에 대한 식견과 조예를 가지고 있었다. 젊은 시절에 그는 가인(假人) 혹은 가인(可人)이란 아호를 쓴 적이 있는데 그것이 바이런의 『카인』에서 유래한 그 음역이라는 것은 시사하는 바 많다. 그는 스스로 문예서류를 난독(亂讀), 남독(濫讀)하여 학교 교과를 등한히 하고 육적(肉的) 사상 중독과 신경쇠약으로 중학을 그만두었다고 적고 있다. 일본의 자연주의 문학을 탐독했음을 실토하고 있기도 하다. 그의 독서는 다독에 그치지 않고 속독으로 특징지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는 기록이 있다. …… 이대용군과 한방을 쓴 일이 있었다. 어느 날 낮에 루딘의 번역인 『부초(浮草)』를 사두었다가 저녁에 첫머리 몇 페이지를 넘기었을 때 당시 유학생계의 쟁쟁한 인물 몇 사람이 이군을 찾아와서 나도 그 사람들은 아는 관계상 독서를 중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이 보고 싶어 좀이 쑤시는 판인데 그 인물들의 기염 경쟁은 그칠 줄을 몰랐다. 주인 측 이군이 단아한 사람인 만큼 부수근청(俯首謹聽)하는 까닭에 기염의 도수가 오르고 내리지 아니하였다. 그 사람들보다도 이군이 미웠다. 참다 참다 못하여 한 손에 양등(洋燈)을 들고 한 손에 『부초(浮草)』를 들고 뒷간으로 들어가서 조금 조금 하다가 『부초(浮草)』 한 권을 다 마치고 한참 동안 오금이 붙어 고생하다가 나와서 본즉 기염 인물들은 다 돌아가고 이군이 자리 깔고 누워서 전무후무의 굉장한 뒤라고 조롱하였다.(주11) 투르게네프의 첫 장편인 『루딘』은 비교적 짧은 작품이다. 그러나 장편임에 틀림은 없다. 그것을 변소에서 앉아 다 읽었다니 굉장한 속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지로 『부초(浮草)』는 1897년에 간행되었는데 번역자는 일본에서 구어체 소설의 창시자라 불리는 작가이다.(주12) 이러한 속독을 가능케 하는 것은 골똘한 탐독성과 관련되는 것이지만 그의 특출한 재능이었다고 생각된다. 그의 광범위한 독서는 그가 속독에 능했으리라는 것을 추정케 하면서 그의 실토를 뒷받침한다. 「청빈낙도하는 당대 처사(處士) 홍명희씨를 찾아」란 기사에서는 어떤 종류의 책을 많이 보느냐는 질문에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것도 없고 신문에 소설이라고 쓰는 바람에 그저 손에 쥐는 대로 읽게 된다면서도 “저기 발자크 전집이 있지요마는 얼마 전에 그것은 다 읽어보았지요. 지금 동서양을 물론하고 모두들 부르조아 작가의 최고봉으로 쳐서……”라고 답변하고 있다.(주13) 실제로 그 당시 일본서 발자크 열기가 있어서 그 전집이 간행된 바 있다. 또 “그는 내가 상해에 갔을 때는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안 그레이』 『옥중기』 같은 것을 읽고 있었다. 그에게는 악마주의적인 것을 좋아하는 성미가 있었다”는 춘원의 대목이 있다. 『옥중기』 는 『심연으로부터(De Profundis)』의 일역판 제목이다. 톨스토이 서거 25년을 기념하여 쓰인 글에서 그는 『부활』을 높이 평가하면서 종교와 교훈을 내포하고 있는 작품들이 객관적 실재성이 없다면서 루소의 『에밀』이나 페스탈로치의 『주정군의 안해』를 그 사례로 들면서 『부활』의 가독성을 말하고 있다. 그 글에는 다음 같은 대목이 보인다. 감옥생활에 체험이 많은 크로포트킨이 아메리카합중국 감옥을 두 번째 구경하였을 때 제도의 개선된 점이 많아서 나중 알아본즉 『부활』의 영향이더라고. 이것은 이 소설의 공효(功效)의 일단이라 끝으로 붙이어 밝혀둔다.(주14) 톨스토이 사전ㆍ사후에 나는 그의 작품의 일본역이 있는 줄 안 것은 거진 다 구하여 보았다. 『간이성서』까지 톨스토이의 작품이라고 사서 보았으니 다른 작품은 말할 것도 없다. …… 본지 만지한 『안나 카레니나』는 17, 8년 전에 한번 잘 보았고 보기를 원하던 『전쟁과 평화』는 12, 3년 전에야 비로소 보게 되었는데 그나마 다른 사정으로 흥미 없이 보고 말았다.(주15) 내가 황진이에게 흥미를 느낀 것은 만석중과 황진이와의 관계가 아나톨 프랑스의 타이스와 비슷하기 때문이었는데 그 관계를 그린 점으로 상허의 것은 좀 불만이야…….『사씨남정기』같은 것은 특색 있는 작품이지. 말하자면 『엉클 톰스 캐빈』과 같은 작품이야.(주16) 위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그냥 읽었다고 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맥락에서 비교 검토하면서 독서 경험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독서량과 범위에 놀라면서 『임꺽정』과 같은 대작이 폭넓은 독서 경험에 기초해 있음을 새삼스레 확인하게 된다. 당대 작가 시인의 일반적 수준을 압도하는 이러한 독서 경험이 그의 문학 수업이 되고 작가 수업이 되고 지도자 수업이 된 것이다. 그에게서 치기만만한 문학청년 냄새가 나지 않는 것도 이유가 있다 할 것이다. 젊은 문학 지망자에게서 발견되는 성향의 하나는 쓰고 싶다는 열망에 들려 있을 뿐 거기 상응하는 삶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구체적 대상이 없이 “사랑을 사랑하는” 젊은이의 성적 열망과 비슷하다. 그러기 때문에 참으로 쓰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것이냐고 한밤중에 스스로에게 질문하여 진정 쓰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겠다면 그때 그 필연성으로 그대의 삶을 건설하라는 시인 릴케의 추상 같은 충고가 나오는 것이다. 벽초의 광범위한 독서 경험과 그의 폭넓고 다사다난했던 삶 경험이 포개져서 비로소 대작이 가능했다고 추정된다. 그 점 벽초는 만해와 크게 다르다. 만해의 소설이 작가의 희망적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것은 아마도 문학작품 읽기가 빈약했기 때문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박람강기와 대범함 벽초의 이력 중에서 이색적인 것은 한문 고전 교열을 했다는 점이다. 1939년에 신조선사에서 간행된 홍대용(洪大容)의 문집 『담헌서(湛軒書)』, 1941년엔 서유구(徐有榘)의 『누판고(鏤板考)를 교열했다. 모두 실학자들인데 홍대용이 지동설과 우주무한설로 널리 알려진 반면 서유구는 그렇지 못한데 농정가로서도 일가견을 보여주고 있는 인물이다. 일제 말기에 이런 옛 책 교열을 맡았다는 것은 벽초의 일관된 조선 탐구 지향을 보여주면서 그의 생활고를 방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공인된 한문 조예 때문에 맡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이런 한적을 교열할 수 있는 당대의 태두요 권위였기 때문이다. 동아일보에 연재한 칼럼을 모은 『학창산화(學窓散話)』(1926)나 조선일보에 연재한 「양하잡록(養疴雜錄)」(1936)의 문장은 그 온축의 깊이를 보여준다. 중국 고전과 우리 쪽 옛 책을 들락날락하는 필치가 자유자재다. “지금 복중(腹中)에 미성서(未成書)로 있는 ‘양반계급 사적연구(兩班階級 史的硏究)’”란 대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저서로서의 구상도 있었던 것 같은데 끝내 미성으로 남아 있는 것은 유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시대 상황의 점증적 악화와 연관되는 것일 터이다. 벽초의 해석이 보다 현실에 즉한 합리적 해석이지만 이 맥락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단박에 실제 당쟁에 휘말렸던 인사의 말을 예증하는 벽초의 기본적 강기(强記)이다. 김춘택은 김만중의 증손으로서 『사씨남정기』를 한문으로 번역한 인물이다. 이러한 순발력 있고 즉시적인 전거 인용이나 제시는 벽초가 참여한 모든 좌담이나 대담에서 일관되게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다. 이러한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서 자타 공인하는 대가로 숭상된 것이라 할 수 있겠고 따라서 많은 의문이 해소된 것임을 첨가해둔다. 당시인 허혼(許渾)의 시에 “음시호사성선골(吟詩好似成仙骨) 골리무시막랑음(骨裏無詩莫浪吟)”이란 것이 있다. 도가(道家)의 말을 들으면 선골 없는 사람은 백 년 수련도 구경(究竟) 소용없고 선골 있는 사람이 수련하여야 비로소 성선할 수 있다고 한다. 위에서 보듯 중국 고전을 전거로 해서 언어의 주인이 되고 표현의 선수가 되라며 원론적인 얘기를 하면서 시인 수업에 공을 들여 시적 성취를 도모하라는 격려의 말을 하고 있다. 과찬이나 과기대가 없고 모든 것은 본인의 노력 여하에 달린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데 대범하면서 부족함이 없는 서문이다. 벽초의 생각이나 글체의 특장이 잘 드러나 있다. 대범하고 편향됨이 없이 온건한 그의 성향에도 불구하고 그의 좌담과 글에는 시대와 당대의 일반적 풍조에서 한 걸음 앞서 있는 선진성을 늘 보여준다. 작가는 군중 속의 한 사람으로서 그 광경을 볼 게 아니라, 언제나 관조적인 태도로 검토하고 비판해야 할 것인데 상당한 시간이 경과해야만 검토하고 비판하도록 작자의 머리가 냉정해질 것 아니오. 벽초의 인품에 대해서는 누구나 겸양과 공손을 말한다. 유약하여 과단성이 부족하다는 과격파의 평언이 있으나 야심과 패기가 없다고 지적하면서도 “전형적인 학자요 전형적인 귀족 타입이요 또 전형적인 장자풍(長者風)이 있는 분”이라며 “명문 출신이면서도 교만이란 조금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주20) 이러한 인품과 박람강기와 총명함과 “40년 고절(苦節)이 중학밖에 나오지 않은 그를 국립대 총장으로 추대하자는 일부 의견을 내게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임꺽정』과 일관된 조선 정조 『임거정』은 1928년 11월부터 조선일보에 연재되다가 서너 차례의 중단을 거쳐 1940년 《조광》 10월호 연재분을 마지막으로 미완인 채 중단되었다. 투옥과 병고로 인한 중단이지만 어쨌건 13년 간에 걸쳐 집필한 것이다. 1928년은 중국에서 북벌을 재개하고 일본이 치안유지법을 개악하여 사형을 추가하고 일본군이 장작림(張作霖)을 폭사시킨 해이다. 1940년 8월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폐간된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다만 나는 이 소설을 처음 쓰기 시작할 때에 한 가지 결심한 것이 있지요. 그것은 조선 문학이라 하면 예전 것은 거지반 지나(支那) 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사건이나 담기어진 정조(情操)들이 우리와 유리된 것이 많았고 그리고 최근의 문학은 또 구미 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양취(洋臭)가 있는 것인데 『임꺽정』만은 사건이나 인물이나 묘사로나 정조로나 모두 남에게서는 옷 한 벌 빌려 입지 않고 순조선 거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조선 정조에 일관된 작품’ 이것이 나의 목표였습니다. (주22) 이러한 작가적 야심과 포부는 일차적으로 『임꺽정』을 모든 독자들이 경탄해 마지않는 우리말의 보고이자 가장 능란한 우리말 구사의 모범 사례로 만들어주었다. 김만중은 『서포만필』에서 자유로운 모국어에 의한 발상을 중시하여 사실상 후속되는 민족문학론의 맹아를 보여주었다. 그러한 생각을 이어받아 우리말로 가장 호쾌한 문학 세계를 성취해낸 것이 20세기 전반에 나온 『임꺽정』이다. 누구나 그 풍부한 어휘에 감탄하는데 “조선어 광구의 노다지”라는 왕년의 조선어학회장 이극로(李克魯)의 논평은 핵심을 찌르고 있다.(주23) 벽초의 산문이나 대담에서는 그의 동양의 지적 전통에 대한 조예를 반영해서 요즘에 거의 쓰지 않는 한자어가 많이 나온다. 불과 100년도 안 되는 사이에 우리말은 커다란 변화를 갖게 되었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런데 소설에서는 한자어에서 파생되었다 하더라도 거의 토착화된 우리말 또 한자어로 소급해서 추정할 수 없는 우리말 어휘가 주로 씌어 있다. 작가의 풍부한 우리말 어휘는 동양 지적 전통에 대한 소양과 마찬가지로 그의 총명함과 또 왕성한 지적 호기심의 결과일 것이며 그의 생활과 따로 떼어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몇 가지 추정은 가능할 것이다. 벽초는 세 살 때 모친을 여의고 주로 증조모와 대고모의 손에 자란 것으로 적고 있다. 특히 증조모의 지극한 사랑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들 증조모와 대고모가 벽초의 우리말 어휘 소유에 많은 기여를 했으리라 추정된다. 대체로 한자어에 의존해서 일상 대화를 운영하는 양반 남성에 비해 여성들이 토박이말 어휘를 풍부하게 구사하는 게 보통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대가족제는 벽초에게 좋은 언어 환경이 되어주었다고 추정된다. 벽초는 14세에 상경하기까지 시골 농촌에서 성장하였다. 열 살이라고 하는 것은 언어 습득에서 중요한 해이다. 그 이전에 습득 사용한 언어가 제1언어이며 또 그 이전에 2개 언어를 사용했다면 그는 이중언어자가 된다. 농촌에서 자라면서 그는 많은 토박이말과 농민 언어에 친숙해졌을 것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좌담에서의 벽초 발언은 유념해둘 만하다. 농군들이 문학적 표현을 하는 실례를 하나 들어본다면, 언젠가 시골서 농사꾼들이 가래질하는 구경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흙이 눈에 뛰어들어가니까 그들이 말하길 “놀란 흙이 눈에 뛰어들었다”고 하거든. 그 얼마나 고급 표현이오? 그리고 빛깔을 말할 때에 분홍빛을 “웃는 듯한 분홍빛”이라 하는 것 같은 것도 그렇고. 그 말을 듣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딴은 빛깔에서 웃는 빛깔은 분홍빛밖에 없거든, 그런 것은 한두 가지 실례에 지나지 않지만 조선 농사꾼들의 대화 속에는 참말 문학적 표현이 많더군요.(주24) 벽초의 비허구 산문이나 대화에 나오는 어휘는 요즘 세대에게는 고문에서나 볼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만큼 해방 전후에 그리고 특히 해방 이후에 우리의 생활 언어가 크게 변한 것이다. 변화의 대세는 재래의 우리식 한자어가 일산 한자어 혹은 일인 선호의 한자어로 대체되어간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물론 구미 언어가 귀화 어휘로 자리 잡는 것이나 토박이말이 한자어를 대체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나 해방 이후 특히 21세기로 접어든 오늘에도 일산 한자어는 끊임없이 유입되어오고 있다. 한자가 일제가 아니기 때문에 엄연한 일산 한자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것인 양 쓰이고 있다. 언어 변화도 자연스러운 사회 변화의 일환이기 때문에 그것을 인위적으로 막을 필요도 막을 수도 없다는 입장이 가능하다. 그러나 프랑스 아카데미가 보여주었듯이 어느 정도의 자정 노력도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벽초의 어휘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1920년대와 1930년대의 벽초 산문에서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본다. 통기(通寄) — 통지, 통고 기평(譏評) — 헐뜯는 평 영회(領會) — 이해 곡경(曲境) — 곤경 통기와 같은 말은 완전히 대체되었다. 그것은 혼인이 결혼, 정혼이 약혼, 역사가 공사로 변한 것과 같이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기평은 이제 악평이나 혹평과 같은 보다 선명한 말로 대체되었다. 당고 같은 말은 관혼상제의 무게가 일상생활에서 옛날 같지 않으므로 다시 찾아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변화가 식민지 시절의 일본 문화 영향 탓이라는 것을 유념해두는 것은 필요할 것이다. 최근 들어 부쩍 쓰이는 말에 전수조사(全數調査)란 것이 있다. 일본어에서 나온 말이다. 통계 조사를 할 때 대상이 되는 것을 빠짐없이 조사하는 것을 뜻하며 센서스(census)가 그 보기이며 표본조사와 대칭 관계에 있다. 이런 말을 차용하는 것도 부득이하다고 못 봐줄 것은 없다. 그러나 신문지상이나 정치인의 발언에서 흔히 보이는 가령 진검승부(眞劍勝負) 같은 일본어를 쓰는 것은 보기 흉하다. 사무라이의 나라였던 일본에서 목도나 죽도(竹刀)가 아니고 진짜 일본도로 승부하는 것이 진검승부다. 본인들은 멋있고 유식하다 생각해서 쓰는지 모르지만 툭하면 반일 언사나 휘두르면서 이런 말을 쓰는 것은 저들에게 비웃음 사기가 십상이라 생각한다. 『임꺽정』 읽기는 그런 면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관군 막을 이야기를 낮에 중둥무이하구 말지 않았어요? (27) 지금 서울 기생 중에 옛날 송도 황진이나 성주 성산월이나 평양 옥매향이 같은 절등한 미인이 혹시 있나? (107) 죽여달라구 지다위하러 왔느냐? (295) 아랫줄 친 단어는 현재 유통되지 않는 말들이다. 얼마나 많은 단어가 유통에서 배제되고 망실되었는지 상상할 수 있다. 위에 나오는 단어의 서른 곱도 넘는 유서 깊은 어휘가 사실상 유실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 없이도 우리의 어문 생활에 커다란 지장은 없다. 그러나 많은 어휘를 보유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문화유산을 풍부하게 보존하는 것이 된다. 뿐만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눈과 마음을 그만큼 정교하게 운영하는 길이 되기도 한다. 가령 이웃 나라 일본의 문학적 잠재력이 옛말과 고유어를 풍부하게 옛 작품 속에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크게 연관된다고 생각한다. 전통이란 살아 있는 과거가 구체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말을 통해서이다. 옛말을 많이 가지고 있지도 기억하지도 못하는 우리는 그만큼 빈약한 문학적 현재를 가지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임꺽정』의 어휘에 감탄하고 공허한 찬사를 바치면서도 우리는 어휘 습득에 기울인 그의 문학적 노력을 전범으로 삼지는 않았다. 화받이, 두길보기, 구메혼인, 이리위 저리위하다, 공먹히다, 싸다듬이하다, 명토 없이 묻다, 닛다홍 무명저고리와 갈매빛 무명치마와 같이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더라도 우리가 아깝게 버린 말과 어법들이 너무나 많다. 소중한 우리말을 버리고 한자어라는 표면상의 유사성 때문에 구별 없이 일본어를 쓰는 폐습은 상습화되어 있다. 『임꺽정』 읽기는 우리의 일본어 의존에 대해서도 좋은 계고가 되고 반성의 계기를 제공한다. 아울러 『임꺽정』을 읽지 않고 우리말에 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한다는 것은 위태로운 일이라는 것도 부언해두고 싶다. 산과 산촌은 현대 소설 속에서 대체로 화전민이나 국빈자의 거주 지역으로 나온다. 그러나 『임꺽정』에서는 반사회적 거부 집단의 근거지로서 권력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치외법권적이고 임시적인 해방 지구로 드러난다. 다양한 계층으로부터 충원된 수다한 등장인물을 포용하고 있어 지난날의 습속과 관행에 대한 소상한 고증과 재현으로 우리의 역사적 과거에 대한 신빙할 만한 참조 자료가 되어주기도 한다. 작품 자체가 파란만장한 역마살 낀 인물들로 짜여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등장인물의 발길은 팔도강산에 미치지 않는 고장이 없다. 따라서 팔도 지지(地誌)가 망라되어 있어 글로 쓴 대동여지도라는 국면도 가지고 있다. 가령 임꺽정이 금강산 구경을 간 자초지종은 다음에 보듯이 구체적이다. 오늘날의 일정표와 비교하면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것이나 지도 없던 시절의 여정치고는 그 궤적이 상세하다. 변해대사와 꺽정이가 허항령에서 혜산진으로 나와서 갑산(甲山) 북청(北靑)을 지나 함흥에 와서 오륙 일 두류하고 다시 영흥을 지나 덕언(德源)에 와서 회양(淮陽)으로 직로하지 아니하고 동해변으로 내려오며 통천 총석정(通川 叢石亭)과 고성 삼일포(高城 三日浦)를 구경하고 금강산에를 들어왔다. 금강산은 경개 걸출하여 처음 오는 사람의 눈을 놀래었다. 대사는 나이 이십 시절에 내외금강을 한번 다 돌아본 까닭으로 큰 절이나 암자에서 노독을 쉬이고 꺽정이가 혼자서 구경 다닐 때가 많았다. 은선대(隱仙臺)를 구경하고 안무재를 넘어서 마하암에 와서 묵을 때, 꺽정이가 비로봉에 올라가려고 대사에게 말하니 대사는 전에 올라가본 곳이라 “비로봉 절정에 올라가보면 금강 일만이천봉이 모두 눈 아래 굽어 보이고 망망한 동해가 눈앞에 내다보이느니라. 한번 시원하지, 그러나 나는 그만두겠다, 나는 수미암(須彌庵)으로 갈 터이니 그리 오시라” 하고 말하였다. (2권 「피장편」 308쪽) 1920년대에 ‘조선주의’가 팽배한 시절이 있었다. 양주동의 『조선의 맥박』, 변영로의 『조선의 마음』과 같은 시집 표제에도 그것이 드러나 있다. 조선주의는 우리 역사에 대한 계몽적 조명이나 국토 기행문의 융성의 형태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이 작품이 더러 글자로 풀어 쓴 대동여지도나 축소된 『택리지』의 형국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단순히 등장인물의 지리적 이동의 실상을 보여주기 위한 소설적 세목이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다. 그것은 국토에 대한 지식과 애정을 함양해야겠다는 조선주의적 충동을 당대의 국토 기행문과 공유한 것이고 작자가 말하고 있는 조선적 정조에의 충실을 위한 조처였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고장과 고장 사이의 거리가 소루함이 없이 꼬박꼬박 적혀 있는 것을 보고 옛사람들의 거리와 행보의 계산법을 상상할 있게도 된다. 작품에서 청석골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거부 집단의 거점이 되어 있는데 그 지리적 세목은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청석골은 서편 탑고개까지 나가기에 시오리가 넘는 긴 산골이다. 성거산이 내려와서 천마산이 되고 천마산이 내려와서 송악이 되니 송악은 송도의 진산(鎭山)이요 송악 한 줄기가 서편으로 달려와서 청석골이 생기었다. 천마산 줄기에서 솟아난 만경대와 부아봉과 나월봉은 삼거리 동북편이 겹겹이 둘러 있고 대봉산은 남으로 떨어져 삼거리 정동편에 와서 있고 탑고개 북쪽에는 두석산이 있고 남쪽에는 봉명산이 있고 서남쪽에는 빙고산이 있다. 천엽 같은 산속의 골짜기를 따라 큰길이 놓여 있으니 이 길이 비록 소도부중에서 이삼십리밖에 아니 되는 서관대로이나 도적이 대낮에도 잘 나는 곳이라 왕래하는 행인들이 간을 졸이고 다니었다. (4권 「의형제편 1」, 154쪽) 작품에서 중요 지리적 단위가 되어 있는 청석골의 위치와 주위 지리가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일반 독자로서는 머릿속에서 정연하게 시각화하기가 쉽지 않지만 일단 세밀하게 적혀 있다. 작가편의 지리적 고증이 없다면 쓸 수 없는 지문이다. 치밀한 세목 서술은 그러나 작품의 리얼리티 조성에 기여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작품 세계에 빠져들고 얘기의 진행에 순순히 동조하게 만드는 설득력을 갖고 있다. 이러한 설득력은 전편을 통해서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지리적 특성뿐 아니라 그 지방의 생활상까지 자세히 적혀 있는 것은 일개 사수(射手) 이봉학이 1000여 호 골의 원님으로 가는 제주도 풍물지를 보여주는 「의형제편 3」에서 볼 수 있다. 산에서는 희귀한 약재가 나고 바다에서는 풍부한 해물이 나건만은 백성은 살기가 간구하였다. 토지가 대개 돌서덕밭인데 농구가 변변치 못하여 밭벼 서속 같은 곡식이 소출이 적고 잠수질로 해의 전복 등속을 따고 낚시질로 은구어(銀口魚) 옥두어(玉頭魚) 등속을 잡으나, 그물 같은 좋은 어구(漁具)를 쓸 줄 모르고 사내가 적고 계집이 많은 곳이라 사내는 놀리고 계집이 일하는 것이 풍습인 까닭에 여름살이도 주장 계집의 일이요, 고기잡이도 역시 계집의 일이요, 잠수질은 특별히 계집의 장기로 처서 바닷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딸이라야 여의기가 손쉬웠다. 계집의 덕으로 사는 백성들이 다른 침해만 아니 당하여도 오히려 잘살 수 있지만, 관장도 침해하고 관속도 침해하고 더욱이 도지관(都知管) 벼슬을 세습하는 고씨 문씨의 붙이들의 침해가 자심하여 밭 뺏고 세간 뺏는 건 고사하고 사람을 잡아다가 사내를 계집종같이 부리되 인녹(人祿)이라고 자기네 밭을 녹과 같이 여기었다. 고된 신역으로 겨우 식구 입에 풀칠을 하는 신세니 물건 지고 다니는 계집의 얼굴에 풀기 있을 까닭이 없고 모여서서 절구질하는 계집의 노래가 자연 구슬프지 않을 수 없었다. 물건을 머리에 이지 않고 곡식을 방아로 찧지 않는 것이 역시 이곳의 풍속이었다. 백성들이 간구하니 읍 모양도 보잘것없었다. 사가(私家)에 와가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관가까지 초가라 정의현감의 동헌은 전주부내 잘사는 집의 안마루 폭도 못되었다. (6권 「의형제편 3」, 80~81쪽) 이러한 지지적(地誌的) 성격보다 두드러진 것은 민족지(民族誌)의 성격이다. 작가가 밝혔듯이 이 장편은 각각 독립된 듯한 긴 단편이 연작 형식으로 되어 장편을 이루고 있다. 소설이 본격적으로 재미있어지는 「의형제편」에는 곽오주편이 나온다. 나중 꺽정이가 만들어준 쇠도리깨로 청석골에서 유아 살해로 악명을 떨치는 그는 “박명한 미인”으로 일생을 마친 과부를 아내로 맞아서 아기 아비가 되지만 상처 후 젖을 제대로 얻어 먹이지 못해 아기를 죽게 한다. 이에 실성하다시피 되어 우는 아이를 두고 보지 못한다. 농가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오주(五柱)란 이름을 얻은 그는 조실부모하여 형네 집에서 얹혀 형수 눈칫밥을 먹다가 뛰쳐나와 머슴살이를 하게 된다. 정첨지의 집에서 머슴살이하던 때 이웃 마을에 얼굴 고운 과부가 있다는 말을 듣고 정첨지 아들이 곽오주를 위시한 동네 청년 다섯을 시켜 그 과부를 업어오게 한다. 그 과정은 이렇게 묘사된다. 그러나 들음들음이 자기 같은 사람의 작은마누라로는 잘 올 것 같지 않아서 동여올 생각을 먹었다. …… 과부의 집이 어디 있는 것은 정첨지의 아들이 미리 다 알고 있는 까닭에 그 집 근처에 가서 집안 동정을 살핀 뒤에 화적 떼와 같이 뛰어들었다. 달빛이 있어서 대번에 소복한 젊은 과부를 붙들었다. 과부집 세 식구가 변변히 소리도 지를 사이 없이 오주가 과부를 홑이불에 싸서 들쳐 업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도망질을 쳤다. …… 난데 놈 대여섯이 동네 와서 과부 업어간 것을 알고 십여 명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쫓아가서 모두 빼앗아 온다고 장담들 하고 곧 떼를 지어 뒤쫓아갔다. 업혀가는 과부가 홑이불에 싸여서 손발을 마음대로 놀리지 못하는 데다 업고 가는 오주가 황소같이 힘에 센 사람이라 과부가 죽을 힘을 다 들여서 몸을 드놓아도 조금도 끄떡이 없었다. (4권 「의형제편 1」, 236~237쪽) 이렇게 업어온 과부는 정첨지와 며느리의 맹반대로 결국 곽오주에게 넘겨진다. “과부를 업어왔다 도루 보내면 그 집에 재앙이 있다”는 말도 있고 해서 그리된 것이다. 실제로 「의형제편 3」에는 청석골 두령들이 상쟁이를 불러 관상을 보는 장면이 길게 나온다. 임꺽정에 대해서는 “저렇게 극히 귀하구 극히 천한 상은 처음 보우”라고 말한다. 그런 경우가 있을 수 있느냐는 물음에 대해선 “상이 그렇단 말이지 낸들 아우”라 대답한다. 수는 어떠냐는 물음에 대답은 않고 “성명은 천하 후세에 전하시겠구 또 귀자를 두시겠소”라 대답해서 꺽정이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게 한다. 곽오주에 대해서는 “저분은 눈이 승냥이구 목소리가 이리 소리다”라 했다가 성급한 곽오주에게 뺨을 얻어 맞는다. 이 상쟁이는 모든 것을 족집게처럼 맞히는 대가인데 생전의 벽초가 곤경에 처하거나 어려운 선택과 마주쳤을 때면 임종의 발자크가 “어서 비앙송을 불러와, 내 병은 그가 아니면 못 고쳐!”라고 말했듯이 이 상쟁이를 불러보았을 것이다. 사실 이 상쟁이의 상 읽기를 통해 독자들은 청석골 두령들의 인물 됨됨이가 요약되어 있음을 알게 되고 운명을 대충 예감하게 된다. 이러한 장면에서도 누당(淚堂)과 같은 그쪽 용어를 써서 실감 조성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그 자체가 재미있으면서 독자들의 등장인물 이해를 도와주고 있다는 점에 묘미가 있다.(「의형제편 3」, 315~320쪽) 옛날 어느 시골에 한 선비가 있었는데 그 선비가 아내를 못 잊어서 과거를 못 보러 가니까 그 아내가 꾀를 내서 몸에서 한 가지를 떼어줄게 가지구 갔다 도루 가지구 오라구 말하구 홍합 한 개를 주었더라네. 그 선비가 그것을 받어 주머니에 넣구 과거길을 떠났는데 서울 오구 과거 보구 하는 동안, 틈틈이 남몰래 주머니에서 끄내 보구 싱글벙글 웃는 것을 다른 선비가 한번 눈곁에 보구 수상히 여겨서 그 선비 자는 틈에 주머니 세간을 뒤지다가 홍합이 한 개 나오니까 넝큼 먹어 버렸드라네. 이튿날 방이 나서 그 선비는 급제가 되었는데 새 급제가 주머니를 샅샅이 뒤지더니 급제는 했어두 아내는 병신을 만들었다구 낙심하더라네. 이야기는 고만일세. 그것 좀 끄내놓게, 같이 먹세. (4권 「의형제편 1」, 191쪽) “절에 간 색시는 중 하자는 대로 하는 것이야.” 이렇게 무진장한 속담은 그 자체로서 재미있을 뿐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됨됨이를 알려주면서 성격 창조에 기여한다. 그리고 얘기가 가지고 있는 넓은 의미의 교훈을 제공함으로써 독자의 인간 형성과 세속 지혜 취득에 긍정적으로 작동한다. 그런 맥락에서도 『임꺽정』의 민족지(民族誌)적 성격은 이 작품을 우리 문학의 고전으로 올려놓고 있다. 또 이러한 친근한 속담이나 민담의 누적된 충전력은 불신의 자발적 정지를 야기하여 좀처럼 곧이들리지 않을 일도 쉬이 곧이들리게 하여 재미와 설득력을 더해준다. 가령 술에 취한 곽오주가 호랑이를 잡는 장면이 그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대강 그 장면만 나온다면 불신의 자발적 정지는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사례가 허다해서 이 작품의 현실감 조성력의 원천의 하나가 되어 있다. 오주가 한번 드러누우며 곧 잠이 들어서 한숨 곤히 자는 중에 얼굴에 물이 떨어지는 것 같아서 눈을 뜨고 보니 얼룩얼룩한 짐승의 꽁지가 얼굴을 도닥도닥 두드리는데 그 꽁지가 처끈처끈하였다. 요약하면 소식의 『동파지림』에 이런 말이 있다. 거리의 어린아이들은 천박하고 수준이 낮은데, 집안 사람들이 그 아이들 때문에 아주 질리게 되면, 돈을 주어서 모아 앉혀두고 옛날이야기를 듣게 했다. 이야기가 삼국의 일에 이르러 유현덕이 패하는 것을 듣게 되면 눈썹을 찡그리고 찌푸리다가 우는 놈마저 있다. 조조가 패하는 것을 들으면 즉시 즐거워해서 노래하며 기뻐했다. 역사와 통속 소설의 차이점을 말하는 위의 글에서 주목할 것은 김만중이 성공적인 서사의 두 요소를 지적하고 있다는 점이다. 눈물을 흘리게 하며 슬퍼하게 하고 또 웃고 즐겁게 하는 요소가 성공적 서사의 필수적인 요소임을 은연중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하나 빠트린 것은 이 다음에 어떻게 될까 하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어떻게 될까 하는 궁금증, 울음, 웃음이라는 서사의 세 가지 요소를 『임꺽정』은 넉넉하게 가지고 있다. 그 점에서 작품은 성공적인 서사가 되어 있다. 그런데 조마조마하며 웃음과 울음 사이를 오가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성 질서 속에서 특혜적 위치를 차지하고 아랫것들을 부려먹고 괴롭히는 부패한 양반층과 기성 질서에서 일탈하여 살고 있는 반체제적 변방인들 사이의 사회적 대립의 관계이다. 반체제적 변방인들이 정의를 구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겠으나 부정의에 저항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고 이에 독자들이 심정적 응원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꺽정이나 박유복이 잘되면 통쾌해지고 그들이 곤경에 빠지면 눈썹이 찡그러지게 되어 있다. 청석골의 두령들은 꺽정이 같은 천민, 곽오주 같은 빈농, 박유복 같은 농민의 아들, 길막봉 같은 소금장수, 백두산에서 태어난 황천왕동이, 등등 조선조의 하층 변방인들이다. 이들에게 독자의 동정이 가도록 구상하고 운필한 것이 벽초의 작가적 재능이요 시대에 앞선 선진적 지식인의 혜안이라 할 것이다. 작품을 사회적 정치적 전언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소설을 약체화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되풀이 전경화된 주요 모티프가 있다면 그것은 조선조 구체제의 계급적 반상 개념의 전면적 거부이다. 그런 맥락에서 황천왕동이가 아내에게 하는 말은 중요하다. “부자가 대대로 역졸을 다닌다니 근본이 역놈이지 무어요.” 중요한 것은 이러한 말이 아주 자연스럽게 들리도록 씌어 있다는 것이다. 이념 표방의 작품이 때때로 생경한 언어로 부자연스럽게 전언을 앞세우는 것과 비교할 때 그 효과는 인상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말이 진실되고 설득력 있게 들리도록 등장인물들이 그려져 있다. 황천왕동이가 지금 양반은커녕 그전 양반에도 없다고 말하는 백정의 아들 꺽정이가 이봉학과 나누는 대화를 들어본다. “형님이 꽤 심약해졌소 그려.” 이렇게 항변하는 반사회적 반골이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어른답고 인간미를 풍긴다. 곽오주가 뒷다리를 움켜잡고 잡은 호랑이를 한 칼에 요정내지 않고 괴롭히는 것을 본 꺽정이는 말한다. “아서라 불쌍하다. 얼른 죽여버리자. 아무리 짐생이라두 산중에서 제로라 하는 것을 개새끼같이 놀리는 것이 우리의 잘못이다.” 하고 곧 칼을 높이 들고 있다가 대가리를 겨누고 번개같이 내리쳤다. (4권 「의형제편 1」, 282쪽) 루신은 「개 고양이 쥐」란 글에서 고양이를 원수 취급하는 것은 참새나 쥐를 잡아먹을 때 한입에 물어 죽이는 게 아니라 잡았다가 놓아주기를 되풀이해서 한껏 농락하다가 마침내 먹어치우기 때문이라 적고 있다. 타인의 불행을 즐기고 약자를 괴롭히는 심술궂은 인간 근성과 같아서 싫다는 것이다.(주28) 이러한 중국 선비의 마음을 조선 백의 아들 꺽정이도 공유하고 있다. 또 통정한 여자를 버리려는 돌석이의 행동을 알고 “사내 대장부가 나이 어린 기집애에게 언약해 놓구 주저하는 게 다 무언가” 하고 나무라며 번의하게 한다. 그러나 그를 과도하게 미화해서 대중적 상상력에 호소하는 의적처럼 만들지 않은 것도 작가의 인간 통찰과 문학적 역량의 소치다. 이념에 입각해서 그런 면을 비판하는 견해도 있으나 설득력 없는 문학의 원리주의적 편향이라 생각한다. 꺽정이 같은 백정의 아들을 주도적 등장인물로 삼았다는 것 자체가 1920년대 한국에서는 하나의 혁명적 문학 기획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푸줏간 주인에게는 어린애가 반말을 하는 것이 예사였다. 푸줏간 어른도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수용하였다. 그것은 로맹 가리의 말을 빌리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얘기”가 된다. 그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비로소 기성 질서에 저항하는 벽초의 반체제적 시각의 선진성을 우리는 실감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앞에서 얘기한 작품적 미덕을 가진 이 작품은 동시에 조선조에 대한 가장 신랄하고 전면적인 비판이 되어 있다. 식민지 시대에 우리가 가졌던 가장 철저한 우리의 역사적 과거 비판이자 규탄이기도 하다. 나라를 잃고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자기비판이나 자기반성은 때때로 민족성의 개조와 같은 관념적 자학의 형태로 나타났다. 벽초는 소설을 통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우선 평등 의식의 확립이요 보급이란 것을 주장했고 그 의미는 평가받아 마땅하다. 그가 평등만을 꾸준히 일관되게 주장한 것은 다양한 주장보다도 하나라도 반듯하게 성취해야 한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한다. 의식의 전환이 중요하다는 것을 작가로서 직감한 것이다. (요즘 페미니스트들 가운데는 모계의 성을 성명에 드러내는 이들이 있다. 곽오주가 비슷한 생각을 앞당겨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작가의 선진적 안목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아버지 어머니 피를 다 받었으니까 성을 둘씩 가져야 하지 않소. 하필 아버지 성만 가질 거 무어 있소.”(「의형제편 1」, 202쪽)) 한을 우리 문학이나 우리 겨레의 특성으로 말하는 것에 대해서 늘 유보감이나 저항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에 꺽정이의 이유 있는 비분강개나 박명한 미인으로 일생을 마친 약탈혼의 희생자가 죽기 전 아기에게 젖을 물리며 들려주는 독백을 읽으면서 한의 실체를 접한 듯한 감회를 갖게 되었다. 한은 봉건적 신분 관계의 고정성에서 유래한 부자유와 억압을 사회적인 것으로 의식하지 못하고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데서 오는 수동적 슬픔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난날의 상민이나 여성 특유의 심정적 특성이며 의식화되지 못한 무자각의 계급의식이나 자의식의 자기 소모적 영탄의 정서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하리라 생각된다. 한마디로 말해서 억압 속에 갇혀 있다는 생활 실감에서 시작되어 팔자 한탄과 원망으로 끝나는 주체 소거적(消去的)인 체념과 자기 연민의 무한 선율이 한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 해준 것만으로도 『임꺽정』 다시 읽기는 소중한 체험이 되어주었다. 망국 이후 일단 망명의 길로 떠나보았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귀국하여 식민지 체제하에서 문화 실천을 통해 자기완성과 사회적 기여를 도모한 인물들이 있다. 호암 문일평, 위당 정인보, 춘원 이광수를 우리는 열거할 수 있다. 벽초도 그중의 한사람이다. 8·15 해방에 임해서 우리가 이렇다 하게 해방에 기여한 바 없다는 국민 다수의 보편적 자격지심은 해외에서의 정치투쟁을 한껏 숭상하고 높이 평가하게 하였다. 그것 자체는 당연지사이나 그것이 문화 실천에 대한 상대적 과소평가를 수반했다는 것은 공정하거나 균형 잡힌 일이 못 된다. 정치 실천 못지않게 문화 실천이 중요했으며 그 후속적 영향력이란 맥락에서는 후자가 전자를 오히려 능가한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벽초는 단 하나의 작품밖에 남기지 않았고 그것도 미완으로 끝났다. 미완으로 끝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작가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단 한 편만 남겼다는 것은 작가의 총명함의 소치이며 그것이 식민지 시절의 문화적 실천 중 가장 우뚝한 봉우리이자 상록수라는 것은 단언해도 좋을 것이다. 오점을 남긴 춘원과 달리 삶의 도정이 시종여일했다는 것도 기억할 만한 덕목이라는 것을 첨가하는 것은 아마도 사족이 될 것이다. 주석 주1 강영주 교수의 역작 『벽초 홍명희 연구』(창자과비평사, 1999), 임형택ㆍ강영주 편 『벽초 홍명희와 『임꺽정』의 연구 자료』(사계절, 1996)를 그 귀중한 성과로 꼽을 수 있다. 자유롭게 벽초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최명 교수의 『벽초, 임꺽정 그리고 나』(책세상, 2006), 민충환 편저 『임꺽정 우리말 용례사전』(집문당, 1996)도 좋은 자료가 된다. 주7 『자료』, 25쪽. 강화도조약 이래 청일전쟁이 끝난 1895년까지의 20년 간에 조선에 와서 거주한 일본인의 수는 1만 2302명이고 청일전쟁 이후 격증하여 1910년에는 17만 1547명이 되었다. 1945년엔 75만 명이다. 신석호 외, 『한국현대사 2』(신구문화사, 1969), 354쪽. 또 1900년 서병숙(徐丙肅)이 인공양잠전습소를 만들었다. 여기서 외국 양잠 기계를 사용하고 외국에서 양잠 기술을 배워온 장홍대, 김한목 등을 고용하여 1년에 7-8차례나 양잠하는 방법을 발견하였으며 학생을 모집하여 양잠 기술을 교육함으로써 많은 기술자를 배출하였다. 또 같은 해에 대한제국 인공양잠 합자회사가 설립되어 외국으로부터 기계를 구입하는 한편 일반 자본금을 모집하였다. 같은 해에 김동규(金東圭)가 양잠 회사를 설립하였다. 신석호 외 『한국현대사 3』(신구문화사, 1969), 412쪽. 주12 中村光夫, 『日本の近代小說』(岩波書店, 1954), 51쪽. 주23 『자료』, 255쪽. - 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