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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보는 교회
요한 12장 20- 26절, 사도 7장 54절- 8장 1절, 고전 1장 18-25절
한 문 덕 목사
[어디에 안길 것인가?]
평화의 인사 시간에 서로 인사를 나누셨지만, 우리 한 번 더 옆자리의 교우들과 인사하겠습니다. “옆자리에 앉아서 영광입니다.”“집사님(성도님/권사님/장로님/형제님/자매님) 덕분에 제가 삽니다!”우리가 생명사랑 신앙공동체의 이름으로 모인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하신 바가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불교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매주일 이렇게 좋고 멋진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좋은 만남을 허락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어떤 분이 운전을 하고 가는데 정신병원 병동이 있는 건물 앞에서 그만 한쪽 바퀴를 죄고 있던 나사가 전부 풀려 버렸습니다. 다행히 큰 사고는 나지 않았는데, 풀려 버린 나사가 떼구르르 굴러서 하수구에 쏙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차를 한쪽에 세워놓고 이걸 어떻게 하나 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마침 그 장면을 보고 있던 정신병원 병동의 환자가 큰 소리로 이 운전자에게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나머지 바퀴가 멀쩡하면 나머지 세 바퀴에 있는 나사를 한 개씩 풀어서 앞바퀴를 조이고, 카센터로 가면 될 거 아니오!”운전자가 듣기에 아주 적절한 충고였습니다. 그래서 환자의 이야기대로 얼른 다른 바퀴의 나사 하나씩 풀어 앞바퀴를 고정했습니다. 그리고 환자에게 고맙다고 하고 하나를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그렇게 총명하신데 왜 거기에 계십니까?”그랬더니 이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미쳤으니까 여기에 있지, 멍청해서 여기에 갇혀있는 줄 아시오!”
그렇습니다. 어딘가에 미치면 갇히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 미치면 세상에 갇히게 되고,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되는 것입니다. 마땅히 가야할 길에 열중하면 훌륭한 인격의 사람이 되지만 옳지 않은 길로 빠지면 죄인이 되고, 현명한 사람을 따르면 앞길이 훤하게 트이지만, 어리석은 사람을 좇아가면 둘 다 구렁텅이에 빠지게 됩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관심과 여러분의 삶은 지금 어디에 꽂혀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고린도전서 1장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는 것에 꽂혀 있는 바울 사도의 말씀입니다.
[십자가가 능력이요 지혜인가?]
오늘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십자가의 말씀이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가 된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의 삶을 살기로 한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하는 능력이요, 세상을 밝힐 지혜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진실합니다. 자신이 가진 로마시민권, 자신의 학식, 유대인으로 지녔던 모든 열정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포기할 수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과 같은 편지를 씁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은 바울 사도의 이 말씀에 동의하십니까? 아멘으로 받아들입니까?
우리는 “아멘”으로 응답하지만, 세상 사람들도 동의할까요? 오늘 본문에 십자가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낌이 되는 것이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명기 21장에 보면 “나무에 달린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람”이라고(23절)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는 하나님의 권능을 가지고 저 로마제국을 무너뜨릴 강력한 힘을 가진 이였습니다. 기적을 일으키고, 홍해를 가르고, 만나로 온 백성을 먹이는 구원자입니다. 다윗처럼 골리앗과 맞서 싸워 단칼에 적을 무찌르는 용사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달려 죽은 이가 그리스도, 메시아라니, 그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방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지혜는 로마의 식민지에 불과한 유대인 예수에게서 나올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목수인 예수는 무식하고, 구약성경에도 단 한번 등장하지 않는 촌동네 나사렛 출신이 세상의 지식을 알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참된 지혜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명문가 집안의 자제가 유명한 학교인 아카데미아와 같은 곳에서 배워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로마 사람들에게 예수가 참된 지혜라는 것은 어불성설이었습니다. 로마의 반란군을 처형하는 십자가에서 죽은 이가 로마 황제보다 높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부름 받은 사람은 달리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이 세상의 권력과 지혜가 온 생명을 구원했는가? 힘 있고 가진 것 많고, 지식 많은 이들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었나? 아니면 망쳤나? 그들이 가진 지식과 힘이라는 것이 정작 누구를 위한 것이었나?
로마 제국의 박해와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처음 그리스도교가 번창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이 바로 십자가에서 참된 사랑과 능력과 지혜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권력과 부와 지식과 명성을 쌓아야 한다고 얘기하고, 그런 사람이 구원자라고 말합니다. 국회의원이나 시/도의원 들을 뽑을 때도 역시 그런 것을 우선시 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런 사람들이 국회로 가서, 정치인이 되고, 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어서 정말 국민을 위해서 일했는지는 누구나 물음표를 던지게 됩니다.
[세상의 지혜와 능력?]
이전에 박종신 집사님께서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제게 보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아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넌 내가 정해준 여자랑 결혼하거라!”그러자 아들이 대답합니다. “싫어요!”아빠 왈 “그 여자가 빌 게이츠 딸인데~”아들 왈 “그럼 좋아요!”이렇게 아들을 설득한 아빠는 이제 빌 게이츠를 만나러 갑니다. “당신 딸이 내 아들과 결혼했으면 합니다.”빌게이츠 왈 “그럴 순 없지요!”“내 아들은 세계은행의 CEO인데요!”그러자 빌게이츠가 허락합니다. 이번에 이 사람은 세계은행 총재를 찾아가지요. “제 아들을 세계은행 CEO로 임명해 주시지요.”“택도 없는 소리 마시오.”“제 아들은 빌 게이츠의 사위요”“그럼 좋습니다!”
이 에피소드의 제목은 “이것이 비지니스다!”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하는 돈벌이와 비지니스라는 것이 대개 이러합니다. 만약 이 사람의 아들이 세계은행의 CEO 역할을 잘 해내고, 빌 게이츠의 딸과도 결혼 생활을 잘 한다면 이 아빠는 유능한 사람이라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잘 살펴보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자신의 아들이나 빌게이츠, 세계은행총재의 욕구를 모두 꿰뚫고 있고, 그들의 욕망을 채워주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욕망을 채우는 것이 그리 나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거짓말로 모든 과정을 진행했다는 것이지요. 정직한 실력과 공정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면 결국 그것은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게 마련입니다. 주인공의 아들이 진짜 실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세계은행도 피해를 보고, 빌 게이츠도 손해를 입겠지요. 결혼 생활 또한 망가질 것이고, 이 아빠는 사기꾼이 되겠지요. 그런데도 세상은 자본과 권력의 논리에 따라 거짓을 밥 먹듯이 하고 그것이 이 세상을 사는 지혜요, 능력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얘기를 들려 드리지요. 자본주의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돈으로 돈을 사고 팔며, 돈이 사람을 이용하여 자기를 증식시키는 형태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돈을 잘 이용하는 사람이 부자가 되게 마련이지요. 제가 김학로 장로님께 돈 백만원을 빌렸다고 해 봅시다. 1년 뒤에 갚겠다고 하고 말이지요. 장로님께서 저를 믿으시니 빌려 주시면, 저는 1년 동안 잘 쓰고, 1년이 지난 뒤에 장이홍 장로님께 백만원만 빌려 달라고 합니다. 그럼 장로님도 제게 빌려 주시겠지요. 그래서 장 장로님께 빌린 돈으로 김학로 장로님께 갚습니다. 1년 뒤에 갚겠다고 한 약속을 잘 지켰기 때문에 김학로 장로님은 저를 더욱 잘 믿게 됩니다. 1년이 지나고 다시 김학로 장로님께 백만원을 빌려 달라고 하면, 지난 번에 갚았기 때문에 또 빌려 줄 것입니다. 그럼 저는 그 돈으로 다시 장 장로님께 갚습니다. 그럼 장 장로님도 저를 잘 믿게 되겠지요. 그래서 1년마다 양쪽 장로님에게 빌리고 다시 갚기를 반복하다가, 나중에는 저는 쏙 빠지고, 두 분 장로님을 만나게 해드린 다음, 서로 1년에 한 번씩 만나 돈을 주고받으라고 합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약삭빠르게 돈을 버는 방법이지요.
정말 참된 지혜와 진리는 어디에 있을까요? 거짓말로 남을 속이고 등쳐먹는 세상에서 정직하고 진실함으로 세상을 이겨내는 그 능력과 지혜는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그런 지혜와 능력을 갖게 될까요?
[진리 위해 자신을 헌신할 수 있다면]
만약 한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생을 살면서 참된 진리를 발견하고 그 진리를 위해 자기의 인생을 걸고 목숨을 바칠 수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제대로 인생을 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한참 심문을 하다가 빌라도가 예수께 이렇게 묻습니다. “진리가 무엇이오?”빌라도는 궁금했던 것입니다. 이 새파랗게 젊은 청년이 어떤 진리를 지니고 있길래, 스스로 진리의 왕이라고 하며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는가? 빌라도는 권력의 가장 높은 자리에서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자기 맘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정말 인생의 참된 진리가 무엇인가?”하는 목마름이 남아 있던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부패하고, 인간에 대한 예의가 사라지고, 묻지마 살인이나 폭력이 난무한다해도 인간의 양심에 녹아 있는 진리에 대한 물음과 갈증은 사라질 수 없습니다. 제가 인문공간 넛지살롱이라는 곳에서 지난 4-5월에는 “예수와 공자”라는 강좌를 하였고, 이번에는 “예수와 장자”라는 강의를 합니다. 어제가 첫날이어서 거기에 온 분들에게 어떻게 오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거기 온 사람이 전부 삶의 의미를 찾고 싶어서 왔다고 답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참된 길을 찾는 존재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올바르게 하고, 제대로 하고 싶어 하는 존재입니다. 떳떳하게 살고 싶지 그 누구도 남이나 속여 가며 그렇게 살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생명사랑가족 여러분! 여러분에게 진리는 무엇입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삶의 의미입니까? 이 질문에 답이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의 풍조에 휘둘려 진정한 진리에 대한 물음은 꺼내지도 못하고 있습니까?
바울 사도 못지않게 복음의 진리를 깨달은 스데반은 오늘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 처형에 내 준 어리석은 유대주의자들을 향해 참 진리의 소리를 외쳤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십자가 처형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앞장서신 것처럼 오늘 스데반도 자신의 설교가 곧 자신에게 위협이 될 줄 알면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외쳤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진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 안에서 삶과 죽음을 뛰어넘는 자유를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돌을 던진 사람들은 스데반을 죽임으로써 자신들이 승리한 줄 알았겠지만, 순교의 역사는 적대자를 변화시켜 전도자로 세우는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예수를 심문하던 빌라도가 예수께 “진리가 무엇이오?”라고 물었듯이, 스데반의 죽음을 보았던 청년 사울(바울)의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저 사람의 진리는 무엇이기에 저렇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인가?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는 그 고통의 현장에서 하늘이 열리고, 영광의 하나님과 그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을 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말아 주십시오.’바울은 이전에 스데반을 만난 적이 전혀 없지만, 지금 이 순간 엄청난 마음의 동요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어떻게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살인자들을 용서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 힘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나도 내 신념에 따라 죽을 수는 있다. 그러나 내가 내 목숨을 노리고, 나를 죽이는 자마저 용서할 수 있을까? 스데반은 나사렛 예수에게서 무엇을 본 것인가?’바울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스데반의 순교에 이어 처음 교회가 큰 박해를 받고, 그 박해로 인해 많은 교인들이 유대 온 지역과 사마리아로 도망하게 되는 일을 보고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박해를 통해 복음의 소식은 널리 전파됩니다. 박해와 고난은 스데반에게는 죽음을 가져온 매우 불행한 것일지 모르지만 교회의 역사는 이 박해와 순교를 통해 새롭게 쓰입니다.
베드로가 설교했을 때는 수천명이 개종을 하였는데, 스데반이 설교했을 때는 수천명이 돌을 들어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박해를 통해 교회는 더욱 커지고 확산되었습니다. 또 베드로와 스데반이 지닌 공통점은 둘 다 자신들이 예수님을 통해 바로 보았던 그 진리, 하나의 진리를 전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보는 교회]
위에서 말씀 드렸지만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는 진리에 근거하기보다, 거짓과 속임수에 근거한 것처럼 보입니다. 세상이 근본적으로 부패하다 보니 참된 것이 도리어 고난을 당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제대로 살려고 하면 도리어 왕따를 당하고, 너만 깨끗한 척 하지 말라고 핀잔을 듣기도 합니다. 그 핀잔과 박해를 견디지 못해 이제는 심지어 교회도 그 세상에 물들어 갑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오늘 요한복음서의 말씀처럼 씨앗으로 심긴 한 알은 자신을 내 주어야 합니다. 씨앗이 자신을 내 주지 않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자신을 희생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내어 주지 않으면서 많은 열매를 기대합니다. 그래서 거짓과 속임수가 판치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풍성한 수확을 하려면, 정말 많은 결실을 맺으려면 자신이 씨앗이 되어 자신을 내어 주는 교인들이 많아야 합니다. 그런 지도자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자신을 내어줄 때, 결국 어떻게 됩니까? 그 씨앗에서 나온 열매들이 바로 그 씨앗과 똑같은 것들 아닙니까? 즉 자신을 내어주는 그것이 자신이 사는 길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하고, 그런 마음으로 섬기는 이는 하나님께서 높여 주실 것이다.
생명사랑가족 여러분! 진리에 깨어 있읍시다. 정직합시다. 바로 보는 눈을 가집시다. 거짓에 속지 말고, 속임수에 휘둘리지 말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으로, 순교자의 마음으로 진득하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갑시다. 예수님을 따라 갑시다.
제가 전에 목회하던 교회의 한 집사님이 50대가 다 된 나이에 음식점을 차렸습니다. 자신의 회사를 창업하고 경영하시기까지 하시던 분이었는데, 이런 저런 사정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모든 사업을 접고 음식점을 차린 것입니다. 평소 요리를 즐겨하고, 또 솜씨도 좋아 많은 사람들이 칭찬을 했지만, 음식점을 차리는 것은 다른 문제여서 저도 조금 걱정을 했습니다. 더군다나 친구와 동업을 한 것이기에 다른 면에서 또 걱정이 되었습니다. 자칫하다가는 친구와도 금이 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음식점에 초보자인지라, 처음에는 이래저래 시행착오도 하였고, 워낙 한국경제가 불경기라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집사님께서 포기하지 않는 것은 음식의 질이었습니다. 정직하게 음식을 만든다는 것이지요. 남들이 다 속여도 자신은 절대 그런 짓은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식당에서는 도가니탕을 끓일 때, 도가니보다도 힘줄을 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 집사님은 한우 100% 도가니만을 사용했습니다. 도가니를 손질하는 과정에서 기름이 엄청 나오고 도가니의 양도 3분의 2로 줄어들지만 절대 속이지 않았습니다. 원가가 많이 들어도 손님에게 제대로 된 음식을 드린다는 원칙만큼은 지킨 것이지요.
그래서 최근에 “먹거리 X파일”이라고 하는 TV 프로그램에서 선정한 착한 음식점이 되었습니다. 관심 있는 분은 일산 백석동에 있는 “미스터 곰탕”집을 방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유투브로 “나는 착한 도가니탕”을 치시면 이 집이 어떻게 음식을 만드는지 잘 볼 수 있습니다. 이 방송이 나간 후 대박집이 되었고, 2시 이전에 그날의 모든 메뉴가 다 팔린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실함과 정직함은 이렇게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집사님의 가게가 TV에 나오지 않았다면 가게가 문을 닫았을지도 모릅니다. 원가를 맞추기가 어려웠을 테니까요. 그러나 이 집사님을 자신이 망해도 원칙은 지키겠다는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입니다.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세상이 뭐라 해도, 우리는 오직 십자가의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발견합시다. 사랑만이 능력이요, 지혜입니다. 거짓과 속임수, 권력과 돈으로 사람을 지배하려 들지 맙시다. 하나님의 주신 양심에 호소하며, 진리의 길로 걸어갑시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가집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어야만 많은 열매가 맺힙니다. 이것이 바로 보는 것입니다. 요행을 바라지 말고 우리 공동체는 정직하게 바로 보고 바로 걷는 공동체가 됩시다. 그 길에서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며, 그 길에서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우리에게 참된 지혜와 능력을 허락하신 하나님! 세상이 아무리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해도, 우리는 넘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바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많은 열매가 자신을 내어준 씨앗 하나에서 나온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며, 바로 나 자신이 그런 씨앗 하나가 되려 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으로써 살고, 자신을 내어 줌으로써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우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먼저 그 길로 가시고 우리 또한 십자가로 초대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세상을 바로 보고, 십자가의 사랑과 진리로 세상을 돌보며 치유하는 생명사랑가족들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