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중 노벨상을 수상한 이는 2000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유일하다. 그런데 노벨위원회 홈페이지에서 수상자를 출생지별로 분류하면 한 명이 더 표시된다. 1987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미국의 화학자 찰스 존 페더슨(Charles John Pedersen)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대한제국 시대였던 1904년 10월 3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이 같은 사실이 국내에서 알려진 후 그는 한때 ‘부산 사나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부산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그에게 한국인의 피는 전혀 섞이지 않았다. 최종 국적이 미국이었던 그는 노르웨이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의 부친인 브레더 페더슨은 해양 엔지니어로서 증기선을 타고 극동에 왔다가 당시 영국 관할 기관이었던 대한제국 세관에 취업했다. 그 후 그는 항해를 포기하고 현재의 북한 북서부에 있는 평안도 운산 광산에서 기계공학자가 되었다.
출생지가 부산으로 분류된 노벨상 수상자 찰스 존 페더슨. ⓒ DuPont
그의 모친인 다키노 야스이는 1874년 일본에서 태어난 후 콩과 누에의 대규모 무역에 종사하던 가족을 따라 한국으로 왔다. 그들이 무역회사를 차린 곳이 운산 광산에서 가까웠던 덕분에 그녀는 브레더 페더슨과 만나 1893년 결혼했다.
찰스 페더슨에게는 두 명의 형이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어린 시절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부산에서 출생한 까닭은 부모가 러일전쟁을 피해 잠시 부산으로 피난 왔기 때문이다. 그가 4살 때 다시 운산으로 갔기 때문에 그의 어린 시절 기억의 대부분은 운산 광산에 맞추어져 있다.
운산 광산에서 화학과의 첫 만남
당시 운산 광산은 미국의 금광 시설로서, 미국인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다. 그곳에 외국어학교가 없었기에 그는 영어를 배워 사용했다. 페더슨에 의하면 그때만 해도 호랑이와 늑대가 돌아다닐 만큼 운산은 외진 곳이었다.
하지만 운산은 그에게 화학과의 첫 인연을 맺어준 곳이기도 했다. 광산에서는 시안을 이용해 금을 추출했는데, 훗날 페더슨은 시안에 금이 녹는 모습을 본 것이 자신과 화학의 첫 만남이었다고 회고했다.
학교에 보낼 나이가 되자 그의 부모는 페더슨을 일본 나가사키에 있는 수녀원 학교에 보냈다. 2년 후인 10살 때 페더슨은 다시 어머니를 따라 요코하마에 있는 세인트요셉칼리지에 들어가 중고교 과정을 마쳤다. 세인트요셉칼리지는 로마 가톨릭 종교 지도자로서 마리아회라고 불리는 제사장과 형제들에 의해 운영되는 예비학교였다.
이후 아버지의 권유로 대학은 미국에서 공부하기로 결정했다. 1922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오하이오 주에 있으며 역시 마리아회에서 운영하는 데이튼대학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한 그는 메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유기화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당시 그를 가르쳤던 지도교수는 박사 과정을 권유했으나 부모에게서 일찍 독립하고 있었던 그는 공부 대신 취업을 택해 1927년 세계적인 종합화학회사 듀폰에 입사했다. 1947년에 듀폰 사의 연구원 중 가장 높은 직책으로 승진한 이후 그는 수잔이라는 여성과 결혼해 뉴저지주의 살렘에 정착했다.
직장과 가정이 안정되면서 그의 과학적 관심은 더욱 다양해졌는데, 1960년 이후 그는 배위 화학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실험을 하다가 비커 바닥에서 이상한 결정체 덩어리를 발견했다. 그 물질에 호기심을 느낀 그는 연구를 시작해 산소 원자 한 개가 탄소 원자 두 개 사이에 끼인 형태의 유기화합물임을 밝혔다.
찰스 페더슨이 발견한 물질은 왕관처럼 생겨 ‘크라운 에테르’라는 명칭이 붙었다. ⓒ DuPont
18개 내지 40개의 탄소와 산소 원자로 이루어진 고리화합물을 합성한 그 새로운 화합물에 페더슨은 ‘크라운 에테르’라는 이름을 붙였다. 분자의 모양이 마치 왕관처럼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가 발견한 크라운 에테르는 알칼리 금속 이온으로 안정된 구조를 형성하는 일련의 특별한 화합물 중 첫 번째 물질이었다.
이 분자들은 이전에 결합을 만들기 매우 어려웠던 이온들인 리튬, 나트륨, 칼륨, 루비듐, 세슘 등과도 안정한 착화합물을 형성할 수 있다. 그의 발견은 이후 미국의 화학자 도널드 크램과 프랑스 화학자 장마리 렌에 의해 더욱 확장됐다.
석사 학위로 노벨상을 수상한 화학자
이처럼 다른 분자와 결합할 수 있는 분자를 개발한 공로로 찰스 페더슨과 도널드 크램, 장마리 렌은 1987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페더슨은 박사 학위를 받지 않고 과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몇 안 되는 인물 중의 한 명이다.
페더슨이 듀폰에서 정년퇴임한 때는 입사한 지 42년 만인 1969년이었다. 듀폰에서 그는 25편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획득한 특허만 해도 65개나 되었다. 은퇴 후 낚시와 원예, 조류 연구, 문학 등을 하며 시간을 보내던 그는 1983년에 골수종 진단을 받았다.
노벨상 수상 당시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스웨덴 스톡홀름에 직접 가서 노벨상을 받은 뒤 ‘상업성이 없는 연구를 계속 지원해준 듀폰 사에 감사한다’는 내용의 수상 소감을 남겼다. 그리고 2년 후인 1989년 10월 26일 그는 조용히 세상과 이별했다.
노벨상위원회의 홈페이지에는 노벨상 수상자들의 수상 당시 국적과 소속기관뿐만 아니라 출생지로도 분류해놓고 있다. 그 이유는 국가마다 국적을 결정하는 원칙이 제각기 달라 국적 표기가 상당히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수상자의 국적이 바뀌는 사례도 빈번하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의 경우 수상 당시 독일 국적을 지니고 있었지만, 스위스‧오스트리아 국적으로 가졌던 적도 있고 최종적으로는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다. 또한 노벨상을 2회 수상한 마리 퀴리도 수상 당시 프랑스 국적이었으나 폴란드에서 출생한 폴란드인이다. 그런데 당시 폴란드는 제정 러시아에 속해 있던 상태라 독립 국가가 아니었다.
이처럼 이중국적이나 미승인국 문제 등으로 수상자를 국적만으로 분류하기에는 애매모호한 사례가 너무 많은 탓에 노벨상 위원회는 찰스 페더슨의 사례처럼 수상자에 대한 출생지의 원칙을 적용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