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주사 복천암에는 세종대왕이 시주한 아미타 삼존불이 있었다.
속리산 법주사의 산내암자 복천암은 금강산 마하연.지리산 칠불암과 함께 우리나라 3대선원으로 꼽는 수도성지이다.
1882년 경허스님이 정진하였으며 1922년 동산스님이 하안거를 나면서 선원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930년 전강스님이 조실을 맡아 수선납자를 지도하였으며 1943년 청담스님과 성철스님도 복천암에서 안거하였다.
당시 먹을 것이 없어 미숫가루와 생식으로 허기를 달래며 정진하였다고 한다.그후 효봉.금오.혜암.고봉.금봉.서암.영월.월인.탄성스님등이 이곳을 찿아 수선안거하고 힘을 얻은 곳이다.
그런 까닭에 호서 제일선원이라 부른다.현재는 월성스님이 선원장소임을 맡아 수좌들을 지도한다.복천선원의 편액은 전 해인사주지이며 신필로 유명한 환경스님의 90세 필적으로 유명하다.
복천암 극락전에는 세종대왕이 신미대사에게 시주한 아미타 삼존불이 유명한데 영조때 화재로 불타고 연기.두책등의 불모가 그 모습 그대로 복원해 모셨다고 전해진다.
아미타 삼존불이 전해져 왔다면 세종과 신미의 관계 한글창제의 비밀이 환하게 밝혀질수 있는데 애석한 마음이다.
1997년 세계 언어학자들은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한글의 우수성을 인정하여 훈민정음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시민단체 문화재 제자리찾기와 일부 국내 학자들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우리나라 국보 1호로 지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어 가고 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별관으로 한글 박물관을 건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한글창제는 우리 민족의 큰 자랑이며 세종대왕의 가장 큰 업적이다. 그런데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반포 8년전에 완성된 한글 문헌이 발견되어 학계에 충격을 주고 있다.
정통 3년에 천불사에서 간행된 원각선종석보 제1권은 일타스님께서 중국 고서점에서 우연히 구입하여 국내에 들여온 문헌이다.
대학자이며 당시 5개국어에 통달했던 신미대사는 인도 범어의 50개 자모음에서 28개를 선별하여 실험적으로 한글을 만들어 책을 펴냈던 것이다.한글창제의 연혁을 풀수 있는 가장 귀중한 문헌이 아닐수 없다.
신미대사는 10세때 사서삼경을 독파하고 출가후에는 팔만대장경을 섭렵하였다.그는 대장경을 보면서 뜻이 명확치 않은 부분을 확인하기 위해 몽골 팔사파 문자의 뿌리인 티벳말을 배우고 티벳말의 모태인 산스크릿트어 범어를 배워 통달하였던 것이다.
원각선종석보의 언해본은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그리고 그 이후 발간된 능엄경 언해등에 똑 같은 방식으로 표기된 것을 확인할수 있다.
이같은 사실과 복천암에 전해지는 복천보장.복천암사적기.영산김씨 족보등에 나오는 내용들을 종합해 볼때 세종대왕은 신미의 동생인 김수온이 전해준 한글 불경을 보고 우리글 창제의 필요성을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 집현전 학사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세종은 신미를 불러 비밀리에 한글창제의 특명을 내렸을 것이다.
신미는 학조.학열등 두 제자를 데리고 복천암에서 이미 정리해둔 한글 자모음과 음운의 체계를 확립하여 세종임금의 이름으로 반포하게 하였을 것이다.
불교가 억압받던
조선시대에 승려의 이름을 앞에 내세우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법주사 복천암에서는 한글창제의 비밀을 밝힐수 있는 자료를 월성스님께서 30년 세월을 지내면서 수집해 놓았다.이번에 월성스님의 상좌인 복천암주지 효담스님께서 ,복천사지.라는 이름으로 자료집을 출판하였다.
이제는 오랫동안 의혹속에 가려졌던 한글창제의 진짜 주인공 신미대사를 역사의 영웅으로 다시 태어났다.
조철현 감독의 영화 나랏말싸미를 통해서이다.
영화가개봉되자..국민일보가 앞장서고 기독교인들의 적극적인 영화반대운동이 조직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동안 오백년 감춰진 역사가 먼지를 털어내고 햇빛을 보는 순간인데 역사왜곡이라는 것이다.
세종으로 열연했던 송강호.신미역할을 훌륭하게소화해낸 박해일 내전에서 불심을 이끈 소헌왕후 전미선..그리고 세종의 두아들 안평과 수양으로 나온 배우들까지 덤테기로 비난을 쑫아 붓고 있다.
영화는 역사왜곡과 반대여론에 휩싸여 휘청거리다가 모두 막을 내리고 말았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수 없다.
경부 고속도로를 박정희 대통령이 만들었다고 역사는 기록한다.
그러나 박정희가 중장비를 몰고 삽질한 것은 아니다.
한글창제 시기에 세종은 몸이 아파 경연에도 참석하지 못했다.그런 시기의 세종이 혼자서 문자를 창제했다? 이제 까지 학계의 의문이었다.
영화 나랏말싸미는 이제까지 학계의 의문에 실마리를 던진것이다.
신미대사는 세종.문종.세조때 3대를 거쳐 왕사 역할을 수행한 분이다.세종은 신미대가 궁궐에 출입할때 말을 타고 들어올수 있는 특혜를 내렸다.자신의 스승을 귀하게 받든 것이다.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경복궁내에 화려한 내불당을 지어 대사를 머물게 하였다.가까이에서 가르침을 받고자하는 세종의 뜻이었다.
내불당 낙성식에 세종이 참배하자 사리가 증식하는 이적이 일어났다.세종은 김수온에게 명하여 오늘의 일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게 하였다.
그때의 기록이 바로 사리영응기이다.세종대왕 기념사업회에서 한글번역하여 펴냈다.
역사왜곡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역사를 먼저 공부하기를 바란다.
임종을 앞두고 세종은 대사를 침전으로 부른다.그리고 "우국이세 혜각존자"라는 칭호를 내린다.
국왕을 도와 세상을 이롭게 하신 지혜로운 스승이라는 뜻이다.국왕을 도와 세상을
이롭게 했다는 말은 훈민정음 창제를 두고 한말이다.
그것도 임종을 앞두고 신미대사에게 후사
를 부탁하면서 내린 칭호이다.
박해진 작가의 열정으로 "훈민정음의길ㅡ신미대사 평전"이 출간되었다.영화제작의 모태가 된 기록물이다.
정찬주 작가의 손으로 신미대사의 한글창제를 다룬 역사소설이 출간되었다.
모두 조선왕조 실록의 기록을 바탕으로 집필한 것이다.
한글은 절에서 태어났다.
"천강에 비친달"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