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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사함의 은혜
성경본문: 레위기 16: 1-5
1 아론의 두 아들이 여호와 앞에 나아가다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니라
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휘장 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아무 때나 들어오지 말라 그리하여 죽지 않도록 하라 이는 내가 구름 가운데에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3 아론이 성소에 들어오려면 수송아지를 속죄제물로 삼고 숫양을 번제물로 삼고
4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세마포 속바지를 몸에 입고 세마포 띠를 띠며 세마포 관을 쓸지니 이것들은 거룩한 옷이라 물로 그의 몸을 씻고 입을 것이며
5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서 속죄제물로 삼기 위하여 숫염소 두 마리와 번제물로 삼기 위하여 숫양 한 마리를 가져갈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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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절기를 지켜야 했습니다. 여기서 절기라함은 이스라엘 백성이 성회로 모여서 지켜야 하는 날을 말합니다.
레위기 23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7가지 절기를 지키라 명하셨습니다.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초막절, 그리고 대속죄일입니다.
이 7가지 절기가 다 중요하지만, 그 중에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절기가 바로 대속죄일입니다. 본문 29절을 보면, 이 날을 '영원히 지키라'고 엄히 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1절을 보면, 이 날은 '안식일 중의 안식일'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32절 이하를 보면, 대제사장은 ‘대를 이어 이 의식을 전수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이 날을 중요하게 강조하는 것일까요?
이스라엘 백성은 나름대로 거룩한 백성답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죄 짓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다 죄를 범하게 되면, 속죄제 또는 속건제를 드려서 그 죄를 씻으려고 힘썼습니다.
그러나 연약한 인간이기에 거룩한 백성이라고 해도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자기도 모른 채 범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부정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혹은 죄가 다 씻기지 않은 채, 혹은 자기도 모르는 중에 죄가 있는 채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습니다.
특히 제사장은 물론이고, 대제사장조차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문제는 저들이 부정한 채 제사를 드려서 성전과 성전의 성물마저 부정해 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상황을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저들을 죄에 노출된 채로 그대로 두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자칫 저들과 척을 져야 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고, 또한 저들을 심판해야만 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1년에 한번 저들의 죄를 묶어서 회개할 수 있는 날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바로 그 날이 대속죄일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나의 회심]이란 글에서 이렇게 간증하고 있습니다.
"5년 전 나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였다. 그러자 나의 전생애가 변했다. 이전에 욕망하던 것을 욕망하지 않게 되고, 오히려 이전에 구하지 않던 것들을 갈구하게 되었다. 이전에 좋게 보이던 것이 좋지 않게 보이고, 대수롭지 않게 보이던 것들이 이제는 중요한 것으로 보이게 되었다.
나는 소위 행운의 무지개를 좇아 살았는데, 그 허무함을 알게 되었다. 거짓으로 나를 꾸미는 것이나 여인들과의 타락한 생활이나 술취해 기분 좋은 것이 더 이상 나를 행복하게 할 수는 없었다."
톨스토이는 예수를 영접한 뒤,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죄사함의 은혜를 체험한 것입니다. 그리고 죄사함의 은혜 뒤에 찾아온 놀라운 변화를 간증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들이 죄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십니다. 죄사함의 은혜를 누리며 살기를 바라십니다.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우리 죄를 대신지게 하시고 저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 죄사함의 은혜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덮어주시는 은혜
본문에 나오는 ‘대속죄일’이라는 말은 원어 히브리어로는 "욤 하 카페림"(yom ha keperim)이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욤"이라는 말은 "날"(day)을 뜻합니다. "하"라는 말은 영어의 "the"와 같은 정관사입니다. 그리고 카페림은 "카팔"이라는 말과 복수어미 "임"이 합해서 된 말입니다.
여기서 카팔이라는 말은 "죄를 덮는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대속죄일이란 하나님께서 이 절기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덮어주신 날이라는 말입니다.
다음으로 '임'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히브리어에서 복수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접미어입니다. 그래서 모든 죄들을 다 덮는다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또 다른 용법이 있습니다. 이 ‘임’이 절대적인 것을 강조할 때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히브리어로 "신"을 나타내는 말이 "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나타낼 때는 "엘로힘"이라는 말을 씁니다. 신들이라는 말이 아니라 모든 신 중의 신이요 유일하게 절대적인 신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볼 때 카페림이라는 말은 죄를 덮되 완전히 덮는다. 철저하게 덮는다라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속죄일이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백성의 죄를 아주 철저하게 덮어주신 날이라는 말입니다.
요 8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음행 중에 잡혀온 여인을 용서해 주시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한 여인을 예수님 앞으로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서 이 여인의 죄상을 낱낱이 들추어냈습니다. 그리고 율법에 이런 여인은 돌로 치라 기록되어있음을 알렸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실 것인지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몸을 굽혀 땅에 손가락으로 무엇인가 글을 쓰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리고 다시 땅에 무엇인가 글을 쓰셨습니다. 사람들이 양심에 가책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씩 둘 씩 그 자리를 도망치듯 떠났습니다.
저들이 왜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땅에 무엇이라 쓰셨을까요? 저들의 마음속에 감춰진 죄상을 쓰셨을 것입니다. 아무도 모를 줄 알았던 자기들의 죄가 하나씩 둘씩 땅에 드러나자 저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워 도망쳤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죄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죄상이 드러난 죄인과 다른 하나는 죄상이 감춰진 죄인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 죄상이 드러난 죄인만 죄인입니다. 그래서 죄상이 감춰진 죄인들은 의인 행세를 합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는 다릅니다. 하나씩 땅에 그 죄상을 써 내려가면 누구도 그 자리에 서 있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서는 모두가 다 죄상이 드러난 죄인들인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 여인이 저지른 죄를 덮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덮어주시는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1년에 한번 대속죄일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모든 죄를 덮어주시는 은혜를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덮어주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둘째, 다시 기회를 주시는 은혜
본문 29절을 보면 이 대속죄일이 언제인가를 정확하게 못 박고 있습니다. 7월 10일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매년 이 7월 10일에 대속죄일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7월 10일에 대속죄일을 지키라 명하셨을까요?
이스라엘의 전승을 찾아보면, 이 날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두 번째 언약의 돌판을 주신 날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출 32장을 보면, 당시 사건을 자세하게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시내산에 올라 첫 번째 언약의 돌판을 받고 내려왔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대노하셨습니다. 모세에게 저들을 진멸하시고 모세로 하여금 새롭게 하나님의 백성이 될 나라를 일으키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중보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화를 거두셨습니다.
이제 모세가 돌판을 받아 내려오면서 저들이 금송아지를 섬기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돌판을 던져서 깨뜨렸습니다. 이미 저들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저들 사이의 언약이 사실상 깨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금송아지를 부수고, 저들의 잘못을 바로 잡았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모세를 다시 시내산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두 번째 언약의 돌판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대속죄일을 이 날로 정해서 지키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죄를 범해서 멸망당해야 했지만 다시 기회를 주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저들이 대속죄일을 지키면서 한 해 동안 자신들의 잘못으로 심판을 받아야 하지만 다시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된 것입니다.
오래 전 미식축구 경기의 명장면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본 일이 있습니다. 조지아 공과대학교와 남가주대학교가 로즈 볼 미식축구 시합을 하였습니다.
전반전 중에 남가주대학교의 로이 리글스라는 선수가 상대방이 떨어트린 볼을 극적으로 집어서, 방어진을 뚫으며 이리저리 피하다가, 어떻게 혼돈이 왔는지 상대방 골문이 아닌 자신의 골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팀 베니 롬이라는 선수가 골문 1미터 앞에서 가까스로 태클을 해 저지하지 않았다면 로이는 필경 자살 터치다운을 했을 것입니다. 결국 이 상황으로 상대에게 터치다운할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습니다.
전반전이 끝나고 로이선수는 양손을 가린 채 코너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로이 선수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궁금해 하고 있었고, 후반전에는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코치는 짧게 한 마디만 말했습니다. “전반전에 뛰었던 선수들이 후반전에도 다시 뛴다.”
모든 선수들이 경기장을 향했지만 로이는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코치님, 저는 못합니다. 저는 당신과 우리 팀과 제 자신을 수치스럽게 했습니다. 밖에 있는 수많은 관중의 조롱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라며 울었습니다.
이 때 코치는 로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습니다. “로이, 다시 나가 뛰어라, 게임은 이제 절반밖에 지나지 않았다.” 로이는 다시 나갔고, 후반전에 조지아 팀 선수들이 감탄할 만큼 탁월한 경기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코치처럼 다시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비록 하나님을 실망시켜드린 일이 있어도 하나님 앞에 죄를 자백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기회를 주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대속죄일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시 기회를 주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우리에게 다시 기회를 주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셋째, 세워주시는 은혜
본문 1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론의 두 아들이 여호와 앞에 나아가다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니라" 앞의 10장에 기록된 사건을 되짚고 있는 것입니다.
레 10장을 보면, 아론의 두 아들 제사장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께서 명하지 않으신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불에 타 죽은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일로 대제사장인 아론이 백성들 앞에 면이 서지 않게 되었습니다. 영적 지도자들의 약점이 노출되어 리더십이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론의 다른 두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제사장으로 세우셨고, 아론에게 여전히 대제사장직을 수행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대속죄일을 대제사장인 아론으로 하여금 집례토록 세워주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 오늘 본문을 보면, 대제사장인 아론이 대속죄일을 집례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위해 속죄하도록 했다는 점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대제사장인 아론은 수송아지로 자신을 위해 속죄제사를 드려야 했고, 숫양으로 자신을 위해 번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인 아론은 이 절기를 집례할 때, 대제사장 의복이 아니라 세마포로 된 옷을 입어야 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도 죄인임을 백성들 앞에 확인시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비록 대제사장도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 대속죄일의 모든 집례를 주관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대제사장도 죄인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래서 실수도 할 수 있고, 손가락질 받을 만한 일도 할 수 있지만 회개하게 하신 뒤에 다시 저를 세워주셨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세워주십니다. 그리고 소중한 그릇으로 사용하십니다. 저들이 완벽해서가 아닙니다. 저들이 죄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저들이 실수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다만 회개하게 하신 뒤에 세우시고 그리고 귀하게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주님께서 세우신 위대한 두 사도가 등장합니다. 전반부에는 베드로이고, 후반부에는 바울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 앞에 치명적인 잘못을 범했던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베드로의 경우,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곁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베드로를 따로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잘못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뒤, 내 양을 먹이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초대교회를 이끌도록 지도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바울의 경우, 앞 장 서서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많은 신자들을 옥에 가두었을 뿐 아니라 죽음으로 내 몰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교회에 큰 고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다메섹까지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길을 나선 바울을 따로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방인의 전도를 부탁하셨습니다. 이방교회의 지도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을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비록 죄짓고 허물이 있는 대제사장이지만 회개케 하여 대제사장직을 수행토록 하셨습니다. 오늘도 비록 우리가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죄사함 받고 귀한 일꾼으로 세워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문에서 빼놓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31절을 보면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에게나 죄사함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나 덮어주시고, 다시 기회주시고, 세워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죄 때문에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죄사함의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괴롭혀야 합니다. 우리 안에 죄가 남아 있는지 스스로를 살피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죄가 발견되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를 자시는 반복하지 않게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No Pains No Gains!" 우리가 우리 안에 죄가 있음을 알지도 못하고, 안다 해도 우리 스스로를 너그럽게 용서하고 합리화해서는 결코 죄사함의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를 괴롭게 해야 죄사함의 은혜가 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죄사함의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덮어주시는 은혜, 다시 기회를 주시는 은혜, 그리고 세워주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에게 이 죄사함의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