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골퍼 중에 “백상어”라는 별명을 가진 호주 출신 그렉 노만(Greg Norman)이라는 골퍼가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참 냉정하고 엄격하게 노만을 키웠다고 합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1996년 유에스 마스터즈(U. S. Maters) 대회에서 노만은 초반에 앞서 갔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라운드에서 영국의 닉팔도(Nick Paldo)에게 역전 당해서 우승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경기 후 팔도가 노만에게 다가 가서 악수 대신 포옹을 했습니다. 그러나 노만은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어리둥절해 하는 기자들에게 노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 경기에 져서 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전에도 많이 졌고 앞으로도 많이 질 것입니다. 나는 지금껏 살아 오면서 이런 포옹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울었습니다.” 부흥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식어진 사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는 관계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삶이 힘들고, 외롭고, 아플 때에도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사야 49장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의 자녀들을 사랑하시는지 그 사랑에 대한 말씀을 읽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정된 사람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1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여호와께서 나를 부르셨고, 내가 아직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내 이름을 부르셨다.” 이것을 사람들은 예정(predestination)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운명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상황이 어떻게 변해도, 우리가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 처한다고 해도 우리를 예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사람으로 예정해 놓으셨습니까?
그 말씀이 3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이스라엘아, 너는 내 종이다. 내가 너를 통해 내 영광을 나타내겠다(You are my servant, Israel, and you will bring me glory).” 또 5절에는 “나는 여호와의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The Lord has honored me). 다시 야곱을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며 이스라엘을 자기에게로 모이게 하시려고 나를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자기 종을 삼으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혹시 여러분 중에 내가 누구인지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자기 자신에 대하여 자신감을 잃어 버린 사람이 있습니까? 하는 일마다 실패를 경험한 사람이 있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에 대하여 전혀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으로 예정해 놓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중에 종이라는 말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종이라는 말은 “servant”라는 말입니다. servant라는 말은 “섬기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God’s servant라고 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라는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한 없는 영광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는 존귀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servant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할 사람들로 예정해 놓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에베소서 2:10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미리 마련하신 대로 선한 생활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창조하신 작품입니다(For we are God's masterpiece. He has created us anew in Christ Jesus, so we can do the good things he planned for us long ago).”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servant로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하나님께서 예정해 놓으신 존귀한 존재들인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성경 말씀은 먼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실 비전을 보여 줍니다. “내가 너를 온 민족의 빛으로 삼아, 세상 끝까지 나의 구원이 이르게 할 것이다.” (6절) 마치 모세를 선택해서 이집트에 400년 동안 억류되어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너를 온 민족의 빛으로 삼아 세상 끝까지 나의 구원을 선포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너”가 과연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문맥으로 보아 “너”는 이스라엘 민족들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혹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그렇게 집단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읽고 있는 우리 자신들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렇게 성경을 해석해도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어저께 말씀 드린 것처럼,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민족을 불러 모으시고 구원하시겠다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다시 그의 사명을 이루시기 위해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가 가지고 있는 사명을 제자들에게 위임(commission)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나를 위한 말씀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 이상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여러분 중에 자신의 인생의 비전을 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저는 이렇게생각합니다. 크리스천의 인생 비전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이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든지 그 비전은 성경의 체크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경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비전을 주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너를 온 민족의 빛으로 삼아, 세상 끝까지 나의 구원이 이르게 할 것이다(6절)” 이 말씀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시는 비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상당히 큰 비전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기도는 구체적으로 “하나님, 2010년 사순절 새벽 기도에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보여 주신 이 큰 비전을 어떻게 이루어 나가야 합니까?” 이런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비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통해서 이루시겠다고 보여 주시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을 본 사람들은 그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고, 사명이 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여러분 각 사람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이 비전을 어떻게 이루어나가실지 말씀 드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 비전을 이루기 위해 감당해야 할 부분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치 그림 짜 맞추기 퍼즐과 같습니다. 우리 각 사람은 이 하나님의 큰 그림의 작은 piece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piece들이 짜맞춰져서 하나님의 그림을 완성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각자가 맡은 사명을 감당해 나가야 하는 하나님의 servant들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큰 그림을 완성하시려고 하십니다. 그 일을 위해서 여러분을 예정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존귀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잘 몰랐는데, 어른이 되고 나이가 들어가니까 부모님의 사랑을 알 것 같습니다. 참 부모님의 사랑과 배려가 고마웠다는 생각이 문득 들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부모님은 간혹 저에게 아무 것도 해 준 것이 없다고 미안해 하십니다. 저를 이만큼 키워주셨는데,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고,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습니까? 만일 제가 지금 와서 제 부모님에게 “왜 저를 낳았습니까? 왜 저를 사랑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렇게 따지고 든다면, 그게 말이 되겠습니까? 지금의 제 존재 자체가 부모님의 사랑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지금의 우리 존재가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 맞나?” 하고 의심할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고마워하고 감사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그 하나님의 사랑이 14-16절 말씀에 이렇게 나옵니다. “너희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셨다.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고 한다. 여자가 자기의 젖 먹는 아이를 잊겠느냐? 자기가 낳은 아이를 불쌍히 여기지 않겠느냐? 혹시 어머니가 자기 아이를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겠다. 보아라, 내가 네 이름을 이렇게 내 손바닥에 적었다.”
어머니의 사랑의 위대함을 성경 말씀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식을 잊어 버리는 어머니가 어디 있느냐고 합니다. 혹시 그런 어머니가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내 자녀를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자녀들의 이름을 손바닥에 적었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 말씀을 머리로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으로 이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부흥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흥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깨달아지면 그 사람의 심령은 부흥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그의 사랑을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으로 비유했습니다. 나는 결코 내가 예정한 나의 servant, 나의 존귀한 사람들을 잊어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하시고서도 그 약속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시고,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증명하셨습니다.
그 사랑이 요한복음 3:16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獨生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같은 말씀이 로마서 5:8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또 같은 말씀이 요한일서 4:9-10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