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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19:145-152 여호와여 내가 : 칼빈
본문은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그대로 구원해 주시기를 호소하는 내용입니다.
1. 본문 145-146절은 “(145) 여호와여 내가 전심으로 부르짖었사오니 내게 응답하소서 내가 주의 율례를 지키리이다
(146)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증거를 지키리이다”입니다.
1) 본 절은 하반절과 연결되어 선지자가 바라고 부르짖는 목적을 보여주려 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지자는 율법을 지키려는 강한 열심이 불붙어 계속 이 문제를 하나님께 간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 구절은 같은 사실을 되풀이함으로서 우리들이 다른 견해를 갖게 합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하나님께 자기의 기도를 들어 주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또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의 증거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다만 막연하게 ‘부르짖는다’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선지자는 자기가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고 다만 이 세상의 자녀들이 여러 가지를 좇으므로 마음이 흩어져 있는 동안에도 자기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기에 모든 마음을 오직 하나님께만 두었음을 보여주고 있을 따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모든 선한 것들의 창조자이심을 마지못해 인정하기에 바로 여기서 형식적인 기도가 나옵니다.
이런 생각이 다윗으로 ‘자기는 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말하게 해 주었습니다.
다윗은 이 간구를 드릴 때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고 더 큰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헌신코자 하는 각오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찬송의 제사를 통하여 섬김을 받으신다고 말씀하셨음에도 다윗은 단지 냉담하고 마지못해 찬송을 드림으로 하나님의 이름에 욕을 돌리고 있는 위선자들과 구별하여 자기의 생활과 행위를 통하여 감사를 드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2) 146절은 전혀 새로운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선지자는 보다 분명하게 말합니다.
상반절에서는 자기가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말하고 하반절에서는 여기에 덧붙여 하나님께 기도로 자기의 복을 간구했다고 말합니다.
시편 119 편
따라서 선지자는 평안하게 되든 극심한 위험으로 죽음을 당하게 되든 간에 자기가 계속해서 평안하게 될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은 하나님을 자기 복의 보호자로 지켜 주시는 자이심을 충분히 인식하고 한결같이 하나님을 의지하였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2. 본문 147절은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입니다.
명사 נשף(네세프)가 여기서는 어울리지 않게 ‘황혼’, ‘땅거미질 무렵’으로 번역됐습니다. 이 말은 새벽녘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황혼이라는 단어 crepusculum 은 라틴어 creperus 즉 ‘의심스러운’, ‘분명하지 않은’ 에서 온 것이므로, 빛과 어둠 사이에서 분간하기 어려운 시간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이 말이 특별하게 훌륭히 선택된 말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다만 신자들은 석양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때를 가리키지 않고 동틀 무렵 아직 빛이 분명하지 않은 때를 가리키고 있다고만 알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말은 새벽 미명부터 기도 하는 뜨거운 열성을 나타낼 것입니다.
‘부르짖는다’ 라는 동사는 항상 진지한 개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또 마음의 뜨거움이나 열심을 큰 음성으로 나타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지자는 자기의 성급함을 말함으로 자신의 인내를 더욱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일찍부터 기도를 드렸어도 자기는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기도를 즉시 들어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을 비방하고 불평을 늘어놓는 불신자들처럼 피곤에 지치지 않았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간절한 소망 중에 인내함으로 참된 기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울 사도도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고 권면하면서 우리가 기도를 드릴 때는 그 기도의 목적이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갖게 해 주는데 있으므로 우리들의 소란스러운 감정을 억제시켜야 한다고 일깨워 줍니다.
이 구절 끝에 나오는 “말씀”이라는 단어는 공연히 덧붙여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눈앞에 두어야만 우리의 부패한 성품의 포악함을 억제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본문 148절은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 입니다.
선지자는 파수꾼이 밤을 지키는 것보다 주의 말씀 묵상을 더 열심히 했음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동사 שוח(슈아흐)가 ‘이야기하다’ 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봅니다.
시편 119 편
이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이 말씀의 뜻은 선지자가 의식이 아니고 형제들의 복을 위하여 자기는 쉬지도 않으면서 교통하는 교훈을 바라고 있었다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묵상” 이라고 하는 것이 이 구절과 더 잘 어울립니다.
밤에는 하나님의 법에 대해서 대화는 할 수 없고 다만 조용하게 자기가 전에 배웠던 것을 기억하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율법을 묵상하지 않고 밤을 보내는 일이 없었습니다.
4. 본문 149절은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내 소리를 들으소서 여호와여 주의 규례를 따라 나를 살리소서” 입니다.
상반절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자기가 들은 것 중 유일한 소망의 근거였다고 말합니다.
성도들은 어떤 복을 간구하든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근거로 출발해야 합니다 하반절의 “규례” 라는 말씀도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은 그의 인자하심을 그의 말씀 속에서 나타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부터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확신을 얻어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필요를 느끼고 하나님께서 기꺼이 자신을 인생들에게 말씀해 주시고 그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알려지게 해주신 말씀에 자신을 직접적으로 내맡깁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에게 특별하신 긍휼을 베풀어 주셨다는 것을 확신하고 선지자를 본받아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보여달라고 구해야 한다는 것을 배웁시다
어떤 사람들은 “규례”란 말을 ‘방법’ 또는 ‘관습’이라고 해석합니다.
이유는 하나님이 늘 사용하시는 방법은 그의 모든 백성들을 은혜로 대하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해석에 전혀 반대할 의사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본문의 내용이 매우 자연스럽게 우리가 취한 해석을 보여주고 있는데 반해 무리요, 억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뿐 아니라 선지자가 ‘살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자기가 비록 죽은 자들 가운데 있다 해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벗어날 수 있을 것을 입증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마땅히 자신의 불완전함을 깨닫고 자기 생명은 허무하여 한 순간도 살기를 바랄 수 없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끔 자기 종들에게 정당한 이유로 그들의 기도를 들으사 무덤에서부터 죽음에서부터 생명으로 들어가게 하신다고도 말했습니다.
시편 119 편
5. 본문 150절은 “악을 좇는 자가 가까이 왔사오니 저희는 주의 법에서 머니이다” 입니다.
“좇는 자” 로 번역된 히브리어 רודפי(로드페)는 구문상으로 “악”으로 번역된 ןמה(짐마)와 연결되었습니다.
라틴어에서는 “악” 이라는 말이 소유격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절에서는 악인들이 해를 끼치려고 가까이 오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주석가들이‘좇는 자가 악에 가까이’ 또는 ‘접근했다’고 번역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으나 ןמה(짐마)가 ‘악’보다는 ‘악의’ 또 ‘강퍅’이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기에게 격렬한 원한을 품고 있는 자들이 등 뒤에서 쫓아와 자기를 고통당하게 하기 위해 그 격렬함을 나타냄으로서 그들은 하나님의 법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며 의(義)와 공평에 무관심한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선지자에게 가장 비참한 상태는 자기 원수들이 하나님께 대한 모든 경외심과 그의 율법에 대한 존경을 벗어 버리고 자기에게 손을 펼쳐 들고 죽이려 달려들고 있음에도 하나님께서 곁에 계시사 자기를 보호해 주시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6. 본문 151절은 “여호와여 주께서 가까이 계시오니 주의 모든 계명은 진리니이다” 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이 슬픔에 눌려 있는 것을 보시면 적당한 때에 그들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생각하고 스스로 용기를 얻습니다.
바울 사도도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빌4:5) 라고 말했습니다.
선지자는 이 구절을 끝맺음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에 결코 버리시거나 실망시키시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언약을 통해 언제나 자기 백성들의 복을 염두에 둔 사실을 일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손이 원수들의 공격에서 우리를 구해 주시기 위해 준비하고 계신 사실을 확신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보호자가 되시겠다고 하신 약속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닌 사실을 확신해야 할 것입니다.
7. 본문 152절은 “내가 전부터 주의 증거를 궁구하므로 주께서 영원히 세우신 것인 줄을 알았나이다” 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절을 ‘내가 오래 전부터 주의 증거를 알고 있었나이다’ 로 번역합니다.
시편 119 편
우리는 이 해석을 전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취한 의미가 더 좋다고 봅니다.
즉 선지자는 하나님의 증거가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을 뿐 아니라 이러한 깨달음을 바로 그 계명 자체에서 얻게 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라틴어 전치사 de(from)가 나타내고 있는 의미를 מן(민) 이란 분사 또는 ב(베트)라는 문자로 표현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주의 계명에서 ‘그 증거가 영원히 서 있는 것’을 배운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느 한 시대뿐이 아니라 영원토록 신뢰도와 한결같음에서 특출하다고 하는 것은 실로 믿음의 중심이 되는 문제입니다.
다른 것에는 영원한 구원에 대한 소망이 들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이러한 불멸성에 대한 확신을 우리의 마음 속에 뿌리박도록 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내적인 계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그의 말씀의 확실성을 인쳐 주시지 않으면 그 확실성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항상 동요를 일으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지자가 이 사실을 말씀에서 배웠다고 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영으로 비춰 주실 때는 그와 동시에 그 말씀 속에 숨겨져 있는 은밀한 진리들을 말씀의 거울 속에서 영원토록 빛나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119 편
시119:153-160 나의 고난을 보시고
본문 말씀은 주의 종인 선지자가 환란 중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1. 본문 153절은 “나의 고난을 보시고 나를 건지소서 내가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 입니다.
선지자는 여기서 자기 자신을 실예로 들어 하나님을 섬기고 경외하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그 경외에 대한 보상이 없어도 실망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이 땅에 거하는 신자들의 모든 처지도 하나님이 주시는 복 중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신자들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때에도 당황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신자들은 고난의 때에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생각함으로 만족을 누리고 자기 앞에 하나님을 향해 기도의 문이 열리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선지자는 마치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에 대한 댓가를 지불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처럼 율법 지킨 사실을 자랑치 않고 다만 자기는 하나님의 종 중에 하나임을 말할 뿐입니다
이것은 선지자가 마치 다른 곳에서 자기의 소망에 대한 말을 한 경우와 비슷합니다.
“내가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 라고 한 이유를 들어서 하나님께 자기의 고난을 보시고 나를 건져주시라고 간구한 사실은 현재형으로 특히 강조되어 있습니다.
선지자가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버리는 대신 유혹과 맞서 싸우는 것과 심지어 하나님이 고의적으로 자기에게서 떠나신 것처럼 보이는 경우에도 하나님을 찾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특별한 용기를 가진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2. 본문 154절은 “주는 나의 원한을 펴시고 나를 구속하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입니다.
이 구절 말씀에서 다윗은 자기가 당한 고난은 특별한 종류의 것으로서 악하고 파렴치한 자들의 손에 부당하고도 형편없는 대접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나의 원한을 펴시고” 라는 말씀은 원한을 떠맡는것, 또는 재판석에서 어떤 사람을 변호하는 것, 또는 압제당하는 사람의 권리를 지켜 주는 것과 그 의미가 꼭 같습니다.
상반절에서 선지자는 자기 원한을 해결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자기가 부당하게 격렬한 비방 또는 정교한 술책으로 압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시편 119 편
선지자는 ‘구속받기를’ 구함으로서 자기에게는 저항할 힘이 없다는 것, 또 원수들의 올무에 빠져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아니고는 소망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하반절의 ל(라멧)이란 문자는 그 모양이 비슷한 כ(카프) 대신 취한 것으로 보입니다.
선지자는 앞에서 비슷한 기도를 드릴 때에도(149절) 이 문자를 사용했습니다.
다윗은 구속주의 손으로 건짐 받기 전에는 족쇄에 잡혀 있듯이 원수들에게 붙들려 있다고 탄식함으로 정당한 근거로 하나님께 자기 생명을 회복시켜 달라고 간구합니다.
이때 다윗 자신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비천한 대우와 멸시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반절에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라는 말씀도 매우 적절한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참된 생명의 소망이 비춰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구속주가 되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신 데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지기를 사모하면서 하나님 말씀에서 용기를 얻습니다.
이 말씀에 또 다른 의미가 있다면 다윗은 단순히 자기 육신의 생명 얻기만을 구하지 않고 영적인 생명을 간구하여 용기를 가지고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더 불러일으키고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려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3. 본문 155절은 “구원이 악인에게서 멀어짐은 저희가 주의 율례를 구하지 아니함이니이다” 입니다.
세상이 공정한 심판주 되신 하나님의 은밀하신 섭리에 의해 주관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던 선지자는 여기에서는 악인들이 구원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구원이 악인들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교리를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선지자 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기도의 확신을 갖게 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멸시하는 자들에게서 돌이키시는 사실 만큼이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종들에게는 도움을 베풀어 주실 준비를 갖추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자기의 원수들이 형통하여 의기양양해 있을 때에도 선지자 자신은 오히려 믿음으로 마음을 굳게 하여 그 원수들의 모든 즐거움이 정죄를 받게 되고 멸망케 되리라는 확고부동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인들이 세상에서 자기가 바라는 대로 형통케 되어 기름으로 살찌우며 교만해져 있을 때마다 우리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이 교리, 곧 믿음의 방패를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배웁시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이유로 마침내 비참하게 망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필연적인 사실에서 반대되는 교훈을 생각해 낼 수 있습니다.
시편 119 편
순전한 신자들은 신실하게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나아가는 동안 마치 도살자들 앞에 놓인 양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으나 이들의 구원은 특별하신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의 보살피심과 지키심 아래에 있기에 틀림없이 성취되고야 만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선지자는 다음 구절에서도 계속 말씀하고 있습니다.
4. 본문 156절은 “여호와여 주의 긍휼이 크오니 주의 규례를 따라 나를 소성케 하소서” 입니다.
선지자로 하신 이 말씀은 자신을 하나님의 긍휼에 맡긴 사람 외에는 달리 평안을 얻을 수 없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그뿐 아니라 선지자는 보다 큰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용기를 얻기 위해 하나님은 긍휼하시다고 할 뿐 아니라 그 긍휼하심이 심히 크시다고 찬송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볼 때, 선지자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만족을 누리고 다른 어떤 도움을 선지자가 자기 자신의 공로에서 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유의해야 할 사실은 선지자는 많은 시험들을 가볍게 보아 넘기는 대신 이 하나님의 풍성하신 긍휼로 시험들을 강력하게 대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크오니” 로 번역하든 ‘많으오니’ 로 번역하든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주의 규례를 따라 나를 소성케 하소서” 라는 선지자의 기도는 언약들을 가리킵니다.
“규례” 라는 말의 원어를 어떤 사람들은 ‘방법’ 또는 ‘관습’ 이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번역이 다른 번역보다 적합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소망이 없이는 생명을 기대하거나 하나님께 간구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여기에서 다시 한번 확증하고 있습니다.
선지자가 이 사실을 반복한 이유는 우리가 이 사실을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자기 종들에게 약속하신 모든 은혜에 우리 자신을 담대하게 내맡기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대한 크고도 다양하신 성경 말씀의 교훈을 항상 우리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언약을 맺어주신 까닭은 하나님이 그렇게 행하시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거나 우리가 그것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의심이나 불신이 우리 마음을 빼앗아가 버림으로 우리 기도의 문은 곧 닫혀져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약속해 주시게 된 유일한 동기는 하나님 자신의 본성에 기인하고 있는 긍휼하심 때문인 사실을 철저히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조금도 주저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나아가 간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선하신 뜻에 따라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시편 119 편
5. 본문 157절은 “나를 핍박하는 자와 나의 대적이 많으나 나는 주의 증거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입니다.
선지자는 자기가 비록 많은 어려움을 당했으나 옳은 길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에 은혜에 의한 선지자의 대단하고 단순한 불변에 대한 증거였습니다
우리가 의인들 가운데 있을 때에 선한 일을 한다는 것은 그런대로 용이한 일입니다.
그러나 악인들이 우리를 괴롭히고 공개적으로 우리에게 강력한 공격을 가해오며, 우리의 재물을 빼앗아가고, 속임수를 써서 우리를 에워싸며, 비방으로 우리를 공략해 올 때에도 우리가 순결을 지키고 이리들과 함께 울부짖지 않기란 심히 어렵습니다.
또 악인들이 형벌에 대한 아무런 두려움이 없이 자기들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흔들게 만드는 무서운 동력과 같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악인들을 못 본 체하실 때 우리를 그들의 먹이로 두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주의 증거”라는 말을 거룩하고 의로운 생의 법칙이라는 의미로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주의 언약’ 이라는 의미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여호와여 악인들의 행위는 나로 하여금 무죄한 길에서 돌이키도록 시험하였나이다. 그러나 나는 돌아서지 않았나이다. 오히려 주의 은혜를 믿는 나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고 주의 구원을 인내하며 기다렸나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없어서는 안 됩니다.
부당하게 고통을 당하는 자가 선행(善行)으로 원수들의 원한을 맞서 나가며 온갖 앙갚음의 행동을 억제시킨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다고 하면 이러한 자기 선행의 의를 행하는 것만으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내어맡기고 하나님을 자기 구속주로 모셔 들이는 자가 아니면 아무도 선한 행위만을 가지고서는 결단코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선한 행위를 자기 구원에 필요에 관련해 말하면 절반이 아니라 전적으로 불충분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산 믿음의 역사를 가지고 구하는 성도들이 받습니다.
한편 하나님께서 자기 구속주 되신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언약에 자기 마음을 지탱해 나아가는 자는 누구든지 선으로 악을 이기려고 힘쓰게 될 것 또한 사실입니다.
6. 본문 158절은 “주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는 궤사한 자를 내가 보고 슬퍼하였나이다” 입니다.
이 구절 말씀에서 선지자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법이 악인들에게 멸시당하는 사실을 볼 때에 선지자는 거룩한 열성이 불타올랐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석가들 간에 일치하지 않는 단어가 이 본문 속에 하나 있습니다.
시편 119 편
그것은 우리가 ‘꾸짖었다’ 라고 번역한 אתקוטטה(엣코타타) 란 동사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이 ‘논쟁하다’ 또는 ‘다투다’ 라는 뜻을 종종 의미하고 있는 קוט(쿠트)의 ‘히팟엘’ 형이라고 보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은 ‘죽이다’ 또는 ‘멸망시킨다’ 란 뜻을 가진 קטט(카탓)에서 왔다고 봅니다.
우리는 첫 번째 해석을 받아들이는데, 그 이유는 이 해석을 학식 있는 사람들이 타당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자기가 하나님의 법에 대한 열심이 불붙어서 악인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 비방함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다투다’ 란 동사는 자기 스스로 괴로움과 의분을 느끼는 사실을 의미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을 공개적으로 책망한 사실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내가 전율했나이다.’
또는 “내가 보고 슬퍼하였나이다” 로 번역합니다.
정녕 어느 누구라도 먼저 스스로 초조해지고 마음에 슬픔을 느끼는 자 외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유지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과 다투지 않습니다.
이러한 거룩한 감정의 지향성은 항상 외부적인 행동을 낳습니다.
이러한 거룩한 생각의 지향성이 결국은 의지적 언행으로 옮겨 간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선지자가 보여준 실예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자들에 대한 불쾌감을 가져야 하며 우리의 마음은 ‘꾸짖는’ 데까지 뜨거워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우리 안에서 슬픈 느낌을 갖도록 합시다.
다음은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담대히 악인들의 무례와 교만을 억제시키도록 힘씁시다.
끝으로 악인들이 우리에게 노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주저하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7. 본문 159절은 “내가 주의 법도 사랑함을 보옵소서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신 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경건됨을 말할 때에는 자신의 공로를 자기 믿음의 근거로 삼지 말고 하나님은 자기 종들을 무례하고 악한 자들과 구별하여 그들이 전심으로 자기를 찾고 있기에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즐거이 하나님의 법을 사랑한다는 사실은 택함을 받았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이 사랑은 성령의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전혀 정도에 지나치는 일이 없이 자기가 체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간구한 것을 응답받을 수 있다는 더욱 분명한 확신을 갖기 위해서 매우 적절하게 자신의 경건을 말합니다.
시편 119 편
동시에 우리는 댓가가 없고 자발적인 사랑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법을 진정으로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자발적인 헌신을 요구하십니다.
선한 생활의 시작은 모세가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 그를 사랑하며.....”(신10:12) 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말씀은 율법의 요약에도 되풀이 되어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 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에 다윗은 하나님의 법은 존귀한 것일 뿐 아니라 기쁨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율법을 지킴에 있어 우리가 마땅히 자발적인 순종으로 시작한다면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보다 더 즐거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
한편 우리의 마음이 이렇게 기울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인자와 아버지 같은 사랑이 필연적으로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높은 지위의 사람들에게 순전한 계명에 순종하게 하면 그들은 도망쳐 버릴 것입니다.
따라서 분명한 사실은 사람이 율법의 교훈 속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의 마음을 돌이켜 율법을 사랑하는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선지자가 빈번이 되풀이해 드린 “나를 소성케 하소서”라는 기도는 선지자가 자기 생명이 무상함을 잘 알고 있기에 사람이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매순간마다 그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실 때뿐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아마도 선지자로서는 계속해서 많은 죽음에 둘러싸여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끝까지 더 간절히 자신을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께 맡겼을 것입니다
선지자는 자기 믿음을 그 생명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두었습니다.
“주의 인자하신 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라는 이 말씀을 볼 때 우리는 선지자가 앞 절에서 자기가 하나님의 법을 사랑했다고 말할 때 자기의 공로를 내세우려는 데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었는가 를 알 수 있습니다.
8. 본문 160절은 “주의 말씀의 강령(시작 - 칼빈)은 진리오니 주의 의로운 모든 규레가 영원하리이다” 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선지자가 말하려는 내용을 파악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명사 ‘시작’이 가리킨 것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연구하기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그 말씀에서 하나님의 진리가 현저하게 비춰지기에 이 시작은 마땅히 말씀의 시작이라고 불려져야 한다고 해석합니다.
시편 119 편
이 해석에 매우 유익한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의 조명과 감화로 이해력의 눈을 뜨게 되면 곧 우리 육신의 눈에 진리로 보이는 것보다 하늘의 교훈에 우리의 눈을 돌이키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약간 다른 의미를 부여하여 매우 적절한 의미를 말합니다.
‘주의 말씀은 처음부터 확실하고 과오 없는 진리며 또 끝까지 계속될 것이라’입니다. 이 두 구절은 서로 매우 잘 어울립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말씀에 대해 태초부터 신실하시었습니다.
또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에 영원토록 변치 않고 신실하실 것 또한 불변의 법칙입니다.
“규례”란 말씀은 하나님의 사역을 가리키고 하나님의 교훈을 가리키지 않는다고 보는 해석에 우리는 전혀 반대할 의사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문맥상 조화를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거룩하고 신실하신 하나님 말씀이라는 의미로 해석합시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하시기 시작할 때부터 항상 신실하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기 백성들의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이 신실함의 경과가 이토록 한결같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하고 신실하십니다.
시편 119 편
시119:161-168 방백들이 무고히 나를
선지자는 핍박 중에서도 주와 주의 말씀을 두려워하며 사랑하며 주께 감사합니다.
1. 본문 161절은 “방백들이 무고히 나를 핍박하오나 나의 마음은 주의 말씀만 경외하나이다” 입니다.
선지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험이 극심하고 심각했으나 자신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 의해 선한 사람이 취해서는 안 될 일에 휘말려들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넘어뜨릴 수 없는 권력을 가진 방백들이 우리를 적대시하고 괴롭힐 때에는 절망에 빠지기 쉽습니다.
또 우리를 보호해 주어야 할 방패인 바로 그러한 자들이 그들의 권세를 우리를 괴롭히는데 사용하는 것을 생각하면 고통이 더욱 더 가중됩니다.
진실로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에 의해 고통 받을 때 하나님의 손이 자기를 대적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선지자의 경우에는 이것이 더욱 더 심각했습니다.
선지자는 택한 백성의 고관(高官)이신 하나님께서 그러한 영광된 자리에 높이사 마침내는 교회의 기둥이 되게 하신 자였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보다 더 제한적인 해석을 내리기를 좋아합니다.
곧 그들은 다윗이 그리스도의 권면을 따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을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마10:28).
이 말씀은 비록 그 때에 그리스도의 입을 통해서 말씀되지는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 시대에 성도들의 마음에 확고히 자리잡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말하는 의미는 선지자가 원수들의 어떠한 위협과 공갈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데서 돌아서지 않은 것이 됩니다.
그러나 선지자가 자신의 꿋꿋함을 찬양함은 더 넓은 의미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 실예로 이사야가 전했던 말씀을 살펴봅시다(8:12,13).
“그들의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 가 그것입니다.
시편 119 편
이 구절에서 선지자는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는 이 세상의 모든 공격들을 능히 물리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일반적으로 보여줍니다.
선지자는 성도들에게 그렇게 하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리에 서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언제나 그들의 보호자가 되사 그들의 모든 염려를 자기에게 맡기도록 하고 계신 사실을 확신시켜 줍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만족하고 자신의 평안을 구하기 위해 죄가 되는 것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에 이르게 됩니다.
선지자는 본문에서 방백들의 부당한 강포로 압제를 당하였어도 자기는 이 슬픈 상황 에 굴복당하지 않고 자기가 응당 해야 할 일을 생각했으며 원수들의 사악함에 보복함으로서 사악한 자들의 행위를 본뜬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함’이 자신을 극기(克己)하는 것이나 부당한 일을 꾀하지 않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줍니다.
우리는 이미 חנם(힌남; 무고하게)라는 말씀이 강조를 위해 사용됐음을 앞서 말했습니다 폭군들이 무고하게 다만 자기들의 악한 생각대로 무죄한 자들을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보다 큰 시험이기 때문입니다.
선한 성품을 지닌 사람과 고상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을 무고히 괴롭힌 자를 볼 때 누구보다도 더 많이 분노를 발하기 쉽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다른 사람들과 맞서서 악을 행하거나 시험을 이기기 위해 자기가 자신의 공동체에서 점유하고 있는 특별한 위치를 벗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 자신을 자제했다는 뚜렷한 증거입니다.
비록 불의한 방백들이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맡겨주신 권력을 포악하게 비록 남용한다 할지라도 반란을 일으켜 사회의 평화나 질서를 파괴하지 않도록 화평을 유지해야 된다는 것을 우리들도 기억해야 합니다.
2. 본문 162절은 “사람이 많은 탈취물을 얻은 것처럼 나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나이다” 입니다.
전쟁에서 이긴 자들은 원수들에게서 탈취물을 갖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을 주는 것이 없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전승자가 탈취물을 얻는 것은 승리의 영광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승자가 갑작스럽게 탈취물을 갖게 될 때에는 더욱 큰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다윗이 자기가 깨달은 하늘의 교훈을 전승자에게 주어지는 탈취물에 비교하고 다른 부귀에 비교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시편 119 편
다윗은 이 말씀을 통해서 다른 방도로는 도저히 얻을 무한히 수 없는 큰 기쁨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얻어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다윗은 하나님 말씀 안에서 자기 모든 기쁨을 얻어 낼 수 있는 것으로 알았고, 자기 믿음을 굳게 해줄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해 했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다윗은 타락한 본성의 욕망을 자기 마음에서 버리지 않고는 이렇게 될 수 없었습니다.
다윗이 복된 삶의 모든 집합체를 주의 말씀 에 두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영생의 보배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다윗은 이것이 자기에게 값없는 선택을 통해서 주어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3. 본문 163절은 “내가 거짓을 미워하며 싫어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 입니다.
선지자는 자기가 하나님의 법에 부여된 영광이나 평판을 들을 만한 자격이 있는 것으로 여기는 잘못된 생각을 지워 버렸다는 사실을 좀 더 명확하게 말합니다.
왜 선지자가 율법에 대한 자기의 사랑이나 헌신을 말하기 전에 “내가 거짓을 미워하며” 라고 말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말하고 지나 가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본능적으로 위선이 들어 있습니다.
또 우리는 본능적으로 헛된 것이나 거짓된 것을 좇으려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이 그러하기에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깨끗케 하기 위하여 성의를 기울여 율법에 대한 사랑이 자리 잡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제 선한 생활의 시작과 의(義)의 첫 단계가 거짓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필연적으로 순결보다 더 뛰어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뒤따라 나옵니다.
이것이 주요 위치를 차지하지 않고는 다른 모든 것들은 쉽게 사라지지가 않습니다.
“미워하며 싫어하고” 라는 말씀은 공연한 반복이 아닙니다.
이렇게 반복한 의도는 거짓을 미워하되 평범한 미움만으로는 부족하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를 죽도록 미워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려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한 사랑과 거짓에 대한 미움이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라면, 주의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자는 모두 속임수와 위선에 감염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4. 본문 164절은 “주의 의로운 규례를 인하여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 입니다.
“일곱 번씩”은 선지자가 계속 또 매우 빈번히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마치 시험에 빠질 때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잠24:16)라고 한 말씀과 같습니다.
시편 119 편
‘하나님의 심판’(규례-한글)이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내리시는 형벌의 의미로 사용되었고, 때로는 하나님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섭리 일반을 가리키는 의미로도 사용되었기에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가 하나님이 악한 자들을 벌하시고 온 세상의 다스리심을 통해서 자신의 공의로우심을 입증하셨기에 하나님을 찬송한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이 주의 율법을 가리킨다고 보는 자들과 의견을 같이 합니다.
그것은 처음 해석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시인이 이 시편 말씀에서 주제로 말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찬양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용이주도하게 주의 율법을 묵상했을 때 의와 지식을 완벽하게 분간하게 되었고 주를 아는 지식이 자기 마음 속에서 찬송과 감사가 터져 나오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토록 열심히 하나님을 찬양한 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법을 존경심으로나 존귀한 마음으로 말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인류에게 부여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로 여겼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런 찬양은 단순한 경이감에서 나온 게 아니라 ‘감사의 원리’ 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오류가 없는 하늘의 진리의 씨로 말미암아 복되고 끝없는 생명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보다 사람에게 더 귀한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께 이 주의 진리에 대한 감사를 드릴 수 있도록 이 보배를 받은 사람은 백사람 중에 한 사람 정도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오히려 세상에는 사악한 배은망덕함이 가득 차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진리를 무례하게도 배척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 진리를 멸시하거나 경홀히 여깁니다.
또한 사람들은 주의 말씀에서 자기들에게 불쾌한 것이 발견되면 이를 갈기까지 합니다
5. 본문 165절은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입니다.
만일 “평안”이라는 말을 생활의 형통함이라든가 복된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본다면 이 말과 대치되는 ‘장애물’이라는 말은 ‘환난’ 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종종 이러한 의미로 사용합니다. 이 말씀의 뜻은 이렇습니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는 온 세상이 멸망당해도 항상 형통한 생활을 영위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동등한 설득력을 지닌 다른 해석도 있습니다.
성도들이 큰 평안을 누리는 것은 자기들의 인격과 생활이 하나님께 용납되는 것임을 깨달아 스스로 선한 양심을 가지고 평안을 누리기 때문이라는 해석입니다.
이 양심의 평온한 상태, 이 마음의 고요함은 마땅히 복된 삶의 정점으로 여겨집니다.
시편 119 편
이러한 상태는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하는 때와 하나님의 아버지 같은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비춰질 때에 이루어집니다.
선지자는 평안을 율법에 대한 사랑에서 얻는다고 올바르게 가르쳐 줍니다.
다른 것을 의지하는 자마다 사소한 바람만 몰아쳐도 두려워 떨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하반절의 “장애물”이란 말씀은 마음의 모든 근심과 불안을 가리키는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는 모든 자들이 쓰라리게 당하는 고통과 괴로움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는 자들은 자신의 부패한 성품을 좇아 행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변덕스러움을 좇습니다.
그러나 “평안”과 “장애물”, 을 어떤 의미로 보든지 간에 선지자가 말하려는 것은 동일한 것으로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 자는 비참한 자인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 자들은 자기들의 평안함을 노래해도 갑자기 자기들의 길에서 뛰어나오는 많은 장애물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 속에서 이 평안은 노예처럼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 같은 분으로 보여주어 영원한 구원의 확신으로 우리의 마음을 평안케 해주지 않으면 우리는 율법에서 단맛을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모든 세속적인 사람들이나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은 마땅히 자기의 부패함과 강퍅한 반역 때문에 형벌을 받게 됩니다.
이들은 모두 자기 자신들을 죽이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주의 말씀을 맹렬히 대적할수록 멸망의 순간까지 더욱 더 고통을 당합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성도들도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내적인 위로는 그들의 모든 슬픔을 씻어주며 그들에게 힘을 주어 모든 장애물들을 극복하게 하며 그들을 붙들어 연약해지지 않게 해줍니다.
6. 본문 166-167절은 “(166)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바라며 주의 계명을 행하였 나이다
(167) 내 심령이 주의 증거를 지켰사오며 내가 이를 지극히 사랑하나이다” 입니다.
선지자가 이 말을 자주 되풀이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찬송을 받으시는 권세와 구원해 주시는 직분이 하나님께 있음을 입으로 말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 없다고 하면서도 오랫동안 시험에 시달리게 될 때에는 변치 않고 한결같은 소망을 보여주는 자를 이 세상에서 만나보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시편 119 편
말씀의 순서를 볼 때, 우리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율법에 대한 사랑을 지켜 간다면, 모든 것보다 하나님 안에서 구원을 구하게 된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이 우리 마음에서 없어지거나 우리의 인내가 흔들림을 당한다면 우리는 이리저리 방황하게 되고 더 이상 선을 행하려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 가장 귀중한 것은 십자가와 고난을 인내하여 자신을 묵묵히 하나님께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위선자들에게는 환난이 생기지 않는다면 자기들도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지자가 우리에게 만일 올바른 생활을 하고자 한다면 마음 속에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있으라고 권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세상의 쾌락이 올무로 우리를 붙들게 되면 우리는 곧 용기를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의 마음이 넘어지는 이유는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서만 나온다는 소망을 굳게 믿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는 끝까지 하나님을 섬기고 믿음으로 우리 앞에 있는 미래를 비추어 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인내를 가지고 우리 안에 의에 대한 사랑을 불러일으킵시다.
우리가 끝까지 인내할 수 있는 것은 인내의 영을 가지고 하나님의 품 속에 감추인 우리의 구원을 받는데서 나오기 때문이요, 감각적인 눈으로 볼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그의 손을 거두어 가시는 것으로 보인다 해도 마침내 하나님은 자기에게 구한 모든 자들에게 신실한 보답을 해 주시는 분이신 사실을 우리는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167절에 선지자가 이 교훈을 “내 심령이 주의 증거를 지켰사오며” 로 확증합니다.
심령이라는 말 속에서 선지자는 더 강력하게, 자기의 마음 속 가장 깊숙한 곳에 율법의 교훈을 간직했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이처럼 특별한 기쁨으로 율법을 지킨 이유는 선지자가 이 구절 끝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율법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못해서 그리고 노예처럼 율법에 복종하는 자는 마음 속 은밀한 곳에 율법을 받아들이지 못하므로 머지않아 자기에게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율법을 멀리하게 됩니다.
7. 본문 168절은 “내가 주의 법도와 증거를 지켰사오니 나의 모든 행위가 주의 앞에 있음이니이다” 입니다.
선지자는 강력히 말했던 것을 이제는 단순하게 되풀이하여 그 이유를 밝힙니다.
시편 119 편
선지자는 앞 절에서 “심령” 이라는 말만 단축시켜 말하였으나, 여기서는 “계명” 과 “증거”를 서로 연결시켜서 자기는 단지 정당하고 거룩한 생활의 규범만을 말한 것이 아니라 모든 구원 언약을 포괄적으로 말했다는 사실을 더욱 더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교훈을 그 의로운 계명 때문에 달게 여기지 않고 또 매혹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으면 역시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긍휼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계명과 증거를 지키는 이유로 내세운 것은 “나의 모든 행위가 주의 앞에 있음이니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인 것이 없음을 잘 알고 있는 사실이 선지자로 하여금 거룩한 생활을 하도록 용기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지(全知)하신 감찰 아래서 살지 않으면 우리는 곧 육체의 변덕스러운 욕심에 따라 이리저리 방황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 다음과 같은 의미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을 자신의 중보자이시요 자기 생활의 심판주로 삼았습니다.
성경 말씀에서는 자신의 모든 행위를 하나님께 맡기는 자, 즉 사람 앞에서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행하는 자를 가리켜 ‘하나님 앞에서 행한다’ 고 말합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선지자는 자기가 사람들 앞에서 모든 실수나 책망받을 것이 없도록 애쓸 뿐 아니라 하나님께 건전하고 신실한 마음을 드리려고 힘쓰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어떤 의미로 해석하든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마음을 감찰하사 하나님의 눈에는 아무것도 감추인 것이 없으시므로 그 하나님을 묵상할 때만이 하나님의 법을 올바로 지키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이 마지막 구절은 또 항변의 형태로 볼 수도 있습니다.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님은 내가 주의 법을 신실하게 지킨 것에 대한 최상의 증인이시니이다.
그 이유는 주께는 아무것도 감추인 것이 없기 때문이니이다.’
그러나 선지자는 자신의 거룩한 생활의 원리가 자기 생활을 하나님께 집증시키고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언약에 고정시키는 것이었음을 말한다고 보는 것이 더 좋습니다.
시편 119 편
시119:169-176 여호와여 나의 부르짖음이
본문에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고 구원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1. 본문 169절은 “여호와여 나의 부르짖음이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입니다.
선지자는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던 것과 동일한 말을 되풀이합니다.
즉 다른 모든 것들을 능가한 가장 중요한 소망으로 다른 것들을 제 2차적인 것으로 돌릴 수 있게 한 것은 하나님의 법의 연구에 정진(精進)한 때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선지자는 “부르짖음” 이라는 말로 주의 법 연구에 진지한 사실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정당하고 합리적인 것으로서 ‘우리가 다른 모든 것들보다 염려한 것, 즉 판단력의 빛으로 하등 동물들 보다 우리가 우수하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이 소망에 불이 붙음으로 세상의 모든 유익을 버릴 수 있게 하였나이다’ 라고 선지자가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의 말씀대로” 란 표현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다윗이 하나님께 ‘하나님의 약속대로 자기에게 판단력을 주시옵소서’ 라고 간구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둘째로는 다윗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의 규범대로 형성되어 율법의 교훈을 따르는 것 외에는 지혜롭게 되지 않을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 의미로 보는 것이 합당한 사실은 다음 구절에 나오는 “주의 말씀대로 나를 건지소서” 라는 말씀이 이 해석에 반대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두 구절의 의미가 서로 일맥상통한다고 하면 언뜻 보기에는 다윗이 율법의 규범에 따라서 지혜롭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좋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미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다윗은 ‘자기에게 판단력을 주심으로 언약을 성취하시옵소서’ 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런 댓가없이 자기 백성들에게 모든 복을 베풀어 주시고 성령으로 밝혀 주시고 참되고 건전한 지식에서 뛰어나도록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다른 언약들보다 가장 뛰어난 언약으로 여겨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교훈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면에서 유익을 줍니다.
시편 119 편
첫째로 우리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빛으로 우리를 인도하사 금수와 같지 않게 해주시는 것보다 더 바람직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둘째로 우리는 이 말씀에서 이와 같은 교훈이 성령의 특별한 은혜인 사실을 배웁니다.
다윗이 자기 스스로의 본성을 인해서나 또는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 요구했다면 이와 같은 기도는 허사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언약에 관해 한 말씀을 고려해 볼때 성도들은 하나님이 친히 끝까지 소경의 길잡이 되시며 어린아이와 겸손한 자들의 주(主)와 스승 되기를 거절치 않겠다고 말씀하신 대로 성령의 조명을 받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데 주저하면 안됩니다.
2. 본문 170절은 “나의 간구가 주의 앞에 달하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건지소서” 입니다.
선지자는 자기에게 올바른 판단력의 은사가 임하기를 간구한 후에 이제는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하심으로 하나님이 하늘에서 손을 펼쳐 도움을 베푸시지 않으시면 자기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많은 위험 속에 빠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우리는 고난이 우리에게 압박해 올 때마다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신하기로 선지자는 어떤 특별한 고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지자는 자기의 생활 속에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일반적인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자기 구원자가 되어 주시지 않으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수많은 죽음에 사면으로 가로막혀 있다는 사실을 재차 음미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우리가 모든 위험에 처해 있을 때 우리를 도와 주실 준비를 갖추고 계신 사실을 확신시켜 주신 것은 우리에게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위로가 됩니다.
3. 본문 171절은 “주께서 율례를 내게 가르치시므로 내 입술이 찬송을 발할지니이다”입니다.
다윗은 여기서 앞 절에서와는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자로 삼아 주시는 것과 하나님의 학교에서 올바른 것을 배울 수 있도록 해 주신 사실을 얼마나 고귀한 특권으로 여기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다윗이 이것을 특권으로 말했다면 능란한 말로 주께 감사드리기에 바빴을 것입니다.
선지자가 사용한 נבע(나바)란 말은 샘에서 물거품이 올라오는데서 취한 비유입니다.
이는 단순히 ‘말한다’는 의미를 가진 게 아니라 많은 말을 쏟아놓는 것을 가리킵니다.
시편 119 편
선지자는 앞서 자기 소망의 간절함을 기도로 보여준 것처럼 이제는 자신의 찬송이 오직 하늘의 진리로 철저하게 물들기만을 바라는 자신을 증거하게 될 것으로 말합니다.
선지자는 다시 한번 우리가 진실로 지혜롭게 될 수 있는 길은 첫번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극을 받아 자기 자신의 생각을 따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둘째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판단력을 열어 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라는 교훈을 말합니다.
선지자는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서로 연결시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자신의 법을 내놓으실 때는 우리가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배울 수 있게 하십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조명과 감화를 따라 내적으로 우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이 판단의 영으로 우리 마음을 조명하지 않거나 깨달음의 영의 감화로 우리 강퍅을 고쳐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귀를 외부의 소리에 기울일 수 없습니다.
가르치는 자의 수고가 덕과 능력이 겸비하기 전에는 아무 효험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에 대해 참되게 배우는 자들은 은밀한 계시라는 사실 때문에 율법과 성경 말씀을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여전히 초보적인 문자에서 서성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광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발로 무참하게 짓밟힘을 당하게 되지 않고는 자신의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지 못합니다.
4. 본문 172절은 “주의 모든 계명이 의로우므로 내 혀가 주의 말씀을 노래할지니이다” 입니다.
여기서 시인은 자기가 하나님의 법에서 유익을 얻게 될 때에는 또한 이 하나님의 법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르치겠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순서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기 전에 먼저 그 하나님의 진리를 우리 마음 속에 뿌리를 내리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 믿음의 분량에 따라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자기 형제들과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의 용도와 열매를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공동적인 교화를 위해 사용하시고 계신다는 교훈을 매장시켜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는 일반적으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법을 선포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시편 119 편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든 의가 온 세상에 널리 퍼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의로우시다’ 라는 칭호를 사용해서 찬양할 때에, 단순히 자기가 하나님의 계명을 인정한다는 의미만을 나타내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선지자는 이 규범이 인류를 주관하게 되지 않으면 온 세상은 다만 처참하고 무서운 혼란 속에 빠져들게 될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히브리어 동사 ענה(아나) 가 의미하는 뜻이 ‘답변’이든 ‘증거’이든 간에 여기서는 ‘말하다’는 뜻보다 더 적합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내 혀가 주의 말씀을 증거 또는 응답하리니 그 이유는 의에 대한 참 지식이 오직 주의 말씀에서만 나타남이니다’ 라는 뜻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는 ‘주의 말씀에’ 라고 읽기 위해서 אמרתך(임라테카)란 말에 ל(라멧)이란 문자를 보충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5. 본문 173절은 “내가 주의 법도를 택하였사오니 주의 손이 항상 나의 도움이 되게 하소서” 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율법의 교훈에 맡겼기에 주의 손이 도움으로 펼쳐지기를 간구합니다.
선지자는 이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하나님께 복종시켜서 하나님의 말씀의 다스림을 받게 하는 신자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도와 주심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누구든지 좀 더 진실하게 선한 사람이 되어 보고자 하는 사람은 그만큼 더 사단에게 괴로움을 많이 당하고 더 많은 원수들로 사면에서 에워쌈을 당하게 되는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번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맛보고 계속해서 그 결심을 지켜 나아가는 신자를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그 신자들에게 더 많은 도움을 주십니다.
선지자는 하반절의 “택하였사오니” 라는 말씀으로 자기가 하나님의 법에 자신을 드리는데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큰 싸움이 없이는 율법을 사랑함에 자기의 마음을 기울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은 육체의 타락한 성향에 따라 여러 것들을 쫓아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택하였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하늘의 교훈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무식해서나 아니면 분별이 없는 열성 때문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변하기 쉬운 마음을 가졌고 여러 가지 육체의 충동을 받고 있기에 의도적으로 자기 마음을 하나님께 복종토록 해야 합니다.
시편 119 편
6. 본문 174절은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며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복된 환경을 바라고 있으면서도, 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 없다고 공언하지는 않지만 복된 생활과 형통함에 대한 개념은 혼돈되고 명확하지 못한 생각 때문에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려는 신자는 심히 적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야망을 좇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전적으로 탐심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욕심에 불이 붙어서 하나님에게서 더욱 더 멀어지는 현실이 매사에 자기들에게 더 좋을 것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평안하기를 바라는 사실과 비례해서 이곳 저곳에서 그 평안을 구함으로 하나님의 노를 그만큼 더 격발시킵니다.
히브리 원문은 소망의 불변성, 또는 한결같은 사실을 나타냅니다.
문자 그대로 보아 “내가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며”라는 말씀은 단지 그 사모함이 지금 시작한 것이 아닌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다음으로 우리가 인내하며 구원을 사모해야 하는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방식은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위로와 새 힘을 구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약속된 은혜를 근거로 삼아서 위로를 얻지 않는 신자들은 사소한 어려움만 닥쳐도 요동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현명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생각을 가까이 하여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소망에서 돌아서지 않게 합니다.
7. 본문 175절은 “내 혼을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의 규례가 나를 돕게 하소서” 입니다.
동사가 ‘살 것이다.’ ‘찬송할 것이다’ 는 미래형이기에 정당한 해석이 있습니다.
‘주여 주께서 내게 생명을 부어주실 때, 나는 주를 찬양함으로 내가 배은망덕하지 않음을 보여드릴 것이니이다’ 가 그것입니다.
만일 이 의미가 옳다면, 선지자가 누리는 기쁨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함으로 자기의 생명이 계속해서 평안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생명이 사망의 그늘에 감추어져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기필코 평안함을 유지하고 자랑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신실하신 보호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한 확고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소생케 하시는 은혜에서 나옵니다.
시편 119 편
그러나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 말씀을 가정법으로 번역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다 일반적인 해석을 따르도록 합시다.
다윗은 자신의 생명이 지속되기를 간구합니다.
동시에 다윗은 자기가 살기 바라는 목적이 하나님을 찬송코자 함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도 그런 뜻입니다(시115:18).
하반절에서 규례라는 말을 계명으로 이해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자기가 수없는 환난에 넘어지기 쉬움을 깨닫고 하나님께 자기를 해하려는 악인들을 특별하신 섭리로 억제하셔서 자기를 보호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성도도 악인들의 억센 성향 때문에 세상에서 이리 가운데 있는 양처럼 지냅니다.
세상의 일들이 심히 혼란된 상태에 있고 우리의 안전이 여러 가지 다양한 폭풍 가운데서 위험을 당하고 있는 것과 같을 때 우리의 눈을 들어 하나님의 판단을 쳐다보고 거기에서 해결책을 구하라고 하시는 말씀은 매우 유익한 교훈입니다.
그러나 이 시에서 “규례” 라는 말은 흔히 하나님의 계명을 가리키는 말로 쓰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이 말씀을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해석한다면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구원을 주는 직분과 특권을 부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속임수로 언약을 맺으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위급한 일이 생길 때마다 자신의 손의 역사를 사람들이 느낄 수 있도록 나타내심으로 자신의 말씀을 확증하고 비준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하나님의 법을 자기에게 도움이라고 불렀을 때 하나님의 말씀의 유효성(有效性)을 분명하게 찬양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혹 이 말씀은 율법을 지키는 것을 가리킨다고 해석해도 우리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의미로 해석하면 선지자는 ‘여호와여 내가 체험한 의로우심과 내가 주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가졌던 열성으로 나를 지켜 주소서’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8. 본문 176절은 “잃은 양같이 내가 유리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 입니다.
선지자는 여기서 마치 자기가 사단의 함정에 빠져 보기라도 한 것처럼 자기 죄를 고백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견해를 가지는 과오를 범합니다.
이런 해석은 자기가 주의 법을 잊지 않았다고 말한 하반절과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시편 119 편
이 문제를 해결함에서 선지자가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양처럼 방황하였으나 부르심을 받은 후부터는 거룩한 생활을 했다고 이해하는 것은 만족스런 해결책이 못됩니다.
또는 선지자가 방황하고 있을 때에도 경건한 감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완전히 포기하려던 것을 억제시켰다고 하는 이해도 역시 빈약한 해석입니다.
상반절과 하반절은 동시에 일어난 사실을 말하고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또 이 두 구절은 ‘~ 할지라도’ 또는 ‘~ 에도 불구하고’ 라는 접속사로 연결되어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쉽습니다.
‘비록 우리가 잃은 양처럼 방황하였으나 그럼에도 하나님의 법을 잊지 않았나이다.’
선지자가 말하려는 의미는 ‘자기의 방황은 원수들의 맹렬하고 포악함의 추격을 받아 이리저리 큰 두려움 중에 옮겨 다니면서 자신을 숨겨 줄 자를 찾았다’ 는 것입니다.
다윗이 원수들에게 추격을 받아 도망다닐 때 피할 곳을 도무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습은 분명히 다윗을 가리키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매우 타당할 것입니다.
다윗으로서는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에게 좇겨나 도망다니면서도 결코 하나님의 법에서 돌아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리들이 어느 곳에서고 그를 좇아다녔으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숨겨 주사 안전하고 평안한 자리를 달라고 기도하여 마침내는 더 이상 이리저리 방랑자처럼 방황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다윗은 매우 정당한 근거에서 비록 많은 죄악에 선동을 받았음에도 자기는 결코 하나님 경외하기를 그만두지 않았다는 말을 들 을 수 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특별한 행위라기보다 다윗의 일반적인 생활의 길을 가리킵니다.
다윗은 간음죄를 범했을 때 얼마동안 무감각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이 고난을 당할 때 거룩한 인내로 참으면서 의를 계속 좇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