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 서구는 서해안을 면하고 있어 과거 여러 개의 섬이 있었고, 복잡한 해안선을 따라 갯벌과 바닷물이 드나들었습니다. 하지만 간척사업, 경인고속도로 개통, 발전소 건립 등 빠른 속도로 산업화가 진행되었습니다. 다만 변치 않는 것은, 사라져버린 섬과 바다 위에도 새로운 마을이 생겨났고, 여전히 서구 사람들은 함께 어울려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선사시대 검단 고인돌부터 고려의 경서동 녹청자 가마터, 500여년 신현동을 지켜온 회화나무와 같은 서구 지역 곳곳에 숨어있는 보물 같은 이야기를 담아 전하고자 합니다. |
▲가현산 (인천서구문화원, 2009, ‘검단의 역사와 문화’)
아침 일찍부터 귀찮게 굴던 매미 울음소리는 잦아들고 어느새 저녁나절엔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해진 바람과 함께 가을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닫는다. 계절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순리대로 늘 어김이 없다. 더위와 추위가 사나워지기는 했지만 각 계절을 느낄 수 있는 순간들은 언제나 찾아온다. 한 해, 한 해의 기억들은 계절에 녹아들어 쌓인다.
각자의 나이만큼 계절을 보냈다고 한다면, 인천 서구에서 가장 오랫동안 계절의 변화를 보아온 것은 무엇일까? 아마 선사시대까지는 올라가야 할 것이다. 선사시대는 현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혹독한 기후였으니 지금처럼 아름다운 사계절을 느끼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재난과 전쟁 등 인간들의 환란 속에서 오롯이 제 자리를 지켰어야 했다. 인천 서구 검단 대곡동에 가면 그 주인공을 만날 수 있다. 바로 가현산 골짜기 황곡마을에 있는 ‘고인돌’이다. 긴 시간만큼이나 쌓였을 고인돌에 담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본다.
황금 물결 출렁이던 황곡마을 고인돌
대곡(大谷)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가현산 큰 골짜기에 자리한 황곡마을에는 고인돌이 있다. 가현산을 배후에 두고 앞으로는 작은 하천이 흐르고 좌우에는 나지막한 구릉이 호선을 그리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이다. 황곡마을은 황골이라고도 불리는데, 가을이 되면 논 전체가 황금 물결로 출렁거려 붙여졌다는 지명유래가 전한다. 한편 대곡동에서 김포시 양촌면 마산리로 통하는 고개는 주변에 고인돌이 많아서 ‘돌고개’라고도 불렸다.
▲대곡동 황곡마을 (인천서구문화원, 2009, ‘검단의 역사와 문화’)
고인돌이 있는 마을에서는 보통 돌 숭배가 확인되는데, 황골마을 역시 고인돌이 앉아있는 형태를 보고 마을의 길흉을 점치기도 했다. 통상 고인돌이 높게 오른 곳의 자연부락은 그해 풍년이 들고 마을 사람들이 잘사는 반면, 돌이 주저앉은 곳은 그해 흉년이 들고 가난해진다고 여겼다. 그래서 때로 주민들은 덮개돌 밑에 돌을 괴어 놓기도 했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런 풍속은 사라진 지 오래되었고 현재 마을에는 크고 작은 공장들이 들어서 있다. 공장과 민가, 논밭이 혼재해 있어서 이곳에 고인돌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고인돌이라는 명칭은 덮개돌 아래에 돌을 괴는 형태에서 비롯한 것으로, 지석묘(支石墓)라고도 부른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형태로, 지상에 큰 덮개돌이 있고 그 밑으로 고임돌, 무덤방 등이 있는 구조이다. 대부분 무덤으로 쓰이지만, 공동무덤을 상징하는 묘표석(墓標石) 또는 종족이나 집단의 모임 장소나 의식을 행하는 제단(祭壇) 혹은 기념물로 사용되는 것도 존재한다.
강화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시지정 기념물 제33호, 검단 대곡동 고인돌
고인돌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이 있다. 청동기시대, 무덤, 계급, 돌, 강화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등이다. 강화 고인돌은 지난 2000년 고창, 화순의 고인돌 유적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런데 인천에는 강화 이외의 지역에서도 고인돌을 볼 수 있다. 미추홀구 주안동·문학동 고인돌, 중구 운남동 고인돌 그리고 서구 대곡동 고인돌이다. 특히 서구 대곡동의 고인돌은 밀집도가 높고 다수가 발견되어 주목된다.
▲검단 대곡동 고인돌 (인하대학교 박물관 제공)
▲검단 대곡동 고인돌 (인하대학교 박물관 제공)
검단 대곡동 고인돌은 인천시와 김포시 경계에 자리한 가현산 북동쪽 말단부에 위치한다. 고인돌은 5개의 작은 군집을 이루고 총 99기가 분포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인하대학교 박물관, 2005, ‘대곡동 지석묘: 인천 대곡동 지석묘 정밀지표조사보고서’). 이후 경기도박물관, 인천시립박물관 등에 의한 조사를 통해 기존에 알려진 대곡동 고인돌군의 규모와 범위가 훨씬 큰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가현산을 경계로 한 김포시 마산리에도 22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인근 석모리에도 고인돌이 조사되었다. 이렇듯 대곡동 일대에 분포하는 고인돌은 대략 120여기가 넘어서는데, 이는 강화도의 고인돌과도 견주어도 적지 않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표조사 이후 발굴조사 단계로 나아가지 못해 하부구조 및 출토유물 양상을 비롯한 구체적인 성격 파악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현재는 고인돌 가운데 일부가 인천시 기념물로 지정되어있을 뿐이다. 다만 검단의 원당동, 검단동, 불로동 등 주변에서도 청동기시대 취락유적 등이 조사되어 인천 서구의 검단 일대에 청동기 문화가 번성했던 것을 증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