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 너는 몇 살이니? 8살? 그럼 이번에 초등학교 갔겠네? 어디학교 다니니~?”
“발도르프학교요....”
“뭐? 어디?” 하면서 나를 쳐다본다.
한창 입학 시즌인 3월 초 여러 번 겪은 상황이다.
이 곳 전라도 쪽에 올 해 문을 연 무등자유 발도르프에 우리 아이가 다니게 된 건 어찌 보면 운명이라고 까지 해도 되지 않을까...
아이가 태어나고 2개월째...
뭐가 그리 급했을까. 전문 자격증을 막 딴 후 아이를 임신해서 직장에 취직을 못했던 게 자격지심이었을까... 급하게 사람이 필요하다는 곳에 면접을 보고 일을 시작했다. 아이는 혼자 되신 지 오래된 시댁의 먼 친척 어른이 봐 주시기로 하고. 많이 사랑해 주시긴 했지만... 엄마가 돌보지 않아서 였을까... 우리 아이는 애착관계 형성이 잘 안 되서 오히려 아무한테나 울지 않고 다가가는 낯가림 없는 아이가 되었다. 그리고 조금 자라자 등 뒤에서 불러도 돌아보지 않고 자기 관심사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자기주관이 너무나 뚜렷하다고 해야 하나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꼭 해야 하는 아이로 자랐다.
남들은 애가 순한데 호기심이 정말 많다고 얘기했고, 이러저러한 아이 성향을 보니 초등학교에 다니게 되면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막연하게 들었다. 서울대를 나와도 취직이 고민이라는 요새 젊은이들을 보면서 우리 아이가 대학에 갈 나이가 되면 대학이라는 게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 버릴 수 있겠다 싶었고 뭐든 스스로가 행복해 할 만한 일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초등학교 입학 직전 1월.
지인이 유치원 졸업행사를 다녀와서 아이가 예사롭지 않은 모습을 보여 고민하다가 광주 인근 담양에 있는 대안학교에 보내기로 했다는 말을 들었다. 어디? 발도로프? 발도르프?
홈페이지를 찾아봐도 안 보이고... 물어물어 다음 까페에서 찾아내어 한 번 쓱 둘러보고 맘 속으로 우리 아이도 일반 학교에서 적응 못하면 대안학교에 보내야 하는데 여기도 알아놓자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우리 아이 유치원 졸업 전 선생님과 면담을 하는데 선생님 말씀이 아이가 같은 또래에 비해 애교도 많고 눈물도 많고 한데 집중력이나 수행능력이 떨어지는데 학교 가면 잘 할 거라고 하신다. 3년을 같은 유치원에 보내면서 조금씩 자라는 아이가 좀 독특하고 좀 어린양이 심하고 유난히 부산하게 호기심이 많다고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3년간 유치원 초청 잔치 행사가 있을 때마다 겨울 즈음 심해지는 틱 증상에 우리 아이는 뭘 억지로 시키거나 단체 율동 같은 걸 하면 스트레스를 받는가 보다고 생각했었고...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시점에 확인 점검 차 소아신경정신과를 방문했는데 틱이 동반된 과잉행동장애 증후군 진단을 받았다. 심리검사 상 과도한 불안과 강박장애가 동반된 모습이라고 했다. 2주일 간 매일 저녁 처방해 준 약을 먹이면서 날마다 울면서 보냈다. 아마도 우리 아이는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나를 더 걱정하고 상처받았던 듯하다. 최소량의 약을 먹으면서 아이의 틱은 더 심해지는 듯 했고 오히려 점점 평소의 모습보다 심하게 막무가내 떼를 쓰는 모습을 보였다. 선생님 말씀대로 일반 초등학교에 보내면서 계속 약을 먹이고 사회에 적응하도록 해야 하는 게 맞는지 약을 중단하고 대안학교에 보내서 아이가 편한 맘으로 학교를 다니도록 해야 맞는지... 정작 아이는 입학면접을 끝낸 집 앞 공립초등학교에 가겠다고 하는데 눈에 보이는 듯 펼쳐진 미래가 너무나 걱정스러웠다.
그리고는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찾아간 시골의 작은 학교.
선생님 두 분과 만나 정식 입학 면접도 아닌 그냥 무작정 우리 이야기를 쏟아놓고 아이를 봐달라고 했다. 그런 황당할 수도 있는 부탁을 들어주신 선생님들은 한참 내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아이가 왔다갔다하면서 보이는 행동들을 관찰하시고는, 배움으로 들어가는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는 아이이지만 많은 면들이 개선의 여지가 있고 계속 약을 먹지 않아도 될 것처럼 보인다고 하셨다. 왠지 모를 믿음을 주는 선생님들을 만나 뵙고 나서 그 날부터 발도르프가 대체 뭔지 폭풍검색 들어가고 책도 여러 권 주문해서 읽어보고 했다.
우리가 어려서 많이 듣던 이야기들이 짬뽕되어 있는 듯한 인지학 이야기부터 이미 1970년대에 독일 슈타이너(발도르프) 학교에 아이를 보내면서 있었던 일들을 기초로 발도르프 교육에 대해 재미있게 풀어쓴 이야기까지... 그러다보니 어느새 우리 아이가 어떤 문제가 있어서 대안학교를 보내야겠다가 아니라, 섬세하고 남다른 감성을 가진 우리 아이에게 꼭 필요한 배움과 돌봄을 해줄 수 있는 이 학교에 어떻게든 보내야겠다가 되었다.
아이를 설득하고.. 아이 아빠를 설득하고.. 공립초등학교 교사로 정년퇴직 하신 친정엄마에게 이야기하고... 대안학교와 발도르프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던 사촌오빠의 지원에 힘입어 입학식 1주일 전 결정을 했다. 그리고 일하는 부모님들을 배려하여 3월 2일 일요일 시작된 입학식에 참석해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 어떤 눈살 찌푸리게 하는 거창한 행사 의식 없이 부모님께 받은 꽃 한 송이씩과 담임선생님께 받은 꽃 한 송이씩을 들고 촛불길을 따라 걸어가 자리에 앉는 아이들과 선생님의 피아노연주, 그리고 학부모들의 나의 살던 고향 노래 제창 속에 조용하고 아름답게 진행된 입학식이었다.
이 학교에 다니자마자 모든 문제가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는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차츰차츰 모든 게 좋아지리라는 어떤 이상한 믿음이 생겼다. 오전 집중 수업 후에 30분 휴식시간, 오후 한 두 시간 수업. 그리고 방과 후 수업은 집에 올 때까지 넓은 학교 마당과 숲에서 놀기. 약 복용은 만 7세가 되는 생일까지 보류하기로 하고 그 때까지 아이가 최대한 많은 변화를 보여주길 기도했다.
학교 다니고 1주일 된 날 담임선생님과 1학년 학부모들의 만남 시간에 쿨하고 솔직하신 말씀들을 듣고 나니 그간 불안해하던 아이 아빠 얼굴에 편안한 미소가 생기고 지인들에게 학교 자랑을 하게 됐다. 1주일이 넘어가자 학교가 재미있다고 하고 매일 옷에 흙과 모래를 묻혀왔다. 걷기 싫어하고 뛸 때도 약간은 어설프던 모양새가 날렵해졌다. 피부 미남 소리 듣던 흰 피부는 까매져 가는데 단단해지고 벨벳 같은 윤기가 생겨 엄마 고슴도치 눈에는 더욱 건강하고 멋져 보인다. 이제 피부 미남 소리는 못 듣겠지만... 아마도 입학지원서를 내면서 생활을 자세히 물어보는 질문지에 답하다가 스스로 창피한 마음에 우리 가족이 좀 더 규칙적인 생활을 하게 되고, 학교에선 건강한 식단으로 한 끼 식사와 간식을 먹고 아이 성향에 따른 돌봄을 받으면서 자연 속에서 뛰어놀아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입학 후 3주째 에는 아이가 그림을 그렸다. 빈 종이와 색연필, 싸인펜을 준비해 놔도 손에 도구 쥐는 것조차 싫어하고 그림 잘 못 그리니까 안 할 거라고 하던 아이였다. 그 날은 저녁에 세 식구 모여 가족회의를 하고 책을 보고 있는데 아이 혼자서 가족 회의 내용을 쓰던 작은 종이와 볼펜으로 손 잡고 걷는 두 사람이랑 태양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태양 아래서 친구들이 뛰어노는 거라고 이야기 했다. 입학 전 신경정신과에서 검사할 때에 이층집을 그리고 창에 아이 하나를 그리고서 혼자 집에 있는데 지진이 나서 곧 무너질 집이라고 설명했다고 했었는데, 아이의 마음이 친구들과 노는 그림을 그리게 했다는 생각에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4주차 에포크가 하나 끝나고 선생님을 뵈러 가니 아이가 선으로 그어서 재빨리 끝내고 딴 데 정신팔고 그랬는데 이제는 노트 한 면 가득 색을 채워 넣을 정도로 집중하고 있다고 하셨다. 교실에 있는데도 딴 데에 가 있는 듯한 표정이었는데 이제 점점 교실 안으로 선생님 이야기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고도 하셨다.
이제 입학하고 50일이 지났다.
한 달에 한 번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서 맛은 보장 못하지만 건강한 식단으로 찬을 만들고, 일주일에 한 번 등하교 셔틀 차량에 함께 타서 아이들과 부대끼고, 가끔 주말에는 학교를 찾아 학부모들과 정리 작업을 하거나 친목 모임을 갖는다. 이렇게 우리 가족이라는 작은 동그라미가 여러 가족들과 연결된 동그라미 중 하나가 되었고 감히 발도르프 공동체라는 이름 아래 자리잡아 가고 있다. 이제 50일... 앞으로의 12년을 매일같이 새롭게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다.
- 발도르프 1학년 학부모
첫댓글 다시 읽어도 감동의 물결 ^^, 모습은 다르지만 부모의 심정은 비슷하고.. 더 힘을 낼 수 있는건 공동체 이기 때문이겠죠?
뭉클 뭉클 ~~
1학년 우리 아이들 모습과...정말 너무나도 애쓰고 계시는 선생님들...우리 멋찐 학부모님들 생각에.... 이새벽 눈시울이 붉어지네요ㅜ.ㅜ
처음처럼...
구연아빠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에요...우리 모두 첫입학식때처럼...파이팅!^^♥
찡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