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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노래’와 ‘사모의 연가’
-박말애의 수필세계 -
권대근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저승에 목숨을 맡기고 이승에서 일을 하는 게 해녀다. 숨을 참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해녀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내 안에 감춰진 신화와도 같은 사유가 있어야 하고 응결된 마그마가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헌신적인 희생으로 무장한 내면의 뿌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거친 바다의 숨소리에 천착할 수 있고, 바다라는 거대한 우주를 들일 수가 있다.
- <해녀1>에서
1.
인간의 삶은 시간적인 구조와 함께 공간적인 구조를 갖는다. 이처럼 시간과 공간은 분리될 수 없는 상관성을 지니며, 이 실체가 없는 시간과 공간의 본질을 규명하고자 하는 노력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칸트와 베르그송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어 중요한 철학적인 명제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바다가 나오고 파도가 나온다고 해서 바다수필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다와 인간이 만나 나누는 교감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내편으로 바다를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다 쪽으로 향하여 가서 어느덧 사물과 작가가 경계를 잊고 하나가 되는 동화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차원에서 2014년 발간된 박말애의 첫 수필집 <해녀가 부르는 바다의 노래>에 실린 바다 관련 수필은 제대로 된 ‘해양수필’ 또는 ‘바다수필’로 볼 수 있다.
아시다시피 박말애는 해녀 수필가다. 첫수필집의 첫 작품으로 배치된 수필은 <해녀 1>이다. 해녀1의 의미는 앞으로 해녀2 해녀3의 글이 있을 거라는 걸 암시한다. 그런 그녀가 안타깝게도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다. 그녀의 명복을 빌면서 박말애 수필집의 책장을 조심스럽게 넘긴다. 박말애는 뮤지컬 <마지막 해녀>에도 출연한 바 있다. 수필집 두 권을 남겼는데, 첫수필집의 핵심어는 ‘바다’와 ‘파도’다. 제2집의 핵심어는 ‘사향’과 ‘사모’다. 무슨 구질구질한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이 네 단어가 그녀의 인생 또는 수필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2014년 첫수필집 <해녀가 부르는 바다의 노래> 를 내면서, “나에게 열병을 안겨준, 나의 곡진한 삶에 자리한 바다는 늘 나를 회유하려 했다. 그때마다 그의 속내를 알기 위해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했다. 얼마나 슬퍼하고 고뇌해야 바다는 고개를 끄떡이며 나에게 손을 내밀어줄까? 타협하고 화해하는 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 오늘도 또 내일도 쉼없이 바다는 파도의 화두를 제시할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수필창작에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경험으로 글을 쓸 것이 아니라 체험으로 글을 써야 한다는 점이다. 체험이란 집단적 인과율의 산물인 경험과는 구별되는 개인적 감상의 파편들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박말애의 수필의 경우, 체험에서 얻은 정신적 반응이 작품 속에서 ‘실감의 보수’와 ‘실감의 유리’라는 미적 경로를 거친 미적 정서로 유로되어 탄생한다는 점에서 본격수필이다. 이 두 가지 전략은 ‘우회성’이란 용어로 문학가와 더 친숙하다고 하겠다. 제한된 지면과 언어의 부피 속에 부푼 표현 욕망을 압축하는 데, 그것은 더없이 좋은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박말애의 수필은 우회성이 드러나 문예미학을 안겨준다. 문학은 사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통해서 승화된다. 이러한 작업이 박말애 수필에서는 문학적 기법을 통해 문예미학을 완성된다는 차원에서 박말애 수필은 ‘문악’이 아니라 ‘문학’이다.
2
박말애의 <테왁>은 제1 수필집 <해녀가 부르는 바다의 노래>에 실린 여러 작품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잘 쓴 수필이다. 박말애의 <테왁>은 높은 문학적 성취도를 보여준다. 이 수필에는 해녀로서의 인생사에 대한 세련된 인식이 드러나 있다. 그녀가 화두로 삼고 있는 ‘인생사’의 이야기가 신뢰감과 설득력을 가지고 독자에게 전달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이 걸어온 삶을 압축하는 단축키로서 가장 적재의 화제인 ‘테왁’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세상살이는 바다에서 물질하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그냥 풍경이 아니라 그것이 개성적인 심미안으로 파악되어 문학적 형상화 과정을 거치면서 절경이 된다는 데서 박말애 수필의 남다른 매력을 찾을 수 있다. <테왁>은 한마디로 인생사에 대한 작가의 세련된 인식과 사유가 빚어낸 결정체다. 삶의 무게를 제재를 통해 바라봄으로써 작품의 내포를 다졌다. ‘삶과 죽음이 상존하는 바다에서 유일하게 떠다니는 동그란 부표 하나! 그를 의지하면서 날리는 해녀의 숨비소리에는 꿈을 향해 피우는 불씨가 살아있다.’라는 진술은 비장함을 안겨준다. 문학적 형식이라는 구조와 관계 속에서 수필의 소재가 되는 해녀의 테왁은 다른 직업인의 시각으로 보면, 누구에게나 익숙한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해녀의 삶이 '낯설게 봐야 한다'라는 명제와 만나면서 손맛을 우려낸다.
이로써 이 수필은 간접화, 내면화, 완곡화라는 예술적 특성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제재인 ‘테왁’을 인생의 동반자로 비유해서 의미화해내고 있는 이 수필은 화소가 특별해서 문학적 가치를 지닌다기보다 물 속에서 생활하는 해녀의 일상을 다양한 의미로 직조해내고 있어 나름대로 문학성을 확보하고 있다. 특히 정서를 표현함에 있어 ‘우회적 수법’을 잘 활용하고 있어 미적 쾌감을 준다. ‘테왁’은 이 수필 속에서 ‘동그란 부표’, ‘생명의 끈’ ‘정겨운 파수꾼’, ‘그림자’로 그려진다. 그녀의 진술처럼, ‘해녀가 물질하기 위해 갖춰야 할 도구 중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지만, 테왁은 특별한 존재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보호자 또는 배우자와 같이 살아가지만, 해녀는 말을 할 줄 모르고 표정도 없는 테왁과 동행을 한다. 해녀의 안전을 책임지는 테왁은 망사리를 매달고 있다. 그물로 짜진 망사리는 그 안에 채취한 해산물을 담아 해녀가 뭍으로 나올 때까지 살아있게 하는 공간이다.’ 테왁에 의지해서 내는 숨비소리에는 꿈을 향해 피우는 불씨가 살아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러면서 작가는 자신과 테왁의 관계를 ‘아이와 보호자’ ‘아내와 남편’, ‘바늘과 실’, ‘사람과 미물’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다정한 연인’ 등으로 표현하면서 정서의 간접화를 위해 최선의 노력하고 있다.
나는 바다 한가운데 혼자 남아 있었다. 사방이 아득한 사막과도 같은 물속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숨을 고를 수 없는 그때 죽음의 두려움이 내 곁으로 다가오는 아득함을 느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한 그 순간의 기억이 한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날따라 유난히 환한 물속으로 무심하게 멀어져 가는 망사리를 망연히 내려다보는 안타까운 그 심정이 지금도 화인처럼 남아있다. 하루해가 서서히 기울고 망사리 속은 자연의 베풂으로 가득하다. 테왁은 종일 바다와 씨름을 한, 나비처럼 가벼워진 해녀를 태우고 뭍으로 향한다. 해녀의 안녕을 비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며 둘은 사랑의 노래를 곧잘 부른다.
- 박말애의 <테왁> 중에서 -
위의 인용 단락은 수필의 결말부다. 이 단락의 앞에는 오래 사용해 온 테왁이 짠물에 닳고 삭아서 매듭이 끊어진 바람에 테왁을 잃어버렸던 경험이 기술되어 있다. 작가는 그 당시 죽음의 두려움을 느꼈다고 한다. 망사리는 깊은 바닷속으로 떨어지고 자유의 몸이 되어 물살을 타고 그녀 곁을 떠나는 테왁을 붙잡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헤엄을 쳤지만, 작가를 조롱이라도 하듯 테왁은 그녀에게서 멀어져갔던 것이다. 이 지점에서 그녀는 냉정하게 임과 이별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돌아오라고, 다시 한 번만 내게 돌아오라고 간절히 애원하며 붙잡으려고 애를 쓰는 안타까운 마음을 뿌리치고 돌아서는, 무정하기 그지없는 임을 보듯 애달픈 심정이었다.’는 표현에는 안타까움은 물론 절박함이 놓여 있다. 멀어져가는 테왁을 헤엄쳐 잡으려고 한 데 대한 작가의 후회는 인생사의 비정함이 녹아 있다. 이는 작가의 치밀한 치환원리의 적용 능력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려는 심정으로 자신의 심사를 변심한 연인의 냉정한 이별장면으로 이미지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비유를 통한 함축은 우회적 수법의 대표적인 방법이다. 치환원리를 써서 비유적으로 상황을 제시하는 우회적 표현 능력이야 말로 모든 문학가가 먼저 가져야 할 소질이 아닐까. 박말애는 그런 능력이 충분해 보여 든든함을 안겨준다.
이 수필의 압권은 마지막 대목이다. 그녀에게 ‘테왁’은 인생의 동반자다. ‘하루해가 서서히 기울고 망사리 속은 자연의 베풂으로 가득하다. 테왁은 종일 바다와 씨름을 한, 나비처럼 가벼워진 해녀를 태우고 뭍으로 향한다. 해녀의 안녕을 비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며 둘은 사랑의 노래를 곧잘 부른다.’라는 결말부는 이 수필에서 가장 중요한 지배적 정황이 된다. 둘이 부르는 사랑의 노래에는 무슨 의미가 담겨 있는가. 언어는 결핍의 표현인 것이다. 종일 바다와 씨름을 한 나비처럼 가벼워진 해녀를 태우고 테왁은 뭍으로 향한다. 살아있음에 대한 감사와 가장으로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 그리고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준 자연에 대한 고마움을 작가가 ‘사랑의 노래’로 구체화함으로써 삶의 무게 가볍게 하기가 문학적으로 잘 형상화되었다고 하겠다. 작가는 바다에서 테왁을 놓쳐 가장 힘들었던 때를 회고하며 삶의 희노애락을 수필 속에 녹여낸다. 상징과 비유 등의 수사법을 최대한으로 활용하고, 주제를 의미화하는 문학적 수법을 통해 그녀는 독자로 하여금 상상과 연상의 세계로 안내하고 있다. 진정한 문학적 감동은 여기서 싹을 튀우는 것이다.
3
박말애는 일곱 번 쓰러져도 여덟 번째 일어서는 칠전팔기의 의미를 늘 생각하며 ‘오뚝이 인생’이란 노래를 즐겨 불렀던 해녀 수필가다. 박말애 문학을 이루는 또 하나의 견고한 줄기는 근원에 대한 본능적 편향성, 어머니로의 지향성이다. 그 그리움의 귀착지는 ‘어머니’다. 2016년에 발간한 두 번째 수필집에서 그녀는 “이번에 발간하는 두 번째 수필집은 첫 수필집의 내밀한 바다를 탐험하는 해녀의 물질과 별개다. 시간에 떠밀려온 그저 평범한 일상과 내 고향 기장 대변 이야기로 묶었다.”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2집은 1집과는 달리 ‘바다의 노래’는 아니다. 평범한 일상과 고향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작품 하나하나에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정서가 없는 게 없다. 한마디로 절절한 사모곡이다. 이는 그만의 독특한 정서라기보다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거의 대부분 수필들이 귀소본능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직조되고 있다. ‘부모님이 생존해 계시는 고향의 어휘는 고된 삶의 버팀목이 된다.’고 하는 진술이 있듯, 어떤 경우든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은 고향과 어머니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사실은 작품 <명절에>, <언덕 위의 작은 집>, <어머니의 안식처>, <그곳에 산이>, <소중한 순간들>, <국화>, <명절에>, <음악 세상2>, <효를 다하는 마음>,<기장 아카데미 강좌를 듣고>, <생애 첫 여행> 등의 수필이 입증한다. 궂은 운명의 장난에 아파하고 힘들었던 과거사에 대한 푸념 같은 인상이 강한 작품이나 주제의식은 모정에 있다. 사람들은 물질적 변혁만 이루면 인간이 안고 있는 모든 아픔이 허물을 벗고 한순간에 환한 모습의 꽃으로 피어날지 모른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눈에 드러나는 현란함은 한때 사람들을 현혹시킬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완전한 행복의 실체는 아니다. 물질만으로는 생명을 틔울 수 없고, 진정한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무한대의 ‘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박말애의 수필적 정서는 이러한 어머니를 향한 뜨거운 인간적 향기라 하겠다.
언젠가부터 내 마음속에 한줄기 염원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날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어머니 삶의 마지막 길이 순탄햇으면 하는 바람이다. 어쩌면 무모한 발상인지도 모른다. 노인의 증상은 어느날 안개로 가리듯 자신을 망까할 수 있고, 또 감당키 어려운 수난의 일을 초래할 수도 있다.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날 수 있지만 내 어머니는 남다른 성격의 소유자시다. 내면의 틀 안에서 평생을 살아온 철옹성 같은 당신의 저존심을 지켜드리고 싶다. 시간의 벽 안에 갇혀 홀로 외로움을 곱씹으며 응시해야 할 요양시설의 차가운 공기를 염두에 두고 싶지 않다. 할 수만 있다면 길들여온 허락괸 공간에서 자유와 안정을 공유하면서 편안하게 안식을 맞이했으면 한다. 곳곳에 당신의 흔적이 밴 일상의 따뜻한 집 안이 어머니의 마지막 안식처가 되었으면 한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소박한 바람이 내 마음속에 커가는 나무다. 이는 곧 나의 간절한 기도다.
- <어머니의 안식처>에서
위의 예문은 <어머니의 안식처> 결말 부분이다. 인간에게 소중한 것은 자신의 삶이 갖는 의미에서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다. 그 충족의 기쁨 없이 삶은 무의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살아있는 것만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지 않고 존엄한 운명을 집 안에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박말애의 위대성은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켜주려는 데서 빛난다. 인간은 누구나 무엇에 의지해 자기를 지탱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다. 적막이라도 따뜻하다면, 차라리 괜찮은 것이다. ‘시간의 벽 안에 갇혀 홀로 외로움을 곱씹으며 응시해야 할 요양시설의 차가운 공기를 염두에 두고 싶지 않다.’는 이 자세가 주는 인문학적 사유는 그녀를 무한한 포용성의 얼굴을 가진 작가로 부각시킨다. 삶을 원망하고 현실에 불만을 토로한다고 해서 삶의 질이 어느 한 순간에 돌변하여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수필은 어떤 순간에도 어머니를 집에서 모시겠다는 의지를 통해 어머니의 삶을 다시 반추한다.
‘내면의 틀 안에서 평생을 살아온 철옹성 같은’ 어머니의 자존심을 지켜드리고 싶다는 효심이 못 자식들과 달라서 공감을 넘어 감동을 준다. 일상사의 외로움에서 출발된 어머니의 슬픔과 따뜻한 작가의 효심이 노정된 이 글은 인간적 삶의 소중한 경험이요, 수필가는 그 경험의 전파자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잔잔한 감동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이 끈끈한 혈연의 연대라는 것을 이 수필은 말해준다. 순수한 연모와 향기 나는 사모의 노래보다 더 가치롭고 아름다운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소박한 바람이 내 마음속에 커가는 나무다.’라는 마지막 형상화된 결구가 살짝 가슴을 찌르면서, 지배적 정황이 되어 여운의 맛을 준다. 이런 맛이 있어 문학성이 생겨나고 공감도가 형성되는 게 아닐까. 이 수필에는 눈물보다 끈적한 사모의 향기와 그리움의 미학이 펼쳐져 있다. 혼자 살면서 혼자 사는 어머니를 책임진다는 것은 일정 부분 자기 삶을 어머니를 위해 포기한다는 의미다. 도시 생활의 정신적 긴장이나 공동체 의식의 상실이나 비인간화와 같은 도시적 병리 현상이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 이 마당에 어머니를 끝까지 집에서 모시겠다는 다짐은 일종의 아름다운 의식의 성찬이다.
그것은 새로운 자기 탐색을 위해서도 보람 있는 일이지만 아름다운 삶의 영토 확장에도 바람직한 일이다. 또한 그것은 얽매인 일상의 생활에서 새로운 창조의 기쁨을 누리는 희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에는 필시 인간성이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특히 홀로된 어머니와 홀로된 자녀와의 관계성은 여성의 도덕적 인식을 구성하는 요체다.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인 효를 요구하는 사회가 아닌 데도 자식이라는 위치 하나만으로 효의 길을 걷고자 하는 자세는 가장 확실하게 그녀에게 존재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자식의 임무는 하나밖에 없는 가족 구성원을 돌보고 그들에게 정서적 안정을 제공하는 사회적 통념을 의미한다. 박말애는 요즘 어르신들이 요양병원에 가는 것을 죽도록 싫어한다는 것을 알기에,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존엄한 삶을 살았으면 하는 소망을 갖는다.
‘무엇보다 헌신적인 희생으로 무장한 내면의 뿌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거친 바다의 숨소리에 천착할 수 있고, 바다라는 거대한 우주를 들일 수가 있다.’ 아마도 그녀에게 어머니는 거대한 우주가 아니었겠는가. 그녀는 헌신적인 희생으로 밖에서나 안에서나 어려서나 커서나 어머니를 불렀다. 사모의 정이 뜨겁게 솟구치는 수필이다. 이 작품은 어머니를 향한 자식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제시해주기에 감동을 준다. 요양병원에 보내놓고 살아있게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식의 도리를 다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도 돈이 있고 여유가 있는 자식만이 베풀 수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부모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물질적인 도움이 아니다. 아무리 황금만능주의 사회라 하더라도 부모와 자식 간은 물질이 전부일 수 없다. 박말애는 이런 진리를 작품을 통해 잘 보여준다. 마음이 무겁고 뭉클한 감동에 젖는 것은 그녀의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그만큼 절대적이며, 애틋하고 간절하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부모와 자식간의 정이 예전 같지 않은 요즘이라 이런 글이 더욱 가슴에 와닿는다.
4
언어인 말은 존재의 집이다. 인간은 누구나 말 속에서 산다. 마치 자연스럽게 다듬어진 홍도의 계란 같은 조약돌처럼 꾸밈이 없는 듯이 기교를 부려서 글을 쓴다면 분명 독자들을 감동으로 초대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의 폭과 깊이는 자신이 지닌 어휘의 깊이와 폭을 넘을 수 없다. 화장하는 것이 자신의 외면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이라면, 외면에 드러나지 않는 정신의 표현인 말을 ‘우회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문학하는 생활이다. 문학하는 생활은 자신의 정신을 변형시키는 내면의 화장이다. 외면인 육체는 다만 정신의 하수인일 뿐이다. 언어의 변화는 곧 그 사람 정신의 변화요, 정신의 표현이다. 체험을 글로 표현함에 있어서 ‘우회성’을 살리는 것은 문예미학을 위한 수사적인 전략이다. 박말애가 ‘테왁’을 통해 인생을 그려낸 것은 전부 실감의 유리와 실감의 부수라는 전략 때문이라고 하겠다.
박말애 수필세계가 보여주는 또 다른 한 모습에는 사모의 따스함이 스며나고 있으며, 진솔한 고백이 순진무구한 인정의 미학으로 구축되기 있다. 박말애 수필문학이 지닌 특징 중의 하나는 개인적 체험을 보여주는 데 있어서 가공하지 않고 사실을 그대로 노출시킨다는 점이다. 특히 살아온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가 독자로부터 공감을 얻게 되는 것은 그 소재가 특별해서라기보다 작가의 진솔함이 인정에 뿌리내려 있어서일 경우가 많다. 박말애 수필의 최대 강점은 체험의 진실성이요, 진한 인간애의 표백에 있다. 이것이 독자로부터 공감을 얻게 할 뿐만 아니라 수필문학으로서의 가치와 문학성을 담보해 주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어머니와 관련된 부분에서 현상의 추상성을 개념으로 설명하기보다는 구체화로 묘사하려고 노력하는 작가정신을 만날 수 있다. 언어의 디자이너를 연상케 할 정도로 박말애의 글은 실감과 함께 상상력을 주면서 손맛을 느끼게 한다. 격정의 순간에도 감정의 절제를 통해 품격을 갖추려고 한 것도 좋았다.
자신의 사상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수필에도 기교가 요구되는 것은 그것이 문학의 한 장르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수필이 문학의 한 장르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설명의 나열에 그쳐서는 안 되고 표현되어져야 하는 바, 그 효과적인 표현을 위해서는 기교가 없는 듯하면서도, 실은 없는 듯한 기교가 내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수필에 있어서 기교가 두드러지게 드러나 보이게 되면 수필답지 못한 것으로 이해된다. 꾸밈이 없는 자연스러움은 수필의 생명이요, 최대의 강점이요, 인간의 의식과 삶의 형태를 글로써 변환시켜내야 하는 건 인류의 미래를 예지해야 하는 작가적 인식이다. 박말애 수필이 주는 쾌미는 ‘바다’와 ‘파도’를 통해서 인생을 보는 작가의 넉넉한 여유와 긍정의 자세다. 언제나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는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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