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도 사상 최악의 참사라는 프로를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서 보게 되었다. 난 저런 걸 좋아한다. 세월호도 무엇과도 비교가 안 되는 범국민적 재앙이지만 먼 후일 돌아보면 하나의 교훈이고 학술적 자료로도 가치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인문학적인 재미와 즐거움도 놓치기 힘들다. 언제가 될지 몰라도 아마 세월호 관련 영화도 나오리라 예상한다. 이번 회 사상 최악의 참사는 4위에 해당되었는바 바로 진주만공습이었다. 왜 전쟁인가 싶었다.

전쟁이 참사가 아니라는 말은 아니지만 이 프로는 대체적으로 세계 각처에서 일어난 일반적인 대형 재난에 포커스를 두기 때문이다. 깊게 설명할 건 아니고 진주만 기습은 일본이 미국을 너무도 얕잡아보고 딴지 걸다 역으로 크게 당한 결과라 말하고 싶다. 쉽게 말해 어른과 아이의 싸움이었다. 좀더 비약을 할까? 고래와 새우의 싸움? 너무 나갔나? 아무튼 일본은 너무 무지했다. 일본은 아시아를 하나로 통일하여 외세와 당당히 맞서겠다는 지고하고 숭고한 대동아공영권이란 총대를 메고 소련, 중국, 한국, 필리핀, 인도차이나 반도 등 온갖 침략을 일삼았다. 대부분 엄청난 전과를 올렸기에 당시 일본은 누구와 맞장을 떠도 무서울 것이 없었다. 일본은 1941년 12월7일 진주만에 주둔해 있던 미함대들을 기습하여 쑥대밭을 만들었다. 그날 반나절의 전과나 사기로 보면 미국도 일본에게 무릎 꿇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방송은 이상하게도 진주만 공습 뒤 일본은 곧 참혹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멘트를 날리며 끝을 맺었다. 뭥미? 방송이 이렇게 중간에 끝을 내도 되는 거야?
참, 그러고 보니 프로의 취지가 지상 최악의 참사지 태평양 전쟁이 아니다.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아쉽지만 여기서 쫑이다.
컴퓨터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검색어는 진주만 공습 내지는 태평양 전쟁이었는데 별 흥미를 줄 만한 자료들이 생각보다 많이 없었다. 더 실망스러웠던 건 태평양전쟁 관련 책도 별로 없다는 점이었다. 우리별에서 겪은 최악의 재난인데도 단순히 지난 과거라는 이유만으로 벌써 잊어버린 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인이 쓴 태평양전쟁이란 책과 항공관련 기자가 쓴 영화로 보는 태평양전쟁 두 권을 찜해두고 관련하여 개봉중인 이미테이션 게임을 보러 극장으로 달려갔다.
재미있는 영화는 2시간을 황홀하게 만든다. 재미있는 영화는 어른을 아이로 만든다. 온갖 당면한 힘든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만든다. 그 2시간이 평생이었으면..... 대단히 유익하고 재미있는 영화였다. 이미테이션 게임은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이 배경이 아니다.
우리에겐 컴퓨터의 아버지로만 알려진 앨런 튜링의 일상이 전쟁과 맞물리며 너무도 드라마틱하게 그려졌다. 요즘 몇 년 사이 상종가중인 배네딕트 컴버배치란 배우의 진면목도 처음으로 목도했다. 영화는 김정운의 에디톨로지가 떠올랐다. 창조는 편집이다. 책은 한마디로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우리는 창조라고 하면 기발한 아이디어나 연구로 세상에 없는 그 무엇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창조란 기존에 있는 것들을 해체하고 조립하여 편집하는 일이라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백번 지당하신 말씀이다. 관용어지만 오늘날 하늘 아래엔 새로운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어떻게 해체 또는 조합하여 자기만의 브랜드로 만드느냐, 어떻게 불특정한 다수들에게 diy를 내놓느냐의 문제다. 영화가 이렇게 재미가 있는 건 주인공 앨런 튜링의 전쟁과 엮인 삶이 드라마틱해서가 아니다. 그렇게 편집했기 때문이다. 진짜사니이 여군특집이 진짜 재미가 있어서 재미가 있는 건가? 아니다. 그렇게 편집했기 때문이다. 꽃보다 할배가 재미가 있는 이유도 편집의 힘이다. 방송을 아는 누군가도 그랬다. 꽃보다 할배는 실지 따라가 보면 재미가 하나도 없다. 수십 수백 시간을 일거수일투족 할배들 따라다니는 일이 뭐가 재미있겠는가. 문제는 그 긴 여행들을 1~2시간으로 압축 편집하고 자막을 넣기 때문이다. 내 재미없고 우리들의 챗바퀴를 닮은 인생도 2시간으로 압축해봐라, 아마 엄청 재미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에 대해 솔직히 더 많이 알고 싶어졌다. 수학 천재에 동성연애자, 그리고 2차대전의 막후에서 활동하며 결정적인 전과를 올린 역사적인 인물. 종국엔 독이 든 사과를 먹고 삶을 끝낸 사람.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하기 위해 삶 자체를 올인하는 전문가들의 동분서주, 그리고 로맨스, 때마다 터져주는 반전의 반전들.
역시 예상대로 많이 가공되었구나. 실지로 짜맞춘 듯이 앞뒤가 들어맞을 수는 없는 법이다. 아주 많이 가공되었다. 그렇다고 전체가 가공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아카데미 여러 부문 후보에 이름이 올렸다지? 내가 알기론 엘에이에서 30분 이상의 러닝타임에 일주일 이상 상영한 영화중에서 아카데미 후보 자격이 주어진다고 들었다. 작품성이든 감동이든 아카데미 회원도 마찬가지로 일단 재미를 주는 영화 역시도 빠뜨리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 같다. 어떻게 의도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3.1절에 이런 저작들을 연속해서 보게 된 건지 신기하다.

첫댓글 오! 베네딕트 컴버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