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유배문학 「헌신(獻身)」 선비의 꼿꼿한 지조와 현실의 고뇌를 담다>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다음 ‘眞’ 운목의 오언고시(五言古詩) 「헌신(獻身)」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유헌(游軒) 정황(丁熿 1512~1560) 선생의 거제도 유배 작품으로, 그의 문집 유헌집(游軒集) 권1(卷之一)에 수록되어 있다. 정황(丁熿)은 1548년부터 1560년까지 거제시 고현동 계룡산 아래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1547년 양재역벽서 사건에 연류되어 곤양(昆陽)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거제(巨濟)로 이배되어 1560년 거제도에서 죽었던 유학자다. 현재 그가 유배지 거제도에서 남긴 문학작품이 700여 편에 이른다.
이번 작품 「헌신(獻身)」은 임금을 섬김에 있어 가식과 아첨을 배격하고, 오직 도(道)와 인(仁)으로 헌신하겠다는 선비의 꼿꼿한 지조와 현실의 고뇌를 담은 명작이다. 저자는 이 글에서 자하(공자 제자), 이덕유(당나라 재상), 허유(許由, 영양의 은자) 등 풍부한 고사를 활용하여 자신의 사상적 정당성을 옹호했다. 그리하여 자신처럼 권력에 굴하지 않고 임금에게 바른 소리를 하다가 겪은 현실적 좌절감(거제도 유배)을 탕평하게 고백하여, 조선시대 사대부의 '출처관(出處觀, 세상에 나아감과 물러남의 의리)'을 명확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 내용인즉, 이 고시(古詩)는 2구씩 짝을 이루어 시상을 전개했으며, 내용상 전체를 크게 5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1~4구] 『논어(論語)』 학이편에 나오는 자하의 말, "임금을 섬기되 자신의 몸을 다할 수 있어야 한다(事君能致其身)"를 인용하며 시작했다. 작가는 참된 충성이 사라지고 사리사욕(私自勝)만 채우며 옛 도리(古道)를 저버린 당대 조정의 세태를 비판했다. [5~8구] '이씨(李氏)'는 당나라의 명재상 이덕유(李德裕)를 뜻한다. 그는 황제에게 아첨하는 풍조를 비판하고 간신들을 멀리하며 강직하게 정사를 돌보았다. 명절마다 권력자에게 뇌물과 아첨(進媚資)을 바치는 무리들을 보며, 이덕유처럼 군신 간의 대의를 지키는 참된 신하가 없음을 탄식했다. [9~12구] 작가의 확고한 인생관과 공직관을 드러냈다. 부모에게 받은 소중한 몸과 삶을 임금에게 바치되, 물질적 아첨이 아니라 오직 유교의 핵심 가치인 인(仁)과 정직한 도리를 다하겠다는 다짐이다. [13~18구] 정황 선생은 을사사화(1545년) 직후 권신들의 전횡을 비판하다 유배를 갔다. 정승과 임금이 바른 정치를 펴지 못해 세상이 어두워졌는데(累世昏), 자신의 정론(至言)을 들어주는 이가 없었다. 자신의 강직함이 세상의 흐름과 맞지 않아 마치 모난 자귀를 둥근 구멍에 맞추려는 것(枘鑿)처럼 겉돌고 있음을 괴로워했다. [19~24구] 쇠퇴하는 시국을 바로잡지 못한 채 관직에 있었던 자신을 부끄러워했다. 그리하여 요임금 시절 허유(許由)가 왕위를 거절하고 은거했던 '영양(潁陽)'이라는 고사를 빌려와, 차라리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가 야인으로 살았어야 했다고 심경을 토로했다. 벼슬길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타이밍(出處)이 꼬여버린 것은 결국 내 탓이기에, 남이나 운명을 탓할 시간도 없다고 자책하며 시를 끝맺었다.
**「헌신(獻身)」** / 유헌(游軒) 정황(丁熿 1512~1560)
子夏有謨言 자하(孔子의 제자)가 남긴 지혜로운 말이 있으니
事君致其身 임금을 섬길 때는 자신의 몸을 바쳐야 한다네.
壹是私自勝 요즘 사람들은 한결같이 사사로운 욕심만 부리며
古道無復遵 옛 성현의 도리는 다시 따르려 하지 않네.
/微馨聞千年 은은한 향기가 천 년 뒤까지 풍겨오니
李氏眞可人 이씨(당나라 이덕유)야말로 참으로 본받을 만한 사람이로세.
節日進媚資 명절마다 아첨하는 재물이나 바친다면
那用爲羣臣 어찌 그것을 신하의 도리라 할 수 있겠는가.
/孤將父母遺 외로운 나는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此生許君親 이 목숨을 임금과 어버이께 바쳤노라.
君親我臨之 임금과 어버이를 대할 때 마주하는 나의 마음은
所貢惟其仁 바치는 바가 오직 '인(仁)'함에 있을 뿐이네.
/豈圖所見深 나의 식견이 깊다고 생각했겠는가마는
君相造命陳 임금과 정승은 나라의 운명을 만드는 법이라네.
可嗟累世昏 애달프도다, 여러 세대가 어리석고 어두우니
孰以至言珍 그 누가 나의 지극한 말을 보배롭게 여기겠는가.
不免枘與鑿 (세상과 맞지 않아) 모난 자귀와 둥근 구멍 같음을 면치 못하니
無乃忝臣隣 동료 신하들에게 욕이나 되지 않을지 걱정스럽네.
/衰替救未能 기울어가는 국운을 구하지 못하였으니
靦顔貞觀辰 (태평성대인) 정관의 시대에 부끄러운 얼굴을 들고 있네.
寧如祕頴陽 차라리 영양(潁陽) 땅으로 숨어 들어가
野服無我嗔 시골 옷 입고 지내며 나를 꾸짖는 이 없는 게 나으리라.
出處乃如乖 나아가고 물러남(出處)이 이처럼 어긋났으니
奚暇咎談神 담신(談神, 기이한 전설이나 남의 탓)을 원망할 겨를이 어디 있겠는가.
[주1] 자하(子夏) : 중국 춘추시대의 유학자(B.C.507~B.C.420?). 본명은 복상(卜商). 공자(孔子)의 제자로서, 십철(十哲)의 한 사람이다. 위나라(魏) 문후(文侯)의 스승으로 시와 예(禮)에 능통하였는데, 특히 예(禮)의 객관적 형식을 존중하였다.
[주2] 이덕유(李德裕) : 이덕유(李德裕, 787~850)는 중국 당나라의 정치인이다. 당시 굴지의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며 당 헌종 때 재상을 지낸 이길보의 아들이다. 당시 충신으로 선정을 펼친 관료였으나, 극심한 붕당과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좌천과 복귀(재상)를 반복하다가 지방에서 죽었다.
[주3] 정관(貞觀) : 중국 당나라(唐) 태종(太宗) 때의 연호(年號)(627~649). 선정을 펼쳐 태평성대를 이끈 시기였다.
[주4] 영양(潁陽) : 요임금 시절 허유(許由)가 요임금이 왕위(王位)를 물려주려 하였으나 받지 않고 도리어 자신의 귀가 더러워졌다고 하여 잉수이강(潁水江) 물에 귀를 씻고 지산산(箕山)에 들어가서 은거했던 땅 이름.
● 이 한시에 나타난 작가 정황 선생의 심정은 한마디로 ‘강직한 지조와 현실의 벽 사이에서 느끼는 깊은 고뇌와 낭패감’으로 요약할 수 있다.
(1) 세태에 대한 비판과 고독감 : 작가는 성현의 도리(古道)를 저버리고 사리사욕과 아첨(進媚資)으로 조정에 빌붙어 있는 당대 신하들을 보며 깊은 환멸을 느낀다. 당나라 이덕유처럼 강직한 인물을 그리워하는 모습에서, 바른 말을 하는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어두운 조정(累世昏)에 대한 외로움과 고독감이 짙게 배어 있다.
(2) 당당한 자부심과 공직자로서의 책임감 : 비록 현실은 어두울지라도, 작가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목숨을 임금에게 바치되 오직 '인(仁)'과 정론(至言)으로만 보답하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권력에 타협하지 않고 대의를 지키겠다는 유학자로서의 높은 자부심과 꼿꼿한 선비 정신을 드러냈다.
(3) 현실과의 부조화로 인한 좌절감(모순의 고뇌) : 자신의 올곧은 신념이 조정의 권력자들과 도저히 융합되지 않는 상황을 ‘네모난 자루를 둥근 구멍에 끼우려는 것’에 비유했다. 자신의 바른 소리가 도리어 동료 신하들에게 누를 끼치거나 배척당하는 현실 앞에서 깊은 좌절감과 무력감을 토로하였다.
(4) 관직에 대한 부끄러움(羞惡之心)과 은거의 갈망 : 기울어가는 국운과 조정을 바로잡지 못하면서도 여전히 관직에 앉아 있었던 자신을 몹시 부끄러워했다(靦顔). 이 때문에 차라리 벼슬을 던져버리고 시골로 내려가 자연인(野服)으로 살았어야 했다는 강렬한 은거(隱居)의 욕구를 드러냈다.
(5) 철저한 자기 성찰과 자책 : 시의 마지막에서 작가는 세상의 잘못이나 남의 탓, 혹은 운명(談神)을 원망하지 않았다. 벼슬길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타이밍(出處)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불찰이라며 모든 책임을 스스로에게 돌리는 엄격한 자기 성찰로 시를 마무리했다. 작가는 "임금에게 진정한 인(仁)으로 헌신하고 싶지만, 아첨꾼만 가득한 조정에서 뜻을 펼치지 못하고 관직에 있는 것 자체가 부끄러우니 차라리 자연으로 물러난 일이 잘된 것“이라는 지식인의 뼈아픈 고뇌를 고백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