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의 추억 #23, 붕어빵 장사
주학교회, 세칭 동방교의 사주(四柱) 중의 한 사람인 정재덕 요나단 목사의 호(號)를 따서 초량의 옛 침례병원(지금은 인창병원으로 변경) 정문 맞은편 길로 올라간 곳에 설립한 세칭 동방교의 한 교회였다. 주로 중고등학교 학생들 위주로 출입하는 곳이었다.
선화여중, 선화여상, 부산진여상, 경남여고 학생들이 특히 많았다. 주학교회의 위치가 주민들의 왕래가 많은 도로와 접해 있었기 때문에 교회로 사용하는 건물 1층의 도로변 한 칸은 꽃가게가 있었고 안쪽에는 몇 개의 방과 부엌이 있었다.
현관을 들어서면 한쪽 벽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는 실내 계단이 있었다. 이 실내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2층은 텅 빈 강당식으로 된 홀이었기 때문에 예배실로 사용했다. '초량12교회'에서 전도사로 일 하다가 이곳 주학교회의 책임자로 옮기게 되었다. '초량12교회'는 부산경남지방의 중심교회라 담임하는 목사의 지도아래 있었지만 이곳 주학교회는 전도사인 내가 책임자가 되는 것이다.
세칭 동방교에서의 대기자나 전도사의 생활은 늘 배가 고프고 잠도 모라잔다. ‘팔작밥에 오작죽’은 동방교의 캐치프레이즈였다. 아침에는 팔작(0.8홉)밥을 먹고 점심은 대충 떼우고 저녁에는 오작(0.5홉)죽을 먹는다는 말이다. 이것을 근검절약 정신이네 어쩌네 하고 입에 거품을 물고 선전을 해 대지만 그 돈 다 모아서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자린고비도 이만저만한 자린고비가 아니다.
젊은 청년들이 어찌 ‘팔작밥에 오작죽’을 먹고 체력을 지탱할 수가 있단 말인가. 말은 안하지만 학생 신도들이 배고픈 전도사님의 생활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들이라고 보는 눈과 듣는 귀가 없었으랴. 아침에 등교하는 길에 성전(세칭 동방교에서는 예배당을 성전이라 부른다)에 들러 기도하고 가는것이 믿음이 솟아난 것이라고 모두들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은연중에 그렇게 교육시켰을 것이다.
아침 등교길에 성전에 들렀다가 집에서 싸 가지고 왔던 도시락을 슬그머니 성전에 두고가는 학생들이 있었다. 우리 전도사님 배 고프신데 드시라는 뜻이다. 그 어린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두고 간 도시락을 나누어 먹으면서 나는 몇 번이나 남 모르게 눈물을 흘리곤 했었다. 그들은 아마도 학교에서 점심시간에 굶었으리라. . .
나는 학생들의 정성이 고마워서 눈물이 났고 배 고파 허덕이는 청춘, 내 신세가 서러워서 눈물이 났다.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동방교에 대한 충성심 하나로 버텨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러나 금강산도 식후경이 아니던가.
그시절 명명(세칭 동방교에서 지성-헌금-을 바치고 받는 새 이름)이 '히스기야'인 ‘재화’라는 청년아이가 '초량12교회'에 상주하고 있다가 주학교회로 나에게 배속되어 왔다. 나를 도와 심부름도 하고 주학교회에서 내 지시를 받아 일을 거들고 내 밑에서 훈련을 받도록 배속되었던 것이다.
나는 고심 끝에 1층에 있던 꽃가게를 걷어치우고 어떻게 빵틀 기계를 하나 구해서 히스기야 재화를 시켜서 붕어빵 장사를 시작했다. 붕어빵 장사를 하면 어쩌면 배고픔은 면할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점심시간 어간부터 시작해서 저녁때까지 바쁘지 않은 시간을 이용해서 붕어빵을 구워 파는 것이다.
설치해 놓은 붕어빵틀 기계안에 연탄불을 피워 넣고 빵틀을 달구어 준비가 완료되면 두툼한 헝겊붓으로 빵틀에 기름칠을 해놓고 미리 준비해 두었던 밀가루 반죽을 주전자에 담아 빵틀에 붓고 설탕에 버무린 삶은 팥을 넣고 뚜껑을 닫으면 지지직 하는 소리를 내면서 고소한 냄새와 더불어 붕어빵이 익어가는 것이다.
몇 개의 빵틀이 순서대로 한바퀴 돌아오면 충분히 열에 익은 붕어빵이 완성되고 그것을 능숙한 솜씨로 갈고리에 찍어 빼내고 다시 기름칠을 한후 반죽을 부어 똑 같은 붕어빵을 생산해 내는 것이다. 장소가 괜찮아서 오가는 학생들과 주민들의 통행로였기 때문에 장사가 꽤 잘 되었다.
붕어빵을 팔아서 밀가루등 재료를 구입하고 다시 붕어빵을 구워 팔고... 심심하고 배고프면 1층으로 내려가 붕어빵을 주워 먹었다. 물론 재화도 원 없이 먹었으리라. 허기를 면할수 있는 좋은 장소요 기회였다. 붕어빵 점포 주인은 나니까 아무도 이의를 제기 할 사람은 없는 것이다. 둘이서 아무리 먹어도 그래도 남는 장사였다.
그때 먹었던 고소하고 맛있던 붕어빵을 잊을 수 없는지 나는 지금도 붕어빵을 무척 좋아한다.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도 붕어빵 장사가 보이면 길가에 주차해 놓고 사 가지고 와서 운전하면서 먹는 경우도 다반사, 아. . . 붕어빵의 계절, 겨울이 오면 다시 원없이 붕어빵 한번 먹어 보아야겠다.
그런데 문제는 나와 재화만 붕어빵을 먹는것이 아니었다. 소문이 나니까 '초량12교회'에 들락거리는 부산, 경남 지방의 전도사들이 이곳 주학교회 1층에 들러 붕어빵을 많이 먹었다. 그들도 수중에 가지고 있는 돈이 별로 없으니 나중에 준다고 하면서 외상으로 먹는 것이다.
그들도 얼마나 배가 고프고 지친 청춘들인가. 곧 닥칠 불심판을 피해 천당 한번 가 보겠다고 빈집초월(신앙심이 투철해서 무단가출하여 집을 나와서)해서 동방교에 충성하고 있는 동료들이 아닌가.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로 아이와 여자를 제외하고 오천명을 배불리 먹이고도 열두바구니가 남았다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달리 있는것이 아니었다.
선심 좀 써도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 그래서 장사밑이 어둡다고 하던가. 외상값은 독촉하지 않았고 받은 기억도 별로 없다. 생각하면 좋은 추억의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 기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얼마 안있어 나는 서울 용산의 '수원정' 대기처로 올라오라는 지시가 내렸던 것이다. 그후 히스기야 재화도 붕어빵틀도 어찌 되었는지... 모두 추억속으로 사라져갔다.
첫댓글 동방교에서는 팔작밥, 오작죽에다 수도를 해야 한다며 연탄도 못 때게 하였습니다.그래서 젊은 청춘남녀들이 전도사로 파송 나와서 위장병, 부인병, 감기로 시달렸습니다. 하루는 여전도사님이 감기로 힘들어 하길래 선배들에게 약이라도 사 줘야 되지 않겠느냐고 물었더니 믿음이 약해서 그렇다며, 기도하면 된다고 외면했습니다. 나는 선배들의 만류에도 감기약을 사서 갖다 드렸습니다. 그 때 여전도사님의 애틋한 눈동자가 생각납니다. 소사의 농장장 스라야씨의 친 누이며 명명이 두란노로 기억되는 여전도사님은 이후로 건강에 이상이 와서 집으로 갔는지 소식을 전혀 알 길이 없네요. 지금은 70줄의 할머니가 되어 있겠지요.
앗..., 오늘 귀한 소식을 접하게 되었네요.
'이단의 추억 #51, 안타까운 3형제' 라는 게시글이 있습니다. 바로 이들 3형제의 실화입니다. 스라야의 누나가 두란노이고 남동생이 사무엘입니다. 두란노의 이후 소식을 알길이 없었고 필자가 서울의 대기처에서 생활할때도 그녀의 소식은 오리무중이었습니다. 아마 깊숙한 농장이나 외진 대기처에서 식모살이 비슷한 생활을 하면서 회한과 통한의 세월을 보냈으리라 짐작됩니다. 누구에게 일일이 말도 못하는, 부모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놓은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었지요. 初卒일까 말까라고 짐작되는데 여전도사라니 그것도 참 희한한 동방교 수준다운 일이네요.
이단의 추억 #51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함 찾아서 읽어보세요.
세칭 동방교에 충성한답시고 군대도 기피하고 대기처(천국을 가기위해 이땅에 임시로 머물며 대기하는 곳, 집을 나온 세칭 동방교 신도들이 집단으로 머무는 곳을 말하는 은어-隱語)에서 지내다가 꼼짝없이 동방교에 발이묶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끌려다니면서 시키는데로 살아갈 수 밖에 없던 청년들을 여럿 보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