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나라와 주나라
이런 논의로는 멀게는 소동파(蘇東坡)가 있고 가깝게는 이불(李紱)이 있었으나 논조가 날카로운 것이 한스러웠다. 이 글은 그렇지 않아서 중간에 무경(武庚)을 변호하긴 했지만 드러나게 하지 않고 완곡하게 표현하여, 주공(周公)을 깎아내리거나 무왕(武王)의 공을 가리는 정도에는 이르지 않았으니 대단히 문장의 체제에 맞았다고 하겠다.
무왕이 동쪽으로 주(紂)를 정벌할 때 미리 약속도 하지 않고 모인 제후가 800명이었으니, 상나라와 주나라가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은 목야(牧野)의 싸움을 기다리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만약 주(紂)가 모든 잘못을 자신에게 돌리는 포고문을 천하에 내리고서 왕위를 무경에게 전하고, 미자(微子)를 승상으로 삼고 기자(箕子)를 장수로 삼으며 상용(商容)에게 군대를 이끌게 하고, 교격(膠鬲)에게 싸움에 앞서 경계하는 글을 내게 한 다음 목야에 진을 쳐서 주나라 군대를 막았다면 - 동방삭(東方朔)의 “공자(孔子)를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삼는다.”는 식의 말보다 훨씬 뛰어난데, 기자를 장수로 삼는다는 대목은 특히 기이하고 장엄하다. - 무왕인들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는가. 퇴각하여 죄를 청하였을 뿐일 것이다. 그러나 주가 이렇게 할 수 있었다면 무왕이 애당초 상나라를 치려고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무경은 실로 천하의 영재(英才)이다. - 찬물을 등에 끼얹은 듯이 오싹한 말이다. - 주나라가 무경을 봉할 때 대비를 철저히 하여 삼감(三監)을 두어 감시하게 했는데 그들은 모두 무왕과 피를 나눈 형제였다. 그런데도 무경이 끝내 유혹하여 같이 반란하였으니 천하의 영재가 아니고서야 가능하겠는가. 이때 주공이 동쪽에 있으면서 그 세력을 막지 못하고 이공(二公)이 안에 있으면서 그 싹을 자르지 못하였다면, 동방은 모두 다시 상나라가 되고 제(齊)ㆍ노(魯)ㆍ위(衛)만이 주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주공이 아니었다면 주나라는 아마도 위태로웠을 것이다. 그런데도 주공이 대고(大誥)에서 무경이 반란하였다고 지적하지 않고 다만 천명의 향배(向背)를 거북점에 의탁하여 말하였으니 무경이 죄가 없음을 알 수 있다.
공자가 《시경》과 《서경》을 산정하고 《주역》의 전(傳)을 차례로 지어 천하의 대의(大義)가 정해졌다. 주(紂)의 죄가 만세에 드러난 것은 목서(牧誓)와 태서(泰誓) 때문이다. 그러나 주(紂)가 주나라 군대를 막을 때에도 틀림없이 군사들에게 경계한 글이 있었을 것이니 -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 주나라의 죄를 조목조목 따지는 엄정함이 어찌 태서보다 못했겠는가. 무경이 그 군대에 군령을 내릴 때에도 반드시 소강(少康)이 하(夏)나라를 광복하는 것으로 자처했을 것이다. 그 글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을 텐데 공자가 정리해 버렸을 뿐이다.
주(紂)가 무도한 것과 무경이 성공하지 못한 것을 천하 사람들이 모두 안다. 그러나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은나라를 위해 굶어 죽으면서도 후회하지 않았고, 낙읍의 전 왕조를 잊지 못하는 백성들은 충의를 굳게 지켜 변하지 않았으니, 가령 주(紂)와 무경의 글이 후세에 함께 전해졌다면 무왕이 주를 토벌한 의의가 흔들려서 갑론을박하는 논쟁이 어느 쪽으로 판가름 났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무왕과 주공의 도는 공자를 만나서 비로소 밝아졌다고 말한다. - 부득이하여 미봉법을 썼다.
商周
此段議論,古有東坡,近有李紱,而恨不掩稜角耳。此則不然,中間雖扶護武庚,而隱映宛曲,不至逼周公而礙武王,大是得體。
武王東伐紂,八百諸侯,不期而會,商周之不敵,不待牧野而知矣。然使紂下罪己誥於天下,傳位於武庚,微子爲相,箕子爲將,商容導師,膠鬲申誓,陳牧野而拒周,絶勝東方曼倩之以孔某爲御史大夫等語,而箕子爲將,奇甚壯甚。 則武王將如之何哉。其惟退而請罪而已。然紂能如此,武王固不來也。武庚實天下之英才也。冷水澆背,大寒凉語。 周之封武庚,備之深矣,列四監以衛之,皆其骨肉之親也。然武庚卒誘之以叛,非天下之英才,能之乎。當是時,周公居東而不能遏其勢,二公在內而不能折其萌,東方盡復爲商,而獨齊與魯衛,爲周守耳。無周公,周其殆哉。然周公大誥,未嘗斥武庚以叛,而特以天命之向背,托龜卜以諭之,武庚之無罪,可知也。孔子刪詩書序易傳,而天下之大義定,夫紂之罪,彰於萬世,以牧誓泰誓故也。然紂之拒周,亦必有誓師之言,想當然。 其數周之嚴,豈居泰誓下哉。武庚之誓其衆,亦必以少康之光復自處也。其書具存,特孔子刪之爾。夫紂之無道,武庚之無成,天下盡知之矣。然伯夷叔齊,爲之餓死而不悔,洛邑頑民,固守之而不變,如使紂武庚之書,並傳於後世,征討之義疑,而甲乙之論,未有所定也,吾故曰,武王周公之道,得夫子而始明。不得已而作彌縫法。
* 췌언(揣言) : 헤아려 따져 보는 말이란 뜻으로 오늘날의 역사 비평과 비슷하다. 여기에는 중국의 역사에 대해 저자 나름의 시각으로 분석하 고 비평한 11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주1] 이불(李紱) : 청나라의 학자이자 관료로 《팔기통지(八旗通志)》를 편수하였다.
[주2] 무경(武庚) : 주(紂)의 아들이다. 주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뒤 무경에게 봉토를 주어 은나라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는데, 감독 임무를 띤 관숙(管叔)ㆍ채숙(蔡叔)과 모의하여 은나라를 부흥하고자 하였다가 주공(周公)에게 토벌당하여 죽었다.
[주3] 주공(周公) : 주나라 문왕(文王)의 아들이자 무왕의 동생으로 이름은 단(旦)이다.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노공(魯公)에 봉해졌다. 후에 어린 성왕(成王)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던 중에 무경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주나라의 예악 제도를 마련하였으며, 성왕이 장성하자 정사를 돌려주고 천자의 예악을 하사받았다.
[주4] 무왕(武王) : 은나라 서백(西伯)이었던 문왕의 아들로 강 태공(姜太公)을 군사(軍師)로 쓰고 주공의 보좌를 받아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세웠다.
[주5] 주(紂) : 은나라의 마지막 왕으로 이름은 수(受)이고 주는 시호이다. 시법(諡法)에 “의를 해치고 선을 손상시키는 것을 주라 한다.〔殘義損善曰紂〕” 하였다.
[주6] 목야(牧野)의 싸움 : 목야는 은나라 수도 조가(朝歌) 남쪽에 있는 지명으로 무왕이 은나라의 군대와 일전을 벌인 곳이다. 은나라는 이 싸움에서 패하여 천하를 주에 넘겨주게 된다.
[주7] 미자(微子) : 주(紂)의 형으로 경사(卿士)로 있으면서 주의 음란함을 누차 간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자 떠나갔다. 주공이 무경을 멸한 뒤 그를 은나라의 후계자로 삼아 송나라에 봉해 주었다.
[주8] 기자(箕子) : 주의 삼촌으로 주의 무도함을 간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자 거짓으로 미친 체하여 감옥에 갇혔다. 무왕이 주를 이긴 뒤 그를 풀어 주고 천도를 묻자 홍범(洪範)을 지었다. 조선에 봉해졌다.
[주9] 상용(商容) : 은나라의 현자로 백성들이 사랑하였으나 주가 등용하지 않았다. 무왕이 은나라를 멸한 뒤에 그 마을에 표창하였다.
[주10] 교격(膠鬲) : 은나라 사람으로 은둔하여 상인이 되었는데, 문왕이 물고기와 소금을 사다가 알아보고 신하로 삼았다.
[주11] 동방삭(東方朔)의 …… 말 : 동방삭은 자(字)가 만천(曼倩)으로, 한나라 무제 때 해학과 익살로 낭(郞)의 벼슬을 받았는데, 황제의 안색을 살펴 직언을 잘하였다. “공자를 어사대부로 삼는다.”는 말은 자신을 어떤 임금이라고 생각하느냐는 무제의 물음에 대한 답변 속에 들어 있다. 《漢書 卷65 東方朔傳》
[주12] 삼감(三監) :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뒤 은나라의 도읍 조가(朝歌)에 무경을 봉하였다. 조가의 동쪽을 위(衛)나라로 하여 무왕의 동생 관숙(管叔)에게, 서쪽을 용(鄘)나라로 하여 채숙(蔡叔)에게, 북쪽을 패(邶)나라로 하여 곽숙(霍叔)에게 감독하게 하였는데 이를 삼감이라 한다. 원문에 ‘사감(四監)’이라 하였는데 오자(誤字)인 듯하다.[주13] 이공(二公) :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공격한 강 태공(姜太公)과 내치를 잘한 주공의 아우 소공(召公)을 말한다. 《書經 金縢》
[주14] 제(齊)ㆍ노(魯)ㆍ위(衛)만이 …… 것이다 : 제는 강 태공, 노는 주공, 위는 무왕의 동생 강숙(康叔)이 분봉을 받은 곳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 것이다. 그러나 강숙을 위나라에 봉한 것은 주공이 무경의 반란을 진압한 이후의 일이므로 내용상 맞지 않는 점이 있다.
[주15] 대고(大誥) : 《서경》의 편명으로, 주공이 무경을 토벌할 때 천하에 고한 글이다.
[주16] 목서(牧誓)와 태서(泰誓) : 무왕이 각각 목야와 맹진(孟津)에서 군사들에게 맹세한 글로, 둘 다 《서경》의 편명이다.
[주17] 소강(少康) : 하왕(夏王) 상(相)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한착(寒浞)의 아들에게 피살되어 유복자로 태어났는데, 장성한 후 한착을 멸하고 하나라를 중흥시켰다. 《春秋左氏傳 襄公4年》
[주18] 백이(伯夷)와 …… 죽으면서도 : 백이와 숙제(叔齊)는 은나라를 치려는 주나라 무왕(武王)을 말리다가 듣지 않자 주나라의 곡식 먹기를 부끄럽게 여겨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으며 숨어 살다가 굶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