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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씀 : 박 찬 덕 선교사
우리가 마가복음 13장 말씀에 이어서 14장 말씀의 교제를 나누게 되는데요.
그동안에 이 복음서 가운데서 가장 주님께서 이 계시의 말씀을 통하여 하늘에 속한 깊은 이상의 말씀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마가복음 13장 8절에 기록된 해산의 고통의 시작이라는 말씀이 아주 난해하고도 깊은 말씀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립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항하여 일어날 것이고 여기저기에 지진과 기근이 있을 것인데 이러한 것은
해산의 고통의 시작입니다 라는 이 얘기를 중심으로 계속 우리가 3편 4편에 걸쳐서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다.
13장 말씀은 예수님께서 장차 다가오는 일들을 자신을 쫓는 제자들과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뒤따라온 이 무리들,
그 무리들 속에는 많은 여인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암시받고 있습니다.
그 자들에게 장차 도래할 일들을 말씀하여 주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죽음 앞에 정말 낙담하게 되고 크게 실망하게 되고
자칫 잘못하면 실족할 수 있는 이 갈릴리에서 주님에 의하여 이끌려짐을 당하여 쫓아온 무리들을 준비시키고 예비시키는
장면을 우리가 13장 말씀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도 경각심을 주어 이와 같은 일을 미리 우리가 인식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신앙생활과 세상 속에서 펼쳐지는 이 세계 정세를 통하여 미리 우리를 견고하게 하시고 강화시키기 위한
주님의 안배 속에서 이런 일들을 계시해 주고 있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13장 말씀을 보면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요.
그리고 이 전쟁에 대한 소식 그리고 지진과 기근을 통하여 해산의 고통이 시작이된다 라는 이야기를 통해서 이 세계정세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하여 펼쳐지는 이러한 여러 크고 작은 전쟁들, 이런 모든 일들은 바로 부활을 통하여 출산되어진
그 아이가 자라서 성장하여서 새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그런 과정을 위한 고통이라는 것을 우리가 암시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가족에게부터 이 미움과 배척을 받고 핍박받는 일에 대해서 얘기하여 주시고 점점 적 그리스도와 그의 군대들이
기승을 부리고 계시록 12장 2절에 기록된 그 해산의 고통을 통하여 분만되어진 그 아이를 자라지 못하고 성장하지 못하게
왜냐하면 이 아이가 자라게 되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이끌려지게 됨으로 말미암아 바로 주님과 같은 사람들의 모습을
내보일 수 있기 때문에 이 사단의 하수인이 되고 도구가 된 이 적 그리스도와 특별히 적 그리스도는 멸망에 가증한 것으로
나타나고 모든 것을 황폐케 하는 아블론으로 나타나고 있는 이 적 그리스도는 심지어 자신의 형상 자신의 우상을 하나님의
성소에 서 있게 함으로 말미암아 큰 환란의 때에 그 믿는 자들과 세상 모든 자들을 멸망케 하기 위하여 극성을 부리게 된다는
것을 마지막 환란의 때 곧 마지막 그 3년 반 때에 이런 일들이 나타날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무화가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무화가 나무는 곧 이스라엘 국가를 상징하고 있죠.
그래서 주님께서 이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심으로 말미암아 뿌리채 말라버리게 함으로 이스라엘 국가
이스라엘 나라의 생명을 끊쳐지게 한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끊어지게 한 일들이 예루살렘 성전이 멸망된 시점인 기원 후 주후 70년 때부터 이 영국의 외무부 장관에 의하여
이 팔레스타인 땅을 유대인들에게 다시 환원해 주는 일들이 1948년 일어났기 때문에 주후 70년 때부터 1948년까지의
기간을 측정해 보면 1878년 동안 긴 겨울을 유대인들이 통과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배려와 주님의 안배와 주님의 주권
가운데서 생명이 움트게 되는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가 푸르러지는 이런 일들을 보게 됨으로 말미암아
바로 이스라엘 국가의 번영을 통한 무화과 나무의 소생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무화가나무의 소생은 다름 아니라 이스라엘 나라의 생명이 다시 되돌아오게 됐다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국가 1878년 동안 긴 겨울을 지나고 통과한 다음에 새 생명이 이 푸르름을 나타냄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되찾아오게 됐다는 것을 보여준 이 사건은 주님의 부활을 통하여 출생된 그 분만된 아이가 자라고 성장하고 성숙되어져서
이 갓난 아이가 유아가 되고 유아에서 어린아이가 되고 어린아이에서 소년이 되고 소년이 돼서 청년이 되고 장년이 되고
이러한 새사람으로서의 조성되는 기간이 있죠.
골로새서 3장 10절에 새 사람으로서의 조성됨으로 말미암아 우주적인 새 사람이 되어져서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이끌려지게
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 사단의 하수인이 되고 도구가 된 적 그리스도를 통하여 큰 방해를 가져오고
큰 걸림돌이 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멸망시키고자 하는 이 분만된 아이가 자라서 새 사람으로 자라지 못하도록 크게
역사하는 장면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암시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티토스 장군인 이 로마 황제의 아들이 나중에 로마 황제가 되는 아버지를 따라 그 아들인 티토스 장군에 의한
로마 군대에 의하여 성전이 멸망된 시점부터 유대인들이 이곳저곳으로 유랑방랑하여서 1878년 동안 아주 나라없는 설움을
이렇게 경험하면서 떠돌아다니는 유랑 민족이 되고야 만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긍휼을 베풀어 주셔서 1948년에 나라를 되찾게 해 주시고 회복케 해 주셔서 지금 오늘날 2024년인데요.
76년이 지나는 동안에 여러 세개 나라로부터 혜택을 받고 원조 조달을 받고 또 유대 민족 자신의 동족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이 이스라엘 국가가 아주 76년밖에 안 되지만서도 이 수십 개의 아랍 중동 국가를
대적하여서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그런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황폐해진 그 땅이 이러한 유대 민족의 어떤 정성과 열심으로 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과 같은 옥토의 땅이 되게끔
이렇게 변화시키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1948년 이후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소생되어져서 가지가 연하여지고 나무의 푸른 잎사귀가 나오는 것을 통해서
여름이 가까운 줄 알아 무화가 나무 열매는 여름에 나오죠. 이 새 사람의 성장이 온전히 이루어짐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강림하심이 다시 오심이 임박했다라는 것을 알라라고 예언의 말씀과 같은 이런 것을 통해서 제자들을 예비시키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3장 1절부터 쭉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이 구속하시는 죽음을 통하여 마주하게 될 그들의 낙심과 절망과
경악스러운 큰 일들을 미리 사전에 좀 견고하게 하고 강화시키기 위하여 제자들을 준비하시고 또 14장 1절부터 42절까지
또 자신의 죽음을 위하여 제자들을 준비하셔서 장차 될 일들을 통하여 이 제자들에게 또는 자신을 쫓는 무리들에게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하나하나 이끄셔서 준비하시고 계시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부활을 통하여 분만되어진 아이가 됨으로 말미암아 자라서 복음을 전하고 주님과 부합되는 삶을 살 수 있는
자들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14장1절에서 11절까지는 그 종교 지도자들로 구성돼 있는 이 주님을 거절하고 반대하고
심지어는 배척하여 주님을 죽이려고 모의하는 그 반대자들 가운데 주님을 친히 배신하여 은 삼십양에 팔므로 말미암아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죽게 하는 일을 근원적으로 이렇게 시작한 가롯 유다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인 반대자들이 주님을 죽이려고 모의하고 또 12제자 중 하나인 가롯 유다가 주님을 배신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는 동안에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1절부터 2절까지는 종교 지도자들인 반대자들이 주님을 죽이고자 하는 흉계를 꾸미고
죽일 방법을 찾고 있었을 때, 바로 그리고 이 14장10절부터 11절까지는 그 12 제자 가운데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넘겨주려고
제사장들에게 가서 은 30냥을 받기로 약속을 하고 기회를 엿보며 예수님 넘겨줄 방도를 찾았다 하는 이런 반대자들의
이 죽이고자 하는 음모가 있고, 또 이 주님을 팔아 넘겨서 십자가에 죽게 하는 그런 배신자인 이 제자의 도모하는 음모가 있을 때 주님께서는 바로 이 14장 3절부터 베다니 지역에 있는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그 시몬이 자신의 문둥병을 온전히 치유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잔치를 배설할 때 한 여인이 아주 값진 순수한 나드 향유 옥합 한 병을 가지고 와서 옥합을 깨뜨려서
그 향유를 예수님 머리 위에 부으는 이런 사건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14장 12절부터 26절까지 주님께서 자신을 쫓는 그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함께드시면서 만찬을 제정하시는
장면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주님께서 특별히 자신의 그 만찬을 재정하셔서 제자들과 함께 그 유월절 음식을 잡수신 이유는
제자들이 주님을 영원토록 기억할 수 있도록 바로 유월절 만찬 음식을 설립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루시는 그 주님과 이 유월절 음식 만찬을 함께 연결되어짐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크게 놀라고 낙담한 가운데 실족할 수 있는 그들의 실족함을 경고하시고 깨어 기도할것을 권고하심과 동시에
이런 만찬까지 설립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그 죽음과 부활을 절대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의도에서 만찬을 특별히
설립한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마가복음 13장 1절부터 14장 11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이러한 사역들을 통해서 제자들을 특별히 준비하시고
예비하시는 죽음을 통해서 경험해야 될 그 제자들을 견고하게 하고 강화시키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4장 1절부터는 바로 이 세 가지 일이 한묶음이 돼서 병합되어져서 이 세 가지 사건이 한꺼번에 등장되고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노예로 오신 구주이신 주님을 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려는 이 반대자들의 아주 무서운 음모와 흉계가 도사리고
있고 또 한편으로는 이 베다니 지역에 살고 있었던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잔치를 배설한 그런 일들을 통해서 주님과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과 주님을 쫓는 그 모든 무리들이 주님과 함께 누리는 일을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14장 3절부터 9절까지
기록돼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0절 11절에 12 제자 가운데 주님을 은 30냥에 팔아 배반하려고 하는 유다의 음모가 또 있고 이렇게 세 사건이 한꺼번에 묶어져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구주께서는 이런 모든 반대자들의 죽이려는 음모와 또 자신을 위하여 베푸는 그 문둥병자 인 베다니 시몬을 통해서 사랑받으시는 잔치의 누림과 그리고 곧 도래할 그 12제자 가운데 한 명인 가룟유다의 음모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제자들과의 이러한 잔치의 누림을 통해서 주님의 마음이 어떠하셨을까요?
한편으로는 반대자들의 음모가 있고 한편으로는 잔칫집에서 이렇게 주님께서 정말 사랑의 친교를 나누는 장면이 있지만서도
가롯 유다가 자신을 팔 것을 알고 있었던 주님의 마음이 어떠 하셨을까요? 주님께서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도 자신을 따르는
그 제자들과 무리들을 향한 갈릴리에서부터 쫓아온 그 모든 자들에 대한 주님의 그 사랑과 그 자비와 은혜와 무한하신 긍휼을
보여주고 있는 장면이 마가복음 14장 1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4장 1절에서는 이틀 후면 유월절과 무교절입니다 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주 예수님을 죽이고자 음모를 꾸미고 있었지만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그 예루살렘 성에
입성할 때 뜨거운 환영과 아주 대대적인 박수를 받고 환영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만약에 예수님을 죽이게 되면 큰 민중봉기가
일어 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 명절에는 하지말자 라고 2절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주권 아래서 하나님의 때를 성취하기 위하여 구약 성경에서 기록된 예표의 성취를 위하여
유월절 바로 그날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힘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2장 23절에 주님께서 하나님의 정하신 계획과 미리 아심을 통하여 넘겨지는 일을 하게 하기 위한 만세전부터
천부 아버지에 의하여 계획된 그 일들, 그 계획된 하나님의 그 때에 하나님이 정하신 그 장소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시간에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예표의 성취를 위하여 바로 유월절 명절날 예수님께서 골고다 베다니 아브라함이 자신의 독자 이삭을
바쳤던 그 모리아산, 오늘날의 시온산이라고 칭하고 있는 그곳에서 주 예수님이 죽음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월절은 그리스도의 예표라고 고린도전서 5장 7절에 기록된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구나. 마치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이 모리아 산에서 바쳐져서 그 독자 이삭을
주님께서 주신 그 아이를 주님께 다시 환원하여 드릴 때 수많은 아이가 하늘의 별들처럼 바닷가의 모래알들처럼 확대되고
확장되어져서 주님께서 그 하늘에 속한 크신 복을 내려준 것처럼 바로 유월절 이 하나님의 어린양 제물 되신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바로 이 세상에 주님을 따르는 수많은 자들을 얻기 위한 그러한 일들 때문에 주님께서는 유월절날
바로 이 시온산에서 골고다 갈보리 언덕에서 죽음을 당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출애굽기 12장 3절부터 6절에 나오는 유월절 어린양이 6일 동안 격리되어진 것을 볼 수가 있죠.
그런데 실제적으로 신약 성경에서는 유월절 어린양이신 그리스도는 유월절날 그 성취를 위하여 사전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에게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시험을 받으시고 그리고 이 로마 세상법에 저촉되는지 안되는지를 헤아려
보기 위한 가이샤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치 아니합니까라고 이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이 이 세금을 바치는 것에 대해서 이 검사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두개인들을 통하여 부활 신앙을 믿지 아니하는 천사도 믿지 않고 영도 믿지 않고 부활도 없다 하는 그들이 이 신앙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주님을 시험합니다. 7명의 사람들이 그 여자를 취했을 때 그 여자의 진정한 남편은 누가 되겠습니까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심을 증거함으로 말미암아 바로 사람들이 죽었지만 주님 안에서는 산 자들에 대해서 부활이 없다 하는 그들에게 부활이 반드시 있다 라는 것을 가르쳐주어서 그들의 입들을 다물게 하시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 율법학자인 한 서기관으로부터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계명 중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라는
이러한 일들을 바로 이 6일 동안의 고난 기간 가운데 주님께서 이 일들을 이렇게 경험하십니다.
시험받고 검증받고 이렇게 낱낱이 헤아린 바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어린 양의 제물로서 합당한 자격이 있는 자인지
없는자인지를 바로 세상의 모든 것들을 통해서 종교를 통해서 세상법을 통해서 더욱더 계명을 통하여 신앙을 통하여 이렇게
검수받음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제물로서 유월절날 그 성취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인류를 우주를 구원하신 정말 구원자 그리스도가 되실 수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유월절 어린 양은 출애굽기 12장 3절부터 6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6일 전에 묶여진바 되었다가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동안 흠이 있는가 점이 있는가 또는 어떤 결격사항이 있는가 부족한 것이 있는가 잘못됨이 있는가 이런 것을 검수해 보기
위하여 미리 점검받아야 한다라 고 출애굽기 12장 3절 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하루 이틀 사흘 나흘이지만 6일 동안의 고난 기간을 통해서 이 꽉 찬 하루 이틀 사흘 나흘은 사실은 6일이라는 시간 안에
포함되어 있고 함축되어진 하루 이틀 사흘 나흘이라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6일 동안의 고난 시간 가운데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로부터 그리고 심지어는 이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로부터 그리고 율법학자 서기관들에게로부터 이렇게 특별히 격리되어 아주 철저하게 조사받고 철저하게 시험받고 철저하게 검증받고 검사받음으로 말미암아 완벽한
유월절 어린양 하나님께 드려질 사람을 위한 제물로서 결격 사항이 전혀 없는 것을 점검받음으로 말미암아 온전한 제물임이
드러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이 부활을 통하여 분만해야 될 그 아이를 위한 진통의 시간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6일이라는 시간이 있었죠. 구약 성경 창세기에 보면은 6일 동안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죠.
새 창조를 위해서 이 우주적인 새사람을 분만하여서 낳아서 창조하기 위한 이 일은 또한 6일이라는 고난의 시간과 십자가의
오전 9시부터 3시까지 6이라는 시간을 통해서 진통 끝에 그분이 십자가에서 6시간을 정말 기진맥진한 가운데 말할 수 없는
해산의 고통과 진통이 극점에 달한 그때에 죽으셔서 3일 후에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새 사람을 낳으실 수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그 해방되어진 신성한 생명이 우리 믿는 자들안에 주입될 수 있도록 하신 사건이 부활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에 그리스도께서는 유월절 엿새 전부터 6일이라는 이 고난의 기간들을 통하여 꽉 찬 이것을
함축했을 때 보면 이것이 하루 이틀 사흘 나흘이라는 시간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6일 동안의 고난과 하루 이틀 사흘 나흘이라는 그 기간 동안에 흠이 있는가를 점검받으신 뒤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12장 1절에 기록된 것처럼 예루살렘으로 친히 들어오셔서 유대 지도자들에게 점검받으시는 장면이 유월절 엿새
전에 예루살렘에서의 예수님의 행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권위에 대해서 또 이 로마 제국의 세금 내는 문제로 인하여 또 부활 신앙에 대하여
또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이러한 시험받고 검수받고 검증받는 일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단 하나의 결격 사항도 없고
어떤 흠과 점을 찾아볼 수 없는 제물로서 우리를 위한 유월절 어린양이 되기에 온전하고 너무나 완전하게 자격을 갖췄다는
것을 증명하신 것이 마가복음 12장27부터 34절까지의 장면인 것입니다.
그 증명하신 후에는 주님께서 베다니로 가시는데 베다니에 누가 살고 있었죠? 바로 나사로의 가족들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죽었으나 주님께서 다시 살리신 나사로가 있었죠 이 베다니는 열매가 있는 장소라는 뜻입니다.
벳바게는 열매가 없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입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곳 그래서 베다니에서 나오셨을 때 벳바게로 가시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이유가 그래서 그랬던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무화과 나무에 무수한 잎이 아니라 열매를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열매가 있는 자들의 삶이 문둥이 시몬과 같이 주님을 위하여 극진하게 잔치를 배설한 자의 삶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처럼
주님을 너무나 사랑하여서 쫓은 자들의 삶, 이런 것들이 열매 있는 자들의 삶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베다니에 있는 문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셨다 라는 것을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을 합니다.
마가복음14장에 보면 베다니 문둥이 시몬이 치료받은 얘기가 나오고요. 그리고 나서 300데나리온이 넘는 아주 값비싼 향유를
바친 여인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베다니의 문둥이 시몬과 이 값비싼 향유를 바친 이 여인은 그동안에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8장 31절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계시를 말씀해 주십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두 번째로 마가복음 9장 31절에서 죽음과 부활에 대한 얘기를 또 계시해 주십니다.
9:3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
세 번째 마지막으로 마가복음 10장 33절과 34절에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무리들에게 얘기해 주십니다.
10:3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10:34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이 제자들은 그것을 그 당시에는 인식하지 못했지만 이 베다니의 시몬과 이 값비싼 향유를 드린 이 여인은 주님의
그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인식 하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암시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을 위하여 잔칫상을 베풀었다는 것과 그분을 위하여 값비싼 향유를 드렸다 라는 그 자체는 이미 주님의 그 장사를
위하여 이 잔치를 통하여 이게 어떤 시작점을 갖고 오게 하고 또 이 향유가 부어지는 사건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 있는 장사를 위하여 바로 주님의 몸에 기름을 바르는 일을 통하여 이 여인과 그리고 베다니 문둥이 시몬은 주님의
그런 죽음을 이미 말씀을 통해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어느 정도 암시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마가복음 13장 1절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가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마음이 떠났음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주님께선 성전이 주후 70년 때 티토스 장군에 의하여 멸망당할것을 계시하시고
이 예루살렘 성전이 멸망하도록 정죄하심으로 말미암아 마가복음에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한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마가복음 11장 14절에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여서 영원히 너에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할 것이다 라는 그 영원이라는 것이
사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끝도 없는 그런 것이 아니라 1948년까지 라는 것을 우리가 앎으로 말미암아 성경에서 얘기하는
영원이라는 얘기 속에는 주님의 긍휼과 자비와 은혜가 어우러져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제자들이 13장 1절 말씀을 통해서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이 커다란 돌들과 수십 년을 통해서 건축되어진
이 장엄하고도 웅장한 건물들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멋있습니까 라고 했을 때 이미 마음이 성전을 떠나심으로 말미암아
이 성전을 버리신 주님께서는 오히려 성전이 멸망하도록 정죄 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아직도 그 성전에 미련이
있고 옛 종교적인 관념들 안에서 사로잡힌바 되어서 점령되어 있었기 때문에 13장 1절과 같은 그런 어리석은 이야기를
주님 앞에서 토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종교적인 관념들에 의하면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집인 하나님의 성전에서
결코 하나님은 떠나 실 수 없다 라고 고정된 생각들과 관념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관념과 생각에 의하면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다 라는 이런 고정적인
고정관념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바로 13장 1절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 라는 장면을 나중에서야 이 사도 베드로 선생님이 이 말씀을 기억하고 인식을 하고 깨닫고 마가 요한에게 전달해 주셔서 마가 요한이 마가복음 13장 1절 말씀을 이렇게 기록한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3:1 〔성전이 무너질 것을 이르시다〔마 24:1-2; 눅 21:5-6〕〕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그래서 성전에서 예수님께서 걸어나오심으로 말미암아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 집을 버리셨다 라는
것을 우리가 13장 1절 말씀을 통해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에 기록된 먼 훗날 시점에서 이 사도 베드로 선생님이 50일째 되는 날 주님 자신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그때부터 주님께서 이 공생애 봉사 사역을 통해서 말씀하셨던 그 모든 것들이 하나하나 다 깨달아짐으로
말미암아 이 성경을 이와 같이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님은 성육신 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자신이 버리신 정죄받은 그 성전을 떠나심으로 말미암아 그 성전을 버리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그 성전을 아직 버리지 못하고 마음속에 그 성전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정죄받은 이 성전을 떠나시기 위하여 미리 사전에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고 성전을 깨끗하게 청소하시는 장면을
통해서 주님의 마음이 성전을 완전히 떠나버리셨다 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성육신 되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성전을 마음에서 버리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역시 그것을 버리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 주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목적, 주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모두 똑같기 때문에
하나 된 마음으로 움직이고 하나 된 행동을 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버리셨을 때 하나님 역시 그것을 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나가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것을 나타내는 것이고, 이미 사전에 주님께서 그 마음에서 그 성전을
버리셔서 멸망하도록 정죄함으로 말미암아 성전을 깨끗하게 청소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중에서 바로 제자들인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 이 4명의 제자들이 감람산 높은 곳에 이 820m 고지에
위치한 그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장 높은 산인 그 감람산 올리브 동산에 올라가셔서 성전을 마주한 가운데 성전을 바라보시면서 바로 주님께서 이 성전 파괴에 관한 얘기를 하고 계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올리브 동산에 올라가셔서 자신을 따르는 그 4명의 영적으로 이 깊은 계시와 이상의 말씀을 인식하고 깨달을 수 있는 그런
12제자 가운데 4명의 제자들을 이끄셔서 그들에게 이런 말씀을 통해서 그들이 마음속에 아주 귀하게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집인 이 성전을 하나님은 결코 떠날 수 없는 그 성전을 최고로 여기고 있는 그들의 마음에
그 예루살렘 성전이 장차 멸망하고 파괴될 것이라는 얘기를 그들에게 예언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성전은 곧 실제적인
참 성전이신 그리스도 자신으로 대치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성전은 반드시 있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외형적으로 보여지는 그 성전이 훼파되고 멸망되고 파괴되는 대신에 온전해진 실질적인 참 성전이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참 성전이 세워짐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자신으로 대치될 것을 우리에게 암시해 주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13장 1절을 통해서 성전을 떠나신 후에 14장에서 주님께서 베다니에 있는 주님께 치료받은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유숙하신 것을 우리가 암시를 받을 수 있지만 성경에는 그것을 기록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게 나사로
집에서 주무셨는지 아니면 베다니에 있는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유숙했는지는 우리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베다니에 있는
문둥병으로부터 깨끗하게 치유받은 시몬의 집에 오셨다는 것을 이 성경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문둥병자 얘기가 기록되어 있는데요.
왜냐하면 문둥병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죄인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되어 져서 저 바깥 외진 곳에 격리된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세상 사람들과의
교통이 끊어지는 삶을 사는 자들이 바로 문둥병자인 죄인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둥병자인 베다니 시몬은 주님에 의하여 완전하고도 온전히 치유가 되고 고쳐졌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에 대한
감사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분을 사랑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임재 안에 들어가기 위하여 주님과 그리고 그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과 그리고 그 갈릴리서부터 따라온 그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그 잔치를 배설한 것을 볼 수가 있는 거죠.
그러니까 바로 베다니의 문둥이 시몬이라는 사람은 굉장히 부유했던 자임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잔치를 배설하는 것이 너댓명의 사람도 아니고 이게 얼마나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잔치에
참여한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죄인들은 너무나 주님께 감사하고 그 감사함이 사랑으로 승화되어서 주님의 임재를 누리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서 아낌없이 모든 것을 다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참 교회의 모습은 베다니의 문둥이 시몬과 같이 아낌없이 드린 자의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교회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주님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여러분 주님은 성전에서 나오셨습니다. 성전은 불의가 있고 하나님의 기도하는 집이 강도의 소굴이 되어진 그곳에서
주님께서 나오셔서 문둥병자였던 베다니 시몬의 집에 들어가십니다.
문둥병자였으나 주님에 의하여 온전히 치료됨으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된 문둥이입니다.
이 베다니 시몬이라는 사람은 깨끗하게 된 문둥이이기 때문에 구속받은 자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구속받은 자인 주님에 의하여 친히 치료받아 깨끗하게 된 문둥이들이 있는 곳에 바로 그리스도께서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깨끗하게 된 문둥이들 삶 가운데 들어가 있을 때 그 집이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지금 인식을 하고 이해할 수 있습니까?오늘날 하나님의 집으로 나타나고 있는 교회는
깨끗하게 된 문둥이들이 있는 곳입니다. 이들은 원래 하나님과 격리되었던 자들이에요.
그러나 주님의 긍휼과 은혜에 따라서 주님에 의하여 온전히 치료됨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그 집에 거할 수 있는
그러한 장소가 돼버렸던 것입니다.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집인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예루살렘 성전은 강도의 소굴이 되어서 기도하는 집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신들의 이윤을 취하고 종교적인
어떤 특권과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빌미로 해서 돈을 착복하여서 이윤을 챙기고자 하는 그 집에서 나와서 깨끗케 된
문둥이 집에 그리스도께서 들어가신 그 집이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믿는 자들인 우리 모두는 바로 시몬으로 대표된 깨끗하게 된 문둥이가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은 과거에 문둥이로서 하나님과 격리되어서 하나님과 교통을 가지지
못한 그러한 부정한 자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치료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깨끗케 된 문둥이가 됨으로 말미암아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의 집합소인
하나님의 집안에 우리가 거하게 되어서 그 하나님의 집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몬은 너무나 감사해서 자신의 나병을 고쳐줌으로 말미암아 너무나 감사하고 주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위하여 아낌없이 모든 것을 다 바쳐 잔치를 준비한 이 사람이 모든 것을 다 바친 자들, 주님의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드린 자들이 있는 곳이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성도인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하나님과 온전한 교제를 갖지 못한 것을 주님에 의하여 문둥병이
치료됨으로 말미암아 잔치를 배설했을 때 바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한 여자가 매우 값비싼 향유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그 옥합을 깨뜨려서 예수님께 머리에 부었다라는 장면이 마가복음 14장 3절에 기록돼 있습니다.
이 베다니 문둥이 시몬이 자신의 지병을 고쳐주어서 하나님과 교통을 이루게 한 그 일에 감사해서 잔치를 배설한 것처럼
이 여인 역시 주님을 너무나 사랑했던 것입니다.
1차적으로 마가복음 9장 31절과 마가복음 10장 33절, 34절을 통해서 세 번에 걸쳐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얘기했을 때 그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깊은 이상의 말씀을 깨달은 이 여인은 주님을 너무나 사랑하게 돼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지극히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그 주님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는 것으로 표현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는 이와 같이 베다니 문둥이 시몬처럼 자신을 치료해 줌으로 말미암아 감사하는 자들 그리고 주님의
죽음과 부활로 인하여 장사 지내지는 그러한 일들을 통하여 자신들을 구속하여 주시고 바로 부활을 통하여 생명 주는
그 영이 되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 해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분의 머리에 이 값비싼 향유를 붓는 이런 자들로
조성되어지고 구성되어진 곳이 바로 오늘날 하나님의 집인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다니에 있는 이 시몬의 집은 자신의 질병을 고쳐줌으로 이 문둥병을 치료해 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단절되었던 그 교통이 원만하게 이루어짐을 통하여 감사하고 정말 주님을 사랑해서 그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잔치를
배설한 그 베다니에 있는 문둥이 시몬의 집은 오늘날 하나님 관점에서 합당하고도 부합되고 참된 교회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 생활의 축소판이 베다니에 있는 시몬의 집이라는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가득 찬 자들이 모여 있는 곳 이 교회의 축소판인 이 베다니에 있는 시몬의 집은 자신을 문둥병으로부터 치료해
줌으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돼서 하나님과 교통을 이루어서 주님을 너무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사하게 된 자들이 모여 있는
그 장소가 바로 교회라는 것을 여러분들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그 안에 사랑하는 자들인 이 잔치를 배설한 시몬과 함께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새 생명을 부여받을 일에 대해서
정말 너무나 감사하고 너무나 사랑해서 모든 것 안에 계신 그분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림으로 말미암아 그 문둥이 시몬과
바로 이 값비싼 향유를 드린 그 여인은 바로 그들의 존재 안에 오직 그리스도로 가득차 있습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이 300데나리온이라는 돈은 오늘날에 하루에 일당 10만원을 쳤을 때 300데나리온이라면 3천만원이 넘는 거의 그 사람의
전재산이었던 것입니다.
그 3천만 원이라는 돈으로 차를 살 수도 있고 집을 살 수도 있고 땅을 살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자신의 삶의 행복과 안위를
위하여 그 돈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그런 것으로 사용하거나 활용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서 온전히 씀으로 말미암아
다른 것이 들어올 여지가 전혀 없는 그 존재 안에 그리스도로 대치가 된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여인의 드림을 통하여 완전한 대치를 가짐으로 말미암아 그 여인 안에 그 여인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심으로 말미암아 우주 가운데 유일한 대치물이 되시고 대치자가 되신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살아계심으로 말미암아 그 그리스도로 가득 찬 자들 그리스도로 점령된 자들이기에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쓰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거기에 자신의 집을 짓고 땅을 사거나 또 만난 음식을 먹고 싶은 그런 여지나 공간이 없습니다.
이렇게 완전히 주님을 위해서 드림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대치를 이룬 자가 부활을 통하여 분만되어진 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에는 주님께서 성전이 멸망하도록 정죄한 그 성전에 대한 그러한 것이 그 값비싼 향유를 드린
여인의 마음에 전혀 없습니다. 성전이 들어가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 자신과 가족을 위하여 그 3천만원이나 되는 큰 돈을 쓰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그 돈을 다른 자선 사업에 쓸 그것도 없어요. 맛난 음식을 먹고 싶은 그런 거 없습니다.
그 값비싼 향유를 드린 그 여인의 마음에는 성전도 아니고 자신의 아이를 위한 것도 아니고 가난한 사람을 왜 가난한 사람에 대한 얘기가 나오죠. 여기 보면 이 돈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도 있는데,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그때 당시에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준다 라는 이야기를 통해서 그 가난한 여인은 자선 사업을 위해서 쓸 마음도 없습니다.
오직 그 마음 안에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때문에 새 생명을 부여해 주실 그리스도만이 완전히 자리잡고 있고
점령되어져 있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모든 것이 되시는 그분에게 드릴 때 이것이 합당한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 3천만원이 넘는 그 큰 돈이 정말 그 당시에 얼마나 큰 돈이었겠습니까? 이 제자들뿐만 아니라 그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주님께 헌신적으로 드리는 그 여인의 고귀하고도 순결하며 아주 거룩한 그 사랑을 낭비와 허비라고 생각하고
가난한 사람을 위해 썼으면 얼마나 좋아을까 하고 얘기하는 장면을 마가복음 14장5절에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14:5 이 향유를 삼백 ②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그들이 그런 얘기를 할 그때 주님께서는 6절 말씀을 통해서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아름다운 일을 하였다 하시고
이와 같은 자들 자신의 모든 것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는 자들이 모여 있는 곳,
감사함으로 가득 차서 잔치의 배설을 열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진 이들이 하나님의 집인 교회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오늘날의 하나님의 집은 어딥니까? 이런 감사함으로 가득찬 자들, 사랑의 마음으로 가득찬 어찌 할 수 없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려도 모자랄 수밖에 없고 다 드려도 부족할 수밖에 없는 이런 마음들을 가진 자들이 바로 참 교회 안에
있는 성도이고 하나님의 집안에 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주님의 긍휼에 감사하고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새 생명 신성한 생명을 자신들에게 줄 것임을 알고
깊은 사랑을 가지고 그분을 위하여 값비싼 향유를 내놓는 그 여인의 이러한 사랑스러운 이 마음은 자신의 모든 것을 더해도
조금도 아까움이 없이 오히려 부족하다 느낄 정도로 귀하고 값비싼 향유를 드린 여인은 정말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예물을
드림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그분의 머리 위에 향유를 깨어서 부어드린 사건이 낭비이고 허비라고 생각했지만 그분은 절대
그것이 낭비가 아니라 아름다운 일을 하였다라고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위한 달콤함을 간증하는 향기라고 얘기를
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한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해야 될 때 마가복음 14장 8절에
이러한 말씀이 있는데요.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으니 곧 장사 지내는 일을 위하여 미리 와서 내 몸에
기름을 부었느니라라고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7절에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언제라도 너희가 원하는 대로 그들에게 선을 행할 수 있거니와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한다 라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해야 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하게 될 때 그 기회를 놓쳐버리고 지나가게 되면 그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사랑할 때 사랑하고 그분을 사랑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사랑할 기회를 꼭 붙잡고 이러한 베다니 문둥이
시몬 처럼 잔치를 배설하고 또 이 값비싼 향유를 드린 여인처럼 그분의 머리 위에 옥합을 깨어 부어드릴 수 있는 것은
사랑할 기회를 붙잡아서 그분을 위해서 선용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7절 하반절에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주님께서 우리와 늘 항상 함께 이 당시에 제자들에게는
바로 이 그리고 수일 후에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리고 승천을 통하여 사라져 버리게 되는 일
그러나 영의 몸을 가진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지만 하여튼 외형적으로는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사랑해야 될 때 그 기회를 꼭 붙잡아서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바로 확증된 모습을 보여야 된다는
것을 우리가 이렇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5절에서 보면 이 항유 300데나리온 3천만 원을 더 넘게 받고 팔아서 자선 사업을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얘기를 하고 있는 자들을 보세요.
이 값비싼 향유를 드린 이 여인은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관심하지 않습니다.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은 지금 주님을 사랑할 기회인 주님께 사랑을 베푼 다음에
주님께서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않으리라. 주님께서 함께하고 있지 아니한 때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자선 사업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은 지금 주님을 붙잡을 수 있는 기회에는 가난한 자들에게 전혀 관심 갖지 않고
자신을 위한 안위나 행복에 대한 어떤 일로 그 돈을 사용하기를 원치 아니 하고 온전히 모든 것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우주
가운데 유일한 대치물이 되시고,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를 대체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린 이 자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대치한 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그 죽음과 부활 안에 이끌려진 사람들이 그리스도로 대치가 되어서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아니하면 그런 일들로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 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4장에서 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자선 사업을 위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 돈을 전달해 주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을 절대 허락치 않으신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불쌍한 고아들이나 부모 없는 어린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없으셨을까요?
그게 아니라 예수님은 그 자신으로 대체하는 삶이 가장 선제적이고도 우선적이고도 가장 가치가 있는 것이므로 말미암아
자신을 대치하는 일을 소홀히 하면서 가난한 자들을 돕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지금은 가난한 자들을 주의하지 말고 나 자신만을 주의하고 나 자신으로 너희가 대치되어서 너희 안에
나가 살도록 하라 라고 하시고 그 다음에 얼마든지 자선 사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올때는 얼마든지 도움을 줄 수 있는 시간들이 있을 것이라는 암시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신으로 대치가 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 그 사람을 미워하지 말고 핍박하지 말고 권면하지
말아라 그 여인은 나를 자신의 대치로 취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그 모든 것을 자신이 소유하기를 원하여서 지금 가장 값비싼
향유 옥합을 깨어서 나의 장사를 위하여 미리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서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다라는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그 향유를 드린
그 여인이 자신의 그 죽음과 부활 가운데 있는 장사를 위하여 주님의 몸에 기름을 부을 필요에 동참했고 그 주님을 장사함으로
말미암아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한다 라는 그 사랑하여야만 되는 그 사랑의 기회를 꽉 붙잡음으로 말미암아 바로 이 여인이
주님께서 그동안 세 번에 걸쳐서 제자들에게 마가복음 8장 31절을 통해서 9장 31절을 통해서 마가복음 10장 33절과 34절을
통해서 주님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계시를 하여 주었을 때 바로 이 여인은 예수님의 그 죽음에 관한 계시를 들었고
그리고 마음에 받아들여 그것을 깨닫고 인식하였다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주님의 죽음에 관한 세 번에 걸친 계시의 말씀을 받고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가장 최상의 좋은 것을 주님께
부을 수 있는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붙잡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최상의 것으로 자신의 모든 것으로 자신의 사랑의
전부인 것으로 주님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자신 대신에 주님으로 자신의 그 존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대치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가지게 됐던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9절에서 보면 복음이 전파된 곳에 이 여자에 행한 일도 말하여서 저를 기념하라라고 말씀 하셨는데 그 이유는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기회 주님의 몸에 기름을 부을 필요에 동참하여서 그 기회를 꽉 붙잡아서 실제적으로 옥합을 깨어서
머리에 부어짐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되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드림으로 말미암아 주님으로 인하여 대치된 자의 전형적인
성도의 모습이기 때문에 기념하라 라고 얘기를 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4장 8절에 보면 그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으니 곧 장사 지내는 일을 위하여 미리 와서 내 몸에 기름을
부어 장사 지내는 일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장사는 뭡니까? 어둠과 깜깜한 속에 들어간다는 얘기죠.
주님께서는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죽으시고 그리고 사흘 후에 부활을 하십니다.
그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사이에 있는 그 공백 기간 깜깜함과 어두움 가운데 있는 그 시간 속의 기간이 장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장사라는 말을 통하여 9절에 있는 복음이 온 세상 어디에든지 선포될 때 이 여인이 행한 것도 전해져야 될 것이다 라는 얘기를 통해서 복음은 8절에 나오는 장사라는 얘기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에 관한 복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고린도전서 15장 1절부터 4절까지의 말씀인 것입니다.
15:1 〔그리스도의 부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15:2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15:4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이 장사라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복음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 받을 수 있고
그것이 장사가 죽음과 부활 사이에 가운데 이렇게 존재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주님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 장사가 중간의 연결고리죠.
어떤 마치 연결고리인 장사를 통해서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 복음에 대한 얘기는 주님의 죽음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죄사함을 위해서 이 구속하는 죽음을 우리에게 부여해 주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복음의 이야기는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라는 얘기를 전하는 것이 복음의 이야기고
또 주님께 기름부음을 부은 이야기를 통해서 그분께서는 이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에게 신성한 생명을 부어주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도록 한 영이 되게 하셨습니다 라는 이러한 것이 바로 복음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라는 이야기와 그리고 이 값비싼 옥합 향유를 깨어서 주님께 드린 이 여인의 이야기는
바로 은혜를 받고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생명을 소유 받는 것에 대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에 대한 얘기가 복음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 죽음과 장사와 부활 안에는 주님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죽으셨고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다 라는 것이
이 값비싼 옥합 향유를 드린 여인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복음은 무엇이냐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라는 얘기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해야 되고 그리고
바로 그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신성한 생명을 부어주셔서 한 영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 영을 통해서 생명을 부여받아 생명을 이끌어오셔서 우리에게 생명의 사람인 새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라는
이야기가 주님을 새 사람이 되게 하신 그 은혜에 감사해서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얘기하는 것이 바로 이 복음에 대한
두 가지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고 그리고 그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새 사람이 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게 하셨습니다 라고 그것을 전파하는 것이
복음에 대한 두 가지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게 되어서 잔치를 배설하고 향유 옥합을 깨어서 드린 것은 주님이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일 때문에 우리는 감사하고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주님께 3천만원이 넘는 그 값비싼
향유를 모두 아낌없이 드립니다 라는 것은 우리의 헌신을 위한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일이고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헌신을 위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명의 제자를 통하여 이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감람산에 앉으셔서 마주하는 성전을 보시면서
성전에 대한 멸망에 대해서 얘기하시고 그리고 마태복음 24장8절 말씀을 통해서 24:8 그러나 이 모든 것이 解産 苦痛의
始作이다 라고 이렇게 얘기를 하셨는데 그 전에서부터 무슨 말씀이 있었죠? 이 성전이 멸망되고 파괴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난리와 난리에 대한 소식과 왕국과 왕국의 전쟁에 대한 얘기와 또 지진과 기근에 대한 얘기 이 모든 것들은
해산의 고통의 시작이다 라고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출산의 고통 분만의 고통의 시작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부활을 통하여 분만되어진 그 아이를 낳기 위하여 3년 반 동안의 공생애의 기간을 거치셨고
또 6일 동안의 고난 기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려 계시는 그런 6시간이라는 이 출산의 고통을 통하여
3일 후에 부활되어짐으로 말미암아 새 사람을 위한 분만되어진 아이를 낳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분만되어진 아이는 하늘에 속한 하늘의 유전자를 받은 자입니다.
신성한 생명을 받은 자예요. 세상의 생명과는 전혀 다른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되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새 사람의 분만을 위한 출산의 고통을 갖기 위해서 3년 반 동안의 공생애를 가지셨고 6일 동안의 고난의 기간과
함께 6시간의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일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창세기를 통해서 옛 창조를 하시기 위해서 6일 동안의 사역을
하셨던 것처럼 새 창조를 가지시기 위하여 6일 동안의 고난 기간과 6시간의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긴 출산의 진통을
거치심으로 말미암아 아이를 분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완전하지가 않습니다. 어떻게 잘못될지 몰라요.
그래서 이 완전하지 아니하는 이 아이가 새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긴 과정의 고통의 터널이 바로 마태복음 24장 8절에 나오는
이것은 해산의 고통의 시작입니다.이 세상의 세계정세의 상황들을 통해서 환란들을 통해서 고통들을 통해서 펼쳐지는 일들이
새 사람을 만들기 위한 바로 출산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이 긴 과정이 지금 2천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지나갔어요.
분만한 그 아이가 새 사람으로 자라서 우주적인 새 사람으로 만들어져서 하나님께 이끌려지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이끌려지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이들이 하나님의 나라인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서 사단과 사단의 하수인인 적그리스도와 그 군대들과
싸워서 왕국을 이끌어올 자들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부활을 통하여 분만되어진 이 아이가 온전한 새 사람이 되기까지 이러한 과정을 거치기 위해서는
오직 먼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만 출생되어진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그 찢어진 몸을 통해서 쪼개진 몸을 통해서 그 해방되어진 아버지와 아들과 영 하나님의
그 신성한 생명이 그제서야 예수님 육체 안에 감추어 계셨던 그 신성한 생명이 십자가의 찢어짐을 통해서 해방되어졌으며
해방되어진 그 신성한 생명이 부활을 통하여 신성한 생명이 우리에게 운반되어지고 이게 주입되고 적셔지고 침투되어지고
공급되어짐으로 말미암아 신성한 생명이 우리 안에 임재 케 되어서 새 아이를 분만하는 것처럼 아이가 낳아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만 아이가 분만되어져서 이 아이가 자라서 새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새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만 출생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새 사람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다니에 사는 문둥이 시몬이 모든 것을 드려서 잔치를 배설했고 그 잔치를 배설하는 일이 여러분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게 뭐 한두명입니까?갈릴리에서 쫓아온 수많은 무리들이 다 어디서 자고 어디서 먹고 합니까?
그런 것들이 바로 문둥이 시몬과 그리고 이 300데나리온이 넘는 그런 귀한 향유 옥합을 깨어서 주님께 드린 그것은
죽음과 부활을 인식하고 깨달아짐으로 말미암아 새사람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신 그분을 위해서 내놓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억지로 내놓을 수가 없어요. 여러분 주님을 위해서 3천만 원을 내놓으십시오 그런다면 그게 쉽습니까? 안 됩니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로 인한 그분에 의해서 이끌려짐을 통하여 바로 새 사람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분만된 아이가 자라고 성장하고 성숙되어져서 정말 새 사람이 되고 새 사람을 넘어 우주적인 새 사람이 될 때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수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차 될 일들을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해 주시고 마태복음 24장 8절 말씀을 통해서 이러한 것들은 해산의
고통의 시작입니다라는 이야기를 하시면서 베다니의 문둥이 시몬을 치료해 줌으로 말미암아 감사함으로 잔치를
배설하기 위해서 준비되어 있는 시몬의 집으로 들어가셔서 잔치가 진행되는 도중에 또 한편 베다니 시몬과 같이
감사함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한 여인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수님의 세 번의 그 계시의 말씀을 듣고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인식함으로 말미암아 계시의 빛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그 여인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이면서 모든 것을 그분께 부은 것이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바로 향유였던 것이 마가복음14장 5절의 말씀인 것입니다.
14: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지 않겠는가?" 라고 말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였다.
그래서 향유를 드리는 그 여인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그 여인에게 모든 것이심을 가리켜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그 여인이 자신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를 위해서 드렸죠.
세 번에 걸친 계시의 말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듣고 바로 깨달아 알고 계시의 빛을 받은 그 여인은 그것을 앎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장사를 미리 예비하고 준비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리는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그 여인에게 모든 것이 되신다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여인이 몸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성품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생명을 다하여 자신의
장사를 위하여 미리 자신의 머리에 향유를 깨뜨려서 기름을 부었다라고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그 여인에게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이 되신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되신 자들이 바로 그 사람이란 존재 안에 그 여인의 존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대치되는 자들, 이 이러한 자들이 부활을 통하여 분만되어진 아이가 자라서 성장한 자의 모습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여인은 8절에서 뭐라고 얘기합니까? 나의 장사를 위하여 미리 내 몸에 기름을 바른 것입니다 라는 얘기를 통해서
그 여인이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예수님의 세 번의 말씀을 분명히 듣고 알아 계시의 빛을 통하여 깨달았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암시받을 수 있으며, 그렇다면 베드로를 비롯한 12 제자들은 이 말씀을 똑같이 세 번의 말씀을 들었지만
그들은 이런 행동을 나타내 보이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이 말씀을 들었으나 계시의 빛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것임을 우리가 암시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베다니 시몬과 이 여인에 대한 얘기를 통하여 자신이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사랑하기를 원하는 그러한 모든 것이
되시는 자기가 사랑하는 분이 곧 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자신이 사랑할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의 모든 것 가운데 모든 것인 값비싼 300데나리온인 향유를 부어 드릴수 있었음을 우리가 알수가 있습니다.
그때 당시에 이 돈이면 어마어마한 그 여인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었습니다.
사랑할 기회가 다시는 기름을 부을 다른 기회,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자신에게 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그 기회를 꽉 붙잡고 기름부음을 통하여 주님께서 자신 곁에 계시고 자신과 함께 계시는 동안 사랑을 보여드릴 수 있는
기름부음을 통하여 그 여인은 바로 그리스도의 장사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그분을 위하여 기름을 부었다는 것은
그 여인에게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 되셨다는 것을 알수가 있으며 그리스도를 온전히 소유했다 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으로 이끌려지는 삶을 산 그 12 제자들도 이야기들을 들었고, 무리들도 들었지만 여기에
등장되는 인물은 잔치를 배설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이라는 사람과 아낌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의 장사를 위하여
주님께 기름을 부은 여인에 대한 얘기만 있습니다.
이 두 사람 베다니 문둥이 시몬과 이 값비싼 향유를 드린 이 여인에 대한 얘기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으로 이끌려진 삶의
모델이며 아주 모범적인 성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 향유를 드린 이 여인은 그리스도의 죽음 안으로 이끌려져서 장사 지낸 바 됨으로 말미암아 장사는 뭐죠?
죽음과 부활 가운데 있는 것이 장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장사가 죽음과 부활 가운데 있기 때문에 먼저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으로 이끌려지는 삶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그 여인이 가장 비싼 가장 자신에게 모든 것이 되시고, 가장 자신에게 있는 좋은 것 가운데서도 모든 좋은 것이 되시는
바로 그것을 만유를 포함한 대치이신 우주 가운데 유일한 대치물이 되시고 대치자가 되시는 주님께 아낌없이 감사하고
사랑하고 기쁜 마음으로 부어드림으로 말미암아 장사를 위한 기름을 부으신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장사를 위해 그분께 기름 부으시는 이 여인의 모습은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누림을 소유하려고 그분의 죽음을
취했다 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어떻게 우리가 주님의 죽음을 가질 수가 있습니까?이것은 이 값비싼 향유를 드린
여인처럼 그리스도의 죽음 안으로 이끌려 짐으로 말미암아 죽음과 부활 사이에 있는 장사를 위해 그분께 기름을 부어지는
사건을 통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누림을 소유하기를 원하고 갈망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죽음을 취했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바로 향유를 그분의 머리에 부은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마가복음을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으로 이끌려지는 것을 우리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사도행전과 바울의 서신들을 통해서 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으로 이끌어지는 삶이 더 깊고 더 넓고 더 높은 이상
가운데로 이끄시는 장면이 사도행전 말씀과 사도바울 선생님의 14가지 서신서를 통해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여인처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가장 최상의 것으로 가장 최고도로 우주 가운데
유일한 대치물이 되시고 대치자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누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왜 이 여인은 지금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세 번의 계시에 대한 말씀을 듣고 바로 계시의 빛을
통해서 이것을 알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깨달을 때 최고도로 주님을 누릴 수가 있게 된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죽음과 부활 안으로 들어가서 그 여인의 존재 안에 그리스도로 대치가 될 때 완전한 대치를 누리게
됨으로 말미암아 그 여인과 같이 주님을 위해서 아낌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림을 통하여 정말 주님의 그 누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여자의 마음 안에는 자신의 모든 것이 되시는 정말 삶 가운데 가장 최상의 것이고 최고의 것이고 가장 존귀한 것이고
모든 것이 되는 향유를 드림에 있어서 자선 사업을 위해서 쓰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땅과 어떤 집을 짓고자 하는 마음도
없었고 자신의 어떤 안위와 행복의 삶의 평화를 위해서 살고 싶은 그러한 마음이 없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한
것으로 모든 것을 내놓고 그분을 위해서 쓰여졌다라는 것입니다.
그 여인의 마음 안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는 그것이 주님과 하나 되어 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 흙으로 상징되어진 그 여인의 마음은 바로 그리스도로 꽉 차져 있기 때문에 임마누엘 땅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임마누엘 땅이 뭐예요? 영원히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옥토가 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영원히 주님과 함께 누리는 삶 주님이 함께 있는 곳이면 모두가 정말 생명으로 촉촉해지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 주님 외에는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들을 위한 여지가 전혀 없이 모두 주님을 위해서 아낌없이 모든 것을 드림으로
말미암아 그 여인 안에는 구약에 대한 어떤 모세도 없었고 엘리야 선지자도 없었고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감탄 저렇게 커다란
돌과 정말 수십 년 동안 건축한 그 아름다운 장엄한 성전도 없었어요.
성전에 대한 마음도 구약에 대한 어떤 그러한 그런 것도 없었고, 가난한 사람에 대한 어떤 그러한 어떤 베풀고자 하는 마음도
없이 오직 값비싼 향유를 드린 그 여인은 오직 다른 여지나 다른 어떤 공간이나 다른 어떤 여지의 마음은 전혀 없이 오직 자신의 모든 것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신의 최상의 최고의 것을 그분에게 아낌없이 드리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그분의 이 우주 가운데 유일한 대치물이 되시고 대치가 되시는 바로 주님을 완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라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주님과 함께 이러한 주님의 죽음과 그리고 부활 사이에 있는 장사까지도 죽음과 장사와 부활의 모든
과정들의 단계들을 옥합 향유를 드리는 일을 통하여 표현함으로 말미암아 이 주님의 그 모든 과정들인 죽음과 장사와
부활의 단계들을 통과함으로 말미암아 그녀는 영원한 생명의 누림안으로 들어가는 삶을 살 수가 있다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드림을 통하여 자신이 가진 최상의 모든 것이 되시는 그리스도께 드림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죽음 안으로 이끌려져서
장사 지낸 바 되어져서 부활의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이끌어오는 부활을 통하여 신성한 생명을 소유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분만되어져서 그 분만되어진 아이가 주님의 안배 속에서 자라고 성장하고 성숙되어져서 새 사람으로서의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우주적인 그러한 삶을 사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부활의 날에 주님을 목격한 자가 또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가장 귀한 것을 아낌없이 드린 자는 주님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 모두를 관여하고 친히 목격하고
체험하는 그러한 영적인 축복까지도 아울러 받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암시받을 수 있습니다.
12 제자 가 가운데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이 여인처럼 깨끗하고 순수하고 완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정말 고귀하고도 정말 사랑의 마음으로 가득 찬 이 여인과 같은 생각이 베드로 안에는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베드로는 주님과의 관계에서 약간 멈칫하고 정지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 여인은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세 번의 그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죽음에 관한 것을 취했고 또한 장사를 위하여 그분에게 기름 부음 기회를 붙잡음으로
말미암아 부활을 친히 목격하는 자가 될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반대의 과정들을 통하여 바로 그 여인은 주님의 죽음을 취했고, 그분의 장사를 위하여 일함으로 말미암아
장사와 함께 하였고, 또 이렇게 한 모든 일들이 주님께 기억됨으로 말미암아 며칠이 지나지 않아 바로 그 값비싼 향유를
드린 그 여인은 주님의 부활 안으로 들어간 자들 중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그 여인들 가운데 이 여인이 포함돼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암시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부활한 그리스도를 첫 번째로 누린 자예요.
왜냐하면 주님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을 함께 통과하였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준비하심에 의하여 주님의 이끄심을 통하여 왜 마가복음 13장과 14장 말씀을 왜 그렇게 길게 기록했을까요?
이렇게 이 값비싼 향유를 드린 여인과 같은자 베다니의 문둥이 시몬과 같은 자를 준비하셔서 이끄시기 위하여 자신의 죽음과
부활 안으로 들어가는 일에 동참케 하기 위해서 주님께서 이러한 말씀들을 베풀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3장을 통하여 자신의 죽음을 위하여 미리 사전에 펼쳐지는 장차 다가올 일들에 대해서 제자들과 이 쫓는
무리들 특별히 이 갈릴리에서 쫓아온 무리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포함돼 있었겠습니까?
그 모든 자들을 견고하게 하시기 위하여 죽음과 부활 안으로 이끄시기 위하여 이러한 말씀들을 계속 13장 14장 말씀을 통해서
준비를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러한 제자들을 위한 준비는 하나님의 경륜의 중점이 새 사람을 산출하는 것인데 새 사람을 산출하는
것의 부분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첫 번째 이러한 열매의 모습으로 예표되고 있는 모습이 이러한 값비싼 향유를 드린
여인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이 새 사람의 희생은 산고의 고난을 요구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옛 창조를 통해서 6일이라는 시간이 거치고 그다음 날 쉬셨고 새 창조를 위해서는 6일 동안의 고난의
기간과 6시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산고의 고통과 진통의 과정을 통해서 바로 이 새 사람을 낳았지만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 새사람의 출생을 가진 부활을 통하여 이 분만되어진 아이는 이러한 산고의 고난과 고통들을 통해서
주님께 모든 것을 아낌없이 감사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이런 또 산고의 고난과 진통과 고통들을 통해서
점점점점 자라고 성장하고 성숙되어져서 우주적인 새 사람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굉장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깨끗하게 된 문둥이들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집인 교회,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 주님께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은 불의가 가득 차고 하나님의 이 기도하는 집이 이 강도의 소굴들이 되어졌습니다.
이 강도와 같은 자들이 있는 그곳을 나오시고, 이렇게 깨끗하게 된 문둥이들, 사랑의 마음으로 헌신하는 값비싼 향유를
드린 이 여인이 있는 이 집에 하나님이 지금 이 교회에 들어가셔서 같이 누리는 장면을 보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베다니의 문둥이 시몬의 집은 다름 아닌 오늘날 교회의 축소판인 것입니다.교회의 모습이에요.
이런 감사함으로 가득찬 자들, 사랑의 마음으로 가득찬 자들과 함께 잔치의 누림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아울러 기름부음을 누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잔치는 뭡니까? 배부름을 통한 일이죠. 잔치는 거기서 먹는 음식과 마시는 그 음료를 통해서 내적인 만족이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기름부음은 달콤한 향기로 주님께 무언가를 부어드리는 것에 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예 기쁘게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베다니에 있는 시몬 문둥이 집에서 주님은 만족하셨고 그리고 달콤한 향기로 정말 기름을 부음받으심으로 말미암아
흡족해 하시는 주님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일들이 주님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이 이런 일들 감사함으로 가득 찬 자들,
사랑의 마음으로 가득 찼기 때문에 이 죽음과 장사와 부활의 일이 있는 것을 주님께서도 합당하게 여기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으로서가 아닌 바로 인성을 가지고 오신 인자의 모습을 가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목수의 비천한 신분을 가진
그 자신을 사랑하는 자 중에 하나로부터 바로 여러분 하나님으로부터 주님을 사랑하는 자로서 침례를 받을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가 기뻐하는 자다. 변화산상에서도 이는 내가 기뻐하는 자고 내가 사랑하는 자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하는 자라고
이렇게 기름 부어주시는 장면이 이렇게 요단강에서 침례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실 때 이렇게 생생하게 나타나 있지만,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그 십자가의 죽음과 장사와 부활을 통하여 그 계시의 빛을 통하여 안자인 사람을 통해서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게 아니라 자신을 친히 참다운 마음으로 순결한 마음으로 깨끗한 마음으로 사랑하길
원하여서 기름을 부은 것이 여러분 사람에게 주님이 기름 부음 받으셨다 생각을 해보세요.
그 여인이 기름 부어진 것은 너무나 고결하고 너무나 거룩하고 너무나 성결하고 너무나 합당한 것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기름을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그러한 달콤한 향기를 가득 가짐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배부르게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차려진 음식들보다도 이 달콤한 향기를 통하여 취해지는 것으로 주님께서는 배부르게 되고
만족하게 되고 기쁘게 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다니에 있는 감사함으로 주님 자신의 집에서 잔치를 위해서는 시몬의 집에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쫓는 제자들과
자신을 쫓는 무리들 그곳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자신을 대치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들 안에 자신들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심으로 말미암아 그들 존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심으로 그리스도로 대치가 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누림 안에 있게 하기 위해서 이 일을 시몬의 문둥이의 집에서 이 일을 하셨다라는 것입니다.
주님만을 사랑하는 자들은 그들 마음 안에 예수 그리스도외에 다른 어떤 것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의 부분적인 어떤 요소가 없이 오직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의 삶을 나타낸 것이 바로 베다니 시몬
문둥이의 잔치 배설의 모습이었고, 더더구나 더욱이 값비싼 향유 300데나리온이 넘는 향유를 드린 그 여인의 마음 안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 어떤 다른 아무것도 여지가 없었어요. 공간도 없었어요.
들어갈 그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을 통하여 분만되어진 아이의 삶의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의 교회의 축소판의 모습을 봄으로 말미암아 만유를 포함한 대치이신 그리스도를 취하는
모습이 무엇인지를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과 같이 감사함으로 드리는 자, 더더구나 나아가서 정말 자신의 그 모든 것이
되시는 만유를 포함한 구주에게 자신의 최상의 모든 것을 드림으로 말암아 자신의 존재 안에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가지지 않다는 것을 얘기한 이 자들의 삶이 바로 12장 2절에 나오는 새 사람을 해산하기 위한 이 모습이 바로
계시록 12장 2절에 새 사람을 분만케 하기 위한 아이의 출산에 대한 얘기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하나님 나라를 도래케 할 자들입니다.
12:2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하나님께 이끌림을 받고 하나님의 보좌로 이끌림을 받아서 정말 적 그리스도와 적 그리스도의 군대들을 격퇴하여서
하나님의 왕국을 이 땅에 도래케 할 당사자들이 이기는 자들, 강한 용사들이 될 수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마가복음 14장 1절부터 11절에서 거절하고 반대하고 배척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흉계를 꾸미는
반대자들의 음모가 있었고, 또한 바로 배신하려는 유다의 음모가 있었고, 근데 그 중간에 주님을 따르는 일이 베다니 문둥이
시몬 집에서 잔치 배설을 통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아낌없이 드리는 그러한 사랑, 주님 자신을 따르는 자들의 사랑의
누림이 있는 잔치의 모습이 있는 것으로 우리가 세 가지 이렇게 묶어진 바가 되어서 병합되어서 한꺼번에 나타나고 있는
장면을 통해서 바로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삶에 이끌려 나가기 위해서는 정말 이러한 마음과 오직 그리스도 외에는 그 어떤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드리고 그분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것이 되어야 된다는 얘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유다의 음모에 대해서 14장 10절 11절에서 이렇게 얘기를 하시고 그리고 1절 2절에서는 반대자들의 이 주님을
죽이고자 하는 이 흉계와 모의에 대해서 얘기해 주고, 그리고 또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 노예로 오신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 수많은 무리들과 12명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이 값비싼 향유를 드린 그 여인을 통하여 최고의 그 깊은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옥합 향유를 깨어서 머리에 붓는 그런 일들을 표현함으로 말미암아 바로 주님께서 기름부음을 사람으로부터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참 사랑하는 그 여인 가운데 하나에게서 기름을 부음받음을 통하여 참 한편에서는 주님을 죽이려 하고
한편에서는 가룟유다를 통해서 배신을 하고 한 사람은 그분을 귀하게 여기고 한 사람은 그분을 정말 귀하게 여기지 않고 죽음
앞에 넘겨줄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을 통해서 이 교회 안에 있는 이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이와 같은 이 세 종류의 삶의 유형의
모습들이 은연 중에 이렇게 가지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 가운데서 하나님집인 지금 교회 안에서도 이와
같은 자들의 삶을 통하여 참 우리가 향유를 드린 그 여인처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림으로 말미암아 바로
주님을 온전히 만족케 하시기 위하여 기름부음을 받게 하시기 위하여 주님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는 자들의 삶을 사는 자들이
참 그리스도인 참 성도들의 모습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면서 오늘의 모든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