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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삼가해 무각스님 법문
2018년 12월 06일
【說誼】
菩薩萬行이 無念爲宗이니 一得其宗하면
보살만행 무념위종 일득기종
無所施而不可라 其所獲福이 寬廣如空이로다
무소시이불가 기소획복 관광여공
<번역>
보살의 만행이 무념(無念)으로 종을 삼으니, 그의 종을 한 번 얻으면 복을 얻는 것이 너그럽고 넓은 허공과 같을 것이다.
<해설> - 무각
보살만행이 무념(無念)이 위종(爲宗)이니. 즉 보살의 만행은 무념을 종(근본)으로 삼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보살만행을 하려면 무념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무념이란 생각이 없다는 말인데 무슨 생각이 없는 것이냐면 삿된 생각이 없다는 것이고, 삿된 생각이란, 너와 나, 옳고 그름 등이 쉬어진 것으로, 아무 생각없이 멍청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분별을 놓는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분별이 쉬어지니 거기서 밝음(지혜)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는 모든 수행작용은 보살행인데 이 보살행의 근본은 무념이라는 말입니다.
이쁜사람 떡 두 개 주고 미운사람 하나주는 것이 무념이 아닙니다.
그러니 무념으로 보살행을 한다는 것은 이쁘다 밉다는 것을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념이라고 합니다.
무념으로 종을 삼으니 그 종(근본)을 한 번 얻으면 베푸는 것마다 옳지 않음이 없어서 (무소시위불가無所施而不可) 복을 얻는 것(기소획복 其所獲福)이 너그럽고 넓은 허공과 같은 것(관광여공 寬廣如空)이다.
그래서 무념이라는 것을 얻어야 하는 것이고, 무념을 바탕으로 보살행을 해야 합니다.
선종에서 이야기할 때는 무심(無心)이 바탕이 되서 평상심을 쓴다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무심과 무념은 같은 뜻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무념(無念)은 삿된 마음(분별)을 놓는 것입니다.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놓는 것으로 나를 놓으면 모든 것이 다 놓아지는 것으로 이것은 아상(我相)이 놓아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멍청해지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워지는 것입니다.
비유하면 거울에 붙은 때를 닦으면 어떻습니까? 그러면 거울이 맑고 밝아지듯이 마음거울의 때를 벗겨서 분별을 놓으면 거울에 때가 하나도 없는것과 같이 맑고 밝아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마음의 거울에 때가 묻어 있으니 뭐가 오면 고정관념의 때로 인하여 제대로 비추지 못하니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를 못합니다.
즉 여실지견(如實知見)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를 잘못 알면 바보가 되는 수가 있으니 항상 놓고 쉬는 공부를 하다보면 묘하게 밝고 밝은 광명이 나오는 것이 정한 이치입니다.
그래니 여기서 보살만행(수행)은 무념이 위종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六祖】
佛言하사대 虛空이 無有邊際하야 不可思度이니
불언 허공 무유변제 불가사도
菩薩의 無住相布施하야 所得功德도 亦如虛空하야 不可度量하야
보살 무주상보시 소득공덕 역여허공 불가도량
無邊際也니라 世界中大者가 莫過虛空이요
무변제야 세계중대자 막과허공
一切性中大者가 莫過佛性이니 何以故오 凡有形相者는
일체성중대자 막과불성 하이고 범유형상자
不得名爲大어니와 虛空은 無形相故로 得名爲大며
부득명위대 허공 무형상고 득명위대
一切諸性은 皆有限量일새 不得名爲大어니와
일체제성 개유한량 부득명위대
佛性은 無限量일새 故名爲大니라 此虛空中에 本無東西南北하니
불성 무한량 고명위대 차허공중 본무동서남북
若見東西南北이면 亦是住相이라 不得解脫이요
약견동서남북 역시주상 부득해탈
佛性은 本無我人衆生壽者하니 若有此四相可見이면
불성 본무아인중생수자 약유차사상가견
卽是衆生相이라 不名佛性이니 亦所謂住相布施也니라
즉시중생상 부명불성 역소위주상보시야
雖於妄心中에 說有東西南北이나 在理則何有리오
수어망심중 설유동서남북 재리측하유
所謂東西不眞이라 南北曷異니 自性이 本來空寂하야
소위종서불진 남북갈이 자성 본래공적
混融無分別이라 故로 如來가 深讚不生分別也니라
혼융무분별 고 여래 심찬불생분별야
<번역>
부처님이 말씀하기를 “허공이 변제(邊際)가 없어서 사도(思度)하지 못한다.
보살이 상에 주하지 않고 보시하여 얻어지는 공덕도 허공과 같아서 헤아려 알지 못하여 변제가 없는 것이다.
세계 가운데서 제일 큰 것은 허공보다 지나감이 없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크다고 할 수 없는데 허공은 형상이 없기 때문에 크다 하겠고, 일체의 성품은 다 한량이 있다.
그러기에 크다고 할 수 없지만 부처의 성품은 한량이 없기에 크다고 하는 것이다.
허공 가운데는 본래 동쪽 서쪽 남쪽 북쪽이 없으니 만일 동쪽 서쪽 남쪽 북쪽을 보게 되면 역시 상에 주하여서 해탈을 얻지 못하는 것이요, 부처의 성품에는 본래 아상과 인상과 중생상과 수자상이 없으니 만일 사상으로 보게 되면 이것이 중생상이어서 부처의 성품이라 하지 못하리니 이것은 상에 주하여 보시하기 때문이다.
비록 허망한 마음에서 동쪽 서쪽 남쪽 북쪽이 있다고 말하지만 이치에 있어서는 그것들이 어찌 있으리오. 동쪽이니 서쪽이니 하는 것이 참되지 못하니, 남쪽이니 북쪽이니 하는 것도 그와 무엇이 다르리오.
자기의 성품이 본래 공적하여서 하나로 뭉쳐 따질 수가 없다.
그러기에 부처님이 분별을 내지 아니함을 깊이 칭찬하셨다.
<해설> - 무각
부처님이 말씀하시를 허공이 변재(邊際 끝)가 없어서 사도(思度 생각으로 헤아림)하지 못한다. (邊:가장자리- 끝, 한계, 際:사이제)
보살이 상에 주하지 않고 보시를 하면(무주상 행어보시 無主相 行於布施) 얻어지는 공덕도 허공과 같아서 헤아려 알지 못하며 변제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얻으려고 하면 이렇게 해야 다 얻어지는 것이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거기에 모든 것을 던져야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누가 백일기도하러 절에 올라갔는데 다니면서 이 생각 저 생각 계속 올라오겠지요, 생각이란게 끝없이 교차해서 올라오니까요,
여러분이 수행을 위해서 멀리서 차를 타고 오기도 하지요, 멀리서 와도 상관 없습니다. 그것이 공부의 과정이거든요, 2시간 또는 3시간 걸려서 온다고 해도 저는 아주 좋은 조건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오는 동안에 공부생각을 하니 그 시간 내내 기도와 수행시간이 되거든요, 그러니 여기에서 가까운 곳에 살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가까이에 사는 사람은 늦게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전라북도에 살면서도 눈이 펑펑내리는 날인데도 버스를 타고 왔습니다.
눈이 이렇게 많이 내렸는데도 어떻게 왔습니까? 하고 물으니 그래도 버스가 다녀서 왔습니다. 라고 말하더라고요, 그리고는 한 번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눈은 항상 고속도로를 먼저 치우고 다음으로 국도와 지방도를 치우거든요,
가까이에 있는 사람은 눈이 왔으니까 오히려 안오더라고요.
이것을 생각하면 확실히 마음에 달렸다는 것이지요, 마음이 확실히 중요합니다.
교재로 돌아가면 보살이 상에 주하지 않고 보시하는 공덕도 허공과 같아서 헤아려 알지 못하여 변제가 없는 것이다.
세계 가운데서 제일 큰 것은 허공보다 지나감(넘어감)이 없고, 즉 세상에서 아무리 큰 것도 허공보다 큰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일체 성품 가운데서 제일 큰 것이 부처의 성품(불성)이다. 이 불성은 여러분의 가슴속에 있습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크다고 할 수 없는데 허공은 형상이 없기 때문에 크다 하겠고, 일체의 성품은 다 한량이 있다. 그러기에 크다고 할 수 없지만 부처의 성품은 한량이 없기에 크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일체의 성품이라고 했는데 이 성품이 불성을 말하는 것일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서 부처의 성품은 크다고 해서 대(大)자를 썼는데 이 대(大)자는 절대지 대(大)로 상대적인 대가 아니고 절대의 큰 것을 말합니다.
허공은 본래 동쪽 서쪽 남쪽 북쪽이 없으니 만일 동쪽 서쪽 남쪽 북쪽을 보게 되면 역시 상에 주하여서 해탈을 얻지 못하는 것이요,
여러분이 허공을 한 번 보세요 동 서 남 북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자신과 허공을 따로 보기 때문에 그 입장에서 동 서 남 북이 있는 것이지요, 허공 자체는 스스로 분별을 하지 않습니다. 보는 사람이 분별할 뿐이지요,
불성이라는 것은 허공과 같고 이 불성이 여러분의 참성품이고 진짜 자기이거든요, 나는 누구인가 허공입니다. 이것이 나의 본래 면목입니다.
이것을 믿어야 하는데 지금은 여러분의 업이 워낙 두터워서 이게 나라고 고집을 하니 너와 내가 따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와 나를 놓아야 여러분이 불성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부처의 성품(불성)에는 아상(我相)과 인상(人相)과 중생상(衆生相)과 수자상(壽者相)이 없으니 만일 사상(四相)으로 보게되면 이것이 중생상이어서 부처의 성품이라고 하지 못하리니 그것은 상에 주하여 보시하기 때문이다.
비록 허망한 마음으로 동 서 남 북이 있다고 말하지만 이치에 있어서는 그것들이 어찌 있으리오.
즉 이치상으로는(근본적으로) 그것들은 없다는 말이고 여러분이 스스로 그렇게 분별을 할 뿐이라는 말입니다.
그것들을 동쪽이니 서쪽이니 하는 것이 참되지 못하고 남쪽이니 북쪽이니 하는 것도 그와 무엇이 다르리오.
자기의 성품(자성)이 본래 공적하여서 하나로 뭉쳐 따질 수가 없다.
그러기에 부처님이 분별을 내지 아니함을 깊이 칭찬하셨다.
須菩提야 菩薩이 但應如所敎住니라.
수보리야 보살 단응여소교주
<번역>
수보리야, 보살이 응당 가르친대로 주할 것이니라.
<해설> - 무각
수보리야, 보살이 응당 가르친대로 주할 것이니라(단응여소교주 但應如所敎住). 여기서 주(住 머물주)라는 것은 믿어들어가라, 믿어서 거기에 머물라는 뜻입니다.
또는 믿어서 안주하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믿음이 확실해지면 머물게 되거든요, 뿌리가 확실히 그 자리에 머물게 되면 안주하여 반석처럼 움직이 않게 됩니다.
그래서 뿌리가 내리면 어떤 바람이 불어도 움직이지 않게되는 것입니다.
바람이라는 것은 오욕팔풍(五欲八風)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러분에게 바람이 불어오면 그 바람대로 끌려 다니지요, 나를 칭찬하면 기분이 좋고, 비난하면 화가나고, 이것이 바람에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뿌리가 내리면 칭찬이나 비난에 감정이 흔들리지 않으므로 주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주(住)했는지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六祖】
應者는 順也니 但順如上所說之敎하야 住無相布施하면 卽菩薩也라
응자 순야 단순여상소설지요 주무상보시 즉보살야
<번역>
응당이라 함은 순종함이니, 이와 같이 말씀하신 가르침을 순종하여 상에 주함이 없이 보시를 하면 이가 곧 보살이다.
<해설> - 무각
응당이라 함은 순종함이라 하였고, 순종한다는 것은 믿는다는 말입니다. 믿기 때문에 순종하는 거니까요. 그리하여 상에 주함이 없이 보시를 하면 이사람이 곧 보살이다.
그러니 부처님말씀에 상에 주함이 없이 보시한다는 말을따라 순종한다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응무소주 행어보시(應無所住 行於布施)라고 하여 응당히 머무는바 없이 보시를 하라 즉 함이 없이 하라고 한 것입니다.
【冶父】
可知禮也라
가지예야
<번역> 예의를 알아야 한다.
<해설> - 무각
가히 예의를 알도다. 예라는 것은 유교에서 말하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할 대의 예를 말하는 것입니다.
【說誼】
無住者는 萬行之大本也요 萬行者는 無住之大用也라
무주자 만행지대본야 만행자 무주지대용야
慈尊이 敎以無住로 爲住하시니 大本이 已明이나 而大用을 亦不可不知也니라
자존 교이무주 위주 대본 이명 이대용 역불가불지야
禮也者는 人間世之大用也라 存亡之所繫며 禍福之所由興也니
예야자 인간세지대용야 존망지소계 화복지소유홍야
人知禮則進退를 可觀이며 擧措得宜하야 無施不可어니와
인지례즉진퇴 가관 거조득의 무시불가
苟不知禮則雖曰無事於心이나 動輒違規하리니
궈불지예즉수왈무사어심 동첩위규
豈有進退升降之可觀乎아 由是禮也者는 可知而不可不知也니라
기유진퇴승강지가관호 유시예야자 가지이불가불지야
<번역>
머무르지 아니함은 모든 행의 큰 뜻이요, 모든 행에서 머무르지 아니함이 큰 행이다. 부처님께서 머무르지 아니함으로 거처로 삼으라 가르쳐 큰 뜻을 밝힌 것이니,큰 작용(大用)을 알지 아니하면 안 된다.
예(禮)라는 것은 인간의 큰 작용으로써 삶과 죽음이 걸려 있는 것이니 화(禍)와 복(福)이 그 곳에서 일어난다.
사람이 예를 알면 나감과 물러설 때를 알 수 있을 것이니, 그 때를 마땅히 알아 행하니 옳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예를 알지 못하면 마음 속으로 괜찮다 생각하나 이를 행하면 이치에서 어긋나니 어찌 진퇴승강(進退升降)의 때를 알 수 있을 것인가.
때문에 예라는 것은 필히 알아야 할 것이요, 알지 못하면 안 되는 것이다.
<해설> - 무각
머무르지 아니함(無住)이란 곧 모든 행의 큰 근본(만행지대본 萬行之大本)이요,
만행이란 머무르지 않는 것의 큰 작용(무주지대용 無住之大用)이라,
부처님께서 머무르지 아니함으써 거처를 삼으라고 가르쳐서 큰 뜻을 밝혔으니, 머무르지 아니함을 알지 아니하면 안된다.
그러니 근본만 알아야 할 것이 아니라 작용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근본만 알고 작용을 모르면 바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작용이라는 것도 아까 말했듯이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놓아지면 근본으로 계합되거든요.
그러니 여러분이 아무 생각없이 고요하게 앉아 있으면 부처의 근본인 하나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는 사실입니다.
부처를 만나고 싶으면 고요히 마음을 거두고 앉아 있으면 이미 부처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즉 무주의 근본으로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가만히 멍청하게 있으면 안되는 것으로 어떤 경계가 닥치면 그것을 자기 자성의 부처에 맡겨버으면 이미 그 경계는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신구의(身口意) 삼업이 지혜롭게 작용되어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미 대본(大本)은 밝혔으니 대용(大用)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본체만 중요시할게 아니라 본체를 알았으면 작용도 알아야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예라는 것은 인간의 큰 작용으로써(인간지대용야 人間世之大用也) 삶과 죽음이 걸려 있는 것이니 화(禍)와 복(福)이 그 곳에서 일어난다.
즉 화와 복이 예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예를 행하지 않으면 화가 온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생(生)과 사(死)가 거기에 걸려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예를 안다는 것은 지혜가 있다는 말이고 또한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살면서 내가 나서서 해야 할지 아니면 물러설 지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이 정해져 있지는 않더라고요.
사람의 그릇에 따라서 전체를 굴릴 수 있는 역량이 있으면 물러서지 않고 나아갈 수 있고, 전체를 굴릴 수 있는 역량이 없으면 자기도 피해를 입고 전체에도 이익을 주지 못하게 됩니다.
내가 포교원에 있을때 나아감과 물러남을 체험했는데, 그것도 누가 하느냐면 자성의 부처가 하더라고요,
나같은 경우는 아프게 해서 나오게 했잖아요. 누가 아프게 했을까요 그 자리(자성자리)에서 한 것입니다.
이 병의 요인이 있었겠지요, 그걸 통해서 포교원에서 나오게 했습니다. 병이 있다고 해서 나온게 아니라 이것을 통해서 나오게 한 것이지요, 나온후 포교원이 어떻게 됐나요 그때부터 시끄러워 졌잖아요.
내가 그것을 감당할 역량이 있었으면 계속 거기에 있었겠지만 내 성품으로는 감당하지 못함을 부처님이 알고 나오게 한 것입니다.
사람이 예를 알면 나감과 물러설 때를 알 수 있을 것이니, 라고 했듯이,
내 생각으로 나가고 물러서는 것이 아니거든요,아까 무주(無住)라 하여 머무름이 없는 것을 알면 이것이 만가지 행의 근본이라고 했듯이 여기에 내가 귀의해 있으니 그 자리에서 잘 알아서 물러설 때와 나아갈 때를 정해준 것입니다.
내가 포교원을 그만두려고 아픈것도 아니거든요.
여기서 무주에 머문다는 것은 무주처이고 무주처(無住處)가 바로 무주심(無住心)이고 불심(佛心)입니다.
이것은 내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또한 내마음대로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을 생각해 보싶시오 여러분은 현재의식의 내가 나라고 고집을 하는데 그게 아니라 자기 자성의 부처를 믿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자성의 부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성의 부처는 근본을 말합니다.
자성의 부처가 근본이지만 여기서 만가지 행이 나가는 것은 현재의 자기입니다.
그러니 이 두가지법을 포괄해서 잡고있는 것이 중도법이니 세상에 중도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예를 알면 나아갈 자리와 물러설 자리를 안다고 했는데, 자기가 알음알이로 나감과 물러섬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성의부처에 순종함으로써 자연히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공부라는 것은 자기가 스승이고 자기가 제자입니다. 즉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은 부처님께 귀의해야 하는 것이고, 여기서 부처님이 여디에 있느냐면 자기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자유롭게 살 수 있겠습니까?
무명이라는 탐진치에 빠져 욕심을 부리면 자기안의 오묘한 지혜를 가려서 끝내는 자유스럽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예를 알면 나아감과 물러설 때를 알 수 있는 것이니 그때를 행해서 베푸니 옳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예를 알지 못하면 마음속에 괜찮다는 생각을 하나 이를 행하면 이치에 어긋나기 때문에 나가고 물러서고 오르고 내릴 때(진퇴승강 進退升降)를 알 수 있을 것인가.
결론은 모른다는 것이지요.
때문에 예라는 것은 필히 알아야 할 것이요, 알지 못하면 안되는 것이다.
야부스님은 간략하게 말해서 대충 감으로는 알겠는데 확연히 구체적으로 알기는 어려우니 함허득통 선사께서는 이와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하셨습니다.
【冶父】
虛空境界를 豈思量가 大道淸幽理更長이로다 但得五湖風月在하면
허공경계 기사량 대도청유이갱장 단득오호풍월재
春來依舊百花香하리라
춘래의구백화향
<번역>
허공의 경계를 어찌 사량하겠느가. 큰 도는 맑고 그윽하여 이치가 더 길지요. 다만 다섯 호수에 바람과 달이 있으면 봄이 오며 예전대로 일백 꽃이 향기롭구나.
<해설> - 무각
허공의 경계를 어찌 사량하겠느가. 큰 도는 맑고 그윽하여 이치가 더욱 길다.
길다는 것은 크고 넓다는 말입이다. 다만 다섯 호수에 바람과 달이 오면 예전대로 일백 꽃(온갖 꽃)이 향기롭구나
여기서는 큰 도를 사량할 수 없는 허공의 경계에 비유했는데 허공은 무주를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은 만행의 근본입니다.
이 말은 앞에서 말한 무주(無住)로, 무주란 만행의 근본입니다.
그리고 허공 경계를 사량하고 이치가 더욱더 길다고 한 것은 무주가 만행의 근본(만행지대본 萬行之大本)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다음에 다섯 호수에 바람과 달이 있으면 봄이 오며 예정대로 백화가 향기롭구나라는 뜻은 만행이라는 것이 무주의 대용(큰 작용)임을 설명한 것입니다.
작용을 잘 하니까 가히 예를 안다고 앞에서 말했지요. 그러니 모두가 잘 맞아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람과 달 그리고 다섯 호수라 했는데, 바람이 불어오면 호수의 물이 요동쳐서 파도가 이는 것이지요, 다섯 호수는 무엇일까요, 오온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속 오온에 바람이 일면 파도가 이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여기에 달이 있다고 합니다.
파도가 쳐도 달이 비추지 않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니까 온갖 만행이 우주의 큰 작용이라는 것을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잘 안되서 화가 나서 울음이 나오더라도 여기다 맡기면 됩니다.
울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울때는 울고 웃을때는 웃으십시요.
하지만 그것이 어디로부터 나와서 작용이 된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일체법이 진리의 나툼입니다. 이것을 알면 울면서도 울지 않는 도리가 있고 웃으면서도 웃지 않는 도리를 알게 됩니다. 그러면 여여(如如)해 지는 것입니다.
【說誼】
無住로 爲住하니 廓然如空이라 雖然如是나 大道는 不屬有住無住하니
무주 위주 곽연여공 수연여시 대도 불속유주무주
方之海印이요 越彼大虛로다
방지해인 월피대허
大虛中에 不妨有五湖風月이요 無住中에 亦不妨繁興大用이니
대처중 불방유오호풍월 무주중 역불방번흥대용
古人이 道호대 莫把無心云是道하라 無心도 猶隔一重關이라하시니
고인 도 막파무심운시도 무심 유격일중관
無心이 正是無住之義라 要向無住中하야 繁興大用하야
무심 정시무주지의 요향무주중 번흥대용
圓具萬德하야사 方與大道로 相應去在하리니 到這裡하야는
원구만덕 방여대도 상응거재 도자리
見聞覺知가 依前受用家風이요 色香味觸이 元是遊戱之場이니라
견문각지 의전수용가풍 색향미촉 원시유의지장
<번역>
주함이 없음으로써 주를 삼으니 확연하기 허공과 같다. 비록 그렇지마는 큰 도는 주함이 있음과 주함이 없는 데 속하지 아니하여서 해인(海印)에 비기고 저 태허를 지나간다.
큰 허공 가운데는 다섯 호수의 바람과 달 있는 것이 방해롭지 않으며, 주함이 없는 가운데는 또한 큰 작용을 일으킴이 무방하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무심(無心)을 가져다가 도라고 하지 마소. 무심도 오히려 한 겹의 관문에 막혀 있소 하였으니 무심이란 바로 무주(無住)의 뜻이다.
그러기에 무주의 가운데를 향하여 큰 작용을 일으켜서 만덕(萬德)을 원만히 갖추어야 바야흐로 큰 도와 서로 응해갈 것이다.
여기에 이르면 보고 듣고 깨달아 아는 것이 전대로 집안풍도를 받아 써서 빛깔과 냄새와 맛과 촉감이 원래 유희(遊戲)하던 장소이다.
<해설> - 무각
주함이 없음으로써 주를 삼으니 확연하기 허공과 같다. 비록 그렇지마는 큰 도는 주함이 있음과 주함이 없는 데 속하지 않는다.
즉 무주 위주(無住 爲住)에 속하지 아니하다는 것으로 해인(海印)의 큰 바다에 도장 찍는다는 것인데 해인삼매(海印三昧: 화엄경을 설명하면서 도달한 삼매의 경지. 바다에 풍랑이 쉬면 삼라만상 모든 것이 도장 찍히듯 그대로 바닷물에 비쳐 보인다는 뜻)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거울처럼 깨끗해지기를 바라는데 바다는 끝없이 파도가 치는데 거기에 상관없이 끝없이 도장을 찍듯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끝없이 출렁이지요 싫었다 좋았다 이랬다 저랬다 움직이는데 이것이 삼매에 도장찍었다는 것이고 이렇게 변하는 것이 이미 삼매입니다.
여러분은 마음이 고요한 것을 삼매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개별삼매(個別三昧)라고 합니다.
해인삼매는 삼매의 왕이고 이것을 믿으면 해인삼매를 얻게 됩니다.
삼매를 얻으려면 삼매의 왕을 얻어야 하는 것이고 이것은 믿음에 속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주함이 없음으로써 주를 삼는 것이 해인삼매에 견줄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큰 도는 주(住)와 무주(無住)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속하지 않기 때문에 해인삼매에 견줄수 있다는 것이고 저 허공을 넘어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러하냐 하면 여러분 마음 즉 불성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큰 허공 가운데는 다섯 호수에 바람과 달이 있는 것이 방해롭지 않다고 합니다.
큰 허공 속에서 바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더라도 방해롭지 않으려면 여러분 마음이 푹 쉬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거기서 온갖 것이 들고 난다 하더라도 거기에 방해롭지 않다는 것이지요,
깨달음이라는 것이 있고 바람(번뇌망념)부는것에 방해롭지 않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번뇌망념에 괴로워하고 달이 떠서 밝아져서 지혜가 생기면 기뻐하는데 자기 본래면목이 허공이라는 것을 믿어 들어가면 여러분 마음은 어떤 것에도 방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여러분 마음을 허공처럼 쓸 줄 안다면(자기의 본래면목이 허공임을 믿어버리면) 이렇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계가 필요없이 지금이라도 당장 믿어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함이 없는 가운데 큰 작용을 일으키는 것도 무방하다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무심(無心)을 가져다가 도라고 하지 마소. 무심도 오히려 한 겹의 관문에 막혀 있소. 하였으니 무심도 또한 도(道)라고 하지 마소. 무심도 오히려 한 겹의 관문에 막혀 있다는 말이지요.
여기서의 무심은 아무 생각없이 내려놓고 쉬는 것만 도라고 하지 말라. 왜냐하면 지금 이렇게 작용(보살행)을 행하는 것도 한 겹의 관문에 막혀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무심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즉 무심위종(無心爲宗)이라고하여 무심이 근본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렇지만 여기서 다시 무주의 큰 작용(무주대용 無住大用) 이 나와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중에 또 나오는데 집안일과 도중일이라고 하여 집안일은 무주의 근본에 주하는 것이고 도중일은 작용(보살행)으로 이 두 가지가 균형이 맞아야지 치우치면 안됩니다. 무주와 작용이 어느 한 쪽에 치우치면 원융한 지혜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근본에만 머물면 주하는 것이므로 그래서 무주에 머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쉽게 말해서 괘종시계에 비유하면 추가 이쪽이로가서 머무는가 십으면 다시 저쪽으로 가고 거기서 머무는가 십으면 다시 저쪽으로 가니 왔다갔다 잠시도 한쪽에 머무르지 않고 왔다갔다 하니까 이것을 무주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머물지 않고 근본에 의지하면서 작용을 하는데 이와 같은 것을 다른 말로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이라고 하지요. 보리에 머물지도 않고 중생을 제도하는데도 머물지 않고, 왔다갔다 잠시도 머물지 않지요. 이래야 바른 안목이고 바른 수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여기서 하고있는 것입니다.
다시 교재로 돌아와서 무심도 오히려 한 겹의 관문에 막혀 있소 하였으니 무심이란 바로 무주(無住)의 뜻이다.
그러기에 무주의 가운데를 향하여 큰 작용을 일으켜서 만덕(萬德)을 원만하게 갖추어야 바야흐로 큰 도와 서로 상응하여 갈 것이다.
결론은 균형이 맞아야 큰 도가 되지 어느 한 곳에 머물렀다 하여 이게 옳다하고 머물면 안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르고 보면 듣고 깨달아 아는 것이 예부터 집안 풍도(家風)을 받아 써서 빛깔과 냄새와 맛과 감촉(육진 六塵)이 원래 유희(遊戲)하던 장소이다.
즉 일체법이 불법이고 진리의 작용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宗鏡】
住相布施는 猶日月之有窮이요 不著六塵은 若虛空之無際로다
주상보시 유일월지유궁 불착육진 약허공지무제
自他俱利하야 福德難量이니 豁然運用靈通이요 廓爾縱橫自在로다
자타구리 복덕난량 활연운용영통 확이종횡자재
且道하라 還有住著處麽아 妙體本來無處所하니 通身何更有蹤由리오
차도 환유주착처마 묘체본래무처소 통신하갱유종유
<번역>
상에 주하는 보시는 마치 해와 달의 다함이 있는 것과 같고, 여섯가지의 경계에 집착하지 아니함은 마치 허공의 변제(邊際)가 없는 것과 같다.
나와 남이 모두 이익하여서 복과 덕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활연하여 운전하여 씀이 신령스럽게 통하고 확연하여 종과 횡으로 자재하구나.
그렇다면 말하여 보라. 주착하는 곳이 있는가 없는가. 묘한 체는 본래 일정한 처소가 없거니 온 몸에 어찌 더 종적이 있겠는가.
<해설> - 무각
상에 주하는 보시는 마치 해와 달이 다함이 있는 것과 같고, 여섯 가지의 경계에 집착하지 아니함은 즉 머무름이 없는 보시(무주상보시 無住相布施)를 하면 마치 허공이 변제(邊際)가 없는 것과 같다(허공이 끝이 없는 것과 같다).
나와 남이 모두 이익하여서 복과 덕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활연하여 운전하여 씀이 신령스럽게 통하고 확연하여 종과 행으로 자재하구나.
그렇다면 말하여 보라 주착하는 곳(몸과 마음이 집착하는 곳)이 있는가, 즉 잠시도 머무름이 있으면 안된다는 것이고 그래서 무주(無住)에 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묘한 체는 본래 일정한 처소가 없으니 온 몸에 어찌 더 종적(좌취)이 있겠는가.
【說誼】
住相布施는 徒眩人之耳目이니 違於無住大道라 但感有漏之報하야
주상보시 도현인지이목 위어무주대도 단감유루지보
失於無邊大利호미 猶彼日月이 但能代明而不能通乎晝夜어니와
실어무변대리 유피일월 단능대명이불능통호주야
無住行施는 身心이 澹寂하고 內外一如하야 契乎無住大道하야 終獲無邊大利호미
무주행시 신심 담적 내외일여 계호무주대도 종획무변대리
如彼大虛가 廓然無際하야 以之處己하며 推以及人이니 其爲福德이 實爲難量이로다
여피대허 확연무제 이지처기 추이급인 기위복덕 실위난량
福德難量은 且置하고 怎生이 是無住底道理오 豁然運用靈通이요
복덕난량 차치 즘생 시무주저도리 활연운용영통
廓爾縱橫自在로다 且道하라 還有住著處麽아 妙體無處所하니 通身沒蹤由로다
확이종횡자재 차도 환유주착처마 묘체무처소 통신몰종유
<번역>
상에 주하여 보시하는 것은 한낮 남의 귀와 눈만 현혹할 뿐이어서 주함이 없는 큰 도에 어긋나서 다만 유루(有漏)의 과보만 받고 가이없는 큰 이익을 잃어버리는 것이 마치 해와 달이 다만 밝음을 대신할 뿐이고 밤과 낮을 통하여 밝지 못하는 것과 같다.
주함이 없이 보시를 행함은 몸과 마음이 맑고 고요하여서 안과 밖이 한결같으며, 주함이 없는 큰 도에 계합하여 마침내는 가이없는 큰 이익을 얻는 것이 마치 큰 허공이 확연하여 변제가 없는 것과 같다.
이로써 자신에게도 처하고 미루어 남에게 미치니 그 복덕은 실로 헤아릴 수가 없다.
복덕이 헤아릴 수 없음을 그만 두고 어떤 것이 주함이 없는 도리인가.
확연하여 운전하여 씀이 신령스럽게 통하고 확연하게 종과 횡으로 자재하구나.
그렇다면 말하여 보라. 주착(主着)하는 곳이 있는가 없는가, 묘한 체는 일정한 처소가 없으니 온 몸에 종적이 없구나
【宗鏡】
運力檀度契眞常하니 福等虛空不可量이라 無影樹頭에 花爛熳하니
운력단도계진상 복등허공불가량 무영수두 화난만
從他採獻法中王이로다
종타채헌법중왕
<번역>
보시 바라밀에 정진하여 진상(眞常 진실하고 항상것)에 계합하니 복이 허공과 같아서 헤아릴 수 없네. 그림자 없는 나무 위에 꽃이 찬란하게 피었으니 저를 쫓아 법 가운데의 임금에게 따써 올리겠오.
<해설> - 무각
보시 바라밀에 정진하여 진상(眞常진실하고 항상한 것(진리)에 계합(현상이 서로 들어맞음)하니 즉 보시 바라밀을 행하니 참답고 항상한 것에 계합된다는 것입니다.
보시 바라밀에서 보시는 작용이고 바라밀은 법다운 행(저 언덕에 올라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보시를 행해도 그 행이 진리에 맞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진실하고 항상한 것에 계합(하나가 됨)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이 허공과 같아서 헤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림자 없는 나무 위라고 하는데, 왜 그림자 없는 나무라고 했을까요? 나무는 항상 그림자가 있는데, 그 이유는 진리는 항상 상대성이 아니고 절대성이거든요 어떤 인연소생이 아니거든요, 여러분의 본래면목(참 나)은 잠시 생겼다 없어지는 물건이 아니고 죽고 사는 것이 아니고, 너와 내가 아니고 이런 상대적인 세계를 떠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홀로있는 절대성의 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자없는 나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그림자 없는 나무는 여러분의 본래면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림자없는 나무위에 꽃이 찬란하게 피었으니, 그림자 없는 나무가 되야 여러분의 한 생각이 진리로써, 부처님의 법문으로써 그것을 끌고 가면 여러분 스스로가 그림자없는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법문따라 신 구 의 삼업을 행하면 그림자없는 나무가 되는 것이고 이때 상대적인 세계를 떠나서 절대의 세계에 서 있는 것이고 여러분의 삶이 진리위에 서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무엇이 생기느냐 하면 여러분 마음속의 업식들이 깨달음을 얻어 봄이되면 저절로 만물이 소생되어 꽃이 피듯이, 또 마음속에 꽁꽁 얼어있던 악업 선업들이 자기를 끌고 가는데 봄바람이 불면 여기서 자연스럽게 녹아서 새순이 돋고 작용하여 꽃이피고 열매가 맺는 작용을 한다는 말입니다.
남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 가운데 있는 일체 중생들이 낱낱이 깨달아 진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저를 쫓는 법 가운데 왕에게(法中王 부처님,본래부처)따서 올리겠오.
여기서 꽃은 깨달음의 꽃으로 이 꽃을 부처님께 올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유마경에서는 장자의 아들 보적이 칠보 일산을 부처님께 바치거든요, 여기서는 오호(五湖)라고 했지만 유마경에서는 5백 장자의 아들 5백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말의 의미를 알면 말 속에 근본 이치가 들어있습니다.
장자도 아니고 장자의 아들이라고 했고 5백개의 일산을 들고와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이지요, 그러니 부처님께서 위신력으로 한꺼번에 끌어들여서 한 일산으로 만들어 당신이 가지고 있는 일산과 하나로 합치셨습니다.
여기서 일산은 광명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니 거기서 온갖 세계가 전부 드러나더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유마경의 불국품에 나옵니다.
저를 쫓아서 법 가운데의 왕에게 따라 올리겠오.
오백장자의 아들 각자가올린 보배 일산이나. 그림자 없는 나무 위에 찬란하게 핀 꽃이나 같은 뜻입니다. 즉 깨달은 마음이고 장엄된 마음입니다.
이것을 부처님께 바칩니다.
마치 여러분이 촛불을 하나 들었다면 이것도 하나의 작은 밝음입니다. 이 밝은촛불을 부처님이 가지고 계신 광대무명한 춧불과 같습니까?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불이라는 본질은 같은 것입니다. 단지 작용이 크고 작을 뿐입니다.
그럼 그것을 부처님께 바쳐서 부처님의 불과 합쳤으면 자신의 불과 부처님의 불과 분리되었습니까? 분리될 수가 없지요, 그러니 부처님이 가진 광대무변한 지혜와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로써 부처님의 지혜를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지혜가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것일까요 내가 깨달은 것일까요 이것은 둘 다 포함된 것으로 둘이 아닙니다.
그래서 법 가운데의 임금에게 따서 올리겠오. 라고 서정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앞에서는 다섯 호수와 바람과 달을 이야기 할 때 다섯 호수를 말했고 유마경에서는 오백장자와 오백 장자의 아들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오(五)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참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說誼】
無住行施는 施契性空이니 性空이 無邊일새 福亦無際로다
무주행시 시계성공 성공 무변 복역무제
因無住而萬行이 俱沈하야 果闕圓常則無住之於行果에 固有妨矣어니와
인무주이만행 구침 과궐원상즉무주지어행과 고유방의
因無住而萬行이 爰起하야 得福無邊則無住之於行果에 大有益焉하야
인무주이만행 완기 득복무변즉무주지어행과 대유익언
而固無妨矣리라 旣無妨矣則行行이 無著하야 福亦不受가 固其宜矣니라
이고무방의 기무방의즉행행 무착 복역불수 고기의의
爲甚如此오 有樹元無影하니 生長劫外春이라 靈根이 密密蟠沙界하니
위삼여차 유수원무영 생장겁외춘 영근 밀밀반사계
寒枝無影鳥不棲로다 莫謂裁培何有鄕하라 劫外春風에 花爛熳이로다
한지무영조불서 막위재배하유향 겁외춘풍 화난만
花爛熳이여 從他採獻法中王이로다
화난만 종타채헌법중왕
<번역>
주함이 없이 보시를 행하는 것은 보시가 성품이 공한데 계합한다.
성품이 공하여 가이없을새 복도 변제가 없구나.
주함이 없음으로 인하여 일만 행이 함께 잠겨서 과보가 원상(圓常)을 궐(闕)하면 주함이 없는 행과(行果)가 진실로 방해가 있겠지마는 그러나 주함이 없음으로 인하여 일만 행이 이에 일어나서 복을 얻음이 가이없으면 주함이 없는 행과에 크게 이익이 있어서 참으로 무방하다 하겠다.
이미 무방하면 행실에 집착이 없어서 복도 또한 받지 않음이 의당(宜當)하다.
어찌하여 그런가 하면 나무가 원래 그림자가 없으면서도 겁 밖의 봄에 생장하는지라 신령한 뿌리가 밀밀(密密)하여 항하사에 재배했다고 말하지 마소.
겁 밖의 봄바람에 꽃이 찬란하게 피었오. 꽃이 찬란함이어서 저를 쫓아 법 가운데의 임금에게 따다 받치겠오.
<해설> - 무각
주함이 없는 보시를 행하는 것(無住行施)은 보시가 성품이 공한데 계합한 것이다.
보시라는 작용은 자기를 위해서 입에다 넣는 것도 자기 안에 있는 중생을 위해서 보시하는 것입니다. 아귀처럼 탐심으로 먹는 사람도 있고 똑같이 내 입에 넣더라도 보살의 행으로써 보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자기가 자신의 입에 넣는 것은 창피하게 여기고 남을 위해 남의 입에 넣는 것은 좋은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둘을 똑같이 평등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혜가 평등하고 원만하게 됩니다.
조금 착하고 수행꿰나 하는 사라은 자기입에 넣는 것은 좋아하고 남의 입에 넣는 것은 좋아하고, 중생들은 자기입에 넣는 것은 좋아하고 남의 입에 넣는 것은 싫어하고 이렇게 정반대의 생각을 갖거든요, 그러면 어느것이 옳을까요?
둘 다 틀린 생각입니다.
유위법으로 따지면 남의 입에 넣는 것을 좋아하면 유위의 복은 많지만 깨달음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주함이 없는 보시를 행하는 것은 보시가 성품이 공한데 계합한 것이다.
라고 했는데 성품이 공한데 계합했다는 것은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보시를 행해도 깨달음과 계합되지 않는다면 부질없는 일이라고 합니다.
성품이 공하여 가이없을새 복도 변제가 없구나. 복도 끝이 없다는 말입니다.
주함이 없음(무주 無住)으로 인하여 만행이 함께 잠겨서, 이 말은 주함이 없으니 만행이 생겼다는 것으로, 잠겼다는 것은 물들었다는 것입니다.
과보가 원상(圓常)을, 앞에서는 진상(眞常)이라고 하여 진상은 진실하고 항상한 것이고
원상은 원만하고 항상한 것을 말하는데 같은 뜻입니다.
종경 스님은 진상이라고 했고, 함허득통 선사는 원상(圓常 원만하고 항상한 것)이고 했습니다.
단지 이름을 똑같이 쓰기가 그래서 바꿨습니다.
이것은 진리 자체로 본래 면목을 말합니다.
궐(闕)하면 주함이 없는 행과(行果)가 진실로 방해가 있겠지만, 즉 주함이 없는 행을 하는데 방해가 있겠지만 그러나 주함이 없음으로 인하여 만행(萬行)이 이에 일어나서,
여기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보살행을 일으키면 일만행으로 인하여 과보에 물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행을 하는데 일어난다는 것은 마음이 항상 공한데서 경계가 닦치면 한 생각이 우뚝 일어나서, 여기서 일어난다는 것은 우뚝 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경계에 흔들리지 않음을 뜻합니다.
내가 옛날에 속가 동생이 죽었다고해서 전라도 광주로 가는데, 가면서 버스터미널에서 몇 번을 갈아타고 갔습니다. 그때가 출가한 지가 얼마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항상 공부라는 것은 초발심때 부지런히 해야 공부체험이 깊어지지 나이가 많이 먹어서 하려면 발심이 잘 되지 않고 체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때가 30대 초반이었고 그때 공부체험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니 세월이 많이 지났다고해서 체험이되고 출가한지 얼마 안 된 중이라고 해서 체험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출가한지 얼마 안 된 중이 공부를 더 잘하고 열심히 합니다.
신도들도 오래 다니면 매너리즘(틀에 박힌 일정한 방식이나 태도를 취함으로써 신선미와 독창성을 잃는 일)에 빠져서 신심이 약해지고 자주 빠져서 공부의 진취가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 어렵다는 겁니다.
그러니 항상 발심하고 발심해야 하는데 이것이 쉽지 않거든요, 발심을 일으키면 일으킨 만큼 얻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계속 하면 하는만큼 꼭 여러분 마음속의 부처님께서 다 알고, 이에 대해 응답하여 알게 해줍니다.
그래서 부처니의 자비는 한량이 없고 하해(河海)와 같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하는데 여러분이 이것 조차도 잘 안믿거든요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때 터미널에서 차를 기다리며 앉아 있는데 항상 우리는 무주(無住) 무심(無心)공부 즉 놓고 쉬는 공부를 하니까 별생각없이 무심으로 앉아 있었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지나가는데 착 다가오는 것이 삶과 죽음이 손바닥의 앞 뒷면 같이 여실이 보이는 것입니다.
순간 내 눈을 의심하면서 이게 뭘까 생각하면서 계속 보는데 사람들의 모습이 앞에는 생(生)이고 뒷면은 사(死)더라고요, 생과 사가 붙어 있는 것이 보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잘난체하고 나름대로 멋을 부리고 다니잖아요, 그 모습 속에서 죽음이 동시에 같이 있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사람들의 행동과 마음쓰는 것을 보니 우습기 짝이없더라고요,
그래서 혼자 웃음이 나오는데, 그상태에서 나혼자 킥킥킥 웃으면 이상하게 보일까봐 고개를 들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고개를 숙이고 몰래 웃음이 나와니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이 상태가 몇 개의 터미널을 갈아탈 때마다 사람들을 보면 계속 웃음이 나와서 똑같이 고개를 숙이고 웃느라고 고개를 들지를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중이 고개를 들고 혼자 킥킥킥 웃으면 이상한 중이라고 생각할까 봐 그랬지요.
이런 경험도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자성의 부처가 야! 이게 진짜야 너는 지금 살아있고 동생은 죽은게 아니야! 생사라는게 이와 같은 것이다. 라고, 그런데 이런 것은 사람들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거든요, 나는 이 체험을 통해서 생과 사를 여실하게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집에 가보니까 동생이 죽어 있더라고요, 그런데 그때 마음이 평평하니까 생각이 분별이 붙을 자리가 없지요, 그때 마음이라는 놈이 가운데 우뚝 하게 서있는 것입니다. 주장자(拄杖子)가 서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어떤 것이 와도 물들지 않고 요동이 없었지요,
그래서 죽은 동생을 처다보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내 마음 가운데 우뚝 선 주장자가 바로 법이거든요, 잠시후 어머니와 아버지도 오셔서는 울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어머니 아버지를 보고 조용히 하시고 저쪽 방에가서 천수경을 읽으십시오 하고 소리를처서 그 자리에서 보내버렸습니다.
그대 우뚝 선 그 마음(주장자)을 이 책에서는, 주함이 없음으로 인하여 일만 행이 이에 일어나서(인무주이만행 완기 因無住而萬行이 爰起하야) 복을 얻음이 가이없으면 주함이 없는 행과(行果)에 크게 이익이 있어서 참으로 무방하다 하겠다.
이미 무방하면 행실에 집착이 없어서 복도 또한 받지 않으이 의당(宜當 당연히)하다.
어찌하여 그런가 하면 나무가 원래 그림자가 없으면서도 겁 밖의 봄(겁 외의 봄)에 생장하는 지라 라고 했습니다. 즉 시간이나 공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는 봄 자체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의 테두리를 훌쩍 뛰어 넘은 봄바람이라는 것을 항상 알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이어서 겁 밖의 봄에 생장하는 지라 신령한 뿌리가 밀밀(密密 틈이없음)하여 항하사 세계에 서리었고 찬 가지(한지 寒枝)에 그림자가 없으며 새도 살지 않네.
여기서 찬 가지라고 했는데 한자는 찰 한(寒)자로 차다(춥다)는 의미인데 왜 찬 가지라고 했을까요, 보통 찰 한자에 빛 광자를 써서 한광(寒光)이라고도 하는데 같은 뜻이니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다시 여기를 보면 찬가지에 그림자가 없으며 이라고 했는데 찬 가지이니까 그림자가 없으며 새도 살지 않네.
하유향(何有鄕 이상향)에서 재배했다고 말하지 마소. 즉 이상향에서 재배한 나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고 지금 살고있는 이곳이 그대로 하유향(극락세계) 라는 말입니다.
겁밖의 봄바람에 꽃이 찬란하게 피었오.
꽃이 찬란함이어서 저를 쫓아 법 가운데의 임금에게 따다 받치겠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