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모 칼럼(2025.10.25>
(한국의 비료공업의 발전 역사)
우리나라의 비료공업은 일제 강점기인 1930년에 설립된 세계굴지의 종합 화학공장인 흥남 소재 조선질소 비료공장이 건설됨으로써 시작되었다.
흥남의 조선질소는 북한의 수력발전으로 생긴 풍부한 전기로 물을 전기분해하여 생긴 수소와 공기 중의 질소와 합성하여 암모니아를 만들어 최종 제품으로 질소질 비료인 유안과 과석비료 그리고 각종 유무기 약품과 화학비료를 생산하는 공장이었다
.
그러니까 일제 시기이긴 하였지만 한반도에서의 비료생산은 비교적 역사가 오래 되었다.
그러나 남한에는 비료생산을 위한 공장다운 공장이 없었으며 남한은 국토의 70%가 산지여서 경작지도 좁고 천수답이었으니 농본지
국가로서 농사도 원시적인 형태였다.
남한은 6.25 사변 후 전쟁 복구 기인
이승만 대통령시절에 한국 최대 규모의 화학공장인 비료공장을 미국의 ICA 원조 자금으로 건설하였다.
이 당시 한국은 막대한 양의 양곡을 미국의 원조자금으로 도입하고 있었으므로 농업증산을 위한 비료공장 건설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미국은 판단하고 최대액수의 무상 ICA 자금을 주어 건설된 것이다.
비료공업이라고 이는 것은 기술적으로 화학공학(Chemical Engineering)에 의한 공장건설에서 기본이 되는 필수적 공업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화학공업으로서의 비료생산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나) 박정희시대의 비료공장 건설
개관
1. 충주비료( 제1 비 충비)
충비는 1955년 ICA자금 1,955만 5천 달러와 내자 1억 5천만 원으로 연산 85.000톤의 요소 비료공장 건설에 착공하였다.
입지도 미국의 TVA (Tennessee Valley Authority)가 공업용수
와 농산물의 집산지면에서 충주를 결정하여 건설하였다.
수차례의 설계변경에 따른 공사추가로 외자 3,475만 달러가 소요되어 당초금액의 2배가량을 사용하였으며 공기도 1958년 완공에서 1961년 4월에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자기들 돈으로 자기들 마음대로 한 것이다.
그 후 충비는 요소 연간 8만 5천 톤으로는 경제성이 없어 6 비로 명명하여 배가증설을 하여 대규모화했다
그 후 5년 후에 민간에 불하를 했지만 지금에는 자취도 찾아볼 수없 다.
그러나 충주비료 공장건설로 수많은 화공 기술자가 양성되어 추후의 중화학 공장건설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2.(제2 비)( 나주비료)
제2 비 나주비료는 10월 11일 토요 칼럼에서 원료탄으로서의 무연탄이 가루탄이란 비사를 기술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요점만 기록한다.
호비는 당초부터 두 가지 결정적인 문제인 자금조달과 원료에 따른 무모성으로 불가능했던 것을 추진한 비극이다.
화순에서 원료탄으로 운송된 무연탄이 괴립탄이어야 하는데 분탄이었다. 무연탄을 연소시키기 위하여 밑에서 공기를 불어넣으니까(Air Blowing) 연소가스와 함께 탄가루가 가스와 같이 따라 올라와 암모니아 합성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3.(제3 비)( 영남화학)과
(제4 비 )( 진해화학)
60년대 박정희 정부는 비료공급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경제개발 5개년 계획상에 2개의 비료공장을 계상하였다.
이것은 각각 공장규모는 요소 84.000톤 복합비료(NPK) 180,000톤이었다.
사업주체는 한미양국 50:50의 합작으로 하되 차관은 미국의 합작선이 책임지기로 하고 한국의 주체는 국영의 한국종합화학이 담당하였다.
외국의 합작분은 울산 소재 제3 비는 미국의 인광석회사 Swift사와 유류회사인 Skelly 오일이 담당하였고 진해소재 제4 비는 Gulf Oil이 담당하였다.
4.(제5비료)(한국비료)
삼성이 제5비료공장을 건설하기 위하여 설립한 회사가 한국비료(주)이다.
삼성의 비료공장 건설계획은 정부의 3.4 비 비료공장 이전에 추진되었으나 자금조달 문제로 결국 5 비로 건설이 추진되었다.
공장규모는 요소 33만 톤으로 계획 당시 세계 최대급이었으며 요소로서는 국내에 있는 모든 비료공장을 합친 것보다 컸다.
1967.4월에 건설에 착수했으나 건설도중 내자 조달이 불가능하여 삼성은 주식의 51%를 정부에 기부하고 한국비료의 경영에서는 손을 떼었다.
한국종합 화학이 운영하다가 1994년 정부의 민영화 방침에 의거 공개 입찰한 결과 다시 삼성소유가 되었다.
그 후 삼성은 비료생산뿐만 아니라 각종 화공약품을 생산하는 정밀 화학공장으로 발전시켜 첨단 산업에의 진입을 위하여 삼성정밀 화학으로 개편하였고 별도로 삼성 BP를 만들어 석유화학 업계의 거물이 되었다.
삼성은 그 후 미래 전략사업으로 Biologics에 대대적인 투자를 위하여 이병철 회장의 창업 이래 기존의 주류사업 종목이었던 정밀화학, 석유화학, 방위산업등을 롯데와 한화등사에 과감히 매각하였다.
이것은 21세기를 맞이하여 제4차 산업혁명을 수행을 위하여 삼성이 첨단산업화의 길로 진입하는 혁명적인 결단이었다
정부의 힘도 빌리지 않고 삼성자신의 판단으로서 결정한 것으로
세계 IT AI계에서 세계선두를 달리고 있는 삼성다운 미래를 향한 구조 전환대책이었다.
문재인 정부당시 미래산업으로의 전환과정에 생간 계열회사 간 주식합병이 애매한 국정논단에 걸려 이재용 회장을 비롯한 미래 전력 실창 최지성 부회장도 징기 간의 옥고를 치른 해프닝이 있었다. 피눈물 나는 역사이다.
5.(제7 비) (남해화학)
제7 비는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 관심 project인 여수/여천 석유화학단지의 선발사업으로 대성 메탄올 공장과 동시에 출범하였다.
7 비는 암모니아 60만 톤을 기초로 하여 NPK 복합비료 70만 톤과 요소 33만 톤 그리고 초안 1만 5천 톤과 화공약품으로 황산, 인산, 희질 산, 농질산을 섕산하는 세계 일류급의 종합화학 공장으로 건설되었다.
건설당시 대성메탄올 김봉완 사장과 남해화학 장홍규 사장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제7비료 공장은 한미합작으로 건설되었는데 한국 측은 한국종합화학(75%)이 미국 측은 Agrico사(25%)였으며 사명을 남해화학(주)으로 명명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7년 8월 4일 준공식 치사를 통해 "제7비료
공장인 남해화학은 단일공장으로서는 세계 최대급의 규모와 최신공정을 자랑하는 공장으로서 3년 4개월 동안 방대한 자금을 투입하고 고도의 기술을 총동원하여 이룩한 한국화학 공업의 이정표"라고 하셨다.
제7 비의 공장건설로 한국은 모든 비료를 완전 자급자족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출까지 하였으며 화학공업에 필요한 기본인 무기산을 공급하는데도 기여하였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북한에 각종 비료를 공짜로 보내 준 것은 7 비의 생산품이었다.
6. 기타 비료 생산
이밖에 70년대 중반에 비료를 생산하는 공장으로는 경기화학, 풍농비료, 조선비료, 카프로락탐, 제철화학등이 있었다.
이리하여 비료의 자급자족은 물론 수출공업으로 까지 발전하여 국가의 경제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필자가 보는 현재의 비료공업은 수출공업에서 특수비료를 제외하고는 대량의 비료 수입국이 되었다는 것이다. 7 비까지의 비료공장은 문을 닫은 지 오래되었다.
원료를 나프타 분해 (NCC)로 하여 비료제품을 만드는 것은 동남아의 중소 산유국의 나프타이거나 염가의 저질 원료 나프타를 사용하여 생산하는 국가와는 경쟁활수가 없기 때문에 문을 닫은 것이다.
자유무역 국가에서 국제 수지가 맞지 않는 생산은 문을 닫아야 했다. 세월의 무상함이랄가? 요소수 등 특수 전략 용도로의 요소의 국내 생산도 자취를 감추었다.
참고 KMK 칼럼 한국의
석유화학공업 고찰
석유화학 공업이란 석유류인
나프타 분해 (NCC )로 생긴 유분인 Olefin (에틸렌, 프로필렌, 부타디엔)과 BTX ( Benzene, Toluene, Xylene)을 가공하여
플라스틱, 합성섬유, 합성고무등 수십 가지의 인간 생활용 필수품과 산업용품을 생산하는 공업을 말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중화학 선언에서 화학 분야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