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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배를 시작하고 지금까지 우리가 기도하고 찬양했는데 여기까지 잘 따라오셨다면 정말 오늘 잘 오신 겁니다. 잘 하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찬양과 예배 그것만으로도 여러분 충분히 했다면 잘한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서 지금 전한 이 설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까지 듣고 간다. 그러면 최고로 잘하시는 겁니다. 성경에서 말하지는 않지만 성경이 분명하게 보여주는 이 교회의 정의가 하나 있는데 그거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예수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정의와 공의와 진리와 영생, 생명과 영생의 말씀이고 따르면 평강이 기쁨이 있는 말씀,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교회다 들음이 중요한데 들음이 전부는 아닙니다. 듣기 전에 믿음이 있고 들은 다음에 또 순종이 있어요.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말씀을 들음에서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이 들음이 하나님의 말씀이 들음에 중요하다.
오늘 봉독한 말씀 빌립보서 2장 1절부터 11절 말씀 이 말씀 사도 바울을 통해서 빌립보 교회에게 들려주신 함께 읽고 들으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오늘날도 같은 믿음으로 열린 마음으로 받는 모든 사람 모든 교회에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다.
내용적으로 보려면 교회 전체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고요. 또 교회에 오는 각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교회 전체적으로는 이전 말씀에 있는데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라 이거는 교회 전체를 위해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또 교회 성도 각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은 이어서 3절 4절에 있는데, 아무것도 야망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높이 여기며 자신의 일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도 돌보라 이런 내용을 담고 있어요. 어느 교회라도 어느 성도라도 듣고 따라가면 정말로 복이 되는 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도 이 말씀을 따르기를 바라며 그 말씀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전에 먼저 함께 생각해 볼 것이 하나 있어요. 그거는 뭐냐 하면 이렇게 성경에는 무엇을 하라, 무엇을 하지 말라 하는 말씀들이 많이 있는데 왜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거는 제가 떠올린 질문이 아니고 제가 대화 속에서 저에게 주어진 질문이에요.
왜 마음을 같이 해야 하는가 왜 겸손해야 하는가 왜 남의 일도 돌봐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좀 더 잘 따르기 위해서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도 이 질문을 할 수가 있어요. 제가 어느 날 대화 중에 두 번째 뜻으로 내가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받은 적도 있어요. 그래서 어느 경우이든지 오늘 본문이 이 질문에 대해서 대답을 하기에 참 좋은 본문입니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이미 그 질문을 다루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본문이 주시는 답을 우리가 세계 따라가 보겠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혹시라도 내가 왜 성경의 말씀을 따라야 하는지, 오늘 본문에서 준 것처럼 왜 다른 사람의 일까지 돌아보는 일을 말하는 이런 말씀을 따라 해야 하는지 궁금하다면 한번 잘 생각을 해보기 바랍니다.
첫 번째 이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4절 끝부분을 볼까요?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이게 헬라어 성경으로 보면 또 영어 성경으로 보면 맨 앞에 나오는 말 컴플릿 마이 아니면 마이 아니면 메이크 마이조이 풀 이런 게 맨 앞에 나와 2절 앞에 나오는데 여기서 나의 기쁨이라고 하는데 나는 직접적으로는 사도 바울입니다.
그런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셔요. 그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에요. 그러니까 바울이 사람으로서 기뻐할 것이 많이 있잖아요. 그런데 어찌하여서 교회가 사랑으로 하나 되고 성도가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으로 기뻐하겠습니까? 이 부분에서는 보냄을 받은 자와 보내신 사이에 보내신 자 사이에 일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기쁨은 바울의 기쁨이 되는 것이고 바울의 기쁨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다.
지금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듣고 행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에 주어진 말씀을 행한다. 첫 번째 이유가 되는 것이에요.
두 번째 이유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 하는 사실에 있어요. 빌립보 교회만 아니라 우리가 받은 구원은 우리가 잘해서 행위로 얻은 구원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 교회가 하나 되라 각 사람이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말씀하셨는데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은혜와 구원을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구원은 믿음으로 은혜로 이미 값없이 주어진 것입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받았다면 모두 다 그런 구원을 얻은 것이에요. 이것은 반복적으로 말해도 과함이 없는 복음의 핵심이 됩니다. 세상 다른 어떤 가르침, 종교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참 구원의 핵심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이 진짜로 구원을 받았다면 그에 맞는 삶의 열매가 뒤따르기 마련이죠. 그것이 1절을 통해서 말하려고 하는 바입니다. 1절 한번 보세요.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경에 무슨 교재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이렇게 말씀하죠. 여기서 말하는 것들, 언급되는 것들은 모두 구원과 함께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권면 혹은 격려, 사랑의 위로, 성령의 교제, 긍휼 자비 이것들은 정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구원과 함께 베풀어주는 참 좋은 은혜의 선물들이에요. 다른 어떤 곳에서 받을 수 없는 겁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도 정말로 꼭 필요한 것들이에요.
그리고 정말로 그것을 받았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지금 말씀하는 이 좋은 것들을 다 받았다고 한다면 그에 합당한 삶이 있다는 것이죠. 그에 맞는 복음에 맞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맞는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두 번째 이유,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할 두 번째 이유가 됩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지 않을 때 다른 것들이 기준이 됩니다. 우리가 다른 것들을 따르게 돼 있어요. 3절 보면 이래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죠.
여기에서 말하는 다툼, 허영 이거는 어떤 일을 할 때 그것들을 하게 하는 두 가지 동기가 돼요. 그런 것들을 지적하는 하나님 말씀이 없다면 빌립보서 2장 3절과 같은 말씀이었다면 어디서든지 할 수 있다면 주인 행세를 할 수 있는 사람을 다스릴 수 있는 두 가지예요.
뭐예요? 다툼 허용 그런데 이 중에 다툼은 우리가 조금 더 생각을 해봐야 돼요. 다툼 다툼이라고 번역을 하고 있는데 왜 이렇게 번역을 했는지 저는 궁금해 해요. 왜냐하면 다른 모든 번역 성경은 다르게 번역을 하고 있거든요. 영어 성경에 뭐라고 돼 있습니까? 셀피 엠비션이라고 돼 있는데 이게 더 맞습니다.
이렇게 번역을 해야 돼요. 그래서 한국말로 하면 이기적 야심 여기서 뜻하는 바가 뭐냐 하면 선물을 주어서라도 그가 좋아하는 무엇인가를 주어서라도 나를 따르는 추종자, 나를 지지하는 지지자들을 늘려가는 구하는 것을 말을 하는 겁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이 다툼이라고 하는 말이 지금은 인터넷을 팔로우가 많으면 광고가 붙고 돈을 버는 세상이에요. 인터넷에서 좋은 콘텐츠만 마련해서 올려서 사람들이 많이 오고 팔로우가 많아지면 돈을 버는 세상이 됐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라도 팔로우 앞에서 말한 추종자 지지자 이 팔로어를 늘리려고 애를 쓰는 유튜버들이 많다. 그중에는 정말 순수하게 팔로워들을 돕기 위해서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순전히 자기의 이익을 위한 경우도 허다하다 하는 것입니다.
이 두 번째가 바로 본문에서 말하는 다툼인데 좀 더 정확한 번역은 말씀드렸듯이 이기적 야심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 일도 이기적 야심과 이기적 목적과 허용으로 하지 말라.
이 이기적 야망 허용 세상에서는 조금 도움이 될 수 있어요. 돈을 벌고 성공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 이웃, 우리 교회 이런 사랑 공동체에서는 크게 해가 돼요. 도움이 전혀 안 됩니다. 그렇기에 결국에는 자기에게도 해롭고 세상에게도 유익하지 않은 것들이 지금 말하고 있는 이 다툼과 허영이라는 것이에요.
그런데 사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죠. 이기적인 사람 허영의 사람 그거 나쁘다는 것 이기심과 허영심이 나타나는 거 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일반 세상에는 그것들을 말릴 수 있는 장치가 없습니다. 사람 속에 있는 그것들이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어요. 오히려 그것들을 권하고 높이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 것도 많고 그러나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는 기준이 있죠. 절대적인 기준이 있습니다. 이 기준은 밖으로부터 우리에게 강제된 기준이 아니고 우리가 마음으로 기쁘게 받아들인 기준이에요.
어떤 것입니까? 우리에게 자유와 생명의 길이 되시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말씀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야심과 이기적 야심과 허영이 아무리 유혹적으로 보여도 또 그것으로 인해서 사는 사람들이 정말로 아무리 성공적으로 성공하고 아무리 화려하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말씀에 따라서 그 이기적 야심과 그리고 이어지는 허용심 그것을 거부하고 물리칠 수 있는 겁니다.
이 부분에서 청년들이 잘 기억을 하면 좋겠어요. 청년들 이제 막 대학에 들어가는 청년들도 일도 있죠. 그동안 고등학교까지 있다가 이제 대학에 올라오는 청년들도 있고 청년들인데 잘 기억하면 좋겠어요. 뭐냐 하면 어떤 기준이 있다는 것은 항상 나쁘다 제한적이다. 리스트릭티브만 한 게 아니고 거기에는 해방적인 부분이 있다. 리버레이팅하는 부분이 있다 하는 것이에요. 이거는 하나님과의 관계, 또 교회와의 관계, 부모와의 관계를 생각해도 꼭 기억을 하면 좋은 겁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정말로 가장 자유롭게 살고 싶다. 우리 청소년들과 함께 있죠. 이 세상에서 정말로 자유롭게 살고 싶다. 하고 싶은 거 마음껏 살고 싶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고 가세요. 그 외에 다른 모든 것들은 여러분들에게 정말로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구속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참 자유 그것은 오직 가장 높으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그 의미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지만 그 말씀은 여러분 마음에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리치는 것이 있다면 다툼과 허영을 물리치라고 그랬어요. 이게 야심과 허용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그런 물리치는 것이 있다면 받아들이는 것이 있습니다. 3절 후반부에 보면 어떻게 돼 있습니까?
아무에게나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그다음에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여기 겸손이 언급이 되죠. 성경적으로 볼 때 하나님 앞에서 가장 나쁜 것이 있다면 교만이고 가장 귀한 것이 있다면 겸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어떻게 하신다고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겸손이 무엇인가요? 우리가 물어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다 대답을 할 수 있겠지만 겸손이 무엇인지 많은 사람들이 겸신 눈이 좋은 거는 알아요. 하지만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대답하기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겸손이 뭔가 교만도 마찬가지고요. 성경이 말하는 겸손은 단지 낮은 자리에 가는 것이 아니에요. 낮게 낮춰지는 것만이 아닙니다. 내가 종이기 때문에 아니면 내가 힘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낮은 자리로 가는 것이 갈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가는 것은 꼭 겸손이 아니고 굴종이 될 수가 있어요. 복종이 될 수 있어요. 서브미션이 될 수 있는 겁니다.
또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스스로 낮추는 것도 겸손이 아니라 열등감 아니면 우울함이 될 수가 있는 거예요. 눌려지는 거죠. 스스로를 낮추는 겁니다. 거기는 교만한 사람도 갈 수 있는 거예요. 교만한 사람도 눌리면 낮아집니다. 그죠? 교만한 사람도 힘이 없고 돈이 없으면 달라져요.
그렇다고 해서 겸손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시작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말씀하셨는데 언뜻 보면 비교하는 것 같죠. 그러나 이 말씀에 담긴 진짜 의미는 남과의 비교가 아니에요. 나와 비교해서 그가 이 부분에서 더 낫다 그런 뜻이 아니랍니다.
정 집사님 어디 있죠? 저기 좀 봐주시겠어요? 영국교회에서 받은 지침이 있어가지고 잠깐 다녔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살아갈 때 힘에 있어서 능력에 있어서 공부하는 데 있어서 머리에 있어서 재물에 있어서 연주하는 부분에 있어서 연기하는 부분에 있어서 여러 부분들도 많이 있는데 남보다 더 못한 부분이 있고 더 나은 부분이 있을 수 있어요. 그렇다면 그거는 그냥 사실이죠. 팩트예요. 어떤 부분에서는 그가 더 나은 것이고 어떤 부분에서는 내가 더 나은 것이에요.
그런데 사실을 사실로 받기가 어려운 것이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실을 사실로 받을 수 있다는 것 그것도 일종의 겸손이 됩니다. 경기에서 졌을 때 패배를 인정하는 것도 그것도 겸손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 면에서 겸손에는 이런 적극적인 의미도 있는 겁니다. 내가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적극적인 의미도 있는 건데, 그러나 지금 성경이 말하는 겸손은 모든 비교, 모든 경쟁을 뛰어넘는 절대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이 말씀은 어떤 비교하라는 뜻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존재를 그 자체를 나의 존재보다 더 귀한 것으로 여기라 하는 뜻이에요.
어떤 부분 부분을 인정하라는 뜻이 아니고 그 사람 존재 전체를 하나님 앞에서 나보다 귀한 존재로 대하라는 것이에요.
굉장히 파격적이고 과격한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이미 하나님 앞에서 정말로 겸손한 사람 복음 안에서 시기 질투, 우월감, 열등감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한 사람 자기 자신도 하나님 보시기에 그렇게 귀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인정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주시는 말씀이에요.
뭐라고요?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말씀에 담겨 있는 뜻이 그렇다 하는 것이에요. 그런 사람은 자기의 일을 당연히 돌아보지 그런데 그뿐만 아니라 남의 일도 다른 사람의 일도 형제의 형제자매의 일도 돌아올 수 있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빌립보 교회 성도 모두에게 주신 말씀이고 오늘 우리 교회에 모든 성도에게 주는 말씀이 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제시를 합니다. 5절인데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이거는 이제 우리 말 번역인데 원어는 조금 조금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내 요점은 여기서 말하는 마음은 그냥 마음만 말하는 게 아니고 이어지는 말씀을 볼 때 마음 생각 의지 태도 이런 모든 부분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것처럼 그를 통해서 나타난 것처럼 가지라 하는 뜻이에요.
이어지는 말씀을 볼까요? 6절에서 7절인데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 말씀에 겸손의 본이 있습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기본 생각, 마음 태도가 있는 겁니다. 하늘에 속한 분이 땅에 임하여서 땅 아래까지 내려가신 겁니다. 죽을 수 없는 분이 죽을 수 있는 몸을 입으시고 죄인으로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자기 스스로를 낮추시고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가신 것입니다.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게 아니고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에요.
그다음에 일어난 일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인데, 9절에서 11절입니다. 다시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하늘에 있는 권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느라.
이 부분은 이 부분은 신학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인데 우리가 그걸 다 따라갈 수는 없고, 오늘 설교에 맞춰서 전하고 싶은 요점은 예수님은 자신이 할 것을 하셨습니다. 6절에서 7절에서 보여주시듯이 나머지는 아버지께서 해주셨는데 어떻게 하셨어요? 가장 낮은 곳으로까지 내려간 예수를 가장 높은 곳까지 물려주셨다. 이거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일이지만 그를 믿고 그의 길로 행하기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일어날 일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기뻐하세요. 그리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세요. 그리고 겸손한 죄를 지극히 존귀하게 높여주신다. 내가 인정하는 겸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겸손, 그 겸손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신다.
그거를 오늘 말씀에 비춰보면 그렇게 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맞춰서 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로 행했기 때문에 기뻐하신다. 이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마음속에 주는 하나님의 뜻이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각 사람 마음에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기를 바라고 그 뜻에 그 음성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