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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불교
불교의 체화(體化)
나는 1948년 7월 17일 경상북도 청도에서 태어났다. 그날은 대한민국 헌법이 처음 제정 · 공포된 제헌절이다. 우리나라 헌법과 같은 날에 태어나서, 나이도 우리 헌법과 꼭 같은 것이다. 76년을 살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수행하고 몸에 스며들도록 체화하는 과정에, 불법을 가르치신 스님들께서 주신 법명이 셋이다. 불이(不二), 태허(太虛), 당래(當來)의 셋이 그러하다. 그럼에도 아직 그 가르침의 언저리를 걷고 있는가 하는 생각에 돌아보고 또 수행하려고 애쓰는 오늘이다.
고향 청도는 옛 신라의 서라벌에서 가까운 불교의 흥성지이다. 신라시대에 창건된 운문사 · 대비사 · 용천사 등 경내에 들어서기만 하면 저절로 신심이 솟아나는 부처님의 터전에 부모님 손잡고 오르내리면서, 부처님 가르침이 저절로 스며들어 체화(體化)된 것이다. 어머니는 남들이 다 자는 어두운 새벽에 공양미를 머리에 이고 절에 가서 불공을 드렸다. 우리 집은 그 일대에서 상당히 부유한 광농(廣農)으로, 초등학교에 다닐 때 다른 동무들이 모두 논밭에서 일을 하는데도 부모님은 나에게는 일을 시키지 않으셨다. 더운 여름에 나무 밑에서 혼자 앉아 놀거나 책이라도 보고 있으면, 지나가는 많은 일꾼이 쟤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고 했던 말들이 지금은 새롭게 되뇌어진다. 이렇듯 어릴 적 자라던 고향 청도와 집안의 불교적 분위기로 인하여 나는 거의 선택의 여지 없이 자연스럽게 부처님 가르침을 나의 일부로 수용하고 체화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한강 이남의 수재민
청도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대구에 있는 경북중학교에 진학했다. 그 당시 5 · 16 군사혁명 정부에서 전국 모든 중학교에 동일한 시험으로 입학시험을 보게 했는데, 경북중학교가 서울의 경기중학교 다음으로 커트라인(합격점)이 높은 것으로 드러나자, 선생님들이 그해 입학한 우리를 한강 이남의 수재민(秀才民)이라고 놀리셨던 기억이 난다. 또한 나는 청도에 몇 안 되는 경북중학교 합격생으로서, 당시 청도군 전역에 앰프를 통해 방송되는 유선방송에서 마치 무슨 큰 학자라도 된 것처럼 1시간 동안이나 우리 농촌이 잘 사는 길에 대해서 치기 어린 연설을 했던 기억도 난다.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독일어 시간에는 《황태자의 첫사랑(Alt Heidelberg)》 《독일인의 사랑(Deutsche Liebe)》 등의 소설을 원서 교재로 했는데, 《독일인의 사랑》을 쓴 막스 뮐러(Max Müller)에 심취해서, 그에 관한 자료를 상당히 많이 읽었던 기억이 난다.
막스 뮐러는 독일 태생으로 영국에서 인도 사상의 힌두이즘, 불교 등을 비교종교학적으로 연구하여 서양에 소개 · 개척한 동양학자인데, 그가 쓴 유일한 소설인 《독일인의 사랑》을 거의 외우다시피 여러 차례 읽은 기억이 난다. 아름다운 문장 속에 여덟 번의 회상을 통해서 인연과 연기 법칙이 자연스레 드러나도록 쓴 소설이 불교적 인생관을 들여다보게 해주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렇게 늘 내 주위에 있었다.
동국대학교
불교종립 동국대학교는 참 좋은 대학이다. 내가 총장으로 재직하던 때에도 그러했지만, 다른 공직에 있을 때도 누구에게나 동국대학은 일반 대학처럼 전문 학문을 전수해 주는 외에도 철학적 · 종교적 분위기 속에 재학생의 인생관이나 역사관을 자연스럽게 형성시켜 주는 강점이 있다고 늘 이야기해 왔다.
1968년 동국대학에 입학하게 되어, 대학 생활 중에도 부처님 법을 공부하고 수행하는 일이 많아졌다. 입학하던 해인 1968년 5월경 당시 서울 법대 교수이던(그 후 동국대 총장으로도 봉직했다) 서돈각 선생 등과 함께 삼성동 봉은사에 계시던 법정(法頂) 스님을 찾아 뵙게 되었다. 그때 스님께서 톱은 나무를 잘 썰어야 한다고 하신 말씀이 뇌리에 남아 있다(같이 있던 어느 분이 나를 금년도 동국대 수석 입학한 학생이라고 소개하는 바람에). 그 무렵 대학 선원장으로 계시던 탄허(呑虛) 스님의 《금강경》 강화가 거의 매일 열렸는데, 가만히 앉아서 스님의 법문을 듣다가 어느 날 홀연히 부처님을 만나는 듯한 종교적 체험을 하기도 했고, 삼보법회(三寶法會)에서 청담(靑潭) 스님을 뵙고 마음 법문을 새기면서 나의 수행이 익어 가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그때 탄허 스님이 편집해서 나누어 주신 《금강경》을 지금도 보존하면서 독송하고 있다. 1968년 12월 공주 갑사에서 단기 출가와 ‘천 배 수행’ 등을 체험하기도 했다.
자서언 불성정각 불기차좌(自誓言 不成正覺 不起此座)
‘두려움 없는 당당한 삶[無畏堂堂, 蕩蕩]’에 대한 법문을 많이 듣고 새기는 과정에서, 탈속 출가를 하지 않고 재가자로 살아가려면 무슨 일을 하면서 사회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 하는 문제를 많이 생각했다. 고심 끝에, 우리 사회에서 계율에 관한 일을 하는 법조인이 적합하다는 결심을 하고 사법시험 준비를 하였으나, 쉽게 결론이 나지 않고 대학원 재학 중에 폐결핵을 앓는 등 많은 시간과 힘의 일실(逸失)이 있었다. 그 당시 사법시험은 1년에 60명 내외를 선발하는 참으로 어려운 시험이었는데,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 꼭 합격해야겠다는 다짐으로 기나긴 고난의 여정을 시작했다.
싯다르타는 6년의 고행으로 지친 몸을 수자타가 바치는 우유죽으로 달래면서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 정좌를 하고 앉아, “이제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이 자리에서 죽더라도 일어나지 않으리(自誓言 不成正覺 不起此座)”라는 금강의 맹서를 하고 선정에 들어, 마침내 깨달음의 문턱을 넘어 부처님이 되었다. 나도 그 어려운 시험 준비를 시작하면서 부처님의 금강 맹서를 본받아 ‘자서언 불성정각 불기차좌’의 열한 자를 책장에 새겨 두고 마음의 서원을 하였다.
사법시험 준비는 비교적 기간이 길 수밖에 없고 정신과 몸이 버티어 주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모든 상황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항시 부처님의 6년 고행을 생각하면서 학교 도서관을 주로 이용했지만, 학교에서 또는 인연 있는 스님의 안내로 몇 달씩 절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해인사 홍제암, 유가사, 회암사, 청계사 등 많은 절에서 부처님 가피를 입어 준비를 했고, 여러 면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홍성진(洪性眞) 스님이 이불과 책 보따리를 짊어지고 회암사까지 동반해 주시기도 하는 등, 부처님의 응원을 많이 받은 시험 준비였다. 1976년 4월, 사법시험에 합격한 것은 오로지 부처님의 가피가 있어 가능했으리라.
수행하는 공직 생활: 부처님을 찾아 나서다
국가형벌권을 행사하는 데 관련된 여러 기관 중 검사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형사사건 당사자를 직접 접촉 · 조사하고 범죄 현장도 검증하게 되므로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신원(伸冤) 즉 국민의 억울한 원한을 풀어주어야 하는데, 이것이 역사 전환의 모멘텀이 된 일이 허다하다. 공직을 시작하면서 검사로 일하기로 했다. 검사로 전국 각급 검찰청에 근무하면서 주말에는 아내 평등성(平等性)과 함께 인근의 절을 찾아 스님 말씀을 듣거나 기도 수행을 하는 일이 많았다.
특히 1980년에 통영검찰청에 2년 정도 근무하면서 미륵산 용화사에 계시던 일각(一覺) 회광승찬(廻光僧讚) 스님을 뵙고 많은 불교 공부를 했고, 스님께서 송광사 방장스님으로 가시고 나는 서울로 근무지를 옮긴 후에도 일생을 두고 가르침을 받아 새기고 있다. 스님께서 주신 법명이 불이(不二)이고, 나의 아버님 영동(永東) 거사에게는 만선(萬善), 아내 박해주에게는 평등성, 큰아들 세준에게는 향운(香雲), 둘째 아들 우준에게는 설파(雪波), 딸 민지에게는 대원경(大圓鏡)이라는 법명을 주시고, 설법을 베푸셨다. 회광승찬 스님께서 원적에 드시기 얼마 전에 나에게 “김 검사는 돈은 없어”라는 화두 겸 법어를 주신 적이 있다. 그 무렵 해인사 원당암에 계시던 혜암(慧菴) 스님으로부터 태허(太虛) 법명을 받고, 며칠 밤을 도와 법문을 듣고 참선수행을 했던 기억이 뚜렷하다. 1998년 평택검찰청장으로 근무할 무렵, 오래전부터 부처님 가르침을 지도해 주고 계셨던 무산오현(霧山五鉉) 스님께서 당래(當來)라는 법명을 주시고, “검사 그거 할 만하나. 걸릴 것이 뭐가 있노. 무섭게 해라.”라고 주신 법문을 아직도 가슴 깊이 새기고 있다.
1996년 사법연수원 교수로 파견되어서 사법연수생들에게 검찰 실무 등을 지도할 무렵 연수생들의 불자 모임인 ‘다르마 법우회’ 지도교수도 맡아 많은 불자 법조인을 길러낸 것이 보람으로 남아 있다.(나는 다르마라는 말을 특히 좋아했는데, 후에 동국대 총장으로 봉직할 때 1학년 교양과정부를 단과대학으로 승격시키면서 ‘다르마칼리지’로 명명하여 현재까지 그대로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나는 공직에 있을 때부터 근년에 이르기까지 12월 31일에는 항상 아내 평등성과 함께 도리사, 법주사, 삼성암, 칠장사, 보문사, 보리암, 낙산사, 백양사 운문선원, 대흥사, 직지사, 월정사, 상원사 등에서 심야 기도수행을 하면서 새해를 맞고 있다. 그리고 1년에 한 번씩은 봉정암 등 5대 적멸보궁을 찾아 기도 수행하는 것을 원(願)으로 하고 있는데, 근간에 와서 무릎 통증 등으로 산길 오르기가 어려워져서 거르는 일도 있게 되었다.
검사장 · 법무부 차관
부산 동부검찰청 청장으로 근무하던 2002년 2월, 검사장으로 승진하였다. 부산 해운대 장산 아래 자리한 관사에서 새벽마다 장산과 장산 법계사를 다니면서 기도수행을 하고 출근하는 일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평검사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매일 새벽에 인근 절의 법당을 찾아 기도수행하는 것이 일상으로 되어 있다. 집 부근의 봉은사나 도선사, 지방에 근무할 때 명법사, 칠장사, 동학사, 갑사, 해동용궁사 등 많은 사찰이 나의 기도수행처가 되었다.
나는 이러한 새벽 산책 · 기도수행을 상행삼매(常行三昧) 즉 선수(禪修)라고 생각하고, 거의 매일 새벽에 집을 나선다. 30대 초반 젊은 검사로 지방에서 근무한 시절부터 시작해서 70대 후반에 이른 오늘까지 거르지 않는다. 실제로 이것이 나의 불교 수행이고, 선수행이다. 집이 봉은사 부근인 덕분에 아침 산책과 선수행이 저절로 잘 이루어진다. 아침 산책을 마칠 무렵 떠오르는 햇빛은 무량광(無量光) · 무량수(無量壽)의 상징처럼 내리비치고, 온 대지가 밝아오면서 우리 사회는 사람 사는 터전으로 돌아온다. 그 속에 나의 선수행이 있다. 무량광 · 무량수로 상징되는 Amitabha·Amitayus의 일광은 새벽에 반드시 비치게 되고, 힘차고 내면이 뒷받침되는 나의 걸음걸이는 선(禪) 즉 식심견성(識心見性)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이러한 불교 수행이 나의 공 · 사적 생활을 보다 명철하게 들여다보고 어둠을 걷어내는 것이라 생각하고, 상행삼매를 오늘도 계속한다.
공직에 있으면서 공직자 개인의 종교를 정책에 반영하거나 자신의 종교를 위하는 듯한 공적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공직자의 입장에서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사적 영역이다. 그러나 공직자 개인의 종교로 수행된 좋은 성향을 가지고 공적 업무를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바로 공직자의 윤리와도 부합하는 것이므로, 늘 부처님 말씀처럼 공직 생활을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대전지검 검사장 때는 수덕사 원담(圓潭) 스님, 법장(法長) 스님을 자주 찾아 뵙고 법의 말씀을 듣고, 갑사 법당에 앉아 참선하고 있으면 공직 수행에서 안정감을 찾을 수 있었다.
법무부는 국가 인권을 대표하는 기관이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이 바로 인권에 관한 것이다. 법무부 차관으로 있을 무렵, 출입국 절차의 획기적인 개혁은 참으로 보람 있는 일 중의 하나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출입국제도의 개혁으로 인천국제공항이 전 세계 공항 중 항상 일등 공항으로 손꼽히고 있어, 요즘도 출입국 시에 KISS(Korea Immigration Smart Service)를 통해서 드나들면서 자부심을 느낀다. 나는 재조, 법조 공직을 수행하면서 그 과정에서 10권의 저서와 200편이 넘는 논문을 내어놓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 부족한 것들로 생각되고, 한편으로 무상하고 부질없는 일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법학박사 과정을 수학하고 나중에는 명예 이학박사 학위까지도 받은 것을 생각해 보면, 그러한 많은 일을 했던 열정과 건강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스스로도 의문이 생긴다. 아무래도 부처님 가피와 가르침이라는 든든한 바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헌법재판관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행복 추구를 위한 기본적 인권의 보장, 시장경제 질서와 공동체의 보장을 위한 노력 등 헌법적 가치를 수호해야 하는 공직 중 최고의 책임과 명예를 지닌 공직자이다. 헌법재판관으로서 봉직하던 당시 헌법재판소 책자에 나의 결심을 작성해 둔 것이 있다. 13세기 남송의 무문혜개(無門慧開) 선사의 선시를 인용했다.
春有百花秋有月(봄에는 꽃 피고 가을에는 둥근 달)
夏有凉風冬有雪(여름에는 시원한 바람 겨울에는 눈)
若無閑事掛心頭(쓸데없는 일에 마음 두지 않으면)
便是人間好時節(그게 바로 좋은 시절 아니겠는가)
바로 인간의 존엄과 평등이 이루어지는 나라. 자성평등성(自性平等性). 모든 국민의 존엄과 평등을 찾아가는 끊임없는 노력. 부처님 사상의 첫째는 생명 존중과 평등성이다.
2010년 2월경 헌법재판소에서 사형제도(死刑制度)의 헌법 위반 여부에 관한 결정이 있었다. 헌법재판소에서 법률에 대한 위헌결정을 하려면 헌법재판관 9인 중 6인의 위헌 의견이 있어야 한다. 그 당시 위 결정은 재판관 5인의 합헌 의견과 재판관 4인 위헌 의견의 합헌 결정으로 사형제도는 계속 유지되고 있다. 위 사형제도 위헌제청 사건에서 나는 위헌 의견을 낸 4인의 재판관 중 한 사람이다. 나의 의견은 대략 다음과 같다.
……생명은 죽음에 대칭되는 인간의 생존 자체를 의미하는 순수한 자연적 개념이나, 이는 인간 존재의 근원이라 할 것이므로 생명권은 인간의 생존본능과 존재 목적에 바탕을 둔 선험적이고 자연법적인 권리로서 모든 기본권의 전제가 되는 기본권이다. 우리 헌법에는 생명권에 관한 명문 규정은 없지만,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고, 신체의 자유는 생명이 있는 신체를 전제로 하며, 헌법 제37조 제1항에 따라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자유와 권리도 경시되어서는 아니 되므로, 생명권이 우리 헌법상 인정되는 기본권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인간의 생명에 대하여는 함부로 사회과학적 또는 법적인 평가가 행하여져서는 아니 된다. 즉, 모든 개인의 생명은 동등한 가치를 가지며, 각 개인에게 그 생명은 절대적 의미를 가진다. 헌법은 절대적 기본권을 명문으로 인정하고 있지 아니하며,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 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는바, 이는 생명권의 경우에도 예외라고 보기 어렵다. 형벌로써 중대 범죄인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그 범죄인을 사회와 영원히 격리시킴으로써 재범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함에 틀림이 없고, 일응 이는 응보사상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형벌의 기능은 굳이 범죄인의 생명을 박탈하지 않더라도 예컨대 가석방이 불가능한 무기형 등의 자유형을 통하여도 달성할 수 있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는 인간은 모든 국민이므로, 이는 극악무도한 범죄자에 대한 형사처벌의 필요성 이전에 존재하는 상위의 헌법적 가치 질서이다. 비록 타인의 생명과 인권을 유린하고 훼손하는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는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형제도는 형사법의 영역에서도 지도적 원리로 작용하고 있는 헌법 제10조의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반하는 제도라고 아니할 수 없다……
동국대학교 총장
자신의 인생도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다. 2010년 말경 동국대학교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총장을 맡아서 불교종립대학을 발전시키는 데 참여해 달라는 요청이 왔다. 부처님 가피를 입어서 일생을 잘살고 있다고 늘 생각하는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한 끝에 교육 특히 대학 교육이야말로 미래의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현재의 우리 사회를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분야라는 결론을 내리고 총장으로 일하기로 결심했다. 1968년 동국대 신입생으로 입학할 때 〈동대신문〉에 ‘공직 생활을 마친 다음에는 모교로 돌아와 후진들을 가르치면서 살아가겠다’라는 인터뷰를 한 사실도 생각이 났다. 대학은 학문에 대한 연구와 교육을 통해서 우리 사회를 선도하는 기관이다. 나는 우선 모교이자 불교적 분위기가 그대로 배어 있는 동국대학교에서 일하는 것이 참으로 행복한 시절인연이라고 생각하면서, 무언가 학교 발전에 도움이 되는 일을 적극적으로 해야겠다고 의지를 다졌다.
교내 법당인 정각원과 교정 한가운데 있는 불상 등 불교적 분위기는 젊은 학생들의 인생관과 역사관을 정립하는 데 도움이 된다. 원로 스님으로서 정련(定鍊) 이사장 스님의 지도와 가르침이 큰 힘이 되었다. 법타(法陀) 정각원장 스님도 학교 분위기를 잘 조성해 주었다. 대학의 전공별 분석을 통해 일부 학과를 통폐합하고 교직원들의 연구 분위기 진작을 위해서 성과급제를 도입한 것이 큰 혁신에 포함되었다. 그 과정에서 일부 학생들이 총장실을 점거하기도 했고, 일부 교직원들이 강하게 반발하기도 했지만, 부처님 원력으로 좋은 결론을 낼 수 있었다. 정각원에서 월요법회를 하고, 수불(修弗) 스님을 선원장으로 모시고 국제선센터를 설치해서 불교적 분위기를 고양하기도 했다.
무산(霧山) 스님은 평소에 늘 나의 공직 생활과 불교적 삶에 대해서 엄한 지도를 해 오셨다. 동국대 총장으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무산 스님을 뵙고, “만해마을을 동국대에 주십시오.”라고 말씀드렸더니, 한참 쳐다보시다가 “별도 법인이 있고 목적이 달라서 어려워……”라고 하셨다. 한 달 후쯤 다시 만나 뵈었더니 ‘총장은 신뢰하니까 총장이 계속 있으면 좋지만, 총장이 평생 있는 것도 아니고 어렵다’고 하셨는데, 몇 개월 후 나를 만해마을로 부르시더니 ‘총장 말대로 만해마을을 동국대에 주기로 했다’고 하셨다. 어렵게 드렸던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져, 마침내 만해마을이 동국대의 연구 · 수행 · 행사 공간으로 큰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불자인 나 자신이 모교요 부처님 도량인 동국대에서 교직원, 후진 학생들과 함께 연구와 교육을 할 수 있었던 그 시절은 참으로 보람 있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 모두가 부처님 가피가 아니겠는가. 총장 임기를 마칠 무렵에 무산 스님께서 부르시더니 차 한 잔을 내려 주시면서 “당래야 잘 됐지 뭐. 다 흘러가는 물이다. 바람에 이는 파도다.”라고 하신 말씀이 생생하다.
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장 · 여당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
동국대 총장 때에 전국 대학교 총장으로 구성된 대학교육협의회의 대학윤리위원회 위원장을 맡아서, 한국 대학의 운영과 교육에 속하는 윤리에 관한 일을 했었다. 2014년 2월부터는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모든 공직자의 윤리와 재산등록, 선물 등에 관한 심사와 감시를 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나 자신이 오랜 공직 생활을 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부합되게 공적 업무를 수행한 경험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해서, 윤리위원회를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공직 풍토가 청정해지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애썼다.
오랫동안 여러 공직을 수행해 왔지만, 소위 정치와는 관련이 없이 지내 왔었다. 그런데 2016년 5월경 갑자기 그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집권 여당이던 새누리당에서 당 대표가 궐위된 상태에서 당 대표인 비대위원장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왔다. 며칠간 고심한 끝에, 그리 긴 기간도 아니니 흐트러진 집권 여당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제대로 똑바로 정립해 보는 것이 좋겠다는 결심을 하고 비대위원장직을 맡았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정치의 장인 정당의 대표로서 일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다는 것을 절감했다. 워낙 다양하고 의견이 다른 정당 구성원들과 바깥의 다른 정당, 국가기관 등과의 관계가 쉽지 않았다. 절차를 밟아 당 대표 선출 절차를 모두 마치고 후임 대표에게 물려준 다음에 당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한 기간에도 항시 부처님이라면 이 경우 어떠하실까를 생각하면서 당무를 수행한 기억이 남아 있다. 그 무렵 정만(正萬) 스님과 엄홍길 대장 등 몇몇 도반들과 함께 미얀마, 부탄, 네팔, 인도,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등을 순례하고 참배하였다. 성지를 찾아보고 부처님 말씀을 더욱 깊게 수행하려는 노력이었다.
KBL 총재
2021년 7월, 한국농구연맹(KBL) 총재로 선임되었다. 나 자신이 스포츠 선수나 지도자 역할을 한 일이 없는데, 갑자기 프로농구연맹의 총재로 일하게 된 것이다.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인 현생인류의 생활에서 스포츠는 그 본성에서 발현되는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인류를 호모 컴피티션(Homo Competition) 즉 경쟁 인간이라고 본다. 경쟁 인간이기 때문에 문화와 문명을 이렇게 진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현생인류의 조상인 호모사피엔스는 약 20만 년 전에서 10만 년 전 사이에 아프리카 동북부를 남북으로 종단하는 대지구대(Great Rift Valley)에서 살다가, 약 10만 년 전에서 6만 년 전 이동을 시작, 아라비아를 거쳐 아시아, 유럽, 태평양 · 오세아니아의 여러 섬들, 더 나아가 남북아메리카 대륙까지 진출하고 약 1만 년 전에는 남극 대륙을 제외한 전 세계 거의 모든 지역에 살게 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 과정에서 자연의 거친 환경과 경쟁하고, 동식물과 경쟁하고, 다른 인종, 다른 사회와 경쟁하고, 국가의 형태가 성립될 무렵부터는 국가 사이의 경쟁인 전쟁이 계속되어 왔다. 국가 간의 경쟁, 지역과 종교, 인종 사이의 경쟁 수단인 전쟁이 인류 문명에 해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전쟁이 아닌 경쟁의 수단이 된 것이 바로 스포츠라고 생각한다. 물론 오늘날도 전쟁은 남아 있지만, 어느 정도는 스포츠로 전쟁을 대신해서 경쟁함으로써 경쟁심도 충족하고 문화적인 발전도 이루게 된 것이다. 미국의 NBA, MLB, NHL, NFL 등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스포츠는 사회의 통합과 평화에 기여하고 있다.
내가 KBL의 총재로 일하게 된 것도 아마 공정과 활력이라는 스포츠 정신에 부합된다고 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러한 경쟁의 과정도 부처님 정신이 아니겠는가.
생의 끝자락에 서서: 부처님 가르침을 간구하면서
브라마니즘에서는 사람의 일생을 학습기(學習期), 가주기(家住期), 임서기(林棲期)와 유행기(遊行期) 등 네 개의 시기로 구분한다. 나는 이미 임서기도 지나고 유행기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더더욱 계속 걷고 수행해야 한다. 우리 헌법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원칙으로 구체적 기본권으로 종교신앙의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헌법적 가치 속에 부처님을 만나서 모시고 수행하면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기본권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부처님 가르침 속에서 사는 기쁨과 행복이 있다.
이제, 연기(緣起)의 옷을 벗을 무렵에는 빛이 사라지고 사위가 어두컴컴해진다고 하는데…… 나는 이처럼 계속 수행하면서 걸어가겠지만, 언젠가는 그 어두컴컴하고 어쩌면 깜깜하다고 하는 동굴에 다다르겠지. 괴테(J.W. Goethe)는 죽음에 이르러 “더 많은 빛을(Mehr Licht)”이라고 하였다는데. 이제 건강도 이전과 다르고, 열정도 많이 안정화되었다.
나의 일생은 부처님법을 만난 기쁨과 그를 따르는 일관된 노력이 함께했다. 오늘도 그 길을 따라 걸어가면서, 1990년 경오년에 회광승찬 스님께서 친필로 써서 나와 평등성에게 주신 법문 한 구절을 그대로 인용하고 이 글을 마친다.
서로가 돕는 곳은 행복의 나라
작은 돌 큰 돌이 함께 모이어
온전하게 돌담이 이루어지듯
서로가 의지하면 부처님 나라
경오 새봄 송광사 방장 회광승찬 ■
김희옥
1948년 경북 청도 출생. 동국대학교, 동 대학원 법학과 졸업(법학박사, 명예이학박사)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 부장검사, 대전지방검찰청 · 서울동부지방검찰청 검사장, 법무부 차관, 헌법재판소 재판관, 동국대학교 총장,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 등 역임. 주요 논문으로 〈언론의 자유와 개인의 사생활 보호〉 〈국내외 환경문제의 현황과 대책〉 등 200여 편과 저서로 《판례형법》 《형사소송법연구》 《주석 형사소송법》 등 10권. 청조근정훈장 및 홍조근정훈장 등 수훈. 현재 KBL 총재, 동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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