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이후 한국교회가 지향해야 할 영적혁명
코로나 이후 교회와 기독교계는 뼈를 깎는 노력으로 영적혁명을 이루어 내야 한다.
검증과 과학적 사실에 근거한 사실의 엄정하고 공평한 보도보다 감성을 자극하며 자기 논리와 주장을 펴기 쉬운 부분만 잘라서 왜곡하는 선동적인 보도가 대세인 언론 난장, 난파의 시대에 누군가가 교회를 표적으로 삼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기독교계와 교회를 표적 삼아 저격하는 언론은 130여 년 동안 기독교와 교회가 나라와 민족을 섬기며 고난의 세월을 살아 온 역사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침묵한다. 그러나 코로나를 통과하는 1년 동안 기독교 이단 집단들과 몇몇 보수 교회들이 코로나 방역수칙을 어긴 것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여 기독교계와 교회를 마치 반민족적인 집단, 반사회적인 집단으로 매도하고 있다. 이는 교회에 대한 심각한 음해이며 모욕이며 이간질이다. 이는 교회에만 타격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나라와 민족의 앞날 또한 어둡게 만드는 행위다. 그러나 그러한 정치적인 언론, 권력화 된 대중적인 눈먼 냄비 근성의 언론과 맞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에 뼈를 깎는 자성을 하며 개혁을 도모하고자 한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시대의 경향과 흐름을 업고 기고만장한 언론일지라도 사필귀정의 역사에서 계속해서 진실을 덮을 수는 없으리라고 믿기에 내부 개혁을 위해 묵묵히 기도한다.
교회와 기독교계는 사회가 표적삼아 저격하는 타락과 부패, 불의와 구조악의 문제를 폐부 깊숙이 인식하며 회개는 물론 개혁의 대역사를 반드시 이루어내야 한다. 교회는 물질숭배, 권력과 야합, 자본주의와 야합, 언론과 야합, 물량주의, 교회의 계급화, 신앙의 프로그램화, 교회 활동의 프로젝트화 등에서 탈출해야 한다.
1517년 독일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처럼 교회의 갱신과 개혁 작업이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라서 한국교회가 초대 예루살렘교회, 초대 로마교회처럼 에큐메니칼적 종말론적인 교회로 하나님과 역사와 사람들 앞에 서야 한다.
해 아래 새 것은 없다.
영적 혁명을 이루어낸 교회의 모습 또한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감히 새로운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그려본다.
첫째 교회는 말씀의 신앙공동체로 회복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천지의 창조주로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신앙공동체.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하고 말씀 중심으로 개혁되어야 한다.
교회는 NGO, 민간단체가 아니다. 교회는 우리가 사는 세상 모든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를 위해서 부정부패 척결과 사회 정의를 부르짖을 수 있다. 그러나 교회는 투쟁 단체는 아니다.
교회는 기후문제, 환경오염 문제. 농약문제. 농가 부채 문제로 고민하며 신양고백을 할 수 있고 시위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환경단체가 아니다.
교회는 민족의 안전과 생명과 직결된 통일과 평화문제에 지속적으로 관여하고 행동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는 평화통일 단체가 아니다.
교회는 가난의 문제. 기아의 문제. 빈익빈부익부 등 경제 정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건강한 법을 제정하고 나누고 섬기며 행동해야 한다. 그렇다고 교회가 식량문제 해결기구나 기아대책본부는 아니다.
교회는 불우한 이웃은 물론 전 세계 재난과 전쟁으로 고통을 당하는 이웃과 나누고 섬기는 일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그렇다고 교회가 봉사단체는 아니다.
교회가 신앙공동체라는 정체성을 잃으면 일개 사회단체로 전락한다. 교회가 정체성을 잃게 될 때 일반 NGO, 민간단체, 투쟁단체처럼 되어 영적으로 피폐해지고 파당과 분열이 생길 수밖에 없다. 교회는 신앙공동체로서 반듯하게 서있으면서 주님의 말씀대로, 사랑으로 소금과 빛이 되려는 각 분야에서 활동하는 교우들을 지지해주고 격려해주고 품어주면서 함께 영적 성숙과 개혁과 혁명을 이루어 가야한다.
교회는 말씀의 터이며 뿌리다.
나무는 뿌리가 깊고 든든해야 줄기와 가지가 잘 자라고, 줄기와 가지가 잘 자라야 잎이 무성하며 꽃이 피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 뿌리가 꽃이나 잎 새처럼 가볍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 줄기나 가지처럼 가시적인 행동을 해도 안 된다. 뿌리는 보이지 않는 땅 속으로 깊이 뿌리를 내려 나무 전체를 위해서 원활하게 수분을 공급해주어 나무를 나무로 지탱시켜야 한다.
교회는 나무의 뿌리처럼 성도들이 각 분야에서 가지, 몸통, 줄기, 꽃, 잎, 열매가 될 수 있도록 영적 자원, 말씀, 진리와 정의, 평화, 사랑과 용서, 치유와 화행의 말씀을 부단히 공급해야 한다. 만약에 교회가 나무의 꽃이 되거나, 열매가 되려고 하면 교회는 사회적 단체로 전락하여 어느 한 집단의 이해타산을 목표로 존재하게 되면서 영적으로 피폐해져서 쇠퇴할 수밖에 없다. 살아남아 있다 해도 정치화 된 집단, 권력화 한 집단으로 십자가의 길이 아닌 십자가를 이용해서 권력을 지햐하는 교회로 형태만 유지할 뿐이지 결코 주님의 몸 된 교회라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둘째 교회가 돈이 있어야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맘몬이즘, 물질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교회는 돈을 쌓아두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물질 축적을 목표로 추구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돈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생명이 고통을 당하는 곳, 신음하는 곳, 필요한 곳에 즉시 내려놓아야 한다. 로마 카타콤무덤교회는 종말론적인 사랑과 나눔의 실천으로 로마제국을 심판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돈으로 일하지 않고 사랑으로 뜨거운 가슴과 마음으로 일하셨다. 그리고 그는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면 나머지 모든 것은 더하여 주신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돈이 있어야 교회가 사랑하며 세상을 섬길 수 있다고 하는 생각의 함정, 자본주의 논리에 세뇌 되어 있어 교회의 물화와 세속화가 가속화 되었다.
셋째 힘이 있어야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힘을 지향하는 대형교회, 제국주의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예수님은 낮은 자리, 힘이 없는 자리로 오셨고 힘이 없는 자로 사셨고, 힘이 없는 자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는 광야에서 사탄이 숭배하면 천하만국을 보여주겠다, 힘을 주겠다고 했을 때 단호히 그의 제안과 유혹을 거부하셨다. 하나님은 세상을 힘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으로 창조하셨다. 우주만물은 샤랑, 평화, 질서와 조화로 우주 운동을 벌인다. 힘이 없다고 약하다고 탄식하지 말고 자신이 선 자리에서 가능한 것부터 섬기면 된다.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무리는 요구를 하지 않는다. 가능한 일부터 하면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황제의 자리가 아니라 종의 자리에서 오직 사랑으로 갈릴리와 사마리아와 유대지경을 몸소 걸어 다니며 병들고 가난하고 귀신 들리고 마음이 약한 자들을 섬겼다.
넷째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며 교회는 수평구조를 회복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가 사람들의 직업, 지식, 외모, 지위, 소유의 유무에 따라 계급화 되고 서열화 되었다. 교회뿐만 아니라 노회, 총회를 비롯하여 각종 기독교 단체들마저도 수직구조화 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수평구조와 수직구조를 다 주셨는데 문제는 우리 인간들이 이를 정반대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건강한 교회에는 수직 구조와 수평구조가 있다. 수직구조는 보이지 않는 관계로 하나님과 자녀들 사이, 주님과 양들의 관계, 하나님 나라를 향하는 영적 지도력, 순종과 감사의 관계이며 용서와 치유의 관계다.
수평구조는 보이는 세상적 사회적 관계로 목회자와 목회자의 관계, 양과 양의 관계. 성도와 성도의 관계로 서로 섬겨야 하는 관계이다. 장로, 집사, 권사는 결코 수직적, 종속적 관계가 아니다. 주어진 은사대로 섬기는 기능과 역할의 차이일 뿐인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교회 직분을 정치화, 계급화 시켜서 교회를 회사와 종교사업소로 만들어 버렸다.
교회의 모든 직분은 영적 직분이다. 서로 존중하며 섬기고 종이 되라는 직분이다. 서로 돌보며 십자가를 지고 함께 동행 하는 영적 직분이다. 그러므로 서로 들으며 존귀하게 여겨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고 해서 다른 직분자들에게 오만하고 무례하고 악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교우들은 서로 사랑하며 섬기며 함께 기도하는 형제자매로서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다.
다섯째 교회는 프로젝트로 신앙생활, 교회활동을 차별화, 비즈니스화, 형식화, 외식화 시키지 말아야 한다.
특별 나눔과 섬김, 특별행사, 특별성경공부, 특별전도, 특별기도 등으로 교우들을 강박해서는 안 된다. 교회의 기도, 전도, 성경공부, 예배, 나눔과 섬김은 크리스천이 매일 주님과 동행하며 자유롭게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행하는 거룩한 행위이다. 교회의 성회와 가르침은 크리스천들의 삶의 목적이고, 방향이며 내용이다. 그러나 교회가 특별을 붙이고 강제하므로 교우들로 하여금 그 기간에만 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뿐 만 아니라 복음의 실천에 비자발적이고, 위선적이고, 형식적이고, 기만적이고 외식적 이게 만든다. 프로젝트가 일상화 된 교회에서 교우들은 자신의 영적성장과 신앙고백을 위해서 참여하는 것이 아니고 목사님의 얼굴을 생각해서, 장로, 권사, 구역장, 부장으로서 체면 때문에 참여하는 일이 왕왕 발생하게 된다.
그렇다고 프로젝트를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참회와 영적 쇄신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해야 된다. 그러나 과시를 위한 행사로서, 경쟁을 위한 행사로서, 종교비즈니스로 습관적으로 행하는 것은 사라져야 하고 경계되어야 한다.
여섯째 일방적인 소통구조, 다수결에 의한 의사결정구조에 대하여 고민해야 한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주일과 수요일 등 제한된 시간 속에서 만나고 의사결정을 하기 때문에 자유로운 대화 없이 어쩔 수 없는 일방 통행적인 구조와 소통으로 불만이 쌓이며 교회가 동맥경화에 빠질 수 있다. 또한 교회가 새 지도자와 새로운 정책을 결정할 때 최선의 방법으로 민주주의 방식인 다수결 표결에 의한 결정을 하면서 많은 곤란에 직면한다. 그리하여 투표 후에 많은 교우들이 시험에 빠져 교인 상호간의 갈등과 충돌로 홍역을 치루거나 성도들의 이탈, 분립이라는 아픔을 겪는 일이 다반사가 된 것을 본다.
교회는 많은 연구와 노력으로 쌍방 소통, 다각 소통으로 성도들 사이에 마음의 장벽을 허물어야 한다. 또한 최후 결정을 위한 다수결 투표 이전에 우리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한 영적인 작업을 통해서 통찰과 지혜를 얻어야 한다. 교회는 결코 세속의 단체가 아니기 때문에 민주주의 방식으로 다수결 투표를 했으니 우리는 문제가 없다는 방식으로 안일하게 대처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영적인 신앙단체이기 때문에 세상의 정치 방식으로 처리하거나 치리하기 전에 하나님의 사랑 방정식, 예수님의 십자가 방식 앞에서 고민하며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세상의 법칙이나 방식을 뛰어 넘는 열린 소통, 열린 결정을 하면서 성령님의 인도와 지도를 받아야 한다. 교회가 어느 한 쪽을 악으로 규정하고 그쪽을 내모는 것은 쉽다. 그러나 그 후에 오는 영적인 피폐와 어둠 때문에 교회가 본질에서 벗어나기 너무 쉽다. 그러므로 건강한 교회는 하늘과의 소통, 땅과의 소통에 늘 열려 있어야 한다.
한국의 모든 교회가 다함께 성숙해서 교회를 질타하는 세상을 향하여 로마카타콤 지하무덤교회처럼 무서운 칼!
거룩한 양심!
사랑의 품이 되어 물질과 권력 중독에 빠진 세상이
찔림 받으며 부끄러움을 느끼며 하나님 앞에서 옷깃을 여미며
함께 새 하늘 새 땅으로 들어가게 되길 빈다.
2021.2.26.금
우담초라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