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수 밭을 걷다 보니 문득 논에 벼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냄새가 났습니다. 어려서 모내기하고, 가물면 둠벙에 두레질해서 물을 퍼 올리고, 김매며 맡았던 논 냄새였습니다. 그 냄새는 논이 있는 고향이었습니다. 볏짚이 논 바닥에 묻혀 곰삭으면 그런 냄새가 날까… 벼 알 익는 가을을 기다리는 냄새였습니다. 질컥벌컥한 논둑 길을 걸어 읍내에 있는 중학교에 가던 아침이 눈 앞에 있었습니다. 벼는 우우욱 자라고 있었고 논 길에는 노란 민들레가 장식처럼 웃고 있었습니다.
포(Po) 강 유역에서 언제부터 벼농사를 시작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로마시대에 쌀은 귀한 수입품이어서 의약품으로 썼습니다. 너무 비싼 쌀을 매일 먹는 식사용으로 생각한 사람은 로마에 없었습니다.
중세시대가 끝날 무렵 14세기에 포(Po) 강 유역에 벼농사가 등장하는 데 아마도 제노아나 베니스 상인들이 인도에서 벼 씨앗을 가져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벼 농사에는 논에 물을 많이 써야 했습니다. 논에 모기가 창궐하여 말라리아에 걸릴 위험이 높아 처음에는 농민들이 선호하지 않았습니다. 파종된 씨앗의 양에 비해 수확량이 10배 이상이 되면서 농민들 생각이 바뀌게 됩니다. 수확량의 유혹이 질병 위험을 이길 수 있게 했습니다. 15세기 말에는 쌀이 농민들 주식이 되면서 점차 이탈리아 전역으로 퍼져 나가지만 포(Po) 강 유역의 수준을 넘는 지역은 없었습니다. 비옥한 토질과 물 공급 때문이었습니다. 이 지역이 유럽 최대의 쌀 생산지가 된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벼 농사도 르네상스였습니다.
이때가 포(Po) 강 개간이 본격화되고 관개시설이 도입되던 시기였습니다. 농업용수가 체계적인 농수로를 통하여 공급되면서 벼 농사는 번창하게 됩니다. 19세기에 완성된 카보우르 (Cavour) 운하가 결정판이었습니다. 토리노 (Torino) 부근 치바소 (Chivasso) 마을을 흐르는 포(Po) 강에서 시작해서 노바라 (Novara) 인근 갈리아테(Galliate)까지 길이 83km의 농업용 운하입니다. 운하가 강을 만나면 그 강 밑으로 터널을 설치해서 물을 통과시켰습니다. 운하 이름은 카밀로 벤소 디 카보우르 백작(Camillo Benso di Cavour)을 기억하여 지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 통일을 주도한 3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재상 자리에 앉아 이 운하 건설을 적극적으로 밀어 부쳤습니다. 이 관개시설의 몽리면적은 40만 헥타에 달합니다
벼농사가 본격적으로 이윤 창출 수단이 되자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3월부터 10월까지의 벼농사 기간 동안 막대한 인력이 투입되었습니다. 기계화 이전에는 매년 농번기에 약 30만 명의 숙련된 농민이 필요했습니다. 파종, 시비, 제초, 물 관리, 수확, 건조, 탈곡, 출하에 이르는 과정에 필요한 인력이었습니다. 도시지역에서 계절 노동인력이 농촌으로 몰려왔습니다. 대농들은 이 계절 노동력을 먹이고 재울 숙소를 지었습니다. 카시나(cascina)라고 하는 건물들입니다. 큰 규모의 카시나는 성당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기계화되어 사용하는 사람들이 오지 않아 대부분 빈 건물로 퇴락해가는 중입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벼 농사는 두 가지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화학비료와 제초제의 사용, 기계화를 통해 단위 면적 당 인력 소요가 1/20로 줄었습니다. 대단위 영농회사를 중심으로 한 기업농화는 인력 수요를 더욱 줄여 나갈 것입니다. 논에도 자동제어 시스템 도입을 지나 이제 인공지능화 시대가 열리게 될 것입니다. 현재 생산되는 쌀은 베르첼리(Vercelli)에서 거래되고 있습니다.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미곡 시장이 열립니다.
19세기 중엽까지 Nostale 한 품종만 재배했는데 예수회 신부가 필리핀에서 43 품종의 씨앗을 가져와 다양화와 토종화가 진행되었습니다. 새 품종을 육성하기 위한 시험시설이 있습니다. 현재 24 품종이 재배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탈리아 쌀의 대부분은 롱 그레인이 아닙니다. 한국에서 먹는 통통하고 동그란 쌀입니다. 네 종류가 주류를 이룹니다: comune, semifino, fino, 그리고 superfino입니다. 리소토에 인기 있는 쌀 품종은 세 가지입니다: Arborio, Carnaroli, Vialone Nano. 리소토의 식감과 걸쭉한 국물 때문입니다. 쟈스민 같은 향 나는 쌀은 쓰지 않습니다. 한국 쌀도 리소토에 적당합니다. 베니스 지역에서는 1950년대에 육종된 Carnaroli 변종을 선호합니다. 혀가 민감한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그림 출처: https://www.sightseeinginitaly.com/risotto-italian-dish-rice-history/
자세히 보면 이삭의 벼 알마다 하얀 게 묻어 있었습니다. 벼 꽃이었습니다. 하얀 게 수꽃이고 암꽃은 같은 벼 껍질 속에 있습니다. 단 하루만 피는 꽃입니다. 자마구라고 부르는 벼 꽃은 암수가 같이 있어 바람이 불어 흔들리면 가루받이가 됩니다. 벼 낟알마다 꽃이 핍니다. 단 하루 동안 이 논의 모든 벼 알이 수정됩니다. 그리고 저 많은 낟알들이 한 알 한 알 모두 독립적으로 여물어 갑니다.
곡물용 식물의조건에 이런 조건이 있습니다. 낟알들이 차례로 열려 익어 떨어지지 않고 한꺼번에 익어야 하고 줄기에 단단히 붙어 있어야 하는 것. 채집 경제시대에 사람들이 한번에 많은 양을 모을 수 있어야 식품이 되었습니다. 벼, 밀, 보리, 수수는 그런 조건을 만족시켜서 일찍부터 재배되는 곡물이 되었습니다. 벼는 씨 뿌려서 수확까지 120일에서 180일 걸힙니다. 일조량과 온도가 생육기간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초라하게 퇴락하는 까시나 모퉁이를 돌았습니다. 호주에서 왔다는 키 크고 건장한 아가씨가 성큼성큼 지나갔습니다. 오늘 베르첼리까지 간다고 했습니다. 한창 젊음이었습니다. 들판을 가로질러 나무 우거진 농수로를 건넜습니다. 수로에는 풀이 잔뜩 자라 있었습니다. 당연히 위험을 알리는 표지판도 있었습니다. 이 물길은 Naviglio di Ivrea라고 하는 카부르 운하 망 (Cavour Canal network)의 일부였습니다. 갈수기에 포(Po) 강물을 퍼서 이 지역의 논에 공급하는 기능을 해왔습니다. 이 관개시스템은 중세시대부터 만들어지며 확장되었습니다. 19세기에 대대적인 수로 개선으로 이탈리아 농업의 면모를 혁신했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이 수로를 관리하는 회사는 일찍이 부도가 나서 지금은 정부관리 하에 있습니다.
논이었는데 밀을 심어 베어낸 밭은 비어 있었습니다. 드문드문 농가들이 모여 있고 멀리 산티아 시내의 건물 꼭대기가 보였습니다. 북으로 눈길을 돌리면 멀리 알프스 봉우리들이 지평선에 있었습니다. 봄철 논 물에 비친 하얀 눈 덮인 알프스 봉우리들이 일품이라고들 했습니다. 비 포장 농로는 SP54 번 도로와 나란히 갔습니다. 농사를 짓지 않아 휴경중인 밭에는 웃자란 풀과 함께 빨간 아마폴라가 지천이었습니다. 벼가 자라는 논, 옥수수 밭, 수로에 어지럽게 자라버린 풀들. 길가에 따가운 햇볕을 피해 풀 숲으로 기어드는 녀석들 중에는 거북이도 있었습니다. 검 누런 등딱지는 바가지 크기만 했습니다. 갑자기 논두렁에 앉아 있던 왜가리가 날아올랐습니다. 뱀이라도 찾고 돌아다녔나 봅니다. 이곳 생태계는 먹이사슬을 이루며 살아가는 또 다른 세계일 것입니다. 멀리 드문드문 카시나 건물들이 나무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런 들판 길을 4km 걸었습니다.
도시에 가까워지며 집들이 많아지고 차들이 번잡했습니다. 도시주변의 흐트러진 모습은 어디나 공통인듯 싶었습니다. 산티아(Santhià) 시내는 주택들, 4-5층짜리 낮은 아파트 건물, 좁은 골목으로 이어졌습니다. 짧은 여정 14km였습니다.
육십여년 전 중학교 등교길 읍내에 들어가면 빵집이 있었습니다. 진열창에 만두 다섯개가 있었습니다. 일년 내내 그 만두는 상하지도 않았는지 먹어 주기를 기다렸습니다. 한창 먹어 댈 나이였는데 호주머니가 비어 있었습니다.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보기만 하고 먹지 못했던 만두였습니다. 대학 나와 취직해서 돈을 벌게 되어 그 만두가게 앞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만두가게는 없어지고 여성복 가게가 들어와 있었습니다. 여성복이라 … 여자를 사귀라는 뜻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나이 들며 가끔 만두 값을 기부했는데 그 돈으로 가난한 아이들이 좀 먹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작은 읍내에 들어가면 여성복 말고 그런 빵집 진열장에 만두가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습니다. 논 냄새가 불러온 중학시절의 기억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