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으로 가는 길 서안 옥하관에 머물고 있던 날에 통역관 진인남이란 자가 있었는데 분재 매화를 하나 얻어서 그것을 볼 수 있게 시켜주었다 오랫동안 해묵은 줄기와 성긴 가지에 맑은 향기와 깨끗한 꽃술은 참으로 매화 가운데서 제일 품이었다 그 막 피기 시작한 것은 마치 고야 신선이 단아하고 부드러운 살결이 바람을 맞아 흰 치아를 드러낸 듯하고 그 꽃잎이 벌어지려는 것은 달나라의 소아미녀가 하얀 무지개 치마를 몸에 두르고 얼굴을 반쯤 드러낸 듯하고 그 꽃봉오리가 아직 터뜨리지 않은 것은 마치 저라산 나무꾼의 딸이 눈 속에 옅게 화장하고 부끄러움 머금음 체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아름답고 예뻐 보이는 듯하고 그 미리 피었다가 떨어지려는 것은 또 한나라 궁녀 명비 왕소군이 관새를 지날 때 분단장이 다 씻어져 옥처럼 예쁜 모습이 초췌하여도 원래가진 자태는 잃지 않았고 가지가지 기이한 모습은 어떻게 생김새를 형언할 수가 없으니 그것을 보고 있으면 사람들로 하여금 먹지 않아도 배를 부르게한다 대개 식물의 특성은 지역의 춤고 따뜻한 기온에 따라 일찍이 더디게 빠르고 천천히 피는데 매화는 오로지 기온을 먼저 감지하는 것인데 음력 섣달 납월에 피는 것은 오히려 드물다 하물며 매우 추운 북쪽 땅에서 얼음과 눈이 온 천지인데도 이에 모든 것이 죽는 계절인데도 살려는 생의를 능히 회생시켜 만물이 떨어져 나가는 박음의 계절에 양의 화기를 되찾았으니 아 또한 이상토다
이 성어의 발췌문은 조선시대 중기 대사헌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지봉 이수광(芝峯 李睟光1563~1628)선생이 지은 납매를 읊다 병서(詠臘梅 幷序)에 납매의 7언시를 읊게 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서두 글에 앞부분이다
지봉 이수광선생은 본관은 전주 자는 윤경(潤卿) 아버지는 병조판서 이희검(李希儉)이며 어머니는 문화 유씨이다 선조 11년(1578) 초시에 합격하고 1582년 진사가 되고 선조18년(1585) 승문원부정자가 된 후 성균관전적을 거쳐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오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도방어사 조경(趙儆)의 종사관이 되어 종군하였으나 아군의 패배 소식을 듣고 의주로 돌아가 북도선유어사가 되어 함경도 지방의 선무 활동에 공을 세웠다 1597년 성균관대사성이 되고 명나라를 다녀온 후 1601년 부제학이 되어 고경주역을 교정했고 이듬 해 주역언해를 교정했으며 1603년 사기를 교정하였다 1611년 왕세자의 관복(冠服)을 주청하는 사절의 부사로 다시 명나라를 다녀올 때 유구(琉球) 사신과 섬라(暹羅 타이) 사신을 만나 그들의 풍속을 듣고 기록하였다 그 후 도승지 겸 홍문관제학으로 임명되고 대사간 이조참판 공조참판을 역임하였으며 인조 3년(1625) 대사헌으로서 왕의 구언(求言)에 응해 열 두 조목에 걸친 조진무실차자를 올려 시무를 논하여 당시 가장 뛰어난 소장(疏章)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1628년 7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그 해 12월에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일찍이 관직에 나아가 중요한 관직을 모두 지냈으며 세 차례나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올 정도로 관료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하였으며 특히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치르고 광해군 때의 정치적 갈등과 인조 때의 이괄(李适)의 반란을 겪었던 어려운 정국에서도 당쟁에 휩쓸리지 않았으며 언제나 강직하면서도 온화한 입장을 유지하여 그 시대의 성실하고 양식 있는 관료이자 선비로서의 자세를 지켰으며 저서로는 지봉집(芝峯集)이 있고 또한 찬록군서(纂錄群書) 25권이 있다고는 하나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사후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수원의 청수서원(淸水書院)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문간(文簡)공이시다
부드럽고 아름다운 살갗(피부) 또는 살결같이 매우 단아하고 아름답다 라는 의미인 오늘의 성어 작약기부(綽約肌膚)라는 절묘한 말은 장자 소요유에서 또 이색선생의 칠언절구에서도 보이지만 지봉선생이 7언 시를 짓게 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서두 글에서 얻은 것이라 특히 매화 꽃잎을 비유하는 멋진 성어라서 오랜만에 휘호하고 백운필담에 담고 함께 공유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