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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2장 1-6절. 신비체험보다 약한 것들을 자랑한 바울. 요약설교
1절.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1. 지난 시간에는 바울 사도가 다메섹에서 전도하다가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밤에 광주리를 타고 성벽 밖으로 도망한 부끄러운 사실을 설명드렸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자기의 약함을 자랑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약할 그 때에,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고,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20절에는, 은혜도 죄를 깊이 자각한 사람에게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의인인 줄 아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고, 악한 마귀가 역사할 뿐입니다.
그렇지만 죄의식과 은혜가 있는 곳에는, 성령님의 평화가 넘칩니다.
그러나, 교만과 악한 생각이 있는 곳에는, 다툼과 상처만 있습니다.
2. 오늘은 고린도후서 12장 1절 한 절밖에 안 되지만, 역시 바울이 약한 것을 자랑하는 것에 대한 연속적인 내용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서는 바울 사도가 거짓 사도들 때문에 자기의 혈통을 자랑하다가, 자기의 약함과 고생 목록을 자랑하고 주님의 은혜를 드높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것을 자랑하는 자체가 어리석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자랑거리가 있다면 주님이 주신 것이지,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인 나에게 있는 것은 약함과 허물 뿐인데, 무엇을 자랑하겠습니까?
2. 오늘날 우리도 개인의 공적을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주의 약속의 말씀과 주님의 은혜를 자랑할 뿐입니다.
3. 12장에는 바울 사도가 대적자들 때문에 부득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한다고 하면서, 삼층천에 올라간 체험과 그곳에서 본 천국 복락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무익하나마>
1. 사실 자랑하면 자기에게도 유익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은혜가 떠나기 때문입니다.
즉 자랑은 사람을 바라보게 하고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게 하기 때문에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의 참된 모습이 약하다는 것을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슨 초인적인 능력을 지닌 것인 양 꾸미는데, 자기를 자랑하는 이런 태도는 다른 사람도 속이고 자기도 속는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2.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절제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 속에는 절제의 은사가 있습니다. (갈 5:23)
성령의 은사를 받아서, 놀라운 신비체험을 많이 하게 되면, 육체와 인간의 마음이 그 신비체험을 계속 받아 간직하기가 힘듭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몸과 마음이 연약한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비체험을 크고 많이 한 사람은 몸과 마음이 깨어지기 쉽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기한 신비체험을 너무 좋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연약한 인간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놀라운 신비체험을 하더라도, 인간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고, 연약한 질그릇이란 사실을 깨닫고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육간의 건강을 잃고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3. 자랑하는 것은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에게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께 인정받고자 해야지 사람에게 인정받고자 해서는 신앙적 유익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충성해야지 사람에게 인정받고 상을 다 받아버리면, 하나님께 받을 상이 없어지게 됩니다. (마 6:5, 16)
그러므로 성도님들이 교회에서 수고할 때, 사람들이 칭찬해주지 않고, 광고해주지 않아도 섭섭함을 타지 않을 정도로 신앙이 자라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할 때, 칭찬해주어야 힘이 나고, 전혀 칭찬해주지 않으면 힘이 쭉 빠져서 ‘에라 모르겠다. 누가 알아주길 하나?’ 이런 사람은 아직 어린 신앙인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 많이 하시는 성도, 성경 많이 읽는 성도, 전도 많이 하는 성도, 봉사 많이 하는 성도님들도, 사람에게 칭찬받으려고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오히려 이런 분들이 교만해져서 하나님과 교회 지도자들에게 순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정말 믿음이 좋은 분들은 말씀대로 겸손한 분들이지 교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1. 바울은 앞에서 자랑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했습니다(11:1, 16-18).
그런데, 부득불 자랑하려는 이유는 고린도 교인들이 거짓 사도들의 신비적인 자랑에 현혹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무익한 신비체험을 부득불 자랑하는 이유는 역시 교인들을 위해서였습니다.
즉 지금 고린도 교인들이 거짓 사도들에게 현혹되고 있기 때문에 교인들을 건전한 신앙 가운데 서게 하기 위해서 바울은 부득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4. 그리고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서 도전해오는 거짓 사도들이 있기 때문에 부득불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거짓 사도들은 바울을 공격하기를, “바울이 무슨 사도인가? 무슨 환상과 계시를 보기라도 했단 말인가? 무슨 신비체험이라도 했단 말인가? 우리는 큰 신비체험을 많이 했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부득불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1. 바울이 이 시점에서 갑자기 자신이 체험한 환상과 계시에 대해서 말하는 이유는 바울이 지금 '자랑'을 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바울의 자랑은 적대자들의 자랑에 대한 대응책으로서의 자랑이었습니다.
적대자들은 자기들이 생전에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그리스도의 참 제자라고 자랑했고(11:13),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권위 있는 추천서를 받았다고 자랑했으며(3:1), 신비적 체험을 했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자신이 환상과 계시를 체험한 신비적 경험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신비체험을 말하다가 그만두고 다시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약할 그 때에 주님이 강하게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2. 여기서 <환상>(ὀπτασίας: 옵타시아스)이란 잠자는 상태 같으면서도 의식이 깨어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어떤 현상을 직접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계시>(ἀποκαλύψις:아포칼륍시스)란 베일을 벗기듯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주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 방법은 환상일 수도 있고, 귀로 듣는 말씀일 수도 있고, 이미 기록된 말씀을 새롭게 이해하도록 그 의미를 깨닫게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성경적 계시는 구약시대에 선지자들을 통해서, 신약시대는 사도들을 통해서 전달해주셨습니다.
지금은 성령님께서 기록된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해주심으로 계시를 접하게 됩니다.
3.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환상과 계시를 ‘내가 받은 환상과 계시’라고 하지 않고, ‘주의 환상과 계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환상과 계시는 바울 자신이 자기 마음에서 생각한 환상과 계시가 아니라, 주님이 주신 환상과 계시를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여기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말씀한 환상과 계시는 성경에 표준적으로 기록할 만한 성경적 환상과 계시였습니다.
즉 인간적인 것이 가미되지 않은 성경 계시였습니다.
그래서, 셋째 하늘에 올라간 체험과 그 표현이 정말 성경적입니다.
나중에 보겠지만, 가히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생 복락의 천국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요즘에 불건전한 천국 체험기와는 전혀 비교가 안 되는 정말 기록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않는 성경적 계시임을 알 수 있습니다.
4. 바울 사도는 환상과 계시를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표준이 되는 것은 기록했지만, 개인적인 것은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환상과 계시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개인적인 환상과 계시는 그 사람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도 일반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표준적인 환상과 계시는 성경에 기록될 만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환상과 계시 체험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도 자랑하면서 성경처럼 일반적으로 적용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개인적인 체험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혹, 환상을 보고 신비한 음성과 희한한 체험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 개인에게 필요한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누가 그런 신비체험을 말할 때는 그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으로 아십시오.
5. 지금도 성경 말씀, 설교 말씀을 따르기보다는 환상과 계시를 좋아하는 성도들이 더러 있습니다.
누가 ‘보았다, 들었다’ 하면 따라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지금도 자식을 결혼시키려 하거나, 대학교 학과 결정이나, 취업 진로를 결정할 때, 예언 기도 받고, 환상 본다는 사람 찾아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과 이성적 건전한 판단과, 경험자들의 조언과, 자신의 기도와, 목회자의 상담이 필요한 것입니다.
모든 것 다 버리고 그냥 예언 기도만 받으러 다녀서는 잘못됩니다.
6. 결혼의 경우를 예로 들어봅시다.
예를 들어, 딸을 가진 어떤 구역장이 직장이 좋은 아들을 둔 권찰에게 “권찰님 아들과 우리 딸이 결혼하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들었다”고 말했다고 합시다.
그러면서,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이니까, 순종하지 않으면 권찰님 아들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협박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 결혼이 하나님이 뜻이라면, 구역장에게만 계시가 임한 것이 아니라, 권찰에게도 임했을 것입니다.
종종 이런 공갈을 듣고, 두려워서 상담을 요청한 경우가 있는데, 담대하게 대적하십시오.
표준적인 계시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양심과 상식이 통해야 하는 것이지, 개인적인 경험을 강요할 때는 담대히 물리치십시오!
그것은 분명히 욕심에서 나온 거짓된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적인 환상은 복음을 위한 것이고, 또 개인적이지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7. 예를 들어봅시다.
사도행전 10장에는 베드로가 환상을 본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환상 중에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보자기에 싸인 각종 짐승을 잡아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환상을 보여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며칠 절에 고넬료라는 이방 백부장이 가이사랴에서 기도하는 중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환상 중에 천사가 말하기를, “너의 기도와 구제가 하늘에 상달되었으니, 욥바에 사람을 보내서, 베드로를 청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를 모시고 가려고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함께 교제하고 식사하는 것을 거절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베드로가 환상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성령님께서 하나님이 이방인도 깨끗하게 하셨으니,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이처럼, 베드로가 본 환상의 내용과 고넬료가 환상을 보고 베드로를 초청한 내용이 서로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성경적 환상은 이런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과 전도와 교회를 위한 것들이었습니다.
8.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이 어느 곳으로 전도하러 갈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기도하고 있을 때,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나타나서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 환상을 보고, 복음 전도의 길을 지시하신 것으로 생각하고, 마게도냐로 건너가 전도했습니다.
9. 또, 사도행전 18장에서, 바울이 고린도 전도를 할 때, 유대인들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을 때, 밤중에 주님께서 환상 중에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두려워 말고 담대히 말씀을 전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해할 자가 없고,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복음 전도를 위한 환상이었습니다.
10. 또, 사도행전 23장에서는, 바울 사도가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산헤드린 공회에서 재판을 받을 때 환상을 보았습니다.
이때, 바울 사도는 마음이 약해져서, 재판하는 산헤드린 공회원들 앞에서 예수님과 복음을 담대히 전하지 못하고,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로서 심문을 받노라”고 자기를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하지 못하고, 바리새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바울은 목숨 내걸고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적당히 꾀를 써서 한 목숨 살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날 밤에 주님께서 환상 중에 바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아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고 격려해주셨습니다.
즉,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죽지 않고, 장차 로마에까지 가서 복음을 증언하리라는 것을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11. 이처럼, 환상은 복음과 교회를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혹, 할 수 없이 답답할 때는 주님이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라도 알려주시기도 합니다.
물론 감사할 일이지만, 그러나 그때에는 자신이 정말 말씀에 서지 못하고 신앙 형편이 답답한 처지에 있다는 것으로 알고, 더욱 성숙된 신앙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꿈이나 환상은 자기의 잠재의식 속에 있는 것이 수면 위로 떠오르듯이, 의식 세계로 잠깐 떠오른 것들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성경 골로새서 2장 18절을 보면,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불건전한 신비적 영지주의자들이 신비적 환상 체험을 과장하면서 자랑하는 그릇된 신앙 자세를 경계한 말씀입니다.
12. 그렇습니다.
신비주의자들의 환상은 참된 주의 환상과 계시가 아니고, 자기 마음에서 나온 잠재의식이 의식 세계로 투영된 육체적 환상이고, 또 과장된 간증입니다.
분명히 성경은 신비주의자들의 자기 환상은 육체를 좇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골 2:18)
성령님께서 주신 주의 환상은 이와 다릅니다.
복음 전도와 교회 성도를 위해서 주신 주의 환상과 계시는 주님이 주신 것이고, 신비주의자들처럼 자기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너무나 답답할 때는 주님이 특별히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라도 저희를 위로하시고, 힘을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비주의자들이 본 환상이란 대체적으로 자기가 세상 살면서 받은 스트레스가 무의식 속으로 잠재되어 있다가, 어느 특정한 환경 속에서 잠깐 의식 세계 속으로 비추어진 것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신비주의자들의 환상은 육체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수천 년 교회 역사 속에서 수많은 환상과 신비체험들이 많이 있었지만, 정통 신앙은 성경 계시에 입각한 신앙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정통 신앙에 굳게 서서,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분명하게 계시된 성경 말씀에 의지한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건전한 분별력과 상식과 경험과 상담을 동원하여 건전한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복된 신앙생활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절.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1. 여기서 <한 사람>이라고 지칭하는 사람은 바울 자신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자신을 가리켜서 제삼자인 것처럼, <한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랍비적인 표현법이었습니다.
이처럼 ‘간접 표현법’을 쓰는 경우는 자신의 자랑을 피하고, 과장되지 않도록 하는 ‘겸손 어법’이었습니다.
즉, 이 경험은 바울 자신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초자연적 경험임을 겸손히 간증하려는 자세인 것입니다.
<십사 년 전에>
1. 고린도후서가 기록된 것은 56년 가을이었으므로, 그로부터 14년 전이면, 42년으로서, 바울 사도가 자기 고향 길리기아 다소에 가 있던 때입니다.
이처럼 바울 사도는 고향 길리기아 다소에서 약 11년(혹은 13년) 있었는데, AD 35년부터 46년까지였습니다.
이 기간은 소위 ‘침묵의 기간’으로서 사도행전과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21. “그 후에 내가 수리아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러”
갈라디아서 2:1. “십 사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라”
사도행전 11:25-26,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으로 데리고 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47년)
사도행전 11:29-30.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48년)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1. 이것은 하나님이 계신 천국을 유대인들의 표현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즉, 유대인들은 새가 날고 구름이 있는 곳을 첫째 하늘(소위 대기권)이라고 하고, 해와 달과 별들이 있는 곳을 둘째 하늘( 소위 대기권 밖의 하늘)이라고 하고, 하나님이 계신 천국을 셋째 하늘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열왕기상 8장 27절에도 이와 같은 표현이 나와 있습니다.
즉 솔로몬은 성전을 지어놓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릴 때, “하늘들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라고 표현했습니다.
(The heavens, even the highest heaven cannot contain you. 하늘들, 심지어는 가장 높은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셋째 하늘이란 천국 낙원>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바울은 천국 낙원에 가서 굉장한 체험을 했지만, 그에 대한 말을 다 표현 못 했다고 했습니다.
즉, 말로써 설명을 못 한다는 것입니다.
2. 이처럼 바울 사도같이 위대한 이도 천국 낙원에 대해서 말로 설명할 수 없다고 했는데, 하물며 누가 천국에 갔다 왔다고 하면서 천국에 대해서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천국에 갔다 왔다고 하면서, <내가 본 천국>이라는 등 간증 집회나 책을 쓰면서 야단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간증과 책은 다 그대로 믿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약 20여 년 전(1992)에 시한부 종말론자들(이*림)이 “내가 본 천국”이라는 책을 써서 한동안 엄청나게 팔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성경에 어긋난 내용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사람을 속였다는 것이 분명하게 밝혀졌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들은 지금 부끄러워서 기성교회로 못 돌아오고, 자기들끼리 아직도 숨어서 모이고 있습니다.
3. 그러므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바울 사도의 태도와 그런 사이비들의 태도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즉, 바울 사도는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보고 왔으나, 혹 사람들이 오해할까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비주의 환상파들은 “내가 본 천국”이라고 책을 만들고 테이프를 만들고, 온통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자랑을 하고 다닙니다.
물론 이런 천국 간증을 통해서 은혜받고 신앙생활을 더 잘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환상파 간증자들이 전도 집회를 통해서 믿은 사람들은 언제나 신비적 환상이 은혜인 줄 알고, 그런 것만 따르려 하고, 성경 말씀에 의한 바른 신앙을 갖기 힘듭니다.
또한, 무시무시한 지옥 환상에 대한 간증을 통해서 예수 믿은 사람은 언제나 지옥 환상에 매달려 신앙생활 하기 때문에, 구속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없고, 공포증에 걸려서, 올바른 신앙생활을 못 합니다.
4. 그러므로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물론 이런 천국과 지옥 환상이 세상 향락에 빠져 사는 사람들에게는 개인적으로 큰 유익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성경 말씀에 기초한 건전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바울 사도를 보십시오.
셋째 하늘에 올라갔고,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모르고, 몸으로 갔는지 영으로만 갔는지 모르고, 주님만 아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신비주의 간증자들은 ‘내가 보았다’고 딱 부러지게 말하니, 바울의 태도와는 좀 다릅니다.
물론 그런 천국 환상을 본 사람 본인에게는 그런 신비적인 체험이 절대적인 감동과 충격을 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 사도는 천국 환상 체험을 하나님을 의존하며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신비적 환상에 몰입하는 지나친 신비주의 환상에만 너무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매일 기도하고, 성령님의 감동과 인도와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로, 주님 모시고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끌려 간 자라>
1. <이끌려>에 해당하는 헬라어(ἁρπαγέντα)는 부정과거 수동태 분사형으로서(having been caught up), 자의나 자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불가항력적으로 붙잡혀 끌려갔음을 뜻합니다.
즉, 성령에 의해 완전히 지배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2. 이처럼 바울이 본 성경적 환상은 하나님이 이끌어주셔서 가본 천국이지, 바울이 기도를 많이 했거나 바울이 간절히 원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3. 그러므로 신비적 체험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주신 것이지, 인간의 노력으로 체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비적 환상을 보려고 애쓰지 마시고, 바울처럼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 말씀에 따라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놀라운 은혜를 주시고, 크고 귀한 열매들을 가득 채워주시기를 축원합니다!
3절.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1. 바울 사도는 깊은 체험을 했지만, 다 알지는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때, 영혼만 가서 영적으로 깨닫게 하신 것인지, 아니면 몸까지 가서 체험한 것인지 다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순수하게 의존하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타율적 종교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는 모두 자율적 종교입니다.
즉 자기가 노력하고 연구하고 수련을 쌓아서 종교를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오직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하는 타율적 종교입니다.
즉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2. 환상과 계시는 인간이 자기 맘대로 경험하고 싶다고 해서 경험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주관적으로 보고 싶다고 해서 어떤 내용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을 수동적으로 경험할 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전적 무능을 주장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다른 종교들은 인간이 주인공이 되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교주(석가모니)도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는 교만하고 무지한 말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이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만물과 인간을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수동적 존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인격성과 주권성과 자율성을 무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기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인격 활동을 통해서 만물을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운전수가 기차를 운전하고 가지만, 그 기차 안에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활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이 나라를 다스리지만, 백성들이 자유를 가지고 활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큰 배는 그 안에 축구장도 있고 수영장도 있습니다.
그래서 배 안에서 수영도 하고, 축구를 해도 궁극적으로 그 배는 선장이 운전을 하고 갑니다.
이 지구도 하나님이 움직이고 가시지만, 지구 안에서 사람들은 뛰고 놀면서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서로 모순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와 인격 활동을 허용하시면서도 세계를 다스려 나가십니다.
그런데 신비주의자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인격적인 주권’을 알지 못하고, 인간의 자유의지와 인격적 활동을 무시합니다.
그래서 신비주의에 빠지면 비정상적인 사람이 되고, 정상적인 인격 활동이나 정상적인 감정 활동을 못 합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더욱 아름다운 인격과 더욱 풍성한 감정 활동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신앙과 신비주의 신앙의 차이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비주의자들은 피도 눈물도 없고, 인정도 사정도 없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증인은 아이가 죽어도 수혈을 않고, 안식교는 군대도 안 가고, 신천지는 어머니를 화장실 변기로 때려도 가책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정상적인 기독교는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받아도, 더욱 정상적인 인격 활동과 더욱 풍성한 인정과 감정을 갖게 됩니다. 할렐루야!
3. 그리고, 이러한 환상이나 계시는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체험하는 것을 초월하는 초월적인 경험들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언어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요한계시록에도 천상의 일들은 이 세상의 언어로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상징적인 언어로 말씀했습니다.
예를 들면 과거 2천 년 전에는 오늘날 비행기나 탱크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2천 년 전의 용어로는 탱크를 표현할 때 말 같은 것이 쇠로 만들어졌고 긴 꼬리에서 불을 품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비행기가 불타서 공중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배 같은 것이 하늘을 날다가 불타서 땅에 떨어진다고 묘사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천국의 것들은 이 세상적인 용어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가히 말할 수 없는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어떤 이단자들은 천국에 갔다 왔다고 하면서, 천국이 마치 이 세상의 것들인 양 표현한 것은 잘못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통적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즉 오늘 바울 사도처럼 신비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고,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에 굳게 서야 하겠습니다.
오늘 바울이 신비적 체험을 마지 못해서 간증한 것은 거짓 사도들과 거짓 교사들이 거짓된 신비체험을 많이 자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이런 신비적인 신앙을 갖지 않고 오직 하나님 말씀에 굳게 서서 올바른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밝은 계시의 말씀을 전해주었고, 신비적 체험은 제삼자의 이름으로 말해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비주의로 나가지 마시고, 하나님 말씀에 굳게 서서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건전한 인격과 생활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많이 전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4절.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 할 말이로다.
1. 천당에 갔다 왔다는 사람들이 이렇더라고 마구 떠들어대지만,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가히 말로 표현하지 못할 내용이라고 했습니다.
즉 사람의 표현으로 가히 나타낼 수 없는 그런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놀라운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2. 그 때문에 성경에는 내세가 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고, 내세에 가면 놀랍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것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감격스러운 곳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천국이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그런 곳이라면, 아마 세상 용어로 표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그곳에 갔을 때, 놀라울 만큼 감격하고 찬양할 것입니다.
천국은 이 세상에서 예고편으로 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차원이 아닙니다.
3.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만큼만 봐야 하고, 말하라고 하신 것만큼만 말해야지, 봤다고 해서 함부로 떠들고 다니는 것은 잘못입니다.
물론 천국 환상으로 본인은 큰 감동과 은혜를 받을 수 있고, 혹 다른 사람들도 경각심을 가지고 믿음 생활을 더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천국을 세상 용어로 적나라하게 말씀해주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개인이 천국 환상 보았다는 것들을 성경적으로 올바르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4. 지금은 성경 계시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보는 것 듣는 것을 흔하게 주시지는 않습니다.
혹시 워낙 급한 경우라든지, 꼭 어떤 확신이나 위로가 필요한 경우에는 주님이 꿈이나 환상을 보여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글자를 모르고, 전도하는 사람도 없는 경우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런 꿈이나 환상을 보여주셔서 신앙을 갖게 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적으로는 성령님의 감동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감동으로 믿음을 갖고 하시고, 신앙의 증진을 이루어가게 하십니다.
5. 혹, 성경을 영 모르든지, 혹은 성경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에게 꿈이나 환상을 보여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컨대, 인도에 <선다 씽>(1889-1929년)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성경이 무슨 책인지 몰라서, 반항심을 가지고 성경책을 찢고 불태웠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1904년에 기찻길 누워서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런데 새벽에 환상 중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 뒤로 많은 죄를 회개하고 역사적으로 유명한 전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무서운 히말라야 산맥을 수 없이 넘나들면서 죽을 각오로 인도와 유럽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느날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가는데, 한 사람이 눈 속에 쓰러져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같이 가던 사람은 자기도 갈 길이 바쁘다고 죽어가는 사람을 놓아두고 가버렸습니다.
그러나 <썬다씽>은 죽어가는 사람을 엎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갔습니다.
그랬더니 체온에 죽어가던 사람도 살고 <산다씽>도 살았습니다.
그러나 혼자서 살겠다고 먼저 간 사람은 이미 얼어 죽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 체험 이야기가 썬다싱 이야기입니다.
이런 <선다씽>은 성경을 모르고 예수님을 거역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환상중에 나타나셔서 예수님을 믿게 했습니다.
그 사람은 성경을 불태우고, 예수님을 너무나 거역했기 때문에, 달리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방법이 없었으므로, 환상을 통해서 보여주시고, 예수님을 믿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성령님과 성경을 통해서 믿음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특별한 경우 외에는 그런 환상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7.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열심히 기도하여 성령님의 은혜를 많이 받으시고, 성경 말씀을 읽고 연구하여, 믿음 생활을 잘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이 바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입니다.
이 계시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물론 이 성경 말씀을 올바로 알아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8. 그래서 고린도전서 4장 6절에는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노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즉 <기록한 말씀>밖에 넘어가면 사람이 교만해진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성도님들이 가만 살펴보시면 느끼실 것입니다.
즉 계시를 받았다는 사람, 환상을 보았다는 사람, 또는 성경 말씀을 잘 순종하지 않으면서, 그런 데 따라다니는 사람은 영적으로 교만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목사가 성경을 가지고 말해도, 자기가 본 환상과 자기가 받은 계시가 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11. 심지어 어떤 이단자는 성경은 사본이고, 자기의 말이 성경 원본이라고 참람한 말을 합니다.
그런 사람은 오래 믿어도 근본적으로 신앙생활의 성격이 잘 고쳐지지 않습니다.
신학교 가서 목사가 되고, 전도사가 되어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한 번 잘못 받으면 그렇게 되기 쉽습니다.
12. 그래서, 성경 말씀은 분명히 “기록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바울과 아볼로가 보인 본이 바로 기록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왜 성경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고 하십니까?
교만해지기 때문입니다.
즉 환상과 계시를 좋아하면 교만해집니다.
그리고 과장도 잘하고, 거짓말도 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굉장히 신령한 것 같은데, 과장도 잘하고 거짓말도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신비주의자들은 글로 표현된 객관적인 성경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가 다른 환상을 보았다고 금방 변하고, 또 다른 계시가 임했다고 하면서 금방 변질해버립니다.
그래서 자기가 유리할 데로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합니다.
그러므로 신비주의자들은 믿을 것이 못 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환상과 계시란 객관적으로 모든 사람이 다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환상과 계시를 받은 사람이 또 다른 환상과 계시가 임했다고 주장하면, 얼마든지 거짓말을 정당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13. 골로새서 2장 18절에는 신비주의에 빠진 사람들이 이처럼 과장과 거짓말을 잘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이런 신비주의자들이 일부러 외식적으로 겸손한 척하는데, 사람들이 보기엔 아주 겸손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는 겸손한 것처럼 보이지만, 인격적으로 정말 겸손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통해서 죄 용서를 받은 그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만이 겸손해지기 때문입니다.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1. 예수 믿고 신비주의에 빠진 사람도 구원은 받습니다.
예수 믿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신비주의에 빠지면 상을 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그런 사람 중에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천사를 숭배하는 사람도 있었으니, 얼마나 한심한 사람입니까?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1. 기도하다가 환상을 보았다, 계시를 들었다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상한 것은 그런 신비체험이 영적인 것 같은데, 성경에는 반대로 육체의 마음이라고 했고, 과장하며 교만하기 이를 데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신비주의는 영적인 것이 아니라, 실상 육적인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 63절에 “주의 말씀이 곧 영이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2. 환상을 보았다 계시의 말씀을 들었다 하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라기보다는 자기 육체에서 공명되어 나온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런 것은 이방 종교에도 있고, 최면술에도 있습니다.
3. <헛되이 과장한다>는 것은 조그만 것을 보고서도 이만큼 큰 것을 보았다고 과장한다는 것입니다.
즉, 날이 넘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은 머리 되신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본 것, 들은 것을 의지하기 때문에, 성령님과 성경 말씀이 주시는 깊은 은혜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상한 광고 보고 아무 집회나 마구 따라다녀서는 안 됩니다.
<낙원으로>
1. 2절에서 '셋째 하늘'이라고 표현한 것을 여기서는 ‘낙원’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낙원'은 하나님께서 계신 곳을 가리킵니다. (겔 28:13; 31:8 참고).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회개한 강도에게 약속하신 곳(눅 23:43),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 성도가 들어갈 영생의 장소(계 2:7)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낙원'은 구원받은 자들만이 갈 수 있는 곳입니다.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1. 여기에는 몇 가지 뜻이 들어 있습니다.
바울이 경험한 환상과 계시는 너무도 신비로운 것이어서,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2. 그리고 바울이 들은 말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는 신적 비밀이기 때문에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구약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과 사도 요한에게 어떤 계시의 말씀은 봉인하고 알리지 말라고 했습니다(사 8:16; 단 12:4, 계 10:4).
3. 어떤 면에서 바울 사도는 묵시 문학가들이나 영지주의자들이 신비한 체험을 너절하게 자랑하는 행위를 비판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자기가 본 환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진술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4. 이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환상과 계시를 받은 것은 그 환상과 계시를 받은 본인에게는 큰 은혜와 감동과 믿음과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2차 전도여행에서 성령님이 선교의 길을 막으셨을 때, 흑암과 절망을 느꼈으나 드로아에서 마게도냐인이 부르는 환상을 보고, 다시 마게도냐로 가서 선교할 희망과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행 16:6-10)
또한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산헤드린 공회의 재판을 받을 때, 예수님과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자신이 바리새인이요 바리새인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실수를 하고 낙심해 있을 때, 그 밤에 주님이 환상중에 나타나셔서 바울이 로마 황제 앞에서도 전도할 것을 보여주시므로 큰 위로의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행 23:6-11)
그리고 바울과 함께 배에 탄 296명이 14일이나 유라굴로 광풍에 죽을 고생을 하고 있을 때. 주님이 밤중에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모두 풍랑에서 구조되고, 바울의 지도를 받게 될 것이란 환상과 음성을 듣고, 바울이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모든 항해자를 위로하고, 구원해냈습니다. (행 27:14-26)
이와같이 환상과 계시는 그것을 보고 들은 당사자에게는 큰 위로와 희망과 용기를 갖게 만드는 참 놀라운 은혜가 됩니다.
그러므로 환상을 보신 성도님들은 주님의 큰 위로와 은혜를 받아서 더욱 주님께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환상을 자랑하지 않은 태도를 본받아서, 환상 본 것을 감사하고, 너무 자랑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5절.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1. 거짓 사도들이 자꾸 자랑하기 때문에 한 마디 자랑하려고 했으나, 자기는 약한 것을 자랑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자기에게는 약한 것들뿐이라는 뜻입니다.
바울 사도야말로 자신의 모습을 잃지 않은 겸손하고 진실한 사람입니다.
우리도 자랑한다면 나의 약함과 부족함을 자랑해야 합니다.
이렇게 약하고 부족한데도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심으로 주의 일을 감당할 수 있게 하셨으니,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외에 다른 무엇을 자랑하겠습니까?
바울 사도는 다음 절부터 자기의 약한 것들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1. 여기서도 바울은 자신이 환상을 본 당사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람>이라고 3인칭을 사용하여 자신을 숨기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2절에서도 잠깐 언급했습니다만, 유대인의 ‘겸양어법’입니다.
즉, 자신의 명예를 낮추고, 교회의 유익을 도모한다는 바울의 기본 입장 때문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9절에서 '방언'을 말할 때나, 고린도후서 5장 13절에서 '황홀경 체험'에 대해 말할 때 교회의 유익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와 같이, 여기서도 하나님과 바울 자신 사이에서만 이루어졌던 환상을 말하는 것이 교회 성도들의 유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바울은 사람들이 바울을 특별한 존재로 오해하는 것과 바울에게 영광 돌리는 것을 방지하려고 자신을 제삼자처럼 숨기고 있습니다.
바울이 취하게 될 영광은 그 환상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약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서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 하리라>
1. 바울은 매우 현명하게 말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신비체험을 제삼자의 이름으로 자랑하다가, 이제는 오히려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기 시작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약한 자신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자랑하는 수순을 밟아갑니다.
<신비체험은 제3자 → 자신은 약함 → 하나님은 능력>
2. 사실 바울이 진정으로 자랑하려는 것은 자신의 신비체험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신비체험을 말하는 이유는 바울의 적대자들이 사도직의 증거로 ‘황홀 체험’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신비체험이 사도직의 증거라면, 바울 자신도 얼마든지 말할 것이 있다는 의미로 환상 체험을 말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결정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도로서의 자랑은 오직 자신의 약함과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적대자들과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해주고자 했습니다.
3. 우리는 여기서 바울 사도의 위대한 모습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즉 자랑은 다른 사람에게 돌리고, 자기는 약한 것만을 자랑한 모습 말입니다.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자기를 자랑하면서 자기들이 참 사도이고, 바울은 거짓 사도라고 비방해도, 바울은 자기의 약함을 말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누가 우리를 비방하면 당장 화가 나서 욕을 하고 대들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비방해도 자기의 약함을 자랑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잃지 않으려는 훌륭한 태도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4장 6절에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교만한 자는 물리치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면, 때가 되면 하나님이 높여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시편 37편 5절에 악인에 대해서 질투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시편 37편 9절에는 속히 악인이 사라질 것이고 의인이 땅을 차지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물론 야고보서 4장 7절에 마귀는 대적하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귀의 종이 되어서,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다서 1장 10절 말씀대로, 제정신이 아니고 마귀에게 사로잡혀서 알지 못하는 것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에게 전도하다 보면, 알지 못하면서 마귀의 종이 되어 복음 전도를 대항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5장 19절에 “온 세상은 악한 자에게 속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을 대적하지 말고, 그 배후에 마귀가 역사하는 줄 알고, 마귀를 대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마귀가 피하고, 하나님의 평강이 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사람을 자랑하고 자신에 대해서는 약한 것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얻고, 날마다 승리의 생활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6절.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1. 바울이 만일 자랑한다고 해도, 그 자랑이 어리석은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체험 자랑이 모두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참된 체험도 자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듣는 사람이 지나치게 생각하여 바울 자신을 우상시할까 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2. 이처럼 바울이 체험 자랑을 꼬집는 것은 간접적으로 유대주의자들의 신비체험 자랑이 사람을 높이는 우상숭배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유대주의자들이 이처럼 존경받으려고 거짓된 체험 자랑을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1. 바울은 자신이 체험한 환상과 계시에 대해서 얼마든지 더 말할 것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이 실제로 환상 보고 계시의 말씀을 들은 것보다 사람들이 지나치게 생각할까 봐서 그만두었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체험 간증을 절제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1) 첫째,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3절에 말씀한 대로, 바울의 간증을 듣고 바울을 미쳤다고 악평하는 사람이 있을까 봐서 절제했습니다.
(2) 둘째, 듣는 사람들이 바울 사도를 지나치게 높이 평가해서, 주님께 대한 영광과 신앙에 손상이 될까 봐서 절제했습니다.
2. 이처럼 바울의 신비체험에 대한 간증은 신앙이 어린 일반 성도들에게 시험거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교회의 유익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말한 내용이 사실일지라도, 교회에 덕이 되지 않는다면, 말하지 않았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높이 드러나는 것보다 교회와 성도들이 잘 되는 것을 바랐습니다.
자기는 사도로서 교회가 잘되도록 봉사하는 것을 통해서만 인정받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3. 우리는 신비체험을 간증하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가끔 봅니다.
그럴 때, 어떤 사람은 체험 이야기가 무척 궁금해서,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별별 상상을 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옛날부터 사람은 세상 이야기가 아닌 이상한 이야기를 하면 별의별 상상을 다 하면서 궁금해하거든요.
그리고, 심지어 이야기가 끝났는데도, 궁금해하면서, 다 말하지 않고 숨겨둔 것이 있으면, 감추지 말고 더 말해달라고 졸졸 따라다니는 사람도 있어요.
처음부터 이런 쪽으로 신앙이 기울어진 사람은 오래 믿어도 꼭 그래요.
안타깝게도 말씀을 연구하려는 생각을 안 합니다.
옛날부터 공부하는 것은 힘들기 때문인가 봅니다.
그러나, 오직 성경만이 믿음을 갖게 하고, 올바른 성도로 교육시켜줍니다.
디모데후서 3장 15-17절에,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그릇된 신비주의자들의 심리를 알기 때문에 신비체험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4. 그런데도, 어떤 사람은 자기가 체험하지 않은 것까지도 과장해서 지어 가지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어내려고 하는 신비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적당한 기회가 되면, 심지가 약한 사람을 유혹하고 협박해서 돈을 뜯어내고 자기 종으로 부려먹습니다.
5. 이런 신비주의를 좋아하는 신앙은 너무 쉽게 믿으려는 유치한 신앙입니다.
어린아이와 어른의 차이가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이상한 것을 좋아하고, 어른은 유익한 것을 좋아합니다.
어린아이들은 빤짝빤짝하는 것, 알록달록한 것, 불량식품일지라도 우선 눈을 현혹시키고 입맛을 현혹시키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른은 비록 겉모습은 어떻든지, 실속이 있고 가치 있고 유익한 것을 좋아합니다.
6. 영적으로도 꼭 그렇습니다.
신앙이 어릴 때는 이상한 신비 집회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장성하면, 말씀 위주의 집회와, 실제로 교회와 사회와 가정에 유익한 것과 봉사를 많이 하고 열매가 많은 분들의 집회를 좋아합니다.
7. 그래서 바울 사도는 큰 체험을 했지만, 듣는 성도들의 신앙적 유익을 위해서 간증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서, 다음절부터는 자기의 약함과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기 시작합니다.
즉 바울은 못 고칠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병을 고쳐주시지 않으면서, “내 은혜가 약한 데서 온전하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가 강하게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8. 그러나 목회적인 측면에서 한 가지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위와 같은 신비체험을 본인이 했다거나, 신비체험을 좋아하는 어린 성도가 있더라도, 너무 지나치게 나무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신앙생활은 다양하고, 여러 가지 수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너무 지나치게 신비주의 성도들을 나무라고 몰아붙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한때는 이런 신비주의를 좋아할지라도 목회자가 기도하면서 성령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가르치면, 언젠가 성령님의 감동으로 은혜를 체험해서, 정상적인 신앙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 현장에서 너무 지나치고 과민하게 신비주의자들을 몰아붙이면, 아예 올바른 신앙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막아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일시적으로 신비주의나 율법주의나 방탕주의로 흐라는 성도들이 있더라도, 계속 기도하고 오래 참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면서 기다려주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언젠가 어린 성도나 곁길로 가는 성도가 성령의 감동으로 성숙하고 올바른 신앙의 길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비적 체험에 지나친 관심을 갖기보다는 열심히 기도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건전한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놀라운 은혜들을 체험하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큰 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