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너더리통신 94/180803]다시 ‘한 갑(甲)’으로 들어가며
더도 덜도 아닌, 정확히 60년만에 돌아온 생일 환갑(還甲‧回甲)의 해가 어느덧 순식간에 지나갔다. 지난 연말엔 한 해를 돌아보며 제법 허무하기까지 했다. 이어 다시 맞은 생일이 바로 오늘, 속된 말로 ‘귀 빠진 날’이다. 다시 ‘한 갑(甲)’에 들어가는(進) 진갑(進甲)을 맞아 생활글쟁이로서 어찌 한마디 소회(所懷)가 없을손가.
흔히 말하듯이 인생 1막이 끝나고 2막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할 것이다. 인생 2막을 어떻게 살 것인가. 경제활동은 이제 무엇으로 할 것이고, 생물학적으로는 앞으로 몇 년을 더 살 것인가, 스스로 묻지 않을 수 없다. 익살꾼 후배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고 묻자 그 친구 답변이 걸작이다. “JAL(잘)”이란다. 15년, 조금 적은가? 그럼 20년? 아니면 우리 아버지와 같이 구순을 넘긴다면 30년? 그나저나 아프지 않아야 할 터인데, 최소한 자식들에게 ‘민폐(民弊)’는 끼치지 않아야 할 터인데. 건강수명(健康壽命)이 64.8세라 하니, 사실 아프지 않고 늙어가기는 쉽지 않은 일일 터. 그럼 건강 관리는 어떻게? 등산(登山)도, 헬스도 하루이틀일 것이고, 버킷 리스트로 뽑은 세계유람(世界遊覽)도 ‘돈’이 받쳐주지 않으면 ‘꿈’에 그치고 말 것이고. 자, 무엇을 할 것인가? 사방을 둘러보아도 신화(神話)처럼 숨을 쉬는 ‘고래’를 잡으러 가기에는 턱없이 늦은 나이인가?
5년 전인가, 종로구청의 ‘신체나이’ 검진에 나섰다. 10개 종목을 통과하니 38세였는데, 지난해부터는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에 다름 아니었다. 좌우 오십견으로 고생고생, 목디스크에 급성 전립선염까지, 참말로 가지가지였다. 부모님 포함 우리집에서 가장 많은 의료보험료를 지급, 300만원 가까이 되다니? 십여 년 전부터 지병인 고혈압과 당뇨약은 필수 휴대품인지 오래이고. 몸무게가 한달새 10kg가 빠지니, 똥배가 싸그리 없어진 것은 좋으나 힘이 없고 금세 피곤을 탔다. ‘아, 이래서 작년 다르고 올해 다르다고 하는 거구나’ 그 좋아하는, 평생 즐기던 술을 ‘저 살겠다’고 삼가다니? 세상은 역시 오래 살아보아야겠다. 흐흐.
아무튼, 아침 8시, 고향의 아버지께 전화를 드렸다. 아버지는 자식들 생일 때마다 소액환 10만원권이 담긴 축하전보를 보내주셨다. 그런데, 올해는 소식이 없으셨다. 그것을 받지 않아서 섭섭한 게 아니고 이젠 진짜 늙으신 것같구나 생각하니 조금은 슬펐다. “아버지, 오늘 제 생일이에요” “그려, 긍개, 올해는 내가 깜빡했구나” “아니에요. 낳아 기르고 가르쳐주셔서 고맙습니다. 더구나 분가(分家)까지 시켜주시고, 이 사회에서 ‘사람 구실’하게 해주셔서요” 구실? 그렇다. 사람 구실을 하며 한 평생을 잘 살게 해주신 분이 부모님 아니고 누구시겠는가? 그래서 나는 고맙고, 부모님 은혜(恩惠)만 생각하면 늘 감읍(感泣)한다. 게다가 맹자(孟子)가 말한 ‘삼락(三樂)’중 첫 번째인 ‘부모구존형제무고(父母俱存兄弟無故)’가 아닌가? 난 감사(感謝)하고 행복(幸福)하다. 그리고 두 번째 즐거움을 보자. 앙불괴어천부작어인(仰不愧於天俯怍於人), 우러러 하늘에 부끄럼이 없고, 굽어 보아 사람에 부끄러움이 없으니, 그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이제 천하(天下)의 영재(英才)를 얻어 가르치기(敎育)만 하면 될 일이 아닌가?
아버지는 해를 거듭할수록 ‘삶과 생활의 지혜(智慧)’를 배우시는 모양이다. 아예 말로 실천(實踐)을 하신다. 자식들은 제 편할 때 띄엄띄엄 안부(安否)전화를 하건만, 그때마다 “고맙다” “사랑한다”는 말을 후렴구로 달아주신다. 그것이 어찌 쉬운 일일 것인가? 그저 이곳저곳 아프다는 말을 해본들, 자식들 마음만 안편하게 하지 무슨 소용인가?를 깨달으신 듯하다. 총생들 마음이라도 편하게 ‘사정없이’ 립서비스(lip-service)를 하시기로 작정하신지 수년 째이다. 그거,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애정(愛情) 표현은 쑥스러워 우리조차 하기 힘든데, ‘사랑한다’는 말씀을 예사로 들을 때마다 뭔가 잘못하고, 뭔가 ‘불효’한 듯한, 뭔가 크게 미안한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나도 장가를 가고, 아들이 세 살인 큰아들에게 써먹어봤다. 직접 말로는 못하고 “사랑한다”고 카톡문자를 보내자, 아들이 “저도 사랑해요”라고 문자를 보내왔다. 흐흐. 아직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最善)이다. 아버지, 저도 사랑합니다. 언제까지나 우리 고향(故鄕)의 지킴이로 항상 평강(平康)하소서. 제가 귀향(歸鄕)하는 날까지.
*문득 오래된 블로그에서 ‘생일축하금’을 검색하니, 2009년에 쓴 졸문이 떴다. 지하철신문에 칼럼으로 실렸다. 벌써 9년 전이야? 새로운 기분이 들어 부기(付記)한다.
---------------------------------------------------------------------------------------------------------------------------
2009년 8월 13일
늙은 아버지의 생일축전과 하사금
어제는 나의 귀빠진 날. 어머니는 들판에서 김을 매다 배가 아파 11시쯤 들어오셔 12시반쯤 나를 낳았다한다. 그리곤 사흘도 안돼 몸을 일으켜 다시 논일을 했다던가. 새벽 6시, 어김없이 고향에 전화를 건다. 어머니께 “어머-이-, 낳아주어서 고마워요”(가는 귀가 먹어 큰소리로) 했더니, 이 양반 마구마구 웃으며 “미역국이나 얻어 먹냐”고 하신다. 마른 새우를 넣은 미역국이 맛있어 두 그릇을 먹고 출근을 서두르다. 저녁 고교친구들과 흔쾌히 어울리고 10시쯤 들어오는데, 아내가 건네는 우체국 축전. 내용은 이렇다.
“53회 생일을 축하한다. 한자리 즐기지 못해 아쉽구나. 약소하나 가족끼리 외식이나 한끼 하면서 즐겁게 보내렴. -시골에서 애비가”라는 문구의 축하카드와 함께 보내온, 처음 보는 ‘20만원 온라인환증서’
팔순이 훌쩍 넘은 ‘대한민국 원조농부’ 우리 아버지가, 요즘 말로 정말 ‘한 감동’시키신다. 아버지는 소학교만 뒤늦게 나오셨지만, 지금도 학구열(學究熱)이 대단하시다. 길을 가다 뭐 하나 모르는 한문문자가 나와도 꼭 알려고 애를 쓰시고 '새농민'같은 농업잡지도 어찌나 꼼꼼이 읽으시던지 여러 가지로 해박하시다. 그뿐인가. '조선명필 100인'에 드는 중시조를 닮아서인지 필체와 문장력도 좀 좋으시다. 한순간 우리 아부지-어무니가 자랑스러웠다.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은 생각이 물결쳤다. ‘오십 넘어 나같이 부모님으로부터 생일축하금 받아본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말이다. 수년 전에는 결혼기념일에 축전과 함께 10만원을 보내오셨는데, 물가를 감안했는지 이번엔 축하하사금이 100% 인상되었다. 4남 3녀나 되니 일일이 챙기는 것도 신경쓰일 일, 언젠가 큼직큼직한 글자로 된 일력(옛날 밑씻개로 최고였다)에 기념일별로 동그라미를 쳐놓은 것을 보았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위해 나이가 드실수록 세련돼 가건만, 우리들은 어떠한가. 결혼한 날로부터 이날 이때껏 주식인 쌀(일반벼 아끼바리)을 비롯한 온갖 부식물을 다 앉아 받아먹건만, 용돈 한번 번번이 드린 적이 없다. 1년 통틀어 서너 번 목돈을 드린다해도 쌀값에도 못미치는 ‘불효’를 어쩌랴. ‘육친가화(六親家和) 근면검소(勤勉儉素) 초지일관(初志一貫)’ 가훈(家訓)을 친필로 써주신 게 당신의 회갑일(1987년)이었다. ‘육친’은 부모 형제 처자‘를 이른다. 육친가화를 하였던가? 아니면 지금 하고 있는가? 근면하고 검소하게 살았던가? 아니면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한번 세운 처음의 뜻’을 이루려 얼마나 노력을 하였던가? 지금이라도 하고 있는가? 냉정히 생각해보건대, 세 가지 모두 ‘아니올씨다’인 처지에서 늙은 아버지의 하사금을 가만히 앉아서 받는 나로선 낯이 간지럽다. 우체국에서 현금을 찾아 챙기는 나는 솔직히 쑥스럽고 부끄럽다.
아,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는 일, 한 가지 있긴 있었다. 2007년 부모님의 행적과 ‘패밀리 졸문’을 모아 ‘대숲 바람소리’라는 이름의, 아버지 팔순과 부모 회혼을 기념한 문집을 내드렸다. 그것 하나는 순전히 나의 노력에 의한 결과물이었다. 무릎 아래 책을 바친다는 것, 당신들 앞에서 축시를 낭송해드린다는 것, 일가친척을 흐뭇하게 한다는 것, 그것만큼 보람된 일이 어디 있으랴. 앞으로 무엇을 하여 기쁘게 해드릴 것인가. ‘구운몽’ ‘사씨남정기’를 지은 서포 김만중처럼 환갑이 넘어서도 노모 앞에서 색동옷 입고 춤을 추며 재롱을 떨까. 요새 세상엔 백수(白壽 : ‘일백 백’(百)에서 ‘한 일’(一)자가 빠졌으니 99살을 이른다)도 흔한 일, 만수무강, 백년해로 하시기만을 빌고 또 빌 뿐이다.
불초(不肖:부모를 닮지 않았다는 자책의 뜻) 넷째 삼배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