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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자기부정
1986.08.14. 오북환 장로
나를 회개시키는 은인이었다. 내게 맞지 않고 나를 거슬리고 나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까지 그 사람이 참으로 내 천사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노래를 부르기에는 얼마만한 시간이 걸릴 것인가? 그러면 인제 이것 변용이 조금 있는데 그러면 변용이란 무엇인가? 세군데 복음서에 세군데 있는데 마태복음 17장 1절서 8절에 있고요. 또 마가복음 9장 2절서 8절에 있고요. 누가복음 28절 31절에 있는데 거기 한군데 봅니다. 예수의 영광스러운 변모, 이 말씀을 하신 뒤에 여드레쯤 지나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다. 예수께서는 기도 하시는 동안에 그 모습이 변하고 옷이 눈부시게 빛났다. 그러자 난데없이 두 사람이 나타나 예수와 함께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 두 사람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그러면 모세는 율법의 대표지요. 율법 또 엘리야는 예언자 선지자 대표에요. 엘리야는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가 여기에서 끝나요. 율법이나 예언서에 예수 하나 소개해 놨거든, 예언해 놨거든, 구약에, 쭉 나왔다가 여기에서 세례요한은 율법의 마지막으로 나타난 선지자거든. 그러니까 마지막에서 중간이야. 신약 선지자도 되고 구약 선지자 끝이고 그래요. 세례요한이, 그러니까 세례요한의 지시대로 살아야 지시 따라야 예수의 제자가 되고 예수의 제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 따라갈 수 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예수의 제자가 바로 안 되어요. 세례요한의 과정을 통해야 합니다. 율법의 마지막 과정을 치러 완전한 자기 부정을 해야 되어요. 그러면 여기 30절, 그러자 난데없이 두 사람이 나타나 예수와 함께 이야기 하고 있었다. 31절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께서 멀지 않아 예루살렘에서 이루시려고 하는 일 곧 그의 죽음에 관하여 예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깊이 잠들었어요. 어째 그런 장소에서 잠이 들어버렸어요. 그때 잠 들어야 되요? 안 들어야 되요? 들어야지요. 잠들어야지요. 우리 이 깊은 잠을 안자는 것이 문제라고요. 잠들었다가 깨어난다고, 잠들었으면 깨어날 때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래 깨기 위해서 잠이 든 것입니다. 깨어나 예수의 영광스러운 모습과 거기 함께 서있는 두 사람을 보았다 그 두 사람이 떠나려 할 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다른 사람 대표로 베드로가 언제든지 수사도니까 아주 솔직하니까 베드로가 나서서 선생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예수는 좋은지 나쁜지 모르시는가? 그 예수님이 아 이것 참 좋다. 나 여기 있게 초막 한 개 지어줘라. 셋 지어서 세 사람이 살게 해라. 그래야 할 텐데 그랬어야 할 텐데 자청해요. 베드로 자신이 그러면 다 버렸다는 사람이 초막 셋을 지을 돈이 있겠습니까? 어디다 감춰 뒀던지 저금해 두었던지 선생님 셋을 지어 하나는 선생님께 하나는 모세 선생님께 하나는 엘리야 선생님께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예수께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자기도 모르고 하는 말이었다. 이 말이 무슨 말이에요?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자기가 해놓고 곧 잊어버렸어요. 초막 셋을 짓는다는 말을 잊어버렸어요. 그냥 무엇을 짓겠다고 했는가? 무엇을 한다고 했는가? 그 말이에요. 무슨 말이에요? 여기는 그런 말 없습니다만 아까 삼인 대화가 무엇이에요? 멀지 않아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일, 별세하실 일, 그걸 이야기 했는데 잠이 들어서 그 이야기를 못 들었거든. 그러니까 깨서 보니까 황홀한 그 빛나는 영광의 모습만 보고 너무 기쁨에 취해버렸단 말이에요. 저는 그전에 이렇게 생각 합니다. 사도로서 할 소리가 아니란 말이야. 다 버리고 따라다닌 사람들이 십자가 지고 죽음을 내놓고 따라다닌 사람들이 이제서 무슨 초막을 짓느냐 말이야.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을 대궐도 내버리고 온 사람들이 그것을 왜 짓느냐? 그래서 제자들로서 할 소리가 아니다. 그렇게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 책의 설명대로 본다면 우리가 그렇게 변화되어야 한다. 가르쳐줘요. 변화 그래서 예수는 우리를 늘 변화시키기 위해서 이때 한번 변화했어. 그것이 나옵니다. 그래서 인제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하는 사이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뒤덮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사라져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에 질려버렸다. 아까 초막 셋 지었으면 어떻게 했어? 셋 지었더라도 그분은 가버릴 것이고 예수님은 십자가 질것인데 그것 누가 쓸 거예요? 허망하지요? 이때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아들 내가 택한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복음대로 살아라. 율법과 예언서는 다 끝났다. 예수로서 끝났다. 이제 예수님 머리로 모시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임금으로 모시고 일하라 살아라. 그 말이지요. 실제 생활에 나타나라. 36절, 그 소리가 그친 뒤에 보니 예수 밖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제자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자기들이 본 것을 얼마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말할 필요가 없어요. 해도 안 되어요. 자기들이 부활을 체험하고 사명을 확실히 깨달아 가지고 받아 가지고 그때에 그러니까 지금 36절 상반 우리가 봅니다. 예수밖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더라. 우리 생활에 예수 밖에는 우리 목표가 없다. 우리 생활 목표는 예수만 따라 가야 돼. 예수만 목표를 삼고 따라가야 돼. 누구누구 어떤 사람을 따라가서는 안 돼.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예수 따라가면 바울사도와 같이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음 같이 너희도 나를 본받으라. 그렇게 바울사도와 같이 예수 따라가는 사람을 본받는 것이지 바울사도를 본받는 것 아니거든. 바울사도 영혼 안에 예수이지, 성인 안에 예수이지 그 성인을 통해서가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나 주의하라. 복음서에 복음서의 저자들은 가끔 그들에게는 늘 사용하던 이런 일상용어라든가 상징적 표현 등이 있어 그것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문자대로 이해하고 있음을 안다면 그들은 얼마나 놀라겠는가? 당신은 진정으로 하나님이 어떤 강도, 강도라니까 도적이라는 말이 아니고 강한 강(强) 법도 도(度) 어떤 강도의 빛으로 어떤 강한 빛으로 나타나신다고 생각하는가? 몇 볼트인가? 히로시마 광도에 떨어진 원자탄이 태양의 일천배 정도로 빛났다는데 그 원자탄 하나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탄이 태양의 천배라고 합디다. 천배정도 빛났다고 하는데 그리스도의 얼굴은 태양정도 밖에 빛나지 않겠느냐? 그 말이야. 그것은 별로 유용할 것 같지도 않다. 그리고 표백제 사용하면 눈보다 더 희게 되는데 그리스도의 의복은 눈 정도 밖에는 희지 않았다면 그것도 그리 유용한 일이 아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이라든가 예언자의 증거라는 내용을 무엇인가 문자에만 즉시 해결할 수 없는 곤란에 빠져요. 곤란에 모두가 아주 충실하게 믿고자 하는 원시의 저자들보다도 훨씬 유치하게 된다. 유치하게 그때 환상 본대로 그대로만 그 뜻을 이해 못하고 지금 우리 마음의 변화를 봐야 하는데 더욱 좋지 않은 일을 하나님의 세계와 인연을 끊고 변형에 의해 조금이나마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일체의 기회라도 일련을 끊는 것이 된다. 실제로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주님의 손길은 지금도,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 원자탄보다도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탄이 태양의 천배가 뜨겁다 하더라도 빛났다 하더라도 그것에 비길 수 없다. 예수님의 빛은 예수님의 손은 주님의 손길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 말씀은 옛날 사람들에게 위로했듯이 우리에게 있어서도 역시 육체가 되시고 말씀이 되시고 현실이 되시며 우리 현실 생활에 나타난다고 계시 하시고 현실 생활 가운데 같이 하시고 역사하신다고 우리 사이에 살아 계신다. 우리 사이에 살아계신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조금만 변형하기만 하면 급기야는 그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왜 모르느냐? 암만 뒤집어 봐도 모르느냐? 마음이 변화를 못 받았다. 그리스도는 항상 계속 탄생하시기 위해서 한번만 세상에 탄생하셨다. 한번만 탄생하시고 또 탄생 또 탄생 안했지요. 그러나 항상 우리 안에서 탄생하시기 위해서 개인 개인 믿는 자 안에서 또 태어나 그러기 위해서 한번만 탄생했어. 또 예수는 언제나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한번밖에 말씀 하시지 않으셨다. 석가모니께서는 일자불석이라고 했다. 한자도 말하지 않았다. 그럼 예수님은 한자 말했냐? 석가모니께서 말씀 못 하신 것을 예수님은 말씀 하셨다. 석가모니께서 역사가 더 먼저지요? 3천년 말씀을 못했다고 이제 했어. 한번 말씀 그분은 언제나 사람들의 불신과 완강함에 의해 고통을 받으시고자 한번 밖에 그러한 고통을 당하시지 않으셨다. 십자가 그러면 예수님의 소원이 소원이겠어요? 이 말씀이 우리들의 불신 우리들의 불신 사람들의 불신 내가 불신 믿지 않는 것 우리 지금 믿어요? 믿어요? 저는 안 믿어요. 안 믿어. 이것이 문제란 말이야. 안 믿는 것이 무엇이냐? 완강하고 한만큼 고통을 겪어요. 자기 교만한 만큼 고통을 겪어, 그것이 안 믿는 것이라고, 고통이 없어지지를 않아, 아무리 없애고 하려도 찬송을 불러도 그렇고 책을 많이 봐도 그렇고 무엇 뚜렷한 방법은 없어요. 그러면 인제 예수님은 우리들의 인간 대표로 고통을 받으신단 말이에요. 우리들에게서 고통의 원인을 자꾸 제해 주시기 위해서 고통을 받으신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내 불신 때문에 내가 고통을 당하면서 그 완강해진 것 때문에 예수님이 고통을 받으세요. 고통을 받으시고자 그 말은 우리 영혼을 건지시고자 해서 당하신다. 목적은 고통을 당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영혼을 건지려니까 고통을 배로 당해줘야지요. 하나님 앞에 당해줘야 한단 말이야. 우리 죄 값을 누가 지불해 줘야 한단 말이야? 그래 예수님이 당하셔. 그러니까 인제 예수님께 고통을 안 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되겠어? 또 믿지 않아야 되겠어요? 믿고 겸손해야 되지요. 자기가 깨져야 되지요. 자기 부정, 믿어야지요. 희망을 가져야지요. 안 믿으니까 예수님이 당하신다고 그러면 내가 안 믿은 그 상태는 자꾸 예수님을 고통을 당하게 해드린단 말이야. 그러니까 책에도 있지만 예수님이 제일 예수님께 고통을 드리는 것이 무엇이냐? 불신, 불신, 당신을 믿어 드리는 것이 제일 예수님을 위로해 드리는 거예요. 믿어 안 믿는 것은 제일 고통스럽게 해. 예수님이 탄식을 하시고 계신 데는 안 믿는 것 인생들이 믿지 않고 평화의 길에 잃어버리고 헤매고 있는 영혼들을 탄식하고 계셔요. 기뻐하실 때는 믿게 될 때 기뻐하세요. 성령으로 그것뿐이에요. 여기 사람들끼리도 내가 믿을 수 없는 존재인 것이 뻔히 알면서 누가 믿어줄 때 고맙고 안 믿어주면 조금 믿어줘. 하나님을 존경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믿어드리는 거야. 믿습니다. 다 하나님의 역사를 믿습니다. 될 것을 약속을 믿습니다.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을 덜어드리려면 믿어야지, 자꾸 고집부리고 믿지 않고 완고하고 그럴수록 예수님에게 고통을 더 드린다. 그리고 그분은 존경과 사랑으로서 당신에게 가까이 오는 사람들에게 변형하시기 위해서 변형하시기 위해서 한번밖에 변화 하셨다. 누구도 그런 역사 없어요. 한 번에 그러나 늘 당신에게 가까이 오는 사람들에게 변화, 우리 마음을 변화 시킨다는 거야. 우리 마음을 변화시켜서 다 그런 빛으로 나타나게 한다고 원자탄보다 태양보다 몇 천배 강한 원자탄보다도 더 몇 만 배, 사람이 강한 바울사도같이 그런 완고한 고집도 탁 깨져버려요. 야곱같이 그런 고집도 탁 깨져버려 환도 뼈가 부러져버려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거야. 변화시키는 능력 바울사도는 노래 불러요. 나 같은 죄인의 괴수인데 나 같은 이를 끊는 이는 하나님이다. 나 같은 고집쟁이는 죄인 중에 괴수고 고집쟁이를 끊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자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라. 하나님의 능력이 크다. 저렇게 믿는 사람을 학살하고 저런 사람이 어떻게 정 반대로 되어버렸네. 그 하나님의 역사는 크다. 그러면 영광이다. 찬송합시다.
요한복음 17장 17절서 19절 봅니다. 내가 이 세상에 16절서부터 읽겠어요.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 사람들도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이 진리를 위해서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은 곧 진리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이 보내신 것 같이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이 세상에 보냅니다.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해서 이 몸을 아버지께 바치는 것은 이 사람들도 참으로 아버지께 자기 몸을 바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거 사람에게 비는 하나님 이라는 책에서 이제 반 조금 더 봤어요. 시간은 저는 이 시간이 마지막인 것 같습니다. 전부 일곱 가지 문제 중에서 네 문제를 조금 덜 마쳤어요. 네 문제를 끝에서 조금 볼 시간 밖에 없습니다. 첫째 문제가 무엇이냐? 이교도의 기도와 크리스챤의 기도, 그 문제가 쭉 나왔는데 첫째문제 다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방사람들이 크리스챤과 다르다는 것이 무엇이냐? 맨 세속적인 것에 마음이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만 구하지 영적인 것은 우리는 모른단 말이야. 영적인 것을 구해야 할 텐데 그것을 못하고 있다. 그걸 받아 있는 것인데 또 달라고 해. 그러니까 지금 하나님의 사랑과 베풀어 주신 은혜는 너무 많은 것이 감당을 못하는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이제 구할 것이 없다. 이 책에는 구할 것이 없고 주시는 것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다. 그 말이야. 이미 주셔서 있는데 넘치게 주셨는데 왜 그걸 이해도 못하고 자꾸 달라고 하고 감사가 없냐? 그러니까 한마디로 하면 베풀어주신 것을 깨달아 감사합니다. 다른 것 하나 할 것이 없다. 무엇 주시오. 할 필요가 없어. 이미 받아 있는데 구하는 것은 이미 받아있다. 그랬어요. 그런데 우리는 몰라. 우리가 지금 공기주시오. 구하지 않아도 넘치게 주시는데 몸에 위한 것 자연 또 영적인 것도 얼마든지 주어있지만 이해를 못해. 앞서면 감사할 것뿐인데 그것이고 여러분에게 내가 물어봐요. 기도는 무엇 무엇이라고 그랬습니까? 감사는 다 기억 되네요. 간단하니까 감사는 아니에요. 다 베풀어 주시고 그런데 하나는 여기서 말씀을 읽었지만 기억은 안 나요. 하나님께 몸을 바치는 것이에요. 감사 했으면 은혜를 보답해야 하니까 바쳐야지요. 무조건 내가 해야지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어쨌다고? 독생자까지 주셨으니까 그러니까 나도 이제 예수님의 것으로 바쳐버려야 할 것 아니에요? 그러면 이제 내 몸이 아니지 않아요? 바쳐버렸으니까 그러니까 인제 당신 뜻대로 마음대로 쓰도록 해야 할 텐데 아이고 이렇게 해주시오. 그러면 또 내 몸이야. 내 몸 안 바쳤단 말이야. 나 이것 이것만 좀 해주시오. 그러면 안 바쳤어. 무엇을 위해? 나 그것 필요 없다. 그럴 것 아니요? 내 몸인데 무슨 소리하냐 말이야. 내가 마음대로 써야할 몸인데 네가 왜 바친 사람이 도로 찾아 가냐? 그럴 것 아니요? 그러니까 욕구가 없어요. 없어야 돼. 내 것이 아니니까 나는 내 것 아니니까 주님의 것이니까 죽든지 살든지 뜻대로 되어 지이다. 그래야지, 무엇이 있냐 말이야. 그래야 될 것인데 그렇지 못해요. 오늘 어떤 분들은 이제 조금 시간 더 있었으면 쓰겠다. 혹 그런 분도 있으려는지 몰라. 어떤 면으로 보면 시원해 다 되었다. 그러기도 하고 아 이제 시작해야 하려나 쉬어야 하는데 어제 말씀 했습니다만 말씀, 성경은 무엇이냐? 말씀을 받은 사람들의 일기에요. 일기 생활일기 체험담 전부 말씀이 아브라함부터 신앙의 조상들의,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서 받았다 해도 틀리고 나는 못 받는다 해도 틀리고 회의주의 염세주의 낙관주의 희망 없는 꿈 없는 낙관주의 그래. 우리는 희망을 가져야 한단 말이야. 희망, 내게도 아브라함에게 주신 신앙도 내게도 하나님이 주신다. 언제 주시던지 주신다. 숨 딱 끊어지는 그 순간에도 주실 수 있다. 약속이 있다. 내가 약속만 지키면 되는 거야. (끊김)
받았는데 싹이 나요. 나는 사람도 있습디다. 아니 동광원에 들어오기 전부터 벌써 싹이 자랐어요. 그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데 어디 선반에 씨를 얹어 놨는지 제자들도 다 받았으니까 헤어졌어도 다시 돌아오지 않아요? 아직 옥토만 안 된 거야. 그러나 길가에 돌짝밭에 가시덤불 그것은 다 빼앗겨 버렸어요. 씨가 없어요. 새가 주워 먹었고 악한 자가 빼앗아 가버렸고 그러니까 깨닫지 못하면 빼앗긴다. 그랬어요. 씨만 있으면 되어요? 있으면 어느 때든지 풍우 작용이 제대로 있으면 시기를 만나면 난다는 거야. 두 번째 문제는 사람에게 즐겨 기도하시는 하나님, 이 책 이름대로 사람에게 줄곧 기도하신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신다. 성령이 하시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 아니에요. 예수께서 하신것 하나님께서 하신 것 아닙니까? 삼위일체 아닙니까? 나는 어떻게 필요할지 모르지만 성령이 배로 기도하신다. 그걸 믿어야 하고 또 셋째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기도이다. 그러니까 제일 그 말이 많이 있는데 문제로 된 만큼 기도는 무엇이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귀를 기울여 듣는 것이다. 거기는 항상 기도 안에 예배가 있단 말이야. 혼자도 개인일로 하나님과 대화 하는 것 예배에요. 그러니까 모여서 여럿이 모여서 시간 딱 정해가지고 몇 시에 보자. 그것만 예배인줄 아는가? 오히려 그것은 진정한 예배가 못되지 않는가? 그것으로 나는 예배 드렸다. 예배 마쳤다. 예배가 마쳐야 됩니까? 계속이에요. 또 네 번째가 아직 덜했지만 자신의 삶을 복음에 비추어 본다는 것 내 생활을 복음다운 생활인가? 비춰서 복음대로 살아, 말씀을 받은 사람답게 살아, 복음답게 살아간다. 그러면 고린도후서 3장에서 7절 봅니다. 4절서부터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굳건히 믿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우리에게 우리 자신에게서 났다고 내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자격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새로운 계약, 신약이지요. 신약 새로운 계약을 이행하게 하셨을 따름입니다. 이 계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어떤 성경은 율법은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린다. 말씀은 사람을 살린다. 하나님은 사람을 살린다. 하나님은 만물을 살리신다. 7절 율법은 석판에 새겨진 문자로서 결국 죽음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에 비록 잠시 동안 이기는 하지만 그 얼굴에는 너무나 찬란한 광채가 너무나 찬란한 광채가 빛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감히 그 얼굴을 모세의 얼굴을 못 봤어요. 쳐다보지도 못하였습니다. 너무 광채가 심해서 얼굴을 못 봤어요. 이 문자의 심부름꾼도 이 율법의 심부름꾼도 그렇게 영광스럽다면 성령의 심부름꾼은 말씀의 심부름꾼은 얼마나 더 영광스럽겠습니까? 사람을 단죄하는 일에도 영광이 있었다면 율법은 사람을 단죄하는 것이거든요. 자기를 단죄해. 자기를 죄인이라는 것을 시인한단 말이야. 사람을 단죄하는 일에도 영광이 있었다면 사람을 무죄석방 하는 일에는 얼마나 더 큰 영광이 있겠습니까? 오늘 해방 기념일이라지요? 무엇이 해방입니까? 개인 개인 해방이 무엇이냐? 죄에서 해방받는일이야. 로마서 8장 2절 아니겠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했다. 죄에서 해방 받는 것이 구원이요. 참 자유요. 그것이 말씀을 받은 증거야. 죄에서 해방 받아 죄의 사슬 에서 벗어나 과연 지금의 이 영광은 엄청나게 큰 것입니다. 이 영광에 비긴다면 과거의 그 영광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았을 때의 그 영광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잠깐 있다 없어질 것도 빛났다면 영원히 계속될 것은 얼마나 더 찬란하게 빛나겠습니까? 영원하게, 12절 우리는 어떤 이런 희망이 있기 때문에 이런 희망이 있기 때문에 확신을 가지고 일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사랑도 없고 믿음도 완전하지 못하고 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는다. 꿈은 있어야 한다. 앞으로 된다. 하는 그 믿음을 가져야 한다. 지금은 못 받았지만 앞으로는 말씀은 받고 성령의 능력 받는다. 그런 희망을 가져, 희망 없는 사람은 송장이야. 송장은 시간 가는대로 끌려가는 것뿐이야. 희망을 가져야 해요. 지금까지 그 말씀 아니겠어요? 말씀을 이해 못한다고 낙심할 것이 아니야. 또 받았다고 하나님한테 받은 증거도 없는데 생활이 증거 할 텐데 받았다면 생활이 증거 할 텐데 막 사랑이 넘치고 기뻐서 연속 예배드리는 생활이 될 텐데 혼자 막 기뻐 뛸 텐데 그러지는 못했어. 못했으나 희망은 가져야 한다.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는 여자는 행복합니다. 약속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는 영혼은 행복합니다. 내가 지금 현재 약속을 어긴 것뿐이지 그렇지만 지키면 간단히 틀림없이 이루어진다. 12절 이리하여 우리 속에서는 죽음이 설치고 아 잘못 봤어요. 12절 다시 봐요. 우리는 이런 희망이 있기 때문에 확신을 가지고 일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희망 우리는 모세처럼 13절이요. 모세처럼 자기 얼굴에서 광채가 완전히 사라졌어요. 사라지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은 일은 하지 않습니다. 사도들은 그러지 않아, 그런데 십계명 받았을 때는 하나님 앞에 서서 받을 때는 그 광채가 너무 빛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못 보니까 얼굴을 못 보니까 조금 가렸어요. 그랬는데 이제 사라져버렸는데도 자기 자존심을 안보이고 광채가 있다는 거짓, 사라졌는데 그럼 우리 예배의식 뜻 없는 예배 의식은 거짓이야. 이 책대로 보면 기도도 다 거짓이란 말이야. 실제는 그렇게 안하는데 그러나 희망을 갖고 해야지, 그렇게 될 것을 믿고 우리는 모세처럼 자기의 얼굴에서 광채가 완전히 사라지고 사라진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사라져버렸는데 아직도 있다 하고 거짓말을 해. 있다 하고 보이지 아니하려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은 일은 하지 않습니다. 14절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너울에 가려져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에 지금 귀가 막혔다고 들을 말씀에 귀가 막히고 다른 것을 듣고 있기 때문에 그 말 못 듣는다. 또 눈도 왜 하나님을 못 보냐? 다른데 보고 있으니까 눈은 두 개나 있지만 두 개 가지고 여기도보고 못 보거든. 두 개있으니까 앞에도 보고 뒤에도 봐요. 두 개 다라도 뒤에 못 보지 않아요? 가려져서 우둔해지고 말았습니다. 우둔해졌다. 그들은 옛 계약의 글을 읽으면서도 구약을 읽으면서도 그 뜻을 깨닫지 못해, 깨닫지 못 했습니다. 그 너울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비로소 벗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믿어지는 순간 나는 어두움인데 빛 속에 들어간 순간 어두움은 어디로 간지 몰라. 어두움은 없어져. 그러니까 어두움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면 되겠냐? 빛이 들어가면 해결되는데 스스로 해결하려고 그래.
누가복음 9장 하반에 보면 세 종류의 사람이 예수를 따라갔다. 하나는 예수께서 자청해서 따르라 하셔. 그런데 무슨 문제 아버지 죽었습니다. 초상 치루고 가겠습니다. 뭐 재산 뭐라든지, 작별인사 하겠습니다. 모두 핑계를 댔어. 자기가 다 해결 하고 갈 바에야 갈 필요 없지 않아요?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면 의식주 문제나 다 해결할 수 있으면 예수 따라갈 필요도 없지요? 따라가면 해결 될 것을 믿고 따라가야 할 텐데 나 이러고, 이러고 해결하고 따라가야겠습니다. 나 젊었을 때 재미도 좀 보고 늙어서 믿겠습니다. 늙어서 무엇 하려고 믿어? 또 자기 계획대로 되어요? 그렇게 무조건 진리로 믿어졌으면 따라갈 것이지 무슨 이유냐 말이야. 이유를 붙인 것이 아직 진리를 모르는 것 아니냐 말이야. 누가 말씀을 들으라. 들으라. 그래서 억지로 와서 앉아있어요? 누가 들으라 하던지 말라 던지 절대 지금 그때 그랬을 런지 몰라. 나는 말하면서 모르니까 어찌 내가 그렇게 어리석게 그런 말을 했는가? 여기 이 집회 보통 주일에 예배 보러 오는 데는 참석해도 이 특별 집회에는 못 간다는 사람이 왜 그러냐? 내가 그랬다. 자격 없다. 참석할 자격 없다. 내가 그렇게 어떻게 말했을까? 그랬다면 아마 틀림없이 그렇게 들었으니까 그랬겠지. 나는 잊어버렸으니까 어째 내가 그렇게 말했을까? 아 누구든지 오면 좋아하지. 이 말씀 시간에도 누구누구 다 들었으면 좋겠다. 그러거든 욕심이 저번에 남아서 공부하다가 들어야 할 사람들은 안와. 나 핑계도 공부도 해야겠지만 실제도 그랬어요. 공부해야 할 사람은 안 오고 공부 그만 각기 복습하자, 공부를 안 하는 거야. 항상 공부지, 뭐 꼭 시간정해야 공부해요? 밤낮 계속이에요. 예배도 계속이고 기도도 계속이고 어느 때, 어느 때 어디서 어떻게 있을 때에 어떤 상태에 있을 때에 말씀이 들릴지 누가 아냐?
저의 생활 목표는 이것인데 무엇이냐? 바울사도 조금 본을 따서 사도행전 22장 14절이에요. 그 말씀은 들어야 되거든. 그때에 아나니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께서는 뜻하신 바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께서는 뜻하신 바를 깨닫게 하시고 그 죄 없으신 분을 알아보게 하시고 또 친히 하시는 말씀을 듣게 하시려고 당신을 택하셨습니다. 이렇게 아나니아가 바울사도에게 말해줬습니다. 그러면 세 가지에요. 하나님의 계획,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의 영혼을 하나님이 지금 인도 하시지요? 그걸 믿어야하지요? 어디서부터 지금까지 과거 역사를 쭉 생각해봐도 아 하나님이 인도해 주셨다.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얼마든지 각자 있지 않아요? 아 내 계획은 이렇게 하려고 했는데 탁 그 길을 막아주시고는 다른 방향으로 돌이켜 주셨다. 그래서 오늘날 이 자리까지 인도해 주셨다. 그것 믿을 수 있는 거예요.
자기 나온 것을 누가 증거를 하겠어요? 자기나 알지, 계획이 있어요. 섭리가 있어요. 지금 오늘 다음에 할 말씀은 하나님의 섭리와 기도 거기까지 나왔는데 뜻하신바 하나님이 개인 개인 한사람, 한사람 계획 뜻이 있어요. 이 사람은 이런 성질 갖은 사람은 이 사람은 내가 어느 장소에다가 단련을 시켜야겠다. 다 계획이 있다. 그러니까 이 동광원 안에 있는 사람은 이런 단체가 있어야 보존되지 밖에 있으면 안 되겠으니까 모아놔. 그러니까 감사해야 해요. 감사, 어디다 다른데다 떼어놔도 안 된단 말이야. 엄한 길로 가버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단체 안에다 모두 보라고 그렇게 딱, 그전에 이 선생님 살아계실 때 그런 말을 했다고 저는 직접 안 들었습니다만 여기 단체에 잠깐이라도 다녀간 사람은 그만큼 효력이 있다. 그런 말 하셨어요. 또 잠깐 하루든지 몇 달이던지 말씀 씨를 받았으면 그건 밖에 가서 나가서 자랄 수가 있거든. 거기서는 못자라지만 다른데 나가서 나갔다고 버려진 것 아니에요. 오히려 씨만 받았으면 된다. 사방 흩어지면 된다. 못자리가 거기서 씨만 해서 되겠어요? 거기서 결실이 되겠어요? 찢어 나눠서 심어야지, 옮겨야지, 동광원에 여기 생활은 언제가 기한이냐? 언제까지냐? 성령 받을 때, 그러면 하나님이 그리스도가 머리시니까 하나님이 쓰실 테니까 너는 저기 멀리 미국에 가서 농사를 짓던지 장사를 하던지 거기 가서 세상을 깨달아라. 그리고 거기 가서 전파하라. 사방 흩어져야 한다. 너는 뭐 서독으로 간다든지 동독으로 간다든지 소련으로 간다든지 어디로 가든지 나를 증거 하라. 말씀 받으면 성령 받으면 땅 끝까지 가서 복음 전하라. 그러면 그럴 수도 있고 너는 다른데 가서 전하려면 너는 빠지니까 이 안에서 전하라. 저는 아직까지 그런 것 같아요. 너는 이 안에서 네 자신이 전도 받아라. 바울사도는 이방에 전도, 여기 나오지요? 그러니까 뜻 하신 바를 깨닫게 하시고 죄 없으신 분을 알아보게 한다. 그것이 신앙이야. 예수를 아는 것 그것이 영생이야. 죄 없으신 이를 알아본다.
세 번째는 무엇이에요? 친히 하신 말씀을 듣게 하시려고 택했어요. 하나님이 택했어요. 우리는 지금 사람들이 하는 말 책에도 오늘 아침에 나옵니다만 예수님 살아계실 때 너무도 귀가 닳게 설교를 들었어. 들으면 들을수록 문제가 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시간에 저는 마쳐야지 또 하면 못쓰겠다. 들으면 들을수록 동광원의 병이라면 그것이에요. 너무 유명한 강사들의 말도 다 들어봤고 또 누구누구 잘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다 들어봤다. 그렇더라. 또 들으면 아 이제는 안 듣겠다. 그것 당연해요. 그래야 돼 그래가지고 희망만 있으면 되는데 희망까지 없으면 안 된단 말이야. 끝나버려 사람 말 들어 친히 하신 말씀을 들어야지, 여기 참석하지 않은 남원에 계신 두어서너 분 있어요. 계세요. 친히 예수도 믿지도 않았고 이때까지 예수도 몰랐고 직접 직통을 해요. 예수 믿어라. 그 말씀 들은 직후부터 우상도 끊고 부부생활도 끊고 싹 자녀에 대한 애착도 탁, 그 말씀 듣고 백팔십도로 생활이 변해버렸어. 그래서 오늘까지 그 말씀에 붙잡혀서 살아요. 감사뿐이야. 어떤 처지에 있든지 감사뿐이야. 두 분이 지금 그렇게 살고 있지 않아요? 그런데 왜 그걸 목격을 못하냐 말이야. 말씀을 받은 사람 들어오기 전부터 어려서부터 믿는다 하면 교회 다니기 시작해서 아닙니다. 창세전부터 주신 은총인데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왜 시간을 정해요? 어느 때냐? 온 세계에 있는 지금 인류 영혼이 다 희망이 있어요. 한사람이라도 멸망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불완전해요. 전능이 아니에요. 언제든지 다 회개시킨다. 한사람도 멸망치 않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그래서 오래참고 기다리시는 것뿐이지, 누가 멸망해 누가 당신의 것을 내버릴 수 있는 빼앗길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인가? 안 빼앗긴다. 전능하시다. 내가 지금 반대하고 내 마음이 하나님과 멀어진 것뿐이지 하나님은 제자들도 그때 고기잡이 나갔다가 그걸 깨닫지 않아요? 우리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갔구나. 왜 하나님은 나를 안 찾으시고 우리들을 안 찾으시고 완전히 버려버렸을까? 그랬지만 그때도 하나님은 나를 안 버리셨다. 이렇게까지 다시 고기잡이를 가도록 이렇게 되었어도 여기까지 하나님이 찾아오신 하나님이구나. 사람 같으면 매를 때리고 삼년동안 가르쳐 놓으니까 너희들이 이렇게 되어버렸냐? 낙심할 것 같은데 거기서 그때 다시 불러야 할 텐데 그럴 때 완전히 자기들이 희망이 완전히 끊어졌을 때 저는 말씀의 모양, 그렇게 큰 받은 체험은 없어도 예수도 몰랐고 하나님도 몰랐고 도무지 모르지요. 지금도 모르지만 처음으로 첫날밤에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인생의 최대의 목적이 무엇이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말씀을 듣기 전에는 어떻게 살았냐? 인간 이렇게 될 바에야 사람이 무슨 가치가 있냐? 사람이랄 것이 무엇이냐? 동물만도 못하지 않냐? 그러면 무슨 재미로 사냐? 영 길이 없으면 자살밖에 없어요. 그러나 그때 형편으로는 어머니 앞에서 자살 할 수가 없어요. 어머니가 같이 살아계신 한 거기서 자살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나 이제 어머니도 세상 뜨고 더 길이 안 열리면 자살하지 뭐하려고 이렇게 성공했다. 이제 됐다. 하다가 다 이렇게 하룻밤 사이에 병을 붙들고 일 년 내 병치레만 하고 죽어라, 죽어라 하고 이렇게 되는가?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까지도 아무리 잘산다고 해도 하나도 내 눈에 보기에는 나같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 세상에 대한 희망이 없어요. 죽을 길밖에 없어요. 그럴 때 그때 말씀이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인데 그런데 일 년 내 생각하고 생각한 문제에 대한 해답이란 말이야. 그러면 이 길을 알고 알아보고 그래도 길이 안 나서면 죽되 되면 죽을 필요가 없다. 한번 찾아보자. 그러고 지금 이 시간 까지 온 거예요. 그 말씀이 그 말씀의 힘이 오늘날 이 시간까지 그렇게 믿지 않아야겠다. 그런 마음이 없었거든. 믿지는 않아도 포기하는 마음은 없었어. 그 마음 희망을 가지고 온 거예요. 그 힘 그때 받았을 때는 왜 믿는 사람들이 진작 알려주지 않았을까? 아니에요. 다른 때는 못 받아요. 그때라야만 받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