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도서 9장
1. 사람의 결국(1-6)
우리는 복과 저주를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로 판단합니다. 기쁘고 좋은 일은 복이라고 하고, 슬프고 힘든 일은 저주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복과 저주는 인간의 행동에 따른 결과로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만약 이것이 맞는다면, 누가 복을 받고 저주를 받을 것인가에 대한 예상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누구든 선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복을 받아 잘 살 것이고, 악한 행동을 하면 저주와 벌을 받아, 고통스럽게 살 것으로 예상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구의 미래도 이러한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이것은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분명한 현실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나, 주변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을 보면, 인생이 우리가 말하는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을 따라, 복과 저주로 분명히 구분되어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을 전도자는 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2절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일반이라는 말은 ‘같다’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 의인과 악인,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심지어 제사를 드리는 자와 드리지 않는 자를 구분하지 않고 같다고 합니다.
지금의 기독교 입장에서 이해한다면, 주일을 지키는 자와 지키지 않는 자, 십일조를 하는 자와 하지 않는 자, 예배를 드리는 자와 드리지 않는 행위의 차별 없이, 일어나는 일이 같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행동했는가에 따라, 미래의 삶이 결정되고 달라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고, 실제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현실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쉽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왜 이렇게 일하시는가?’라며, 의문과 함께 원망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지 못한, 우리의 현실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기대와 예상대로 실현되지 않는 현실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대 교회는 ‘믿음 생활 잘하고 선한 일을 하면, 하나님이 복을 내려주신다는’는 말을 멈추지 않습니다. 성경과 다르고 현실과도 맞지 않는 말을, 마치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가르칩니다.
전 8장에 보면,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이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고 합니다. 사실 이것이 우리가 현실에서 만나고 경험하는 일들입니다.
악인의 행위가 악인이 아닌 의인에게로 돌아가는 일도 있다면, 우리는 미래를 도무지 예상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을 받기 위해 선을 행하고, 경건의 삶을 살고자 하는 모든 노력들이, 헛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절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 본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
우리는 의인들과 지혜자의 행위라면, 분명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사랑하실 것이라고 지레 짐작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행위로도 사랑을 받을지 미움을 받을지, 사람이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의인이든 지혜자든 사람의 행위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조건도 의로움도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인간의 행위는 하나님께 무가치한 것입니다.
3절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전도자는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이라고 합니다. 행위와 무관하게 모두가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갑니다. 왜 그토록 인간의 행위가 묵살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모든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고,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의 운명은 동일합니다.
행위를 선과 악으로 나누고, 행위에 따라 의인과 악인으로 규정하며, ‘저 사람은 복 받고 천국 갈 사람이다’라고, 우리끼리 인정하고 높인다 해도, 사람의 결국은 죽음의 길로 간다는, 변하지 않는 이치에 생각이 머물러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심판과 저주에서 벗어나 복을 누리게 된다’는 착각에서 도무지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생에 대해서도 제멋대로 예측하고 판단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착각을 하나님이 아시고 행하신 것이 출애굽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들도 애굽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원수로 취급되어 심판을 받고, 죽음의 길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이것이 심판을 받아야 할 이스라엘을, 살게 하시고 약속의 땅까지 끌어가신 이유입니다.
사람의 결국이 행위에 따라 차별되는 것이 아니라, 긍휼히 여김 받을 수 없는 자를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의 자비의 결과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자가 4절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4절 “모든 산 자들 중에 들어 있는 자에게는, 누구나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기 때문이니라.”
지금 살아있다고 해서 죽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보면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을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살게 하시면서, 인간의 노력과 상관없이, 모든 자가 죽음으로 돌아가는 이치를 통해, 인생의 헛됨을 보게 하시고, 희망이 오직 그리스도께만 있음을 알게 하신다면, 지금 살아있는 것이 낫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이 고통과 아픔으로 이끄신다 해도, 그 때문에 자신의 행함이 아닌, 예수님의 의로우신 행함에 소망을 두게 된다면, 죽은 사자보다 산 개가 나은 것입니다.
5-6절 ‘산 자들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며, 그들이 다시는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니라. 그들의 사랑과 미움과 시기도 없어진지 오래이니,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 중에서, 그들에게 돌아갈 몫은 영원히 없느니라.’
개와 사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세상의 영광을 다 가졌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허물과 죄로 죽었음을 모르기에, 영원한 죽음인 둘째 사망을 모르는 것입니다.
둘째 사망에 들어가는 자들은 죽은 사자처럼, 죽을 줄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개처럼 취급을 받아도, 예수님의 생명이 있는 자는, 세상의 모든 영광을 다 가진 자보다 영원히 나은 것입니다.
죽은 자는 인간에 대해 알게 되고, 인생의 헛됨을 깨달을 기회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이 여러분을 살게 하신 것을, 인생의 헛됨에서 헛되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시는, 은혜의 시간으로 여겨야 합니다.
여러분이 살고자 하는 미래를 위해, 선한 행실을 동원하여 복을 받고자 하는, 헛된 수고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대로 수고하면서, 헛된 세상에 헛되지 않은, 의로 오신 주님으로 감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을 사는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복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주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모른 채로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으로 하여금,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고백하도록 일하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지금 살게 하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누리고 사는가?’와 무관하게, 살아있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는 것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2. 헛된 날을 즐겁게(7-10)
바울은 고후 5:17절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물이라는 뜻입니다. 창세기에서 언급되는 처음 피조물인 인간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자가 성도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는 성도 되기 전의 처음 피조물의 상태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되기 전과 성도 된 후에, 자신이 어떻게 다른가를 알아야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어떻게 다른가를 모르면, 성도의 존재됨을 다른 것으로 확인하려고 할 것이고, 결국 혼란과 착각만 초래할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 기독교인들의 현실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성도 됨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세상이 인정하는 변화로 자신의 존재와 신앙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전 1:9-10절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반면에 바울은 고후 5:17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합니다.
새 것이 없다는 것과 새 것이 있다는 것은, 육신을 기준으로 구분됩니다. 세상은 아담 안에서 육신을 따라 삽니다. 그 점에서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된 성도는, 육신이 아닌 성령을 따라 삽니다. 이것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새 것입니다.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세상에서 부와 권력을 얻어, 이름이 높아지는 것이 인생의 성공이라고 하지만,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죄가 용서된 자로, 생명에 속하게 된 것을, 인생의 복과 성공으로 알게 되는 것이 새롭고 다른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내용들을 충분히 이해한다 해도, 실제적인 삶과는 단절되는 것입니다. 새 것이 아니든, 새 것이 되었든, 우리는 소유가 없고 고통이 되는 인생을 싫어합니다. 이것이 당연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해도, 육신을 향한 욕망은 강한 세력으로, 우리 안에서 우리를 흔들고, 불안과 걱정과 실망으로 끌어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증거로 여긴다면, 또 다른 불안과 두려움에 흔들리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9절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날을, 헛된 날로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주신 날이라면 헛된 날이 아니라, 의미 있는 좋은 날이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드린 것처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고, 새 것이 없는 평생의 모든 날 또한 하나님이 주셨고, 하나님이 살게 하신 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날이라고 하면서도, 부끄럽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인생은 싫어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지 못하는 것이며, 헛된 날을 사는 인생의 실상입니다.
그러면 헛된 날에 우리가 원하는, 인생 성공을 거두는 것이 과연 의미 있는 것일까요? 헛된 날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루었다고 자랑하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뜻입니다. 생명이 되지 못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자부하며, 뭇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인생을 살았다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주신 날이 다하면, 세상에서 사라집니다. 그들이 먹고 마시며 누리고 즐겼던, 모든 것이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잘 사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날에,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7-8절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아니하도록 할지니라.”
인생의 마지막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각기 살아가는 삶의 질이 다르겠지만, 마지막의 자리에서 생각해 보면, 전혀 의미 없는 것들입니다.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 역시 무의미합니다. 그것조차 마지막의 때에는, 무의미한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도자는 하나님이 우리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다고 합니다. 세상이 높이고 인정하는, 대단한 일을 기쁘게 받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겠다는 의도로 행하는 일들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받으신 자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삶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특별하고 대단한 일을 하여, 성도 됨을 보여주는 것이, 새로운 피조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서 벗어나, 거룩한 자로 여김 받아 생명에 속한 자로 살아가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눈이 열린 것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처럼 새로움에 대한 눈이 열리면, 세상이 말하는 인생 성공이 무의미한 것으로 보게 됩니다. 물론 인생 성공을 원하는 욕망이 있음은 부인할 수 없지만, 이러한 욕망으로 헤매는 죄를 예수의 피가 대신했다는 사실이, 더 큰 기쁨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 인생의 미래는, 불안이나 염려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어떤 인생을 산다 해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생이란 것으로, 잘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성도는 하나님이 주신 날에, 기쁨으로 먹고 마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현재의 것이, 인생을 즐기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약 현재의 것으로는 인생을 즐길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곧 육신에 머물러 육신으로 살고자 하는 죄입니다.
10절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세상에서의 우리 일이 의미 있는 것이면, 스올이라고 하는 죽음의 세상에까지, 우리가 한 일이 연결되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스올에서는 일도, 계획도, 지식도 없다는 것은, 세상에서의 일과 수고와 계획이,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무의미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하나님이 일하고 살게 하신 것으로,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이름을 높일 수 있고, 스스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에 의미를 둡니다. 그래서 먹고 마시는 일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놓치고,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도 못합니다. 그리스도를 알게 되면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인생을 즐겁게 합니다.
성도는 잠간 근심하지만 크게 기뻐합니다. 잠간 7~8십년 근심할 일이 있지만, 영혼의 구원이란 영원한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고난 가운데 있다고 할지라도, 범사에 자족하며 감사하면서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의 가치로 남과 비교하여 나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직 믿음의 결국인 영혼의 구원으로 인하여,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며 살게 됩니다.
3. 홀연히 임하면(11-12)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믿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개인의 인생은 물론이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항상 예상할 수 없는 일에 부딪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인간이 미리 예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 부딪히고 겪게 되는 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악한 사람이 아닌데도 고통의 삶을 살기도 하고, 누가 봐도 악한 사람인데도 편안하게 살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했을 때,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선과 악의 결과에 대한 인간의 상식을 벗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앞에서 인간이 자기 인생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섭리를, 우리에게 이익이 되도록 바꾸거나, 해가 되는 것은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에는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되고 고통이 되거나, 감당할 수 없는 사건들이 엄습해오기도 합니다. 그런 경우 대개는 욥처럼 하나님에 대해서나, 믿음에 대해서 혼란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섭리 앞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만 하고 있으면 되는 걸까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있는 방법도, 자기를 위한 인생으로 만드는 방법도 없다는 뜻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지, 그저 무기력하게 되는 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섭리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12절 “분명히 사람은 자기의 시기도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들이 재난의 그물에 걸리고, 새들이 올무에 걸림 같이, 인생들도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홀연히 임하면, 거기에 걸리느니라.”
재앙의 날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홀연히 임합니다. 어떤 인생도 재앙을 날이 임하면, 피하거나 막지를 못하고, 거기에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재앙의 날은 선인과 악인,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차별하지 않습니다.
행위의 여부를 떠나서, 누구에게나 홀연히 임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기에, 우리의 예측이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를 믿는 자는, 재앙의 날에 걸리지 않게 해주기를 바라는 기대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기대를 묵살하시고, 믿는 자라 해도 재앙의 날이 홀연히 임하게 하시고, 거기에 걸리게 하십니다. 결국 믿음에도 불구하고 재앙의 날에 걸리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열심히 믿어도 별 수 없다’는 조롱을 받기도 합니다.
11절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이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
달리기에서 선착이라는 결과를 얻기 위해, 발이 빠르다는 조건이 필요하고,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용사라는 조건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발이 빠르다는 조건을 갖추었다하여, 선착이라는 결과가 기정사실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용사들이 참여한 전쟁이라고 해서 역시 승리가 기정사실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는 세상의 이치입니다. 결과는 조건과 무관하게,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는, 조건과 무관하게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공평하지 않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들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하는, 원수의 속성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 것이 일반이라는, 전 9:2절의 말씀이 현실로 드러나는 세상일에 불편함을 느낍니다. 의인과 악인, 선인과 죄인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일반이라는 것에 대해 불공평함을 느낍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수 된 자의 속성임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에 대해 의심 없이 믿고, 바른 신앙의 길을 가고 있다고 여겼던 것이 교만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 개인의 형편에 맞추고자 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관심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증거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주되심은, 우리의 인간성으로는 도무지 깨달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개입이 없이는, 예수님을 주로 섬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로 섬기는 것은, 말 몇 마디로 인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무능함과 무가치함에 대한 깊은 인식과 함께,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시고, 아들의 피로 죄를 용서하심으로, 아들의 주되심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의 생각과 전혀 다른 섭리를 펼치심으로,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속성이 드러나게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말한다 해도, 속마음은 예수로 말미암아 원하는 것을 누리게 되기를 원합니다. 관심이 주가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속에 담겨 있는 탐심이며, 하나님의 원수 된 자의 속성임을 간과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 때문에 인생도 신앙도, 우리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길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믿음과 열심을 인정하시고, 그에 대한 결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시는 방식으로 일하신다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까요?
하나님의 아들이 왜 우리에게 오셔야 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하는지는 잊어버리고, 나의 열심과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복이라는 결과를 얻는 것에만 관심을 둘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라면 기독교는 세상의 허망한 종교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알고, 주를 높이는 성도로 만들어 가십니다. 예수님이 주로 높임 받으시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임을 생각하면, 성도 된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열심히 사용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납득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에 담긴 취지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일하심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환경은, 우리로 하여금 주의 주되심을 알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자리로 인도해 가시는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말 3:1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여기서 언약의 사자가 온다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 언약의 사자인 세례 요한이 증거 한 내용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회개하고 천국을 맞이하는 것은, 언약의 사자인 요한이 증거 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예측하여 준비한 자들은 이런 복음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세리와 죄인들과 창기들과 이방인들이 이 복음을 듣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인과율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임하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게 된 자들은, 언제 어디서 홀연히 주님이 다시 오실지라도, 기쁨으로 맞이할 것입니다.
4. 멸시 받는 이유(13-18)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는, 칭송을 들을 정도로 하나님을 신앙했던 욥을, 당황하게 한 것은, 재앙의 날이 임한 현실이었습니다. 이것은 욥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역시 욥과 동일한 현실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재앙의 날이 임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는 방식의 현실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욥처럼, 신앙에 대해 당황과 혼란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현재의 삶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원하지 않은 전혀 다른 현실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을 주권과 섭리를 말하면서도, 악인들의 행위를 따라 벌을 받는 의인이 있게 하시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이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큰 왕이 작고 인구가 많지 않은 성읍을 에워싸고, 큰 흉벽을 쌓고 치려고 합니다. 작은 성읍은 큰 왕의 공격을 벗어날 힘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읍에 가난한 지혜자가 있었는데, 그의 지혜로 작은 성이 큰 왕으로부터 건짐을 받았다고 합니다. 성을 구원했다면 대대로 영웅 대접 받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그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큰 왕으로부터 성을 구원하는 공로를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구원 받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진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유발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16절 “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나으나,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의 말들을 사람들이 듣지 아니한다 하였노라.”
지혜가 힘보다 낫다는 것은 가난한 자의 지혜가, 큰 왕으로부터 성을 건진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하지만 지혜는 존귀한 것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멸시를 받아 지혜자의 말을 사람들이 듣지 않고, 기억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지혜자가 힘없는 가난한 자라는 것이 이유일 것입니다.
힘없는 성이 지혜로 인해 건짐 받음을 경험했으면서도, 지혜보다 힘을 더 낫게 여긴 것입니다. 전 7:19절에 보면 “지혜가 지혜자를 성읍 가운데에 있는 ,열 명의 권력자들보다 더 능력이 있게 하느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면 세상은 지혜를 구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지혜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지혜가 열 명의 권력자보다, 더 능력이 있게 한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경험하는 것은, 지혜가 능력이 아니라 단 한명이라 할지라도, 권력자의 능력이 도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작은 성이 지혜자의 지혜로 구원 받았지만, 그것은 큰 왕에게 위협 받는 현실에서의 구원일 뿐입니다. 큰 왕이 물러간 다음에는, 또 다른 현실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런데 지혜자의 지혜가, 큰 왕에게서 건지는 능력은 되었다 해도, 모든 현실에서 도움이 되고 건짐이 되는,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때문에 항상 오늘의 현실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난한 지혜자의 지혜는 오늘의 삶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과거의 일로 잊혀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가 멸시 받는 이유입니다.
작은 성은 가난한 자의 지혜가 아니었다면, 오늘이라는 날을 살 수 없었습니다. 오늘이라는 현재가 어떤 현실로 주어지든, 그것이 평안이든 고통이든, 지혜자의 지혜로 인해 큰 왕으로부터 건짐 받았기에, 살게 되는 현실입니다.
큰 왕에게 삼킨바 되었다면, 없었을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았다면 가난한 지혜자는 성읍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그 지혜는 열 명의 권력자보다 더 능력이 되는 것으로 대접받았을 것입니다.
가난한 지혜자의 지혜로 구원 받은 작은 성에,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게 된 현상이, 오늘의 현실에 도움 되는 것만 따르는 인간성 때문임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멸시하고 살아가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구원 받았고, 오늘이라는 현재도 구원 안에서 살게 하시는,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잊어버리고, 현재의 삶에 도움 되는 것만 따르면서, 지혜를 멸시하는 것입니다.
17-18절 “조용히 들리는 지혜자의 말들이, 우매한 자들을 다스리는 자의 호령보다 나으니라. 지혜가 무기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죄인 한 사람이 많은 선을 무너지게 하느니라.”
교통사고가 나면 먼저 큰소리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블랙박스가 있는 사람은 조용히 있어도, 나중에 누구의 책임인지 다 드러납니다. 지혜로운 사람의 모습이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혜가 전쟁무기보다 낫지만, 죄인 하나가 많은 선한 것을 망칠 수 있습니다. 그 죄인이 힘이 강한 사람이라면, 가난한 지혜자가 만들어 놓은 선한 것도, 망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어리석지만, 힘이 강한 사람의 말이, 가난한 지혜자의 말을 이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고전 1:24-25절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신, 가난한 지혜자는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 지혜자라는 이유로,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현실의 문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가 당할 징벌을 대신 받았습니다.
우리의 허물 때문에 찔림을 받았고, 우리의 죄악 때문에 상함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음으로,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메시야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었고, 그의 예언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고초를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지나간 과거의 일로 치부합니다. 예수를 믿고 죄 용서를 받았으니, 더 이상 죄를 언급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는 기억하지 않고, 돈 문제, 자식 문제와 같은 현실에 도움을 주는, 다른 예수를 열망합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멸시하는 것임을 모른 채 말입니다.
빌 2:6-8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 세상의 지혜로는 알 수 없는 지혜가, 십자가의 도입니다. 빌 2장의 그 지혜를 누가 알겠습니까?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으로 가득하신 분이, 자기를 비워 가장 가난하게 되신, 그 놀라운 지혜를, 이 세상의 썩어질 지혜로 어떻게 알아보겠습니까?
썩어지지 아니할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우상으로 바꾸어버린 자들의 지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어내신, 하나님의 지혜를 결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만, 십자가로 다 이루신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임을 믿게 됩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은 자신이 처한 참된 현실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속에 죄를 품고 살아가면서도, 롬 5:12절의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는 말씀처럼 자기 현실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현실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은 사망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참된 현실로 주어져 있습니다. 사망이라는 현실에서 세상의 모든 권력보다 나은 능력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부활의 능력이 우리를 주장함으로써, 다시는 사망이 주장하지 못하는 생명에 속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현실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에게 현실은, 마음에 악이 가득한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피가 우리에게 의로움이 되어, 죄 없는 자로 여김 받고, 천국 백성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참된 현실에서 세상 현실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