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지낸답니다 / 한정숙
동트기 전 동네 텃새들이 나를 깨우면 일흔을 전후한 나이 든 분들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한답니다. 그분들은 보통 여름에는 5시를 넘기면서 하나둘 모여 발을 맞추지요. 할머니들이 많고, 간간이 할아버지도 한 두분 보인답니다. 간단한 아침 인사를 하고 어제의 이야기를 서로 전하는 데 가장 기분 좋게 들리는 소식은 자식들과 손주들에게 생긴 자랑거리랍니다. 늦도록 공부하던 아들이 드디어 취직했다거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자가 유치원생이 되었다고 전할 때면 듣는 이들은 반색을 하며 기뻐합니다. 타박타박 걷던 발걸음에 바퀴를 달아 날기라도 할 것처럼 마음을 가볍게 만든답니다.
아침저녁에 본 TV 드라마나 뉴스도 발걸음 속도에 적잖은 힘을 준답니다. 공공의 적이 되는 아침드라마의 미운 며느리는 잔뜩 감정이 실어 나를 누르고, 납득이 안 되는 이유로 시작되는 전쟁이나 오랫동안 애써 모아 준비한 전셋집 계약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사기 이야기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나의 숨을 가쁘게 한답니다. 속상한 마음에 얼굴색도 변하지요. 1시간 여 걷기를 마친 사람들은 아파트 공원에서 기구를 이용하여 운동을 더 하자고 교문을 나섭니다. 스스로 건강을 관리하는 어르신들을 보노라면 마음이 든든합니다.
사방이 조용해지면 매무새를 다듬으며 8시부터 들어올 아이들의 모습을 상상합니다. 직장에 나가는 엄마 대신 할머니의 손을 잡고 등교하는 다윤이와 서린이를 볼 때면 가슴이 따뜻합니다. 눈도 입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요. 친구들이과 선생님께 할머니를 엄마라고 소개하여 당황스럽게 하는 초롱이는 오늘 아침엔 어떤 얼굴로 교문을 들어설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 아이의 마음속엔 어떤 엄마가 자리 잡고 있을까요? 체육 시간에 친구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을까요? 배 아프다며 운동장 가에 앉아있기도 하고 내 얼굴을 발끝으로 차며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혼자 하던데 말입니다.
나는 듯 걷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생활하는 시간은 기쁘기도 하고 조심스럽기도 합니다. 뛰어다니며 즐거워하는 웃음소리는 보자기에 곱게 싸서 보관하다 시름이 깊은 날 열어 보고도 싶고요. 하지만 다치거나 사소한 일로 다툼이 생겨 부모님이 오시거나 낯선 외부인이 내 가까이 오면 입술은 바짝 타고 심장은 조여 온답니다. 아시겠지만 얼마 전 우리 학교 식구들 뿐 아니라 전국의 학생들과 학부모님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일도 있었답니다. 병아리처럼 예쁜 아이들이 체험학습을 갔는데 선생님 눈 밖으로 나간 별님이가 친구들 곁을 완전히 떠난 것이지요. 지금까지도 학교는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답니다. 나는 기운을 북돋아 주려고 가을볕을 온몸에 받아 무지개를 만들어보려는데 잘 안됩니다. 갑자기 소나기라도 한 번 쏟아지면 되려나? 하고 생각만 합니다.
에이, 우울해서 재미난 이야기를 하나 꺼내 볼까 합니다. 벌써 3년이 다 되어 가는 일이거든요. 평일엔 못 뵙는데 주말이면 나를 찾아오는 분들이 있어요. 다른 곳에서 일하다가 금요일에 집으로 퇴근하시는구나 짐작하지요. 그런 날은 반가운 마음에 내 얼굴이 상기되고 혹여 상처날까 봐 긴장도 한답니다. 그날도 날마다 오시던 할머니, 할아버지도 보였고 가끔씩 운동하던 분들도 있었는데 주말 아침이면 오시던 그분은 언젠가부터 맨발로 걸으셨어요. 춥지 않은 날인데 모자도 꾹 눌러쓰시고 옷도 따뜻하게 입으셨지요. 아파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표정은 온화했고요. 그 아주머니는 처음 두 바퀴는 비닐봉지를 들고서 여기저기 흩어진 쓰레기를 모두 주워 담으시더라고요. 생각해 보니 지난 주말 아침에도 그랬어요. 매 번 그랬던 것 같아요. 주 중에야 학교 야간 당직 선생님이 이른 아침에 쓰레기를 모두 주워서 깨끗한데 토요일과 일요일엔 그렇지 않거든요. 지저분해서 답답하셨을까요?
다른 분들은 무심하게 운동을 계속했어요. 달리기도 하고 걷기도 하고요. 가만히 보니 맨발로 걷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네요. 그런데 진즉부터 미끄럼틀에 앉아 구경하던 할아버지께서 일어나셨어요. 아침이면 조심조심 걷다가 많이 쉬었다 가시는 분이거든요. 연세가 많으신지 기운도 없어 보이시죠. 지팡이를 짚고 어렵사리 몸을 세우신 할아버지는 천천히 걸어와 아주머니 앞에서 멈췄어요. 아주머니께서는 잠깐 놀라시더니 “운동하시나 봅니다.” 하고 가볍게 인사를 하겠지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천사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왔어요.” 하면서 “내가 운동하러 나올때 마다 봤는데 어쩌면 그렇게 좋은 일을 하시는지, 도대체 어떤 천사인지 보려고요.” 하시지 않겠어요? 그러자 “별말씀을요. 그리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운동할 수 있는 장소가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데요. 고마운 곳이니 이런 일이라도 해야지요.” 하며 이를 보이게 웃으셨어요. 할아버지도 연신 고개를 끄덕이셨고요. 깨끗해진 내 얼굴은 고맙고 부끄러워서 간질간질했답니다. 할아버지 덕분에 나도 천사를 보았어요. 천사를 보다니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요.
여름에 수업이 끝나고 따로 남아 놀던 아이들이 우르르 집으로 돌아가면 지친 해도 서서히 자취를 감춘답니다. 그러나 밤에도 가로등 불빛이 환하게 비추는 내 주변은 이야기 소리가 그치질 않아서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답니다. 주로 일과를 마친 어른들이 삼삼오오 걸으면서 대화를 하는데 어떤 분은 휴대폰을 귀에서 떼지 못하고 큰소리로 시시콜콜 얘기하기도 합니다. 수화기 저쪽 상대방의 응대를 짐작하며 듣는 재미도 크답니다. 그렇게 하루를 정리하고 털어낼 수 있다면 제 얼굴을 밟는 것쯤이야 괜찮았습니다.
가을이 깊어지면 나의 수면시간도 길어집니다. 아무래도 기온이 내려가면 저녁에 일부러 나오는 일이 쉽진 않으니까요. 사람들이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면 나름의 성찰 시간을 갖는답니다. 나를 찾았던 이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 갔는지, 계속 찾아오게 할 묘책은 무엇인지 말입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오는 이들을 반갑게 맞는 것 외엔 따로 할 일이 없답니다. 단지 부쩍 흙을 사랑하고 교감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고맙답니다. 더욱이 나를 온통 뒤덮었던 인조 잔디를 걷어내어 답답한 마음을 개운하게 해주시는 분들의 지혜로운 결단에는 박수를 보내지요. 이리저리 움직여 비위를 맞추지 않아도 하루 종일 날 찾는 이가 끊이지 않는다는 것은 나의 매력이 대단하다는 것이겠지요? 이제 뿌듯한 마음으로 쉬어야겠어요. 내일도 기지개를 켜며 모두가 찾는 운동장의 면모를 보이겠어요. 나는 이렇게 지낸답니다.
첫댓글 아하!
운동장이었군요.
저희집 바로앞에도 학교 운동장이 있답니다. 아침을 깨우는 것은 역시 이웃집 할머니들의 목소리거든요. 받아주는 운동장의 생각을 잘 표현 해주셔서 잼있게 읽었습니다.
가끔은 미안하기도 하답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쏟아내는 이야기로 어지럽지나 않을지... 그러나 간간이 천사들도 출목하겠지요?
@풀피리 출목을 출몰로 바로잡습니다.
어려운 수수께끼였어요. 재밌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요즘 부쩍 흙과 친해집니다.
처지를 바꿔 깊게 생각 하면 많을 것을 이해할 수 있겠네요. 자세하게 묘사하다 보면 더 그럴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운동장은 심심하지는 않겠네요. 혹시 그 천사가 선생님은 아니신가요? 할아버지와의 대화가 너무 생생해서요.
어찌 제 입으로 그렇다고 말씀드릴까요? 하하 짐작이 틀림이 없습니다.
역시. 따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