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 작업실에 또 '와버리게' 되었다.
제이는 앞으로 절제하는 삶을 살겠다면서 “친구랑 쓰는 작업실에서 33살이랑 자는 일” (만 32세니까 정정해 달라고 요청함)은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했다. 누나를 부르는 순간부터 절제를 못하는 거라 했으나 “와”, “아냐”, “아 씨 진짜 집 갈 거야”, “온다고?”, “와 그러면” 제이는 아주 난리 부르스를 쳤다. 나는 결국 밤 12시에 나갈 준비를 했다.
나 역시 ‘와버리게 되었다’고 표현했지만 사실 내가 간 거다. 내 의지로 뚜벅뚜벅. 인생 첫 자취를 축하하며 1년 5개월 전에 사놓은 위스키를 들고. 샤인 머스캣까지 씻어서. 우버를 부르고. 올 거면 빨리 오라고 약간 짜증을 부리는 제이에게 지금 샤인 머스캣 씻고 있다고 하니 “앜ㅋㅋㅋㅋ 샤인 머스캣 좋아”라는 답이 왔다.
그렇다. 우리는 “없던 일로 하자”라고 비장하게 말한 지 겨우 일주일 뒤에 다시 만났다. 좀 머쓱했다. 제이의 작업실 소파에 앉아 우리는 하릴없이 유튜브 개그 콘텐츠나 봤다. 좀 야하고 웃기고 머쓱한 그런 콘텐츠들을. 그에 맞춰 우리는 의미는 없으나 재미있는 대화들을 했다. 헌팅 술집에는 몇 번 가봤냐느니, 애인이 있는데 헌팅 술집을 가도 되냐느니. 클럽에서 인스타를 따였다는 제이에게 나는 핼러윈 날 번따를 당했다고 했다. 제이는 “욜ㅋㅋㅋ 현역 **”이라며 나를 놀렸다.
그러다 제이가 내 옆에 와서 앉았고, 내 무릎에 누웠다. “정말 미안해.”라고도 했던 것 같다. 자신은 누구를 사랑하기에 지금 상태가 너무 좋지 못하고, 또 나를 너무 사랑하게 될까 겁이 난다고 했다. 나 역시 이 야밤에 여길 오게 된 이유를 말했다. 지난번에 이제는 대가 없이 무언가를 주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 했던 말이 오만하게 들렸을 수 있겠다고. 그 부분은 사과하고 싶다고. 동시에 그렇지만 나 역시 용기를 냈는데 네가 없던 일로 하자고 하니 상처받았다고 했다. 나는 맥주인 줄 착각하여 위스키 샷을 한 번에 들이켰고, 뱉지도 못하고 온 얼굴을 찡그리고 있으니 제이가 와서 키스했다. 우리는 사이좋게 얼굴을 찡그리며 웃었다.
요일에 따라 친구들과 나눠 쓰고 있는 제이의 작업실에서 더 이상 사고 치지 않기로 합의한 우리는 작은방에 나란히 누웠다. 제이는 내게 솜이불을 덮어주었는데 주기적으로 빨래를 하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주기가 어떻게 되냐고는 묻지 않았다.
“나도 모르겠어. 나도 이 관계에서 뭘 원하는지.”
겁이 난다고 하는 제이에게 나도 겁이 난다고 말했다. 이쯤에서 그만해야 하는데 괜히 마음이 커지는 건 아닐지. 또 제이와 만나는 게 재미야 있지만 일상에까지 영향을 준다면 그것 또한 괜찮을지. 출산과 육아까지 고려하는 내 나이에 해도 되는 선택인지까지 생각하면 당연히 머리가 아팠다.
거기에 더해 나 역시 예술병에 걸려 있고 그래서 내가 제일 중요하기에 누군가를 만나 책임지는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너는 꿈이 너무 많아서 자기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고 하던 이들의 원망이 떠올랐다. 공허하다고 하면서도 책임지는 관계를 맺지 않기 위해 회피해 온 시간들도.
“그렇지만 누나는 나보다 경험도 많고, 회복도 빠를 거 아니야.”
그런가. 우리는 관계에 대해 더 이야기 나누었다. 섹파나 FWB라는 말로 묶이고 싶지는 않으나 연인 관계가 되기에도 상호 두려움이 있는 이런 관계는 뭐라고 해야 할지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럼 섹파는 다른 사람이랑 자도 되는 거야?”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아니,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이랑 자도 아무렇지도 않고 질투도 안 난다면 그런 사람을 왜 만나는 거야? 존나 이해가 안 가네.”
“그니까 누나는 그런 관계를 못하는 거지.”
“아니, 그럼 너는 내가 다른 남자랑 자도 돼?”
“그러면 우리는 그만 만나는 거지”
“아니, 그니까 그게 뭐냐고”
열띤 토론 끝에 제이는 일단 썸 타는 관계라고 해보자고 했고, 일단은 알았다고 했다. 일단 재미가 있고, 재미있는 관계도 흔치 않으니까. 어떤 이름으로 묶인다고 해서 안전한 것도 아니고, 말 뿐일 수 있음을 알기에 마음먹어볼 수 있었다. 처음으로 두렵지만 두렵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