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중고등학교 권성준 교장이 ‘만해의 사상이 고성군 소재 건봉사에서 잉태되었다’는 요지의 글 두 편을 보내왔다. 그는 이 글을 통해 지역사회가 앞장 서 만해 정신을 기려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이번호부터 2회에 걸쳐 연재한다.
소똥령 마을에 둥지를 튼 지 6년이 넘었다. 진부령 그 긴 고갯길을 함께하는 산비탈에 자작나무는 하얗게 겨울을 기다리고 소나무는 제 홀로 푸르름을 자랑한다.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가까운 이웃에 건봉사가 있다. 종교와 관계없이 이웃사촌 집을 찾듯, 단골 목욕탕을 가듯이 편안한 마음으로 자주 가는 건봉사! 내 고장에 있음에 늘 자랑스럽고 이방인에게 소개하는 곳이다. 한국전쟁 이전만 해도 건봉사는 백담사와 설악동 신흥사 등 인근의 절집들을 거느린 큰 절이었다고 한다. 절집에 전해지는 만해 한용운(이하 ‘만해’)의 흔적은 일주문 밖에 선 만해의 시뿐이다. 건봉사에서 만난 만해는‘사랑하는 까닭’을 말한다. ‘당신이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이고,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이며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이라는 것이다. 어느 신문기자가 쓴 글에 ‘몇 해 전 노승에게서 들은 만해는 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가끔 저 바닷가 간성읍에 내려가 술에 취해 사람들의 멱살을 잡기도 했다’(윤승일 기자, 한겨레 <허스토리>)는 만해는 도대체 무엇을 사랑하고 누구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것일까? 건봉사를 접하며 만해를 가르친 과거 26년의 국어교사 생활을 뒤돌아본다. 만해 시가 교과서에 종종 등장한다. <님의 침묵>, <알 수 없어요>, <나룻배와 행인>, <사랑하는 까닭> 등등. 대부분의 만해 시에는 ‘님’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면 만해의 여러 시에 나오는 ‘님’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만해를 독립운동가로 본다면, ‘님’은 빼앗긴 조국인가? 그를 승려이자 불교사상가로 본다면, ‘님’은 불타(佛陀)인가? 혹은 중생(衆生)인가? 그를 한 사람의 남자로 본다면, ‘님’은 사랑하는 여인인가? 아니면 이 모든 것일 수도 있고 또 이들 중 어느 것도 아닐 수 있는가? 많은 논자들의 의견대로 나도 ‘님’의 정체와 관련하여 민족ㆍ조국ㆍ민중ㆍ불타ㆍ중생ㆍ불교의 진리 등으로 해석하였다. 다양하고 복합적인 가치로 풀이된 시어를 가르치며 의기양양하게 중요함을 강조하며 가르친 지난 날, 지금 생각하면 만해 시를 가르치는 교사로 수업할 때 무척이나 어렵다는 생각을 했는데 당시 학생들은 어떠했을까? 뒤돌아보고 그 때를 생각하면 참 시험위주의 주입식 교육에 정렬을 불태웠던 시절이 부끄럽다.
‘님의 침묵’에 등장한 ‘님’의 정체
학생들은 중ㆍ고등학교 때 교과서나 시집을 통하여 본격적으로 시를 접하게 된다. 문학을 접하는 시기에 첫발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그 때 소재나 주제가 너무 무겁거나 해석하는데 어려움을 느낀다면 지레 겁을 먹는 경우가 태반이다. 때문에 쉬운 주제로 서서히 다가가도록 흥미를 유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관건일텐데, 나는 어떻게 가르쳤는가? 뒤돌아보며 반문하고 싶다. 그래서, 오늘은 시험 걱정도 없는, 인간 본연에 모습 그대로의 만해 입장으로 그렇게 많이 등장한 ‘님’이 누구인지를 살펴보고 싶다. 만해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분과 인연을 맺었던 세 분의 여성이 등장한다. 만해는 당시 조혼 풍습에 따라 열네 살(1892년) 나이로 광천 출신의 전정숙이라는 분과 첫 결혼을 하고 보국이라는 아들 하나를 낳았다. 19살 때 속가를 떠나 승려가 되는 바람에 인연이 끊어졌다. 또 55세(1933년)에 다시 재혼을 하는데 이번에는 간호사 출신 유년숙(유원숙, 유숙원) 사이에 딸 하나(영숙)를 얻게 된다.[참고로, 스님이 장가를 두 번씩이나 갔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해는 ‘조선불교유신론’에서 재가승 제도를 강력히 주장했음을 알아야 한다.] 여기까지는 정식 혼인한 사이니까 세속인들이 하는 풍습 그대로다. 그런데, 만해가 승려 생활을 하면서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서여연화(徐如蓮花)라는 분이다. 만해는 1907년 금강산 건봉사에서 만해의 첫사랑 서여연화와의 사랑이 시작된다.(만해는 1896년 19세에 속리사로 가출하여 여러 곳을 다니다 1907년 4월 15일 건봉사에서 최초 안거 수행에 들어감) 서여연화는 독실한 불자였는데, 부유한 선주(船主)였던 남편이 요절하는 바람에 졸지에 청상이 되었다. 미모의 젊은 망부는 그 슬픔을 달래고 남편의 영가가 극락왕생의 가피(加被)를 입기를 바라는 뜻에서 기일(忌日)때마다 대규모 법회를 열었다 한다. 이때 만난 인연으로 서여연화 보살은 만해 선사를 사랑하게 된다. 스님을 사랑한 미모의 청상 서여연화,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고도 남을 일이다. 그리고 만해는 만주의 독립군을 찾아 떠났다가 뜻하지 않게 일본군의 첩자로 오해를 사서 죽을 고비를 넘기는데 그때의 총상으로 머리가 기울어 졌다. 1911년 겨울에 속초로 갔다. 오랜만에 만해는 서여연화를 만났다. 그와 그녀의 회정은 깊었다. 만해로서는 그녀가 원효의 요석이요, 의상의 선묘였던 것이다. 또한 철학자인 강신주님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만해라는 법명에 걸맞게 한용운의 마음은 치열한 자기 수양으로 원만하고 고요한 바다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의 마음을 단번에 뒤흔든 ‘연꽃 같은(如蓮花)’ 여인이 있었습니다. 한용운의 나이 47세, 그러니까 내설악의 백담사와 오세암을 오고가며 지냈던 1925년은 그의 인생에게 가장 극적인 해로 기억되어야 합니다. 이 때 그는 가장 강렬한 두 권의 책을 폭풍우처럼 완성하게 됩니다. 하나는 6월 7일에 탈고한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이고, 다른 하나는 8월 29일 탈고한 ‘님의 침묵’입니다. 십현담주해는 선불교의 종파인 조동종(曹洞宗)의 수행 매뉴얼이라고 할 수 있는 십현담(十玄談)을 주석한 책입니다. 그러니까 십현담주해를 쓰면서 한용운은 스님으로서 가장 강렬한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이루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 내막을 살펴보면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두 권의 책을 쓸 때, 한용운의 곁에는 서여연화(徐如蓮花)라는 여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한용운이 연화 아가씨와 외설악에 있는 신흥사(神興寺)에서 한 때 동거를 했던 경험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한용운이 외설악으로부터 내설악으로 옮겨온 이유도 연화 아가씨 때문이 아닐까요. 이것은 연화 아가씨가 한용운 본인을 스님이 아니라 자꾸 남성으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불안감 때문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십현담주해는 한용운의 치열한 자기 노력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극진하게 모시는 연화 아가씨로부터 발생한 마음의 동요를 가라앉히려고, 그래서 모든 존재를 사랑하는 자비심을 회복하기 위한 발버둥이었던 셈입니다. 모든 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특정 누군가를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만 한용운의 노력은 끝내 좌절됩니다. 마침내 그는 연화 아가씨로 인해 흔들리는 마음을 긍정해버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것이 바로 님의침묵입니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어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라는 시에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용운이 스님으로서의 자신의 삶을 부정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만 한다는 관념적 압박으로부터 벗어났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시적화자의 목소리는 남녀간의 애정
‘님의 침묵’을 통해서 만해는 서여연화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인정해버린다. 그렇지만 만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3.1운동을 주도했던 민족지도자이자 동시에 불교지도자였던 그는 자신을 폄하하는 사람이든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할리 없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님의 침묵’을 탈고한 뒤, 만해가 ‘군더더기의 말’, 즉 ‘군말’이란 서문을 붙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님’만이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며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만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 너에게도 님은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님의 침묵’군말
“님만이 님이 아니다”는 만해의 말을 통해서 우리는 그의 님이 서여연화라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서여연화와의 만남은 혈기가 가장 왕성한 20대 후반(1907년 29세로 추측)에 만났다. 겉으로 드러내놓고 서로 사랑할 수 없는 관계지만 그들의 사랑은 서여연화가 자신의 재산을 털어 재정적인 뒷받침까지 해준 것으로 미루어 그들이 한 사랑의 그림이 ‘님의 침묵’ 전반에 나타난 마음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의 시 전반에 드러나는 것은 남녀 간의 사랑의 서사시임에는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가 시를 읽고 느낄 때, 가슴에 와 닿는 감동이 먼저일 것이다. 특히나 문학을 처음으로 접하는 학생들의 입장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내면적인 상징이 무엇이건 간에 쉽게 접하고 쉽게 이해하는 것이 문학과의 가까워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시를 창작함에 있어 하나의 상징을 가지고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 그 시를 바라볼 때 확장시킬 수 있는 여지가 있음으로 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는 것을 안다. 만해 역시 그러한 의도는 아니었을까? 그렇다하여 그가 보여준 독립운동가로서의 올곧은 행동들을 모르는 것도 아니며, 승려로서 삶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님의 침묵’에서 드러난 시적 화자의 목소리는 남녀 간의 애정을 전제로 한 시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