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의 상실 (방법으로서 자기) >> 샹바오 지음. 우치 대담. 우지한 옮김. 글항아리.
/성숙한 사회의 사람들이 비교적 평온하게 사는 이유는 뭘까요? 이는 사람들이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희망과 노력이 재분배되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사회에서는 자신의 특기와 흥미를 발견하면 이를 통해 나아갈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생깁니다. 잘 사는 방법도 다양하죠/ P427
맨 처음 책의 일부를 인용하는 이유는 글자 수를 늘리기 위해서다. 그리고 뭘 써야 할지 막막하다는 표식이다. 책을 읽는 것은 그런 대로 즐거우나, 뭘 쓰는 일은 늘 고통스럽다. 더군다나 이런 대담집은 주제가 다양하기에 요점을 찾아내기가 무척 어렵다. 그렇다고 참 좋은 책입니다고 할 수만은 없지 않겠는가? 이 책을 두 달에 걸쳐 두 번을 읽었는데 신나게 읽었다. 요즘은 가끔 이런 생각이 고개를 쳐든다. ‘나는 왜 읽는가?’ 내 자신이 무슨 대단한 독서가도 아닌데 이런 질문이 우습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읽어야 하고 읽은 것을 기록해야 한다. 살아야 하고 살아있기에 늘 질문을 하고 의문을 가지고 묻고 답해야 한다. 묻고 답하지 않는다고 살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렇게 하고 싶다. 이런저런 문제들에 닥칠 때 이런저런 해결 방법이 있지만, 요즘의 나는 늘 시간의 풍화작용에 내맡기는 경우가 많다. 우선 멈춰서 생각을 하려고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고 내가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기다리고 견디는 수밖에는 없다. /운명을 알지만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늘 떠나지 않는 생각은 학자나 작가가 아니라 독자인 내가 정말 다행이구나 하는 생각이다. 사상가나 작가는 늘 노력을 해야하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검증도 받아야 하겠지만, 독자는 그런 압박을 받지 않고 늘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독자라고 늘 읽기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감상문을 쓰더라도 늘 가볍게 쓸 수 있다. 이 책의 지은이 샹바오는 중국 저장성 출신으로 베이징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했다. 베이징 대학 재학시절에 윈저우 민중의 삶을 민족지로 기록했고, 석,박사 논문이 중국 인문사회학계의 고전으로 인정받아, 옥스퍼드에 유학했고, 옥스퍼드 교수로 재직하다가. 지금은 독일 막스 플랑크 사회인류학 연구소의 소장직을 맡고 있다고 한다. 주요 저서로 <경계를 넘는 마을-저장촌 이야기>, <글로벌 바디 쇼핑>등이 있고 여러 나라를 넘나들며 강연과 강의와 대담을 하고 있다고도 한다. 샹바오는 인구이동, 유동, 난민, 흐름 등에 많은 관심과 연구를 하고 있다고 한다. 대담자 우치는 후난성 출신으로 미디어 전공자로 크리에이터, 지식인, 활동가들과 대담을 나누고 그들의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고 한다. 이 책의 추천사는 조문영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썼다. 추천사의 제목은 /혼돈과 살아가는 힘/이다. 조문영은 빈곤과 가난에 대한 연구에 천착하고 있다고 한다. 혼돈과 살아가는 힘이란 말이 조금은 낮설다. 사회는 질서정연하고 우리는 정해진 문법대로 긍정적으로 살아가면 되는데 살아가는 힘 같은 것을 굳이 배울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다. 우리의 삶과 세계가 혼돈한가?
이 책은 세 장소에서 이루어진 방담을 싣고 있다. 베이징 방담, 옥스퍼드 방담, 윈저우 방담으로 구성되었다. 2부에서는 그 외 강연과 발표와 짤막한 대담 등을 싣고 있고, 한국의 학자나 기자들과의 대담도 싣고 있다. 굳이 이렇게 장소를 옮겨가며 방담을 할 필요가 있을가 싶었다. ‘형이상학’는 시공간을 초월한 진리가 있을 수 있지만. 인류학자인 샹바오에게는 장소가 중요한 요소인 듯 하다. 장소는 나와 세계를 연결해 주는 네트워크의 한 축이라 할 수 있다. 나의 위치를 지정해주고, 그 위치의 변화에 따라 내 삶과 세계는 다르게 배치된다. 샹바오도 유동하고 세계도 유동한다. 대담의 주제도 실로 대담무쌍하다. 학문의 의미, 지식인의 역할, 신자유주의, 일체화된 시장 경쟁, 플랫폼 경제, 빈곤과 노동, 로컬과 글로벌, 문명과 전쟁 등을 다루고 “의미의 즉각성” , “부근의 소실” , “잔혹한 도덕주의” 등의 해석의 도구를 사용한다.
조문영은 추천사에서 이 책을 평가한다. /시대를 투시하는 그의 힘은 바로 그가 ‘자기’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대담집의 원제이기도 한 ‘방법으로서 자기’는 세계를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출발점의 하나로 자기 자신이 경험을 문제 삼자는 제안이다. 이 때의 ‘자기’는 안과 밖의 경계가 뚜렷한 개인이 아니라, 다른 존재와의 관계를 통해 매번 새로워지는 네트워크다/
미국에서 배트남 전쟁 반대 운동이 절정에 달했을 때 한나 아렌트는 어느 강연에서 청중들에자기자신의 입장에서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하고 물었다고 한다. 다른 이유도 있었겠지만 베트남 전쟁 반대가 폭발한 이유는 징병제에 큰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징병제 때문에 전쟁에 끌려가야 하는 ‘청춘’들의 반발이 기폭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미국은 징병제를 없애고 ‘용병제’를 채택하였고, 그 후부터는 전쟁 반대 목소리가 사회적 이슈에서 멀어졌다고 한다. 샹바오의 <방법으로서 자기>는 ‘자기’로부터 출발하자는 것이다. 선거때만 되면 모두들 나라를 걱정하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추상적인 질문이 아니라, 모두 각자에게 질문을 해야한다. 이런 걱정 이면에는 나의 자산 가치가 떨어질 것을 걱정하는지, 현재 나의 직업에 문제가 생겨서 그런지, 나의 아파트 값이 떨어지는 것을 걱정하는지, 나의 노동 시간이 늘어날 것이 두려운지를 구체적으로 물어야 한다. 나라를 걱정한다라는 이면에는 각자의 계층과 계급의 이해관계가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두가 자기의 경험 안에만 고립되어 있다면 세계는 그야말로 정글의 법칙(무한 경쟁)만이 지배하게 된다. 이렇게 ‘개인’만이 존재하는 세계에서는 누구든 불안을 등에 짊어지고 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자기’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다른 존재와의 관계를 통해 매번 새로워지는 네트워크라고 한다. 다른 존재가 불량하다면 그 네트워크는 손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 샹바오에게는 ‘개인’과 ‘자기’는 다른 개념이다.
‘허무주의’가 전염병처럼 사회를 휩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국 정도의 경제력이라면 분배만 잘 할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은 경제적 빈곤 없이 그럭저럭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한다. 돈이 없어서 불평등이 심화되고 양극화가 극단화 되는 것이 아니라, 재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이나 한국 정도의 국가에서는 사실 경제적 빈곤 보다 의미의 빈곤이 더 심각하다고 한다..우리는 살아야 할 의미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지는 않는가? 의미의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 국가나 민족이라는 거대한 개념에 투신하거나, 아니면 초월적 이념이나 화폐 혹은 혈연적 가족에만 집착하기도 한다. 누구도 신뢰할 수 없고, 세상의 급변을 어떻게 대처하고 해석할 능력도 상실했다고 한다. /부모와 자식 관계처럼 정의된 관계들만이 다시 매우 중요한 것으로 간주될 것입니다/ 샹바오는 이를 신민족주의나 신가정주의라고 한다. 의미가 빈곤해질수록 뭔가를 잡고 싶어하고, 집착한다고 한다. 모두들 자신의 언어와 세계를 잃고 헤매고 있다. 스스로 세계와 자기를 설명하고 해석할 힘을 잃어버리고 세상이 정해 준 라이프스타일을 쫒느라 늘 분주하다..샹바오는 이럴 때일수록 자기의 경험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주위(부근)과 자기의 작은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지금은 유동하고 세계 어느 곳이든지 여행하거나 이동할 수 있고, 유튜브 등을 통해 어느 곳의 정보나 소식도 접할 수 있다. 세상을더 많이 여행하고 알아갈수록 사람들은 더 개방적이고 '글로벌'하게 되리라 예측하지만 사실은 정반대로 더 폐쇄적이고 민족이나 국가 혹은 생물학적인 가족에 더 집착한다고 한다. 마치 믿을 것은 이것 밖에 없어 하는 식이다.
샹바오는 쯔차(자치, 혹은 완전체로 번역) 제안한다. 쯔차는 물질적, 정신적인 시공간에서 자기가 스스로 즐기면서 생겨난 ‘아늑하고 유쾌한 내면의 상태’라는 뜻이다. /혼자라도 자신의 작은 세계에서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찾고 정신적으로 만족한다면 개인의 가치를 압살하는 세계를 전도시킬 수 있다는 ‘방법으로서 자기’가 바로 이 해결책의 핵심이다/ 샹바오는 쯔차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조건을 세 가지 든다.
/자신감, 독서, 개방적인 대화/ 그리고 구체적으로 생각하기와 거리를 두고 명확히 생각하기.
/우리 인류는 현대사회가 되어서야 비로소 한 개인을 하나의 개체이자 세상의 유일한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독특함을 추구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존엄과 자유를 얻을 수 있는데요.-----오히려 개인의 의미와 존재를 되찾는 방법은 개인이 아니라 관계에 있습니다. 한 개인은 스스로 사람의 존엄성을 추구할 수 없습니다. 대신 부근(자기 주위)을 세우고 이 관계를 재고하여 관계를 구축해야 합니다/
소설가 김승옥은 <서울의 달빛 0장>에서 /사람들이 결국 바라는 건 필요 이상의 음식, 필요 이상의 교미, 섹스의 가수요/ 라고 적으며 ‘인간은 과연 행복할 자격이 있을까? 하고 질문했다 한다.
샹바오의 /방법으로서 자기/는 학문의 의미, 지식인의 역할, 신자유주의, 일체화된 시장 경쟁, 플랫폼 경제, 빈곤과 노동, 로컬과 글로벌, 문명과 전쟁 등을 다루고 “의미의 즉각성” , “부근의 소실” , “잔혹한 도덕주의” 등의 해석의 도구를 사용한다. . 읽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책상에 앉기고,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세상의 온갖 소음과 재미로부터 멀리하여 혼자가 되는 것이다. 읽으면 재미있고, 생각의 힘이 생기고, 세계를 더 잘 인식할 수 있고, 세계를 더 잘 인식하면 나에 대해서도 더 잘 알 수가 있게 되는 것 같다. 혼돈에서 세상을 살아갈 힘이 생기는 기분이 들때가 있다. 좋은 책인데 뭘 쓰기가 어렵다. 한 권의 책을 읽고 감상문을 쓰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 이후로는 감상문이나 서평이 아니라 기록자나 서기의 역할만 해야 할 것 같다.
첫댓글 혼돈에서 세상을 살아갈 힘이 생기는 기분이 들게 하는 책인가 보죠?
/다른 존재와의 관계를 통해 매번 새로워지는 네트워크/......책과 관계하고 매번 호호님이 새로워지고 있는 글을 쓰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좋은 글 소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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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의미와 존재를 되찾는 방법은 개인이 아니라 관계에 있습니다. 한 개인은 스스로 사람의 존엄성을 추구할 수 없습니다. 대신 부근(자기 주위)을 세우고 이 관계를 재고하여 관계를 구축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