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농과 반야심경)
1.
불교의 열쇠말은 무엇일까? 물론 거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반야심경이라는 짧은 경전에 나오는 이 말 아닐까?
色卽是空 空卽是色
이 말을 우리 말로 풀면 ‘색은 곧 공이며, 공은 곧 색이다’인데, 그렇다면 색은 무엇이고, 공은 무엇일까?
‘색’이란 모양을 가진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말하니, 천지만물이 곧 색이다. 우리 몸도 거기에 들어간다.
‘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이나 홀로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다. 나는 수많은 나 아닌 것이 있어 존재할 수 있고, 살아갈 수 있다. 공기, 물, 음식물, 해, 바람----등등. 이렇게 나는 나 아닌 여러 가지 것들이 모여서 만들어졌고,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일러 불교에서는 제법무아諸法無我라 한다. 그런가 하면 모든 것은 끊임없이 바뀌어 간다. 머물러 있지 않는다. 제행무상諸行無常하다. 어느 하나가 아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렇다.
공=제법무아, 제행무상
예를 들어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우리의 마음도 그와 같다고, 공하다고 반야심경은 말한다.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수상행식受想行識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네 가지 또한 공하다고 반야심경은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불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곧 우주는 물론 우리의 마음까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사실은 공하다고, 다시 말해 여러 가지 것들이 모여서, 이어져서 존재하고, 또 그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2
농사를 예로 들어보자.
기계화학농(관행농)이나 몇 가지 친환경 농법에서는 농약을 친다. 화학농약, 혹은 친환경 농약을 쓰는데, 여기서는 농약이 곧 색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농약의 공은 무엇인가?
해충이 있다고 보는 세계관
인간 중심주의
모양만을 보는 소비자
배금주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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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등이다.
그분들의 눈에는 해충이 있다. 그러므로 과학자와 공장에서는 농약을 개발하고, 농부는 그것을 구해다 친다. 그들은 그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의심하지 않는다. 그길밖에 없다고 믿고 있다. 이들의 이런 철학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인간중심주의다. 모든 생명의 바탕인 하늘, 땅, 물 등보다 내가, 인간이 먼저다.
농산물을 구입할 때 모양과 크기만을 보고 사는 소비자들도 농약의 개발과 확산에 크게 한몫을 한다. 돈이 최고인 듯이 돌아가고 있는 한국 사회 또한 그렇다. 그런 것들이 모여서 농약을 당연시하는 농업이 굴러간다.
자연농은 어떤가? 자연농에서는 무농약이라는 말 그대로 농약을 쓰지 않는다. 화학농약만이 아니다. 친환경 농약도 쓰지 않는다. 왜 그런가? 농약(색)을 보는 견해(공)가 다르기 때문이다.
해충이 있지만, 먹이사슬이 있고, 그것에 맡기는 것이 좋다 여긴다.
자연 중심이다.
자급농이다.
천지는 또 하나의 어버이다.
이런 요소들이 모여서 자연농에서는 농약을 쓰지 않는데, 풀어서 말하면 다음과 같다.
자연농의 논밭에도 물론 해충이 있다. 있지만 그것을 농약이 아니라 천적에, 먹이사슬에 맡긴다. 다른 말로 하면 생태계다. 생태계를 건강하게 만들어서 생태계가 그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 생태계를 건강하게 만드는 길에는 ‘무경운’ ‘무비료’ ‘무제초’ 등이 있다.
자연농은 인간이 아니라 자연이 중심이다. 자연을, 다시 말해 땅, 하늘, 바다(물) 등을 살리는 게 가장 좋다 여긴다. 자연이 건강하면 우리도 따라서 건강할 수 있지만, 자연이 병들면 우리도 건강히 살 수 없다고 안다.
자연농은 자급농에 걸맞다. 자급농, 곧 내가 먹을 것이기 때문에 모양이나 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천지, 곧 하늘과 땅은 인류를 포함하여 만물의 어버이다. 그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다.
3
내친김에 인간관계까지 이야기해 보자.
자연농은 나머지 농법과 많이 다르기 때문에 주변 농부들과 부딪치기 쉽다. 그때 이웃은 관세음보살이다. 살아있는 관세음보살이다. 물론 불교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을 만난 스님이 3천 년이 넘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몇 안 된다. 아쉽게도 불교계에서는 관세음보살이 주로 설화 속에만 있다. 대략 이런 이야기로.
어떤 스님이 있다. 수행을 남달리 열심히 하는 스님이다. 어느 날 그 스님의 암자에 누군가 찾아온다. 나가 보니 문둥병 여인이다. 이때 어떤 스님은 쫓아버리고, 어떤 스님은 맞아들인다. 맞아들인 스님은 여인의 부탁대로 물을 데워 여인의 고름이 흐르는 몸을 씻어준다. 정성껏 온몸을 씻어주다보니, 어느 순간 문둥병 여인의 몸이 아름다운 관세음보살로 바뀌며 하늘로 날아간다.
물론 이웃 농부는 조금도 관세음보살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 반대인 경우가 많다. 어떤 이웃은 자기 밭에 풀씨가 날아온다고 허락 없이 내 밭에 제초제를 뿌리고 간다. 어떤 이웃은 네 밭의 벌레가 내 밭으로 날아들면 어떻게 하냐며 언성을 높이거나 얼굴을 붉힌다. 그때 내가 고를 수 있는 반응은 ‘이에는 이’ 하나가 아니다. 그보다는 나를 죽이고 그를 세우는 게 좋다. 스님처럼 물을 데워 그의 마음을 씻어주는 길도 있는 것이다.
이웃이, 이웃의 태도가 곧 색이다. 이때 공은 이웃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다. 이웃은 바꿀 수 없지만 나는 바꿀 수 있다. 내가 어떻게 바뀌느냐에 따라 이웃도 또한 달라진다. 관세음보살을 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공을 바꾸면 색이 바뀐다.
이웃 농부만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관세음보살이다. 그런 시각이 아니라면 관세음보살을 만날 수 없다. 설화 속에서 관세음보살을 꺼낼 수 없는 것이다. 불교가 오히려 관세음보살의 현현을 막고 있는 게 아니냐고? 맞다. 그렇다. 안타깝게도 그게 사실이다.
개구리의 눈에는 반야심경은 죽어 있다. 오래도록 죽어 있다. 놀라운 일이다. 그것을 개구리는 살려놓고 싶다. 반야심경 해설서를 한 권 쓰고 싶은 것이다. 책 이름도 벌써 정해놓았다. ‘색즉시공’이다.
이런 이야기를 8월 자연농교실(19일)에서 개구리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