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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333
3월13일 [사순 제2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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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스라엘의 역사는 충실하신 하느님에 대한 반역과 불충실의 역사였습니다!>
축구 시합을 관전하다보면 팀의 승리를 위해 탁월한 기량의 선수들도 중요하지만, 감독의 용병술도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수 있습니다. 그래서 감독은 냉철하고 객관적이어야 하고, 사사로운 개인적 감정이 휘말리지 말아야 합니다. 전반전을 뛰고 나서 그 결과에 따라 라커룸을 향하는 감독의 머릿속에는 벌써 여러가지 생각들이 교차됩니다.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은 선수, 그래서 최대한 빨리 교체해줘야 하는 선수는 누구인지? 그 포지션에 누구를 투입하면 좋겠는지, 등등. 그리고는 구상한데로 가차없이 교체를 실시해야 합니다. 교체 대상인 선수의 성격이 아주 과격해서, 아무런 죄도 없는 물병을 발로 걷어차거나 욕을 해도 개의치 말아야 합니다. 때로 팀웍 상승을 위한 선수 길들이기 차원에서 일부로 빼버리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낡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옛 백성과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 어떻게 교체되는지를 똑똑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반전에 출전했던 과거의 옛 백성들의 처신은 해도 해도 너무했습니다. 참다 참다 인내심에 한계에 도달한 하느님께서 즉시 선수 교체를 단행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포도밭 노래’를 통해 옛 백성의 그릇된 처신과 그에 따른 하느님의 진노에 대해서 잘 예언하고 있습니다.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내어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네. 그 가운데에 탑을 세우고 포도 확도 만들었네. 그러고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랐는데 들포도를 맺었다네. 내 포도밭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더해야 했더란 말이냐? 내가 해 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란 말이냐? 이제 내가 내 포도밭에 무슨 일을 하려는지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 울타리를 걷어치워 뜯어 먹히게 하고 담을 허물어 짓밟히게 하리라.”(이사야서 5장 2~5절)
이스라엘은 하느님으로부터 좋은 포도밭을 선물로 받았으나, 흥청망청 놀고 먹고 마셨으며, 엉뚱한 곳에 신경 쓰느라 포도밭을 황폐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밭은 정직합니다. 주인이 조금도 관심도 가지지 않는데, 풍성한 소출은 절대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인의 아들까지 죽여버린 포도밭의 소작인들은 이중적인 처벌을 받게 됩니다. 자신들이 임대한 포도밭은 다른 소작인들의 손으로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들을 죽인 결과로 주인으로부터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충실하신 하느님을 향한 반역과 불충실의 역사였습니다. 그 역사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 역시 이 부분에 대해 깊은 탄식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너희는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다. 너희는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였다. 너희 조상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내 모든 종들, 곧 예언자들을 날마다 끊임없이 너희에게 보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순종하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목을 뻣뻣이 세우고 자기네 조상들보다 더 고약하게 굴었다.”(예레미야서 7장 24~26절)
하느님의 말씀도 무시했던 그들은 메시아로 보내신 당신의 아들 예수님 역시 무시했습니다. 사악한 소작인들이 한 것처럼 아들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갔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죗값을 톡톡히 받을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주어졌던 선물은 이제 새로운 시대 새로운 백성들의 손에 넘어갈 것입니다.
오늘의 비유 말씀은 심판의 말씀인 동시에 희망 가득한 약속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불의한 옛백성들에게는 심판의 말씀이나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는 새로운 백성들에게는 구원과 기쁨을 주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옛백성의 실패와 멸망은 새로운 아들이신 예수님을 처형함에서 절정에 도달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계약의 피로 인해 새로운 백성이 출범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인류 구원 계획은 이스라엘의 불충실과 실패로 인해 무산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영광스런 부활로 인해 새로운 백성이 탄생한 것이고, 그 백성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영광과 구원이 선물로 주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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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선악과를 건들지 않으려면 생명나무를 바라봐라>
헬렌 켈러의 『3일 동안만 본다면』 이라는 책을 보면 이러 말이 있습니다.
“만약 내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유일한 소망 하나 있다고 하면 그것은 죽기 직전에 꼭 3일 동안만 눈을 뜨고 보는 것이다. 만약 내가 눈을 뜨고 볼 수 있다면 나는 나의 눈을 뜨는 그 첫 순간 나를 이만큼 가르쳐주고 교육해준 나의 선생 설리번을 찾아가겠다. 다음엔 친구들을 찾아가고 그다음엔 들로 산으로 산책을 하겠다. 다음날 이른 새벽에는 먼동이 트는 웅장한 장면, 아침에는 메트로폴리탄에 있는 박물관 오후에는 미술관 그리고 저녁에는 보석 같은 밤하늘의 별들을 보면서 하루를 지내고, 마지막 날에는 일찍 큰 길가에 나가 출근하는 사람들의 표정들. 아침에는 오페라하우스. 오후엔 영화관에서 영화를 감상하고 싶다. 집에 돌아와 내가 눈을 감아야 할 마지막 순간에 나는 이 3일 동안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하여준 나의 하느님께 감사한다고 기도를 드리고 영원히 암흑의 세계로 돌아가겠다.”
우리는 눈을 지니고 볼 수 있음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우리의 일상을 단 하루만 살아보는 것이 평생소원일 수도 있습니다. 감사는 하려고만 하면 할 수 있지만, 할 마음이 없다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소경이 됩니다.
관계 내에서 ‘감사’가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관계를 더는 관계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믿음’이 사라져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감사는 믿음과 직결됩니다. 상대가 자신에게 더 많은 것을 해주고 있다는 믿음이 감사의 마음을 솟구치게 합니다.
이것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느님은 아담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주신 것을 믿는지 살펴보셨습니다. 바로 선악과나무를 당신께 바치는지 지켜보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주셨음을 믿지 못했습니다. 감사히 봉헌해야 했던 선악과나무까지 차지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와 똑같은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소작인들은 주인에게 수확철이 되면 소출의 일부를 바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그것을 바치기를 거부하고 그것을 받으러 온 하느님의 외아들까지 죽였습니다. 성경 전체의 흐름으로 따지자면 에덴동산의 선악과나 소작인들이 바쳐야 하는 소출의 일부는 ‘십일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유대인들이 십일조를 바치지 않았을까요? 겉으로는 잘 바쳤습니다. 그러나 ‘감사의 마음’이 빠져있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면 자신들의 주인의 아드님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주인에게 감사했다면 아드님도 존경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더는 아드님을 내어주지 않으십니다. 아드님을 빼앗아 소출을 내는 백성에게 보내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잃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하느님 나라이시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감사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감사한 마음으로 봉헌할 수 있을까요? 내가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면 그 대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돌아온다는 것을 알면 됩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 자체가 영원한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우리가 바치는 선악과인 빵과 포도주에 담겨 오십니다.
감사의 마음이 생기려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우리는 다 지옥행임을 믿으면 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서 성체로 들어오셔 사시는 예수님을 발견하면 됩니다. 만약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에 손을 대기 전에 그 옆에 있는 ‘생명나무’를 볼 눈이 있었다면 선악과에 손을 대지 않았을 것입니다. 생명을 주는 나무가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주셨으면 이미 우리는 하느님의 모든 것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불만을 가질 수가 없게 됩니다.
에덴동산에 생명나무도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헬렌 켈러 옆에서 나는 볼 수 있는 ‘눈’이 있음에 감사할 수 있듯이, 내 안의 생명나무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나무 때문에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됨을 믿읍시다. 구원은 내 행위나 공로가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기 때문에 얻어지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자신 안에서 성체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발견하면서 감사한 마음이 솟아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사하지 않는다면 생명나무를 가치 없게 여기는 사람이고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잃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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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1,33-43.45-46 : 저 자는 상속자다. 자, 저 자를 죽이자!
오늘 복음의 밭 임자는 포도밭을 일구고 울타리를 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소작인들이 했어야 할 일들을 직접 하였다. 소작인들은 그렇게 많은 일을 해야 했던 것이 아니다. 주어진 것을 잘 지키기만 했어도 되었다. 모든 것이 다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나왔을 때, 율법을 주셨고 도시를 세워주셨으며 성전을 마련해 주셨고 제단을 준비해 주셨다.그러고는 “멀리 떠나셨다.”(33절) 하느님께서는 끈기 있게 그들을 기다려 주셨다.
밭 임자는 “소출을 받아 오라고”(34절) 자기 종들, 즉 예언자들을 보냈다. 소출은 행실로 드러나는 복종심을 뜻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토록 세심한 보살핌을 받고 나서도 게으름을 피워 소출을 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을 찾아온 종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밭 임자에게 용서를 청해야 했지만 그들은 성을 내고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히기까지 했다. 그러나 주인은 그들의 회개를 위해 계속 종들을 보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인은 아들을 보낸다.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37절) 이 말은 글자 그대로 소작인들이 그렇게 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주님은 소작인들이 아들을 죽일 줄 알고 있었다. 소작인들은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듣든, 또는 듣지 않든”(에제 2,5)이라며 다른 곳에서 말씀하신다. 그들이 당신의 종들에게는 완고하게 굴었을지라도 아들의 존귀함에는 경의를 표했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소작인들은 어떻게 했는가? 자기들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청할 시간이 있었지만, 예전에 저지른 죄보다 더 큰 죄를 짓는다.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하고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38-39절)고 한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하고 소리치며, 주님을 도성 밖에서 십자가에 못 박기도 하였다. 그들은 율법이라는 상속재산을 차지하지 못하였고 스스로에게 죽음을 선고하고 말았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40절)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41절)고 대답한다.그 대답으로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인정하였다. 주님께서도 당신의 말씀으로 이것을 암시하셨다.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동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42-43절)
그리스도께서 ‘돌’로 불리시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분께서 놓으신 기초는 튼튼하여 그분 위에 서 있는 이는 거짓스런 속임수에 넘어가거나 박해의 폭풍에 흔들리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사악한 자들은 그분 안에서 완전하게 파멸하기 때문이다. 돌과 부딪히는 것은 산산조각 나지만 돌은 멀쩡하다. 돌 위에 떨어지면 스스로 부서지고 만다. 그들의 파멸은 돌의 힘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떨어진 그들의 잘못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에게 하는 이야기인 줄 알고 예수님을 죽이자고 마음먹었지만 군중이 두려웠다.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기 때문이다.”(46절)그 군중들에게 변을 당할까 두려워 한 것이지만 그 군중들도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하고 외칠 사람들이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참으로 주님의 일을 올바로 따르고 있는 소작인의 삶을 살고 있는가? 반성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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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무부처장)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신약 성경의 독특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초점은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부터 포도밭은 하느님의 백성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이 비유에서 밭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주인이 애써 일군 포도밭은 하느님 백성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백성을 모으시고 그들을 잘 이끌도록 종교 지도자들을 세우십니다. 여기서 종교 지도자들은 소작인으로 비유됩니다.
포도 철이 되자 주인은 소출을 받아오도록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냅니다. 소출은 하느님 백성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며 맺는 열매일 것입니다. 종들은 하느님께서 백성과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지속적으로 파견한 예언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종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실제로 많은 예언자들이 그들에게 거부당하였고 심지어 목숨을 잃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포도밭 주인은 자비로운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는 아들을 소작인들에게 보냅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 아들마저 죽이고 포도밭을 차지하고자 합니다. 주인이 보낸 아들은 우리를 위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백성의 지도자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백성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입니다. 비록 지도자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하느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셨고 결국 당신의 아드님마저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자비는 지금까지도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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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송동림 레오 신부님]
<의사 선생님의 보속>
언젠가 갑자기 몸이 아파 신학교에서 가까운 병원에 간 적이 있다. 진료비를 받지 않아 의아해서 의사 선생님을 다시 뵙고 인사를 드리는데 사연이 있었다.
가톨릭 신자인 그분은 신앙생활을 성실하게 하지 못하는 점, 평소 부모님께서 신자들을 비롯해 성직자와 수도자들에게 잘해 드리라는 말씀 등을 염두에 두고 ‘보속’ 하는 심정으로 진료비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분이 진심으로 실행하는 듯한 보속의 행동은 인상 깊게 각인되었다.
오늘 복음에서 소작인들이 포도밭 주인에게 드려야 할 소출을 드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주인이 보낸 종들과 아들에게마저 폭력을 가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소작인들은 주인에게 당연히 드려야 할 몫을 드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은혜를 망각한 행동을 한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신앙을 통해 많은 은혜를 누리면서 산다.
하느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당연히 갚아야 한다는 논리는 아니지만, 받은 은혜에 감사하면서 하루하루 삶의 여정 안에서 하느님께 돌려드리려는 자세는 은혜를 입은 사람으로서 당연한 도리일 것이다.
주님한테서 자신의 몫을 받아가는 데만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몫에 대해 어떤 행위를 통해서든 기워 갚으려는 자세는 하느님뿐 아니라 보는 이를 흐뭇하게 한다.
주어진 몫에 충실하고 받은 은혜를 돌려드리려는 삶의 자세는 모두를 살게 하는 인간의 아름다운 행위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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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김훈일 세례자요한 신부님]
<참된 상속자>
신앙인 중에도 착각 속에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당에만 꼬박 나오면 세상에서는 좀 사기치고, 미워하고, 상처주고, 욕심내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지만 참된 참회가 없는 삶은 신앙인의 삶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착각하는 것 중 근본적인 것은 “나는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을 보면서도 나의 것이 아니라는 착각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 외에도 돈이 나를 영원한 삶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착각과, 권력이 영원하리라는 착각 속에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오늘 포도원의 소작인들이 그렇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우리 삶이 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공기도, 물과 태양도, 건강도 집도, 재물도 가족도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며, 또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조를 잘 내는 백성이 되어야겠습니다. 그 도조는 사랑의 빚입니다. 우리는 봉사를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희생을 통해서 하느님께 도조를 드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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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제대로 된 자식이라면!>
아버지의 재산은 어떻게 차지할 수 있고 하느님의 나라는 어떻게 차지할 수 있을까? 간단하게 단순화하여 얘기하면 아버지의 재산은 아들만 차지할 수 있고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자녀만 차지할 수 있다.
그러니 약탈해 가지려고 해서는 안 되고 아들을 죽이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해 소유하려해서도 안 된다. 하느님 나라는 약탈해 가질 수 있는 나라가 아니고 아들을 죽인다고 차지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약탈당할 정도로 약한 분이 아니시고 아들을 죽이면 더욱 분노하신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을까? 마태오 복음 5장, 행복 선언에서 주님께서는 이미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를 소유하려면 마음이 가난해야 한다. 그런데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이 무엇인가? 욕심이 없다는 뜻도 될 것이다. 욕심 부려 내 것으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져 소유하는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께서 주셔야만 우리가 차지할 수 있고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이 되어야만 주시니 말이다.
하느님 사랑을 믿어 하느님께서 주시도록 해드려야지 약탈해야만 주시는 하느님으로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진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그래서 조급하지 않고 주실 때를 느긋이 기다릴 것이다.
요즘 부모 자식 간의 관계가 재산과 상속 때문에 깨지는 경우를 종종 본다. 돌아가시면 어련히 주고 가실 텐데 어떻게 해서든지 부모 재산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함으로써 마치 안 주시는 분처럼 만들고 그래서 부모를 매우 서운하게 만든다.
부모를 가장 서운하게 하고 부모로 하여금 인생을 허무하게 마치게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평생을 주셨고 모든 것을 주셨고 일생을 자식을 위해 사셨는데도 아니 주시는 분처럼 만드는 것이다. 제대로 된 자식이라면 그럴 수 없다. 하느님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우리도 그리 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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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장례미사엘 다녀왔습니다. 신부님께서 고인의 신앙과 봉사를 이야기하였습니다.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서 많은 분들이 함께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고인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함께 추모하고 싶었습니다. 장례미사에 오신 분 중에 한국에서 알던 분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한 분은 같이 신학교에 다녔던 선배 신부님입니다. 신부님은 32년 전에 미국으로 오셨고, 미국에서 사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반가운 만남이었습니다. 다른 한 분은 서울에서 함께 꾸르실료 봉사하던 자매님입니다. 고인의 친척이었고, 장례미사에 참석하기 위해서 서울에서 왔다고 합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연으로 만나면서 예전에 읽었던 글이 새삼 떠올랐습니다. “선한 일은 아주 작은 일일지라도 행하고, 악한 일은 아주 작은 일일지라도 하지 마십시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삶과 닮은 점이 있습니다. 어떤 점이 닮았을까요?
첫째,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형들이 질투할 만큼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타볼 산에서 거룩하게 변모하셨을 때도 하느님께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과 가르침을 시기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둘째,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버림받았습니다. 은전 스무 닢에 형들은 동생을 팔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배반당하셨습니다. 유다는 은전 서른 닢에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하였습니다. 닭이 울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보셨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예수님을 배반하였고, 두려움에 숨었습니다.
셋째, 유혹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타국에서의 외로움도 있었지만 유혹을 물리쳤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요셉의 굳건한 신앙을 보셨고, 요셉에게 큰 영광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40일간 단식하셨을 때,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사탄은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고 하였습니다. 높은 데서 뛰어내려 보라고 하였습니다. 사탄에게 무릎을 꿇으면 재물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넷째, 용서하였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버렸던 형제들을 용서하였습니다. 오랜 기근에 굶주렸던 가족들을 이집트로 내려왔습니다. 요셉의 용서로 작은 부족이었던 요셉의 가족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용서하셨고, 평화를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용기를 얻었고,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12명이었던 제자들은 공동체를 세웠고, 공동체는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동생을 팔아넘긴 비정한 형제들이 있습니다. 주인이 보낸 종을 죽이고, 주인의 아들까지 죽였던 못된 포도원 소작인들이 있습니다. 이들도 닮은 점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사랑해야 할 사람을 내쫓았고 죽였습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는 누구를 닮아야 할까요? 한없이 넓은 마음으로 형제들을 용서했던 요셉을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배반했던 제자들을 용서하시고, 평화를 주셨던 예수님을 닮아야 하겠습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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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죽임 당하는 종과 죽이는 소작인>
마태오 21,33-43.45-46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이 비유들을 듣고서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아차리고,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죽임 당하는 종과 죽이는 소작인>
한 사람의 포도밭 주인으로부터
맛난 포도를 가꾸어 바치라는
단 하나의 사명을 받은
소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여름 뙤약볕 아랑곳하지 않고
피땀 아낌없이 쏟으며
탐스런 열매 가득 일구어낸
성실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인의 사랑과 믿음에 감사드리며
주인의 것을 주인에게 돌리려는
충실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인의 사랑과 믿음을 거슬러
주인의 것을 제 것으로 삼으려는
불충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인의 것을 빼앗는 것도 모자라
주인의 것을 주인에게 돌려드리자는
충실한 사람들마저 가차 없이 죽이는
무자비하고 불의한 소작인들이 있습니다.
주인의 것을 빼앗자는 유혹을 뿌리치고
주인의 것을 주인에게 돌려드리고자
온 몸과 마음으로 정의롭게 맞서다
처참하게 죽임 당하는 선한 종들이 있습니다.
죽임 당하는 종과 죽이는 소작인
단 한 명의 주인으로부터
좋은 포도밭에서 좋은 포도를 일구라는
단 하나의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단 한 명의 주인으로부터
단 하나의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
주인의 것을 빼앗기 위해 죽이고
주인의 것을 지키기 위해 죽임을 당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지금 죽이는 이들은
내일 비참하게 죽지만
지금 죽임을 당하는
이들은 내일 찬란하게 부활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하느님나라를 꽃피우라고
주님이요 벗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에 파견된
예수 그리스도의 벗이요 종입니다.
모든 이를 보듬으라고
주님께서 맡겨주신 연민어린 마음으로
고통에 신음하는 이들을 보듬는
따스한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애써 등을 돌리고
주님을 자신의 안락의 도구로 삼는
차가운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모든 이에게 고루 나누라고
주님께서 맡겨주신 귀한 재물로
가난한 이를 돌보는
청빈한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끝 모를 소유욕에 휘말려
주님을 돈벌이의 수호신 삼는
탐욕스런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모든 이를 섬기라고
주님께서 맡겨주신 귀한 능력으로
약한 이를 일으켜주는
겸손한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더 높은 곳에 오르려
주님을 권력의 화신으로 전락시키는
권위적인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죽음 같은 경쟁이 지배하는 세상은
따스한 그리스도인이기보다
차가운 그리스도인이 되라 부추깁니다.
벗들을 살리기 위해 죽으신 주님께서는
차가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따스한 그리스도인만이
당신의 참 제자요 벗이라 하십니다.
재물이 최고의 덕목이 된 세상은
청빈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탐욕스런 그리스도인이 참 사람이라 합니다.
살과 피를 양식으로 내어주신 주님께서는
탐욕스런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청빈한 그리스도인만이
당신의 참 제자요 벗이라 하십니다.
권력이라면 못할 게 없는 세상은
겸손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권위적인 그리스도인이 지혜롭다 합니다.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사람이 되신 주님께서는
권위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겸손한 그리스도인이
당신의 참 제자요 벗이라 하십니다.
지금여기 이 세상을 살면서도
이 세상 넘어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누구의 사랑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지금여기 이 세상입니까.
주님이요 벗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선택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선택의 결과는 하느님께서 주십니다.
선택의 책임은 그리스도인의 몫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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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함께 기도해야…>
2001년 9월 11일 미국 무역 센터가 테러 붕괴가 되었습니다. 그 붕괴에서 생존한 마지막 사람이 27시간 만에 구조되었습니다. ‘지넬 거즈만’이라는 흑인 여성입니다. 건물이 무너지자마자 꼼짝없이 몸이 깔린 그녀는 엄청난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그 순간 ‘지넬’은 교회에서 기도한 어머니의 모습이 생각났답니다. 그동안 하느님을 멀리하고 살아왔던 그녀이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하느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원망하며 살았습니다. 그랬던 내가 하느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날이 어두워지자 ‘지넬’은 다시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가까이 계셔 주세요. 내 곁에 머물러 주세요.”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떴을 때 희미한 불빛이 들어왔습니다.
‘지넬’은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어쩌면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 할지 모릅니다. 기적 없이는 안 되겠지요. 하지만 비로소 당신을 만났음을 고백합니다. 그것이 나에게 더 중요한 기적입니다. 하느님 뜻대로 하소서.”
기도가 끝나자 갑자기 구조대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지넬’이 외쳤습니다.
“도와주세요. 다리가 끼어 움직일 수 없어요.”
‘지넬’은 간신히 뻗은 손을 누군가 잡는 것을 느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곧 구조될 것입니다. 제 이름은 '폴' 입니다.”
‘지넬’은 정신을 잃지 않고 구조되는 순간까지 폴은 지넬 에게 말은 건네며 용기를 주었습니다. 얼마 후 무사히 구조된 ‘지넬’은 구조 대원들 사이에서 '폴'이라는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구조대에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었습니다. 훗날 ‘지넬’은 이렇게 말합니다.
“절박한 순간에 하느님을 믿으며 기도드렸고, 또한 의심하지 않고 생명과 구조를 그분께 맡겼더니 ‘폴’이라는 천사를 보내어 자신의 손을 잡고 도와주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 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게만 보이네.”
세상 그 어떤 사람이 주님께서 하신 일을 온전히 깨닫고 오롯이 찬미 영광을 드릴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마치 스스로 “내 버린 돌”처럼 여기며 주님, 당신을 떠나 있었던 사람에게로 가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모퉁이의 머릿돌”로 쓰시니 그저 저희 입에서는 이 말만 터져 나옵니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게만 보이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한순간도 고운님들을 놓지 않으시고 지켜 보호하시며, 꼭 필요한 순간 놀라운 일을 이루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고운님들은 자신에게 놀라운 일을 이루어주셨을 믿고 그저 주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요즘 코로나 19 때문에 많이 힘드시죠? 그래서 매일 성전에서 사제와 그리고 신자분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참례하는 일이 얼마나 고맙고 행복한 은총이었는지를 이제야 뼈저리게 느끼고 살고 계시죠.
그러면서 한 가지 묵상해 봅니다. 지금 고운님들은 하느님의 포도밭을 일구어 농사를 짓는 소작인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열심히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소출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것은 고운님들이 예수님을 믿고, 그분께서 하신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수많은 하느님의 예언자들이 와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도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을 믿으라고, 당신께서 말씀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며 살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열심히, 충성스럽게 일하는 소작인들의 모습입니다. 요즘 이 소작인들의 모습이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는 저와 고운님들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저희의 눈살을 찌 뿌리게 하고 더 좌절하고 분노하게 만드는 몇몇 뉴스나 신문 기사들을 보십시오. 국민에게 혐오를 주고, 그리고 코로나 19 극복을 위해 매일 노심조차 애쓰고 고생하는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분과 국민 사이에 갈등을 부추기는 일부 못된 정치인들이나 방송하는 자들의 말들은 또하나에 코로나 19 바이러스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이럴 때일수록 소작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과 배려의 말과 행동입니다. 우리 소작인들은 마스크 필요 없으면 필요로 하는 분들에게 양보로 배려하십시오. 그리고 조금씩 희망으로 나눔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고운님들 여러분이 코로나 19 극복을 위해 기도로써 함께 하는 희망과 배려의 소작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게만 보이네.”
저는 오늘도 희망과 배려하는 마음으로 몸과 마음이 아픈 님들과 간호하는 님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에게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있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 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이제라도 온전히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예수님, 그분이 고운님들의 주님이십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어려움뿐만 아니라 좌절과 분노를 겪고 있는 모든 분을 위해 묵주기도나 성모 칠고 묵주 기도하시고, 특별히 오늘은 “수호천사에게 바치는 기도” 하면서 어려움과 수고하신 모든 분에게 기쁨과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수호천사에게 바치는 기도”
언제나 저를 지켜주시는 수호천사님! 인자하신 주님께서 저를 당신께 맡기셨으니 오늘 저를 비추시고 인도하시며 다스리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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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435)
♧♧ 시편 77편 15절…
"당신은 기적을 일으키시는 하느님, 백성들 사이에 당신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 당신은 기적을 일으키시는 하느님...
여기서 ‘하느님’이라는 원뜻을 살펴보면, 히브리어로 ‘하엘’로 정관사 ‘하’는 곧 ‘그 하느님’이란 의미입니다. 그리고 ‘엘’은 하느님의 권능을 강조할 때 주로 쓰이는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진정한 기적을 베푸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밖에는 없다는 것을 강조해 줍니다.(시편 72편 18절. 참조) 사실 하느님만이 정녕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따라하거나 실행할 수 없는 초자연적 계시를 마음껏 보여주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심을 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 역사만을 보더라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탈출기 7-14장. 참조) 아삽은 그 같은 하느님이 당신이 선택한 백성들을 지켜 보호하시는 착한 목자와 같은 분이심(시편 23편 1-4절. 참조)을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21절. 참조)
* 백성들 사이에 당신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하느님의 권능이 비단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이방 민족들에게도 계시되었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신 구원 역사는 가나안 민족들에게 까지 전해져 저들로 하여금 두려워 떨게 하였습니다.(여호수아기 2장 9-11절. 참조)
♧♧ 시편 77편 16절…
"당신 팔로 당신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야곱과 요셉의 자손들을" 셀라
* 당신 팔로 당신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당신 팔’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오른 팔’과 같은 말로 ‘하느님의 권능’을 뜻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큰 기적의 섭리로써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내셨음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표현입니다. ‘구원하셨습니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가알’이라는 말은 ‘값 주고 다시 사다.’라는 뜻으로 ‘본래 노예였던 사람을 그 주인에게 값을 주고 사서 그에게 자유를 주었음’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내심을 ‘구원’으로 표현한 것과 관련하여 저희는 이집트 탈출기를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죽음을 통한 구원이 죄인이 죄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예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야곱과 요셉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큰 민족을 이룬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는 저들 열 두 지파의 족장이 모두 ‘야곱’이란 한 조상에서 비롯되었음(창세기 49장 1-28절. 참조)과 요셉이 살아있는 동안 요셉의 보호아래 있었음(창세기 50장 22-23절. 참조)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 셀라...
이것은 시편에 자주 나오는 음악 용어로서 노래를 부를 때 소리를 높이라는 지시어인 것으로 이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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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람의 뇌는 순간순간의 정보를 모두 처리할 수가 없어서 시간의 축에 따라 띄엄띄엄 정보를 끊어 처리합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스크린 위에서 무언가가 연속적으로 움직인다고 인식하지요. 사실 1초에 24장의 정지화면을 보여 줄 뿐인데도 말입니다.
카페에서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에도 그렇습니다. 아주 시끌벅적한 공간인데도 내가 들으려고 하는 상대방에게 집중하다 보니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완벽하지 않은 우리입니다. 그런데도 완벽하다고 착각에 자주 빠지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나만의 옳음을 주장하며 상대방의 틀렸음을 꾸짖습니다. 나의 선함과 달리 다른 사람은 악하다면서 비판합니다.
예전에 신학생 때 후배들을 많이 혼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후배의 모습이 잘못되었다면서 기합도 주고 언어폭력도 심하게 했었습니다. 그때를 떠올리면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릅니다. 후배들이 그때의 이야기를 하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옳고 선함만을 주장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모습을 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분명히 후회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말씀입니다. 이 복음 말씀을 잘 보면 밭 임자가 소작인들에게 맡긴 일이 그렇게 많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밭 임자가 직접 포도밭을 일구어서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소작인에게 맡긴 일이라고는 그곳에 있는 것들을 보살피고 그들에게 주어진 것을 지키라는 것뿐이었습니다. 분명히 밭 임자는 자비로운 사람이었고, 소작인에게 큰 은혜를 베푼 사람입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그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오히려 종들을 죽이고 아들까지 죽이면서 잠시 맡긴 것뿐인 재산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바로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한 말씀이었지요. 이점을 이들 역시 알고 있었지만, 군중이 두려워서 자제합니다.
주님의 경고에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오로지 권력에 대한 사랑과 영광에 대한 갈망 그리고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마음이 그들의 눈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틀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요? 전혀 몰랐을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생각에만 집중하다 보니,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겠지요. 그래서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이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심판하고 단죄했던 것입니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주님께서 보여 주신 겸손을 본받아, 낮은 자리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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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인문학>
이런 글을 하나 읽었습니다.
10대는 두려움을 없애주기 위한 여행.
20대는 학습과 체험을 하기 위한 여행.
30대는 꿈과 희망을 갖기 위한 여행.
40대는 향후의 삶을 설계하기 위해 필요한 경험을 쌓는 여행.
50대는 살면서 미처 모르고 지나쳤던 것을 보기 위한 여행.
60대는 열심히 살아온 지난 시간에 대한 보상을 받는 여행.
70대는 삶의 짐을 내려놓는 여행.
인생 자체가 하나의 여행임을 깨닫게 해주는 글입니다. 그런데 여행이 무조건 좋고 기쁜 것은 아니겠지요. 학창 시절에 돈 없이 무작정 떠났던 여행을 떠올려 봅니다. 하루에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했던 여행이었습니다. 차비를 아끼려고 무조건 걷기만 했던 시간이었습니다.
당시에 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 큰 수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때의 여행에 대한 기억이 여운처럼 남아 있었습니다. 분명히 어렵고 힘들었지만 ‘나’를 성장할 수 있게 해주었던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편하고 쉬운 여행보다 어렵고 힘든 여행이 나의 성장을 위해서는 오히려 필요합니다. 고통과 시련을 피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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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꿈, 하늘나라의 꿈, 파스카의 꿈>
-우리를 통한 꿈의 실현-
여러분은 꿈이, 희망이 있습니까? 사람만이, 살아있는 사람만이 꿈꿉니다. 꿈꿀 때 아름답습니다. 매력적입니다. 개꿈이 아니라 참꿈입니다. 과거의 기억이 미래의 꿈을 만듭니다. 그러니 과거의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십시오. 제가 쓴 시들을 살펴 보니 꿈에 대한 시들도 많았습니다. 몇편 소개해 드립니다.
-“창문 밖 가난한 언덕 보랏빛 은은했던 그 자리에
샛노란 민들레꽃 감동의 그 자리에 하얀 눈 덮여있다
흰 눈 덮인 하얀땅
보랏빛 샛노란빛 봄꿈을 꾸고 있겠지“-1998.1.22
-“풀잎들 밤새 별꿈 꾸며 잠못이루더니
아침 풀잎마다 맺힌 영롱한 별무리 이슬방울들”-2000.10.1
-“하느님은 우리의 사랑 우리의 꿈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꿈”-2009.
-“살아있는 것들만 꿈꾼다
죽어있는 것들은 꿈꾸지 않는다
연초록 새싹으로 화사한 꽃들로 피어나는
봄꿈의 나무들
살아있는 것들만 꿈꾼다”-2009.
인류 역사에 회자되는 역사적인 명연설로 평가되는 1963년 8월28일 마틴 루터 킹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참 아름답고 감동적인 연설도 생각납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옛노예의 후손들과 옛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둘러 앉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나의 아이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그런 나라에 살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흑인 소년 소녀들이 백인 소년 소녀들과 손을 잡고 형제자매로 함께 걸어갈 수 있게 되는 꿈입니다. 어느 날 모든 계곡이 높이 솟아오르고, 모든 언덕과 낮은 산은 거친 곳은 평평해 지고, 굽은 곳은 곧게 펴지고,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나 모든 사람들이 함께 그 광경을 지켜 보는 꿈입니다.”
서서히 실현되어 가는 하느님의 꿈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 유명한 예언자들 모두가 하느님을 꿈꿨던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꿈이 꽃처럼 피어난 성인들입니다. 흡사 요즘 피어나기 시작한 봄꽃들 역시 하느님의 꿈이 피어난 파스카의 꽃들이라 명명하고 싶습니다. 예수님 역시 꿈꾸는 사람이었고 하느님의 꿈은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었으니 바로 하늘나라의 꿈, 파스카의 꿈입니다.
오, 아름답고 감동적이고 고마운 이들이, 고결한 인격의 사람들이 바로 하느님의 꿈을 실현시켜가는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인류역사의 진보는 이런 하느님을 꿈꾸는 사람들을 통해 조금씩 이뤄집니다. 예수님, 예언자들, 성인성녀들뿐 아니라 우리 하나하나를 통해 실현되어 가는 하느님의 꿈, 하늘나라의 꿈, 파스카의 꿈입니다.
아무리 나이 들어 늙어도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되는 하느님의 꿈이요 죽는 그날까지 끊임없이 실현시켜 나가야 할 하느님의 꿈, 파스카의 꿈, 하늘나라의 꿈입니다. 이런 꿈이 없으면 육신은 살아 있다 해도 영혼은 죽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 창세기의 주인공, 요셉 역시 하느님을 꿈꾸는 사람입니다. 요셉을 통해 실현되어 가는 하느님의 꿈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실현되었던 하느님의 꿈이 요셉을 통해 실현됩니다. 다음엔 모세가 바톤 터치하여 하느님의 꿈을 실현시켜 갈 것입니다. 하느님의 꿈의 사람, 요셉을 질투하며 비아냥 거리는 형제들입니다.
“저기 저 꿈쟁이가 오는 구나, 자 이제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넣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 먹었다고 이야기하자. 그리고 저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
다음에 전개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은 그대로 요셉을 통해 하느님의 꿈이 실현되어 가는 역사의 계속입니다. 결코 세상 그누구도 하느님의 꿈을, 섭리를 좌절시킬 수 없습니다. 외관상 퇴보하는 역사처럼 보여도 조금씩 조금씩 하느님의 사람들에 의해 실현되어가는 하느님의 꿈입니다. 보십시오. 하느님은 르우벤, 유다의 형제들을 통해 요셉을 살려 내어 당신 꿈을 실현시켜가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복음의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도 참 심오합니다. 창세기에서 요셉을 통해 하느님의 꿈이 실현되어 갔다면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꿈은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니 바로 파스카의 꿈입니다. 포도밭 주인으로 상정되는 하느님의 아들이 죽자 부활시키시어 당신의 꿈, 하늘나라의 꿈, 파스카의 꿈을 실현시켜가는 하느님이십니다. 역시 세상 그 누구도 하느님의 꿈, 하늘나라의 꿈, 파스카의 꿈을 좌절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어둠의 땅에서 빛의 꿈을, 절망의 땅에서 희망의 꿈을,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꿈을, 즉 파스카의 꿈을 실현시켜가는 하느님이십니다. 이런 감격의 고백이 바로 시편을 인용한 초대 교회 신자들의 참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우리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시편118,22-23; 마태21,42)-
얼마나 고무적인 말씀인지요! 매일 주님의 꿈, 하늘나라의 꿈, 파스카의 꿈이 꽃처럼 피어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이요, 시편 성무일도 공동전례기도 시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를 통해 당신의 꿈을 실현시켜 가십니다. 참으로 영예스럽게도 날마다 우리를 통해 실현되어 가는 하느님의 꿈, 하늘나라의 꿈, 파스카의 꿈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은 물론 우리의 참 기쁨, 참 행복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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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독서에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는 아버지들이 등장합니다. 모두 하느님 아버지를 가리키고 있지요.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 소작인들에게 내주고"(마태 21,37)
이처럼 자기 밭을 소작인들에게 내준 포도밭 주인이 합당한 소출을 받으려 하다가 거부당합니다. 주인이 보낸 종들은 매질 당하거나 돌에 맞아 죽어가지요. 세상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을 다루어 온 방식입니다.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마태 21,37)
하지만 주인은 그런 소작인들에게서 신뢰를 거두지 않습니다. 자칫 아들을 잃을 수도 있다는 불안 따위는 아예 없는 듯합니다. 그저 자기 아들을 자기처럼 맞이하리라고 너무 순진하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의심하거나 왜곡하지 않는 비유 속 아버지는 하느님을 닮았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집트 탈출이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적 대사건을 준비하는 성조의 일화가 펼쳐집니다.
"자, 내가 너를 형들에게 보내야겠다."(창세 37,13)
요셉을 편애하던 야곱은 바로 그 때문에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는 줄도 모르고 형들에게 그를 심부름 보냅니다. 아마 알았어도 형제간에 있게 마련인 소소한 질투 정도로 여겼을 테지요. 설마 요셉을 죽이고 싶어할 정도의 증오였다고는 상상조차 못했을 겁니다. 오늘 복음 속 포도원 주인처럼 순진했던 것 같습니다.
한바탕 비극적 사건이 두 독서 안에서 벌어집니다. 요셉은 구덩이에 던져졌다가 "은전 스무 닢에" 이집트로 팔려가고, 포도밭 주인의 아들은 소작인들에 의해 "포도밭 밖으로 던져"져 죽음을 당합니다. 그리고 성부의 외아들 예수님은 "은전 서른 닢"에 악인들 손으로 넘겨지실 것입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마태 21,42)
고통스런 사건이 있었지만 결국 요셉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파스카 사건을 위해 준비하신 존재로 역사에 새겨집니다. 포도밭 주인의 아들은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까지 포도밭이 개방되게 만든 단초가 되지요. 또 우리의 예수님은 완전한 희생 제사를 통해 구원의 문을 이스라엘을 넘어 온 인류에게 활짝 열어젖히십니다.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오늘 만난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죄로 기울어지는 우리의 습성과 거듭되는 배반, 죄악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우리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으시는 하느님! 속고 또 속아 당신까지 해쳐도 또 믿어 주시는 분!
그분은 아드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우리에게 거듭거듭 아드님을 보내십니다.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부활의 은총을 인류에게 주시고자 당신 존재가 무너지는 희생 제사를 기꺼이 허락하십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민족적 정통성을 넘어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소작인으로" 포도밭을 얻게 된 이들들이지요.
자격도 못 되는 우리에게 쏟아지는 아버지의 신뢰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래서 그 신뢰에 뭐라도 응답해 드리고 싶은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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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마리아는 십자가 없이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채찍 없이 매질 당하신 분!
마리아는 갈바리아에서 십자가 없이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피 흘림 없이 번제물이 되었고, 못 없이 찢겨졌으며, 채찍 없이 매질 당하신 분이다. 누군가가 극도의 고난에 처해 있을 때는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으며 자칫 어떤 위로의 말이 상처가 될 수도 있어 조심해야 합니다.
♣할 수 있는 일이란 곁에 함께 묵묵히 있어 주는 것이 최상의 일일 것입니다. 지극한 사랑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밖에 할 수 없게 만듭니다. 그곳에 머물고 사랑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충족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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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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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포도밭의 사랑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포도밭 주인(하느님)은 당신의 포도밭(이스라엘 백성)을 소작인(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맡깁니다. 그리고 주인은 당신의 종(예언자)들을 여러 차례 보내지만 소작인들을 그 종들을 학대합니다.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돌로 쳐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결국 주인이 사랑하는 아들(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지만, 그마저도 포도밭 밖으로 끌어내어 죽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신뢰하고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실감나게 해 주는 노래입니다. 그 신뢰와 사랑이 너무도 커서 아들의 목숨까지도 건네주어 버리는 무방비의 신뢰와 사랑의 노래입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 신뢰와 사랑의 노래는 애절한 그 신뢰와 사랑이 거절당하고, 배반당하고, 끝내는 목숨까지 살육당하는 처참하기 그지없는 가슴 아픈 노래입니다. 이 크신 하느님의 사랑과 신뢰에 우리는 얼컥 눈물이 젖습니다.
한편, 이 노래는 그 큰 사랑과 신뢰를 거부해버리고 마는, 나약한 우리 인간의 배신 이야기입니다. 또한 고귀한 사랑과 신뢰마저도 한갓 우리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짓부숴버리고 마는, 배은망덕의 패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통해, 사제들과 원로들을 고발하며 꾸짖으십니다. 어리석은 인간의 꾀와 작태를 비웃으시며, 하느님의 깊은 섭리와 계획을 밝히고 계십니다.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리돌이 되었다’는 성경말씀의 인용을 통해, 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겠지만 오히려 그 죽음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펼치신다는 역설의 신비를 가르쳐줍니다.
당신께서는 버려진 돌이셨지만, 머릿돌이 되시어 새로운 집인 새로운 백성을 세우셨음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정적으로 구원의 역사가 보장되었다는 유대인들의 생각은 파기되고,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인 교회공동체에 보편적 구원이 사명으로 맡겨졌음을 드러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특별히 포도원 주인의 믿음과 사랑을 보게 됩니다. 도조를 받으러 보낸 종들이 두 번씩이나 무참히 맞고 죽는 배신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시기까지 베풀어지는 믿음과 사랑입니다. 그것은 마침내는 당신의 아들마저도 죽음을 당하지만, 끝까지 포도원을 포기하시지 않으시는 무한한 신뢰와 사랑입니다.
이는 아무리 인간의 죄가 크다 하여도 인간의 죄를 뛰어넘는 하느님 계획의 초월성과 구원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참으로,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입니다.”(마태 21,42). 사실, 도조를 바치지 않고 못된 일을 저지른 소작인들, 그들은 일상의 삶 속에서 잘못과 죄를 반복하고 있는 우리들의 자아상 입니다.
소작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끊임없이 주시는 포도밭 주인에게 여전히 우리의 권리만 주장하고 있는 완고한 우리들의 자아상 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을 밀쳐내고, 그분의 권리를 강탈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탐욕으로 인해 주인의 아들마저도 죽이고 마는, 악한 마음과 배은망덕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지금 당장에 주시는 회개의 때를 잘 붙잡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뜻에 따라 좋은 결실을 맺고, 그 풍성한 소출을 도조로 바쳐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바로 오늘이 그분의 신뢰와 사랑에 응답해야 할 때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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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태 21,42)
주님!
당신께서 제게 하신 일, 놀랍기만 합니다.
도망칠수록 더 강한 사랑의 철창으로 꼭 가두시고,
제 안에 꿈틀거리는 반역을 멈추게 하십니다.
거부되고 버려지고 넘어져도 오히려 그를 통해 구원의 섭리로 이끄시고,
감춰둔 사랑의 신비를 보여주십니다.
언제나 제 머리 위에 당신 사랑을 두고, 당신께 속한 이로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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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질투>
"저자가 상속자다 죽여버리자."
사람이 원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릿발이 내린다고 하죠.
인간의 복수가 행동으로 옮겨지면
그 과정에서 겪는 상처는 엄청납니다.
그런데 ~
예수님은 원한을 산 것도 아닌데, .
죽이려하고 합니다. 마치 치워야 할
장애물처럼 여깁니다.
인간이 질투의 화신이 되면 서슴지 않고
행동하여 상대는 무조건 당해야 합니다.
질투가 클수록 파괴력이 대단합니다.
"질투는 상대를 인정하면 곧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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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마태 21, 37)
하느님의 뜻은
피조물인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생명에 존중이
빠져버리면
순식간에
욕심은 생명마저
집어삼킵니다.
눈과 귀를
멀게 하는
욕심입니다.
욕심이 끝내
화를 부릅니다.
빼앗고 빼앗기는
악순환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실은 하느님께
되돌려드려야 할
하느님의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은
하느님의 자리까지
마구 침범합니다.
왜곡된 욕심은
하느님께서 주신
하나뿐인
생명까지도 끝내
파국의 관계로
몰고갑니다.
신앙인의 본분은
생명을 존중하는
평화에 있습니다.
평화의 실천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역사의 교훈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끕니다.
아름다운 삶이란
생명의 질서를
하느님 안에서
회복하는 일입니다.
생명의 질서는
오만함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존중을 우리가
배우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사람을 사람으로
존중하는 회복의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복음은 이렇듯
존중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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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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