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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할매
이 홍사
초저녁에 술친구 덕기 선배랑 약속한 집은 토담이라는 민속 주점이었다.
이상하게도 민속 주점이라면 거부반응이 인다.
그렇다고 싫은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선배는 집 부근이라 걸어서 간다고 했고 나는 위치를 대충 듣고 택시를 타고 가야만 했다. 가서 보니 언젠가 한 번 가본 집이었다. 통나무 탁자에 대나무로 만든 발을 칸막이로 쳐 놓은 민속 주점다운 술집이었다.
선배는 막걸리를 마시고 나와 이 교수는 소주를 마셨다. 안주는 골뱅이무침이었다. 말이 골뱅이무침이지, 골뱅이는 몇 조각 들어가지도 않고 양파와 오이만 잔뜩 버무린 안주였다. 자고로 식당에 다닐 적에 메뉴판을 보고 여러 가지를 하는 음식점은 피해야 한다. 한 가지를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보다 맛을 기대하기 어려운 법이다. 한두 가지만 전문으로 하는 집이 재료도 싱싱한 걸 쓰고, 훨씬 맛이 있다. 그건 술꾼이 되어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 집은 삼계탕부터 시작해서 파전까지, 안 파는 음식이 없다.
애초에 나는 전화를 하면서 똔뽈이라는 식당을 염두에 두었다. 그 식당은 돼지 볼때기 살을 숯불에 구워서 먹는 집인데 돈볼도 아니고 똔뽈이라는 희괴한 상호를 쓰고 있다. 한 번 들으면 기억하라고 그런 상호를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선배의 집 부근에 있고 출출할 때 가서 아주 맛있게 먹은 기억이 있는데 그걸 먹자고 했더니 이미 누구랑 약속이 되어 있다면서 그리로 오라고 했다.
숫기가 없고 낯가림이 심한 나는 누구와의 약속이냐고 기어이 묻는다. 모르고 가서 정치적 성향이 다른 사람을 만나면 술이 넘어가지 않고 앉은 자리가 상당히 불편해진다는 걸 알고 묻는 말이다. 요즘은 정치적으로 성향이 다른 사람과 마주 앉으면 상당히 불편한 시대가 되었다.
선배는 내 성미를 알기에 누구라고 순순히 말을 해준다. 이번에는 지역 인터넷 신문을 개설한 여류 시인이라고 했다. 지역 인터넷 신문? 뉴스를 전하는 포털 사이트가 많은데 굳이 지역의 인터넷 신문을 보는 사람이 있겠는가. 자문하면서 그 자리에 끼이기로 했다.
최소한 인터넷 신문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정치적으로 중립은 지키겠지.
결과는 그 여류 시인은 만나지 못했다.
오던 길에 다른 곳에 급하게 취재 간다고 하면서 펑크를 낸 것이라고 했다. 선배는 둘이서 대작하기 뭣해서 이 교수를 불렀노라고 했다. 이 교수는 나보다 두 살이 적은데 역시 만만한 술친구다.
이 교수는 오전에 잠시 보았다. 오늘은 같은 지역문화연구소의 회원인데 오랜만에 모임을 했다. 예전에는 각자 도시락을 준비해서 한나절이 걸리는 등산을 하기도 했는데 산행을 대신해서 금오산 저수지를 산책 삼아서 한 바퀴 돌고 점심을 먹자고 총무가 연락해서 모이는 저수지 밑에 잠시 오토바이를 타고 갔다. 점심을 먹으면 낮술로 이어지는 건 자명한 일이다.
그러면 오후에 견적을 넣어야 하는 현장을 답사하는 게 펑크가 난다. 그래서 얼굴만 보고 눈도장을 찍고 오토바이를 돌렸는데 이 교수는 그 자리를 끝까지 지키다가 바로 온 모양이었다. 이 교수의 불콰한 얼굴을 보니 술판이 점심나절부터 저녁 답까지 길게 이어졌던 모양이다. 이 교수는 술을 먹어도 표시가 나지 않는 타입인데 얼굴이 불콰한 걸 보니 모두 어지간히 마시고 헤어진 것이 분명했다.
금산할매를 떠올린 것은 술판이 어지간히 끝이 날 즈음이었다. 그 민속 주점에서는 술판이 끝날 즈음이면 입가심을 하라고 인삼을 얇게 썰어서 꿀에 묻혀 작은 접시에 담아서 내놓는다. 예전에도 그걸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 집만의 차별화된 특색인 모양인데 그 인삼을 먹다가 선배는 건삼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건삼?
건삼이라는 말과 동시에 금산할매가 스치고 지나갔다.
선배는 어린 시절 딱딱한 건삼을 물고 살았다고 했다. 선배의 어머니께서는 건삼이 만병통치약으로 여기셨다는 말이었다. 당시에 건삼을 입에 물고 살았다면 부농 집안이다. 선배라고는 하지만 혈연, 지연, 학연 어디를 보아도 걸리는 부분이 없다. 걸리는 부분이 있다면 친구의 친구, 한 다리 건너 친구인 성기 씨의 친형이라는 점이다.
오륙 년이 넘었을 것이다.
어느 모임에서 선배를 우연히 만났는데 급속도로 친해졌다.
누가 소개하기를 나를 두고 미얀마에서 주택 사업을 하고 있다고 말하니 반색을 했다. 미얀마를 혼자서 자유 여행하기로 계획을 세웠노라고 했다. 그래서 연결고리를 찾고 족보를 따지다 보니 친구의 친구인 성기 씨의 친형이 되는 것이었다.
구미라는 중소도시는 그렇다.
한 다리를 건너면 연결이 안 되는 사람이 없다.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디로 연결이 되어 있게 마련이다. 익명성이 두텁지 못한 도시이니 항상 조심해야 한다. 예전의 일이지만 차량 추돌 사고가 있어서 대판 싸우고 나니 사돈의 팔촌쯤 되는 사람이라 입장이 곤란한 경우도 당했다.
선배를 처음 만났던 날, 술좌석에서 미얀마 여행 계획이 있으면 양곤에 도착해서 연락하라고 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돕겠노라고 했다. 지나가는 말이었는데 정말로 미얀마에서 만났다. 모일 모시에 도착이라는 연락을 받고 공항으로 마중을 나갔다. 생전 처음 오는 나라에 가이드도 없이 혼자서 온 것이었다.
선배가 보름간 미얀마를 여행하는 동안 내 숙소를 메인 캠프로 삼았다.
그 후에 구미에 오니 만나면 술을 샀다. 이번엔 갚아야지 작정하고 만나면 항상 먼저 술값을 계산하고 난 다음이었다. 번번이 그랬다.
그러는 사이 깊게 알게 되었고 급속히 친하게 되었다.
초저녁의 전화 첫마디에도 그렇게 말했다.
“출출하니까 형님 생각이 나네요. 똔뽈 회동 어때요?”
“똔뽈보다 토담으로 나와요.”
이런 식이다. 선배와는 약속을 미리 잡는 게 아니라 갑자기 하는 것이다. 아무튼, 건삼을 얘기하던 선배의 말을 듣고 건삼 장사인 금산할매를 떠올린 것이다. 나는 금산할매라고 불렀는데 하얀 옥양목 치마에 저고리를 입은 그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잊고 있었던 할머니인데 불쑥 기억의 수면 위로 부표처럼 솟구친 것이다. 동백기름을 발라 빛이 나는 머리에 비녀를 꽂고 건삼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행상을 다녔다. 내 어린 날 금산할매는 건삼이 잔뜩 든 보따리를 이고 우리 고을에 들르면 우리 집에서 잤다,
나는 할머니 품에서 잤다. 형은 종손이라는 이유로 증조부모님 밑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서 사랑채에서 잤고 나는 할머니와 잤는데 금산할매가 오시면 꼭 내 옆에서 잤다. 어린 날 잠결에 할머니인 줄 알고 금산할매 품으로 파고들어 젖을 만지며 잔 날도 있었다.
당시에는 인삼이 귀하던 시절이었다.
내가 살았던 시골에서는 농촌이었지만 인삼밭은 찾아볼 수가 없었으니 수삼은 구경도 못 했고 전부가 건삼이었다. 지금이야 정관장이다, 인삼 발효를 시킨 음료수다. 인삼 제품이 흔하지만, 그 옛날은 아니었다. 어떻게 말렸는지 모르지만 동그랗게 꼬아서 말린 건삼이 전부였다. 그 옛날에는 시골로 장사를 다니면 여관은 없고 남의 집에서 신세를 져야 했는데 금산할매는 꼭 우리 집으로 왔다.
금산할매는 어느 연줄을 통하더라도 친인척이 되는 게 아니다.
건삼을 팔러 왔다가 할머니와 친해져서 우리 집으로 오시는 것이다. 금산할매가 오면 할머니는 그렇게 반기셨다. 오시면 자고 아침을 먹고 건삼 보따리를 이고 나간다. 다른 동네를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고 저녁이면 들어오신다. 할머니는 얼마나 팔았나 그것에 관심을 둔다,
저녁을 먹고 할머니와 누우면 그날 장사를 한 이야기며 어느 집에 가니 어떻더라는 이야기까지 얘기 보따리를 풀었다. 할머니는 금산할매의 말을 듣는 것을 재미로 여기셨다.
우리 집은 가계가 좀 복잡해서 할머니 혼자 안방을 차지하고 살았다. 나는 꼭 할머니 품에서 잤다. 아버지 어머니는 건넌방에서 동생을 데리고 잤다. 일제 강점기 시절 할아버지께선 만주로 떠나셨다. 그런데 할머니는 집안 살림을 지키느라 따라가지 않으시고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는데 만주에 계신 할아버지께 여자가 생긴 것이다.
그분이 작은할머니다.
할아버지는 만주에서 담배 농사를 대대적으로 지으셨다고 했는데 그 기간이 십육 년이라 했다. 농사를 지으면서 고향으로 돈을 보냈는데 당신의 매제인 고모할아버지를 통해서 보냈는데 오다가 노름판을 기웃거려 매번 배달 사고가 났다. 그것도 모르시고 농사를 지어 일부는 고향으로 보내고 일부는 독립자금으로 보탰는데 일본 순사들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급하게 농지를 처분도 못 하고 그대로 버리고 작은할머니를 데리고 야반도주를 해서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디.
할머니 둘을 데리고 한집에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면 소재지인 장터로 살림을 난 것이었다.
할아버지께선 고향에 돌아오셔서 보낸 돈이 배달 사고가 났다는 걸 아셨다고 했다.
그 사람! 그거, 참!
할아버지께서 그 사실을 알고 허무하게 하신 말씀이라고 했다. 할머니께선 소갈머리도 없는 양반이라고, 그 말씀을 두고두고 하셨다. 만주에서 돌아오신 할아버지는 빈털터리였다. 당시에 입고 오신 호피로 된 외투를 팔아서 장터에 이발소를 차리셨다고 들었다.
할아버지가 작은할머니와 장터에서 살림을 차리자 안방은 오롯이 할머니 몫이었다. 할아버지께서 계셨다면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었겠지만, 할머니 혼자서 자는 방에 금산할매가 친구로 들어오신 것이다. 금산할매는 상품이 되는 건삼은 한지에 싸고 할머니에게 줄 선물로 상품이 안 되는 부러진 건삼을 꼭 한 줌 준비해서 오셨다. 오시면 보통 한 사나흘 묵고 가셨는데, 가시는 날이면 할머니는 아쉬운지 동구 밖까지 배웅하고 들어오셨다.
당시로서는 다음에 언제 오겠다는 기약을 할 수가 없던 시절이었다. 당시에는 돈이 귀한 시절이라 건삼을 현물인 쌀과 바꾸던 때였다. 쌀을 머리에 이고 오시면 그걸 할머니는 쌀쟁이에게 금을 높게 쳐서 돈으로 바꾸어 주곤 했다.
할머니는 금산할매를 두고 금산댁이라 불렀다.
“금산댁이 올 때가 되었는데? 어디 가서 얼마나 파는지 모르겠네?”
하늘을 바라보시며 하는 말씀에는 그리움이 잔뜩 묻어 있었다. 저녁에 누우면 어딘가를 다니고 있을 금산할매를 기다리셨다. 금산할매는 보퉁이에 건삼을 잔뜩 이고 이 고을 저 고을을 돌아다니며 다 팔리면 금산으로 돌아가 또 인삼을 떼어서 나온다고 했다. 오로지 발품으로 건삼을 파는 할매다. 할머니가 그런 말씀을 하실 즈음이면 보름 안으로 금산할매가 건삼을 잔뜩 이고 삽짝으로 들어선다.
“할매 금산할매하고 옛날부터 친구야?”
“옛날부터가 아니고, 심성이 좋아 친구가 된 거지!”
“학교에 같이 안 다녔는데 어떻게 친구가 돼?”
“그래도 마음이 맞으면 친구가 된단다. 어른이 되면 알아.”
당시에 어린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할머니에게 듣기로 금산할매도 남편이 없는 여자라고 했다. 동병상련, 할머니는 금산할매를 이해하고 그렇게 발품을 파는 걸 가련히 여기셨다. 당시에 나는 친구란 이렇게 맺어지는구나, 생각했다.
새벽에 잠이 깨면 나란히 누워 두런두런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 고을에 가니 어떻고, 어느 고을에 가니 또 어떻고, 할머니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구로 금산할매가 있었다.
당시에는 이불조차도 귀했던 시절이다. 시커먼 옥양목으로 된 무명 이불을 셋이서 덮고 잤는데 내가 두 할머니의 가운데서 잤다. 새벽에 금산할매가 구들장이 식으면 냉골이 올라온다며 부엌으로 나가서 아궁이에 군불도 지폈다. 목이 아프겠다는 할머니 걱정에 건삼 보퉁이를 반으로 잘라 반은 할머니 방에 남기고 반 만 머리에 이고 나가서 팔고 돌아와 또 다음날은 팔린 만큼 더 가지고 나가시곤 했다.
우리 고을에 오시면 우리 집이 매인 캠프가 되는 셈이다. 금산할매가 팔러 나가고 난 다음에 마을 사람 누가 오면 할머니가 건삼을 보여주고 팔곤 했다. 그게 좀 팔리면 금산할매는 그렇게 좋아했다. 금산할매는 금산으로 돌아갈 건삼을 할머니에게 좀 맡기고 떠나신다. 그러면 할머니는 그 건삼을 동네 사람들에게 입소문을 내서 파신다. 그 돈을 장롱에 고이 보관하고 있다가 다음에 금산할매가 오면 내준다. 그 돈을 받으면 금산할매는 그렇게 황송해하셨다.
빛바랜 기억이지만, 할머니는 술을 입에도 대지 않지만 금산할매가 오시는 날이면 저녁에 둘이서 가끔 한잔하신다. 사랑채에 증조부모가 계셨으므로 상당히 조심스럽게 도가에 가서 막걸리를 한 주전자 받아다가, 무슨 전을 구워서 먹는데 나는 안주만 거들곤 했다. 금산할매는 특히 우리 동네 도가의 술이 맛이 있다고 했다.
아홉 살이 되어서야 나는 초등학교에 다시 입학했다. 생일이 섣달 스무여드레라 나고 겨우 이틀 만에 한 살을 먹었으니 여덟 살에 입학했는데 한 달 정도 다니다가 그만두었다. 이유는 손가락에 동상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 당시에는 굉장히 추웠다. 동상이 걸려도 밖에 나가서 놀았다.
아버지께서 학교에 말을 해두었다고 내일부터 학교에 가지 말라고 해서 다음 날부터 학교에 가지 않고 다음 해에 다시 입학했다. 당시에 시골에는 유치원이라는 게 없었다. 학교에 가서야 한글을 깨우치는 정도였는데 나는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한글을 깨우쳤고 형이 학교 도서실에서 빌려다 주는 동화책을 많이 읽었다.
어느 공주가 파인애플을 너무 많이 먹어서 병이 났다고 했는데 파인애플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게 궁금했다.
할머니에게 물어도 파인애플이 무슨 과일인지 몰랐다. 아버지에게 물어도 외국의 과일이라고만 했다. 동화책에는 다른 말은 궁서체로 기술했는데 파인애플만 표시가 나도록 고딕으로 표기를 해 놓았다.
파인애플이 도대체 어떻게 생긴 과일일까?
그게 너무나 궁금했다.
지금이야 파인애플을 먹기가 싫어서 못 먹을 지경이 되었지만, 당시는 아니었다. 나는 동화 속의 공주처럼, 아파도 좋으니 파인애플을 구경이라도 했으면, 맛이라도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금산할매가 와서 물었다. 여러 고을을 다니니 그런 물건을 어디서 보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금산할매 파인애플 알아요?”
“파인애플? 서울 사람들만 먹는 외국 과일인데 아주 시단다.”
“금산할매는 먹어 보았어요?”
“그래 맛만 보았지.”
“맛이 어땠어요?”
“풋사과 맛이란다.”
“금산할매! 건삼 장사를 하지 말고 파인애플 장사를 하세요.”
그럴까? 하고 금산할매는 온화하고 친절한 표정으로 응수했다.
지금 생각하니 당시에 시골 살림이 얼마나 궁핍했는지 알 수가 있는 대목이다.
두 개 두 개 사과 두 개!
언니 한 개, 나 한 개
누가 큰지 자꾸자꾸 대어 봅니다.
그런 동시도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줄줄 외우고 다녔다. 사과가 얼마나 귀했으면 그런 동시가 교과서에 실릴까? 지금이야 아이들 사과 깎아줄까? 하고 물으면 싫다고 대답하는 아이가 태반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먹는 게 귀했던 시절이다. 집안의 제삿날이나 되어야 사과를 맛볼 수가 있던 시절이었다.
사과를 얘기하니 생각난 것인데 우리 동네에 사과 과수원이 하나가 있었다. 그건 동네에서 부의 상징인 부잣집의 사과밭이었는데 우리 집안의 큰집이었다. 과수원은 낙동강 강변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사과가 익는 농사철이면 아이들은 그 부근에 얼씬거리지도 못했다. 굳건한 울타리에 당시에는 큰 도사견을 두 마리나 풀어 놓아 감히 들어갈 수가 없었다. 겨울이면 개방이 되었는데 낙동강에 썰매를 타러 가다가 그 과수원에 들어가서 낙엽을 뒤적여 썩은 것이나 얼어버린 조무래기를 주워 먹었던 기억이 난다.
책을 좋아한다는 것을 아신 금산할매는 우리 집에 오시는 날이면 동화책을 사 오시곤 했다. 내게 가장 반갑고 큰 선물이었다. 나는 선물로 받은 그 동화책이 나달나달 닳도록 외우고 또 외웠다. 금산할매가 사다 주는 동화책에는 서양 사람들의 얘기가 태반이었다. 그걸 읽고 또 읽어서 다른 아이들에게 얘기로 들려주었다. 금산할매는 선물을 나에게만 주는 것이 아니었다.
사랑채에 있는 증조부모님에게도 건삼을 몇 뿌리씩 선물했다. 이빨이 없는 증조부는 건삼을 자시지 못했다. 한 조각을 종일 물고 계셨다. 하여, 어머니는 밥을 할 적에 밥솥의 쌀 위에 건삼을 한 뿌리 올려놓고 쪄서 그것을 다시 잘게 썰어서 드시게 했다.
금산할매가 장사를 마치고 떠나는 날이면 서운했고 오랫동안 오시지 않으면 기다렸다. 금산할매가 돌아가는 날이면 금산할매를 따라서 금산으로 가고 싶다고 졸랐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게 어린 가슴에 상처로 남았다.
“할머니! 금산할매가 언제 와?”
할머니 품에서 자다가 물으면 할머니의 대답은 항상 명확하지 못했다.
“글쎄다, 올 때가 된 것 같기도 한데.”
증조부께서는 내가 입학을 하고 돌아가셨다. 기억이 나는 것은 금산할매가 오시던 날 밤에 증조부께서 돌아가셨다. 돌아가실 것을 아셨는지 장터에서 할아버지가 올라와 증조부가 계시는 사랑채에서 함께 주무셨는데 오밤중에 뭔가 이상해서 깨어나니 집안이 조용하면서도 부산스러웠다. 운명 직전에 할아버지를 비롯한 아버지 모두가 사랑채를 들락거리셨다.
“아버지 왜 그래요?”
“노할부지가 돌아가실 것 같다.”
그날 밤을 못 넘기고 돌아가셨다.
지금 계산하니 증조부 연세 여든일곱, 당시로는 천수를 누리신 것이다.
당시에는 오 일 장례를 치렀는데, 금산할매는 장사를 접고 집안일을 도왔다. 동네 아주머니들과 부침을 굽고 손님을 치는데 뒷바라지를 하며 시간에 맞추어 빈소가 차려진 사랑채로 들어가 곡을 했다.
당시에는 부고를 등사기로 밀어 만들어 동네 청년들이 인근 마을을 다니면서 돌리던 시절이었다. 부고를 받는 집에서는 그 부고를 읽고 변소에 새끼줄로 만든 부고를 꽂는 줄에 꽂아두었던 기억이 난다. 누구네 변소나 다 그런 게 있었던 시절이다.
집안에 돼지를 잡고 동네 사람들 다 모여서 장례 준비를 했다. 산소에도 하루 전에 인부들이 가서 광중을 삽으로 파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할머니는 상주 노릇을 해야 했고 금산할매가 음식 장만에 앞장을 섰다. 나는 그 금산할매의 치맛자락을 잡고 따라다녔다. 그때 내가 보기에는 이상한 점이 있었다. 금산할매가 우리 친척도 아니면서 왜 울어? 할머니가 곡을 하면 금산할매가 들어가 같이 곡을 했는데 참 구성지게 슬프게 곡을 했다. 그때만 해도 초상집에는 곡소리가 끊이지 않아야 하던 시절이었다. 곡을 잘하지 못하는 집에서는 곡하는 사람을 사서 곡을 시키던 시절이었는데 금산할매는 곡을 너무 잘했다.
증조부가 돌아가시고 얼마가 지나서 방을 바꾸었다.
증조모는 뒷방으로 들어가시고 할머니가 사랑채를 썼는데 나도 사랑채로 따라갔다. 역시 금산할매도 오면 사랑채에서 잤다.
증조부께서 돌아가시고 증조모는 삼 년을 더 사셨는데 증조부보다 증조모가 한살이 많으니 당시의 나이로는 아흔하나에 돌아가셨다. 역시 천수를 누리신 셈인데 말년에 치매기가 있었다.
“젊은 과부나 늙은 과부나 똑 같다.”
증조모께서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인데 어린 내가 생각해도 할아버지를 작은할머니에게 빼앗긴 할머니 앞에서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을까, 치매가 아니라면 그런 말씀은 하실 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어린 마음에도 빨리 돌아가시기를 은근히 바랬다.
증조모가 돌아가실 즈음부터 금산할매가 오지 않았다.
증조모의 빈소에서 울어줄 사람이 없었다.
할머니는 그 여편네가 곡을 잘했는데, 하시며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증조모가 돌아가시고 할머니는 금산할매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물론 나도 기다렸다.
“할머니 금산할매가 왜 오지 않지?”
“글쎄다. 이 여편네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다. 돈도 줘야 하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는 할머니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당시에는 전화도 없었고 금산이라는 것만 알지 정확하게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오지 않으면 소식을 들을 방법이 없다. 그 전에 두고 간 건삼을 판 돈을 할머니가 지니고 있었다. 금산할매가 다녀간 지 일 년이 넘어서자 할머니는 금산할매를 기다리는 것을 포기했다. 들어보니 죽은 것으로 단정하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떠돌다가 어디서 객사를 하지 않았나 모르겠네. 자식은 둘이 있다고 들었는데.”
할머니는 죽지 않았으면 오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인데 필시 죽은 것이라며 기다리는 것을 포기했다.
그런데 이태쯤 지나서 금산할매가 왔다.
그때는 저녁 무렵이었는데 내가 앞집 골목 앞에서 동네 아이들과 놀고 있는데 금산할매가 보따리를 이고 아랫마을에서 올라오는 게 보였다. 나는 금산할매에게 달려가지 않고 집으로 쫓아갔다.
“할머니 금산할매가 와여.”
사랑채에 있을 할머니에게 마당에서 소리쳤다.
“니 뭐라캤노?”
할머니는 반색하며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저 밑에 올라오고 있어. 건삼 보따리를 이고”
할머니는 고무신을 찾아 신고 삽짝 밖으로 내달았다. 나도 뒤에 따라갔다. 금산할매는 집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아이구 이 여편네야!”
할머니는 금산할매의 등을 두드리고 이고 있는 건삼 보따리를 받으며 금산할매를 살폈다.
“친구야! 니 아사풍 걸맀더나?”
금산할매는 입이 좀 돌아갔다. 얼른 생각해도 편찮으셨던 모양이다.
“다른 데는 괜찮나?”
할머니의 눈에서는 눈물이 글썽거렸고 금산할매는 입이 상당히 비뚤어져 있었다.
“그래도 와야만 할 거 같아서 보러 왔지.”
“잘 왔다. 잘 왔어.”
저녁을 먹고 할머니는 금산할매의 손을 마주 잡고 밤이 깊도록 얘기 보따리를 풀었다. 서로 간에 할 이야기가 참 많았던 모양이다. 나는 두 분의 얘기를 듣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날부터 건삼을 팔러 다니는 건 뒷전이고 이웃 마을의 용하다는 침쟁이에게 침을 맞으러 다니셨다. 침을 맞으러 갈 적에는 꼭 할머니와 동행했다. 침쟁이는 한약도 조제를 해주었다. 할머니는 약탕기에 한약을 풀어서 앉히고 숯불로 정성을 들여 달였다.
할머니가 그렇게 정성을 들이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아사풍이 걸려 입이 돌아간 사람이 건삼을 팔러 다니면 건삼의 효능이 있다고 누가 믿겠는가? 이 사람아 입부터 고쳐야지.”
금산할매는 할머니의 지극정성인 보살핌을 받으며 근 보름간 장사를 나가지 않고 집에만 머물렀다. 침쟁이가 용했는지 할머니의 정성 덕분인지 귀밑까지 돌아간 입이 반쯤 돌아와서 그렇게 흉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되자 금산할매는 건삼을 팔러 나갔다.
건삼을 다 팔고 금산으로 돌아가서 두 번인가 세 번인가 더 오시고 기력이 떨어졌는지 오시지 않았다.
돌이키니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이십 년이 된다.
금산할매가 아직 살아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타지마할은 언제 갈 거야?”
“타지마할?”
덕기 선배가 나에게 물었다. 금산할매를 생각하느라 좌중에서 이 교수와 선배가 하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뜬금없이 무슨 타지마할이에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어. 타지마할 가자고 그렇게 노래를 부르더니.”
그랬었지. 선배가 미얀마 여행을 참 깔끔하게 했다. 혼자서 그렇게 잘 돌아다니는 사람은 처음 봤다. 미얀마에서 내가 사용하던 여분의 전화를 주었더니 필요 없노라고 하고 내 전화번호만 알아서 저장하고 혼자 여행을 다니는데 그렇게 잘 찾아다니는 것이었다. 일주일은 미얀마의 지방 관광지를 혼자 돌아다녔는데 저녁마다 나에게 어디라고 보고를 하는 전화만 하고 잘 찾아다니고 현지 음식도 가리지 않고 잘 먹었다.
그래서 내가 타지마할을 보고 싶다고 했다.
혼자 가기가 겁이 나니 선배와 동행하자는 말을 미얀마에서 여러 번 했다.
술판이 어지간히 끝나가고 있었다. 선배와 이 교수는 더 마시러 다른 곳으로 가겠지만 나는 한 번도 이차까지 따라간 적이 없다.
타지마할은 지금 당장 가기가 어렵다.
중공 우한발 코로나 19가 이렇게 오래 지속될 줄은 몰랐다.
“코로나가 끝나면 생각해보죠. 여행경비나 착실하게 모으세요.”
그렇게 말하는 내 눈에는 금산할매의 얼굴이 떠올랐다.
선배와 이 교수는 내기 탁구 시합을 하기로 했다. 그 민속 주점 이 층에는 선배가 자주 다닌다는 탁구장이 있었다. 이 차로 술 내기 탁구인 셈이다. 나를 보고 심판을 보라고 했지만 나는 그 민속 주점에서 마시고 바로 택시를 타고 돌아왔다.
집으로 와서는 상가주택인 집으로 바로 올라가지 않고 사무실로 들어와 금산할매를 떠올리고 있다.
생각하니 당시에 사다 준 동화책은 새 책이 아니고 어느 도회의 아이들이 읽고 난 것을 얻어다 주었던 것 같다. 금산할매 덕에 나는 또래들보다 일찍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었고 아이들에게 동화에서 읽은 얘기를 들려주었다.
금산할매 묘소라도 알면 가서 술 한 잔이라도 올리고 싶은 마음이다.
민속 주점에서 골뱅이 안주로 마신 막걸리로는 저녁이 부실하다. 집으로 올라가서 아내에게 저녁을 차리라고 하면 달가워하지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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