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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
40여년 전 1980년 10월 27일에,
우리가 문화 유산 답사를 하는
전국의 큰 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몰랐다. 이 사건은 역사책에 반드시
기록되어 후세에게 교육되어야 한다.
월정사 뿐만 아니라 제주도부터 전국의 큰 사찰에서 일어났다.
"10.27 법난"
‘불교신문’에 게재됐던 월정사 원행스님의 수기 '10ㆍ27 법난' 전문.
1980년 10월 27일 불교 법난은 산승인 나에게 참으로 감당하기 힘든 사건이었다. 당시 나는 오대산 월정사에서 조실이신 탄허 스님과 주지이며 은사이신 만화 스님을 모시고 재무국장 소임을 맡아 전쟁으로 폐허가 된 사찰을 복원하는 데 미력한 힘이라도 보태려고 기도 정진 중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원주의 천일공사 대공분실로 끌려가 참담한 고문을 당하였으니, 이 사건은 내게 엄청난 충격과 절망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수행자는 개인의 고통을 드러내서도 안 되고 호소해서도 안 된다. 하여 그 사건은 오랜 시간 침묵 속에 묻어 두었다. 이제 나는 그것이 나 개인의 고통이 아니라 역사의 상처라는 차원에서 발언의 의무를 느낀다. 그래서 현장에서 직접 경험한 사람으로서 그때를 가감 없이 기록해두려 한다.
삶은 고통과의 동거이며 고통은 삶의 깊은 뿌리이다. 고통은 삶의 또 다른 추동이면서 삶의 또 다른 법화이다. 우리 삶의 본질은 고해다. 그러나 고통의 바다 위에 놓인 우리가 고통을 거부하고 그 기억들을 무조건 묻어버리는 것은 고통의 해결방법이 아니다. 그것은 비겁이다. 고통에 용감하게 맞서지 않으면 끝없이 고통 속에서 허덕일 수밖에 없는 것이 중생의 삶이다. 무고한 개인이 불온한 권력에 의해 무더기로 짓밟히는 시대는 이제 마감되어야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 시절 내가 겪은 아픔은 나의 아픔이 아니고 시대의 아픔이었고 나의 상처는 바로 역사의 상처라는 사실이다. 이제 나는 침묵할 수가 없다. 우리가 한 시대를 건너오면서 민중 개개인이 치러야만 했던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고통을 그냥 묻어버린다면, 우리 사회가 발전할 수 없다는 판단으로 나는 이 글을 쓰려는 것이다. 과거의 오류를 인식하는 순간에야 과거는 치유된다. 치유란 상처가 없어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생생하게 되살아나 오늘의 문제로 회귀하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에 대한 뚜렷한 인식에서만 가능하다. 정확한 분석과 반성이 곧 역사의 오류를 바로 잡는 일이다. 어떤 역사도 반성 없는 진화는 없다. 역사에서 역사가 태어나고 현재에서 미래가 태어난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고, 헌법에 따라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였으나 곧 전두환, 노태우를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 세력이 12·12 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했다. 1980년 3월 보안사에서는 정보처를 부활하고, 민주화 여론을 잠재우고 군부가 정치에 나서는 것을 정당화하는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K공작계획을 실시하면서 그해 4월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되어 국내의 모든 정보기관을 장악했고, 5월 신군부세력은 계획적인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를 내리고, 5·18 민주화운동을 진압한 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해 정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1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주체로 실시된 간선에 따라 전두환이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0월 27일에는 임기 7년의 단임제 대통령제 등을 골자로 하는 제5공화국 헌법이 제정됐으며, 전두환은 1981년 3월 3일 제5공화국의 대통령 첫 임기를 시작하였다.
한편 불교 쪽에서는 1980년 4월 취임한 총무원장 월주 스님이 권력의 간섭을 배제한 자율적인 종단 운영과 종단의 자체 정화를 천명하면서 조계종 총무원은 신군부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를 지지했던 ‘전한국불교회’와 ‘대한불교총연합회’를 탈퇴했고, 전두환 정권에 대한 지지 성명을 거부했다. 그러자 ‘한국 불교의 최대 치욕 사건’으로 불리는 ‘10·27 법난’이 발생한 것이다.
이처럼 정국이 소란스러웠던 1980년 10월 26일 당시 나는 오대산 월정사에서 재무 소임을 맡고 있었다. 조실 스님은 화엄경 역경 출판 관계로 서울 안암동 개운사에 주석하셨으며 주지 만화 스님은 그날 아침 일찍 주지 스님은 조실 스님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가시고 노전 스님은 신병치료 차 외출 중이었다. 나는 혼자서 사시마지를 올리고는 호국안보와 조국통일을 기원하며 박정희 대통령 서거 1주기를 맞아 박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왕생극락 발원과 추모 다례제 축원을 봉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봉행 축원 중에 일진광풍이 불어 대웅전 정문이 활짝 열리는 것이 아닌가! 광풍은 법당 바닥에 깔아두었던 붉은 카펫—이 카펫은 과거 쌍용 김성곤 회장의 부인 김미화 보살의 시주물이었다—을 날려서 상단의 촛대와 향로를 모두 엎어버렸다. 순식간에 영단의 영정마저 바닥으로 나뒹굴며 깨어지고 말았다. 이게 무슨 불길한 징후인가. 참으로 괴이한 일이었다. 시국이 하 수상하니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원래 오대산은 시월부터 바람이 세차지만 그런 일은 일찍이 없었다. 나는 법당을 정리한 다음 마음을 추스르고 추모독경을 마친 후 종무소를 점검하고 서별당에 있는 내 방으로 가서 원각경을 독송했다.
저녁 5시쯤에 원주에 사는 월정사 화주 00보살님의 자제분이 점퍼 차림의 젊은이들 서넛을 동행하고 찾아왔다. 그들은 기도 참배하겠다면서 하룻밤 묵기를 청하였고 나는 지객스님과 별좌스님에게 숙소를 제공해주라고 일렀다. —사복 차림의 그들은 원주 천일공사 보안부대 요원으로 특무상사와 중사 하사 등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지만, 그때는 꿈에도 몰랐다.— 그들은 군 지프차와 승용차 한 대를 끌고 왔고, 밤새 헤드라이트 옆에 붙은 붉은색 깜박이 등을 켜둔 채 수선스럽게 사찰 문을 드나들며 사찰 곳곳을 뒤지고 다녔다. 무례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은 들었으나 볼 일이 있어 그러겠지, 무심했었다.
이튿날인 10월 27일 새벽 예불을 마치고 아침 공양 후 나는 내 방에 들어가 잠깐 쉬고 있었다. 그때가 아침 7시 전후였을 것이다.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기에 문을 열어보니 그들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면담을 요청하면서 군화발인 채로 내 방으로 들어서 다짜고짜 내 양팔을 거칠게 붙들고 종무소로 끌고 가 소파에 패대기쳤다. 아직 종무직원들이 출근하기 전이었다. 보살의 아들은 원주 보안사에서 나왔다고 자기들의 신분을 밝히더니 경직된 어조로 물었다.
“스님이 월정사 재무 원행 스님이 맞지요?”
“예, 그렇습니다.”
그는 표정까지 싸늘해져서 더욱 경직된 어조로 말했다.
“스님, 원주 보안사에 같이 가셔야겠습니다.”
나는 뜬금없는 요청에 어이가 없어 대꾸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지금 조실 스님도 주지 스님도 출타하셔서 나 혼자뿐입니다. 절을 비워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내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들의 표정은 더욱 험악해졌다. 보살의 아들이 점퍼 속에서 권총을 꺼내 총구를 내게 겨누었고, 두 사람은 내 양쪽 어깨를 꽉 잡아 바닥에 무릎을 꿇게 하는 동시에 권총과 주먹으로 내려칠 태세를 취했다. 나는 그들의 무례함에 적이 화가 치밀었으나 큰소리를 친다고 해결될 상황도 아니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정히 그렇다면 조실 스님과 주지 스님께 전화를 걸어서 외출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총을 든 남자가 말했다.
“이미 탄허 스님은 알고 있소. 주지 스님도 원주 톨게이트에서 연행되었고 총무 현우 스님과 상원사 주지 삼보 스님도 원주 보안사에 연행되었소. 잔말 하지 말고 순순히 따르지 않으면 강제 연행하겠소.”
그러면서 보살의 아들이 권총을 내 목에 바짝 들이댔고 한 사람이 라디오를 켰다. 마침 라디오에선 불교교단 정화 차원에서 발표한다는 성명서가 낭독되고 있었다. 그들은 내 방을 샅샅이 뒤져서 나의 일기장과 개인 통장은 물론 낡은 흑백텔레비전과 카메라, 손목시계 만년필까지 군용 더블백에 무차별 주워 담았고 종무소의 캐비닛을 열고 각종 장부와 회계 서류 등도 닥치는 대로 더블백에 쑤셔 넣더니 지프차에 실었다. 그리고 나를 무력武力으로 연행하였다. 김장 등 월동 준비로 화급한 일이 널려 있는 도량을 뒤로 하고 전나무 숲을 빠져 나가는데 앙상한 가지에 성글게 남은 나뭇잎이 스산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도착한 곳은 원주시 태장동 천일공사 대공분실이었다. 대공분실은 말 그대로라면 간첩을 취조하는 곳이다. 그런데 나 같은 이름 없는 납자가 그곳에서 조사를 받는다는 것은 아이러니했다. 나는 그곳의 취조실에 감금되었다. 그 방 한가운데 책상과 의자 두 개가 있었으며 콘크리트 벽 한 쪽 구석에는 쇠로 된 야구방망이와 야전침대에서 뽑아온 듯한 쇠파이프와 양동이가 놓여 있었다. 한쪽 벽은 구멍이 뻥뻥 뚫린 유리로 되어 있어 안에선 바깥이 안 보이고 바깥에선 안이 보이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흉한 몰골의 군인 두 명이 다가와 소릴 질렀다.
“야, 이 중놈아. 군복으로 빨리 갈아입어.”
참으로 참담하였다. 이미 많은 스님들이 도착해 있었다. 옷을 늦게 갈아입는 스님에게 그들은 발길질과 쇠몽둥이질을 서슴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퍽퍽 내려치는 소리와 고통의 비명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어떤 스님은 벌써 얼굴에 피멍이 들었고 어떤 스님은 고통스럽게 가슴을 부여잡고 울부짖었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발길질과 쇠몽둥이로 닥치는 대로 내려치니 시멘트 바닥에 피와 울부짖음이 낭자했다. 그들은 나를 의자에 거꾸로 세워 콧구멍에 수건을 씌우고 고춧가루를 퍼 넣고 거기다 양동이의 물을 들어부었다. 이름 하여 고춧가루 물고문. 다짜고짜 고문을 강행하면서 나에게 몇 차례나 허위 진술을 강요했다. 계속 잠을 재우지 않고 눈에 서치라이트를 비추면서 고문을 가하면 정신이 몽롱해져 사뭇 헛소리를 했다. 혼몽 중에 나는 최면에 걸린 듯 까마득하게 잊었던 어린 시절의 어느 날로 돌아가 있기도 하고,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생하게 앞에 다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러다가 기절하여 시멘트 바닥에 쓰러져 버리면, 양동이 물을 냅다 끼얹는 바람에 정신이 들곤 했다. 정신이 드는가 싶으면 다시 일으켜 책상 앞에 앉히고 내게 볼펜과 메모지를 밀쳐놓으면서 다그쳤다.
“월정사에서 10년 동안 재무 소임을 봤잖아. 비밀 자금을 어디에 숨겨놓았으며 비밀 아파트와 여자는 어디에 숨겨 놓았는지 빨리 적어. 그리고 무엇 때문에 중이 되었는지도 적고, 북한 간첩과는 몇 번 만났는지 실토해. 중이 된 이후에 자세한 행적을 하나도 빠짐없이 적으라구. 알았어?”
나는 언제 출가를 했으며 조실 스님과 은사 스님을 모시고 기도 정진하며 불사를 해온 사실을 사실대로 적었다. 그는 누락된 부분을 쉼 없이 반복하여 되묻곤 하다가 고함을 질렀다.
“야, 이 중놈아, 그 큰 절에서 재무를 10년이나 봤는데 숨겨둔 재산이 하나도 없다는 게 말이 돼? 누굴 바보로 아나, 이 새끼가….”
그렇게 질문과 답변이 이어지면서 고문은 계속되었다. 밤 11시가 되어서야 지프차에 태워 봉산동의 원주경찰서로 이송해 유치장에 감금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7시에 다시 대공분실로 끌려가 반복되는 질문과 고문. 그 가운데 가장 괴로운 것은 거꾸로 매달고 발바닥을 내려치는 고문은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얼굴에 수건을 씌우고 코에 고춧가루를 쏟아 붓고 양동이로 물을 들어붓는 것이나, 손가락 사이에 연필을 끼워 돌리는 고문도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그러는 중에 나는 기절하여 쓰러지고 찬물을 끼얹으면 깨어나 다시 고문을 당하고…. 그것은 일주일 동안 반복되었다. 낮에는 원주 태장동 보안 부대 대공분실에서 취조와 고문을 당하고, 밤에는 봉산동 원주 경찰서 유치장에서 군복차림으로 얇은 담요 한 장에 의지해 새우잠을 자야 했다.
그런 가운데 10월 31일에는 전국 사찰에 불법 점거 검거와 수색 작업이 자행되었으니 금세기 최대의 불교탄압이었다. 전국 교구 본사의 주지 스님과 총무 스님과 재무 스님은 모두 연행감금하고 중요 사찰 주지 스님 등도 모두 연행되었으며 사찰 종무원, 사찰 중요 신도까지 또는 불교 관련 중요 인사들이 모두 조사 대상이었다.
나는 출가 동기와 재무 소임을 봉행하는 모든 부분에 대하여 자세히 기술하고 월정사는 6·25 사변으로 아군에 의하여 폐사되어 탑만 남았던 사찰로서 천년 고찰인 문화재 복원을 위하여 조실 스님과 주지 스님의 뜻을 따라 수행하게 되었다는 것을 수도 없이 반복 기술하였다. 일주일 후 나는 보안부대장실로 끌려갔다. —당시 보안부대장의 이름은 생각나지 않으나 박 중령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박 중령은 누군가와 바둑을 두고 있다가 내가 들어서자 힐끗 쳐다보더니 말했다.
“정말 그렇게 오직 월정사 복원에만 노력하고 비리와 부정 축재가 없었소?”
“예, 산승이 산사에 들어 기도수행하면서, 무엇 때문에 따로 재산을 감추겠소? 또 무슨 재주로 그런 일을 하겠소?”
“옷 갈아입어.”
“예?”
“승복으로 갈아입고 나가란 말야.”
천일공사 정문을 나와서 걸으니 고문으로 부서진 발목은 걸음을 떼기가 힘겨울 정도로 아팠고,—후에 엉치뼈를 잘라다 붙이는 수술을 두 번이나 했지만 결국 아직도 온전한 걸음을 걸을 수가 없다— 앞니는 모두 부러져서 숨을 쉴 때마다 머릿속이 찌르는 듯 아팠다. 게다가 장독杖毒으로 온몸이 퉁퉁 부어오른 몰골이라니, 누가 봐도 초췌한 걸승의 꼴이었을 것이다. 소지품은 물론 잔돈푼까지 죄 털려 주머니엔 차비도 없었다. 어디 가서 우선 차비라도 빌려야겠기에 신도님들이 모여 있는 원주시 중앙시장 통으로 향했다. 절뚝거리며 시장 통으로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도님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절에도 가지 않을 것이고 불교를 믿지 않겠다고, 심지어 어떤 이는 그새 개종했다고도 했다. 참으로 곤혹스런 누명을 뒤집어쓴 채 나는 절뚝거리며 시장 통을 지나 이불가게를 하는 보살님께 어렵게 얼마간의 돈을 빌려 근처 간이식당으로 갔다. 된장국에 밥을 말아 입안에 넣는 순간, 부러진 이빨에 벼락 치듯 고통이 엄습해 밥을 씹을 수도 없었다. 다시 미지근한 물에 밥을 말아 겨우겨우 목구멍에 밀어 넣는데 왜 그리 눈물이 흐르던지. 두어 숟갈 뜨고는 버스 정류장으로 가서 진부행 버스에 올랐다. 버스를 탔더니 버스 승객들도 수군거렸다.
“월정사 재무 원행 스님이잖아.”
“어딜 갔다 오는데 저렇게 절뚝거리고 초췌하지?”
“아, 텔레비 방송도 못 봤어.”
“스님들이 죄 간첩이래. 수십 억 대를 부정축재했다잖아.”
우여곡절 끝에 월정사 일주문에 도착하였다. 일주문 돌계단에 털썩 주저앉아 전나무 숲길에 수북이 떨어져 바람에 이리저리 휩쓸리는 낙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공금이나 사금이나 통장을 모두 압수당했으니 겨울나기 준비뿐 아니라 당장 교구행정이나 절 살림을 어찌 꾸려야 할지 막막하였다. 나는 무엇을 위하여 산승이 되었으며 어떤 인연으로 오늘 이 치욕을 당하는 것인가. 구도의 궁극이 과연 무엇인가. 열반이라….
참으로 무상無常, 무락無樂, 무아無我, 무정無淨이다. 능견能見과 소견所見인 경계를 보지 아니하여 없어지지 않는[無滅] 것이 열반이라 했다. 분별을 보지 아니하고, 상相과 무상無相을 보는 것이 열반이라 했다. 열반은 가히 취할 바도 아니며 가히 버릴 바도 아니요 단멸도 아니며 떳떳함도 아니요 하나 뜻도 아니요 가지가지 뜻도 아닌바 그러므로 열반이라.
한참을 멍청하게 앉아 생각에 잠기다가 천천히 일어서서 절뚝거리며 성황당을 거쳐 노랗게 단풍이 쌓인 전나무 숲길을 지나 사천왕문으로 들어서니 신도 몇 분과 동산리 마을 사람 몇 분과 처사 신도 몇 분이 김장을 하다 말고 벌떡 일어서 다가왔다. 그들은 한결같이 눈물을 글썽이며 합장을 했다. 법당에서 기도하다 나온 호명리 노 보살님은 내 손을 잡고 울먹였다.
“재무 스님은 바로 나오실 줄 알았습니다. 스님 같은 분을 감옥에 가두다니, 천하에 몹쓸 사람들.”
언론 매체는 연일 불교를 비방하고, 신도님들은 발길을 뚝 끊었다고 했다. 나의 은사이며 월정사 주지이신 만화 스님과 월정사 총무 현우 스님, 상원사 주지 스님은 아직 나오지 못했고, 조실 탄허 스님께선 대전 유성 학하리로 가 계신다고 했다.
나는 조실 스님을 찾아뵙기 위해 곧바로 대전으로 향하였다. 유성에 도착하여 조실 스님께 그간의 사정을 보고하는데 스님 방의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나를 찾는 전화였다. 어리둥절하여 수화기를 건네받은 나에게 수화기 저쪽에선 냉랭하게 통고하였다.
“다시 원주 천일공사 보안사로 들어오시오. 더 조사할 게 있소.”
내가 거기 간 줄을 어떻게 알았을까? 아마도 나를 미행한 모양이었다. 나는 다시 원주의 대공분실로 갔다.
박 중령은 그때도 바둑을 두고 있다가 무뚝뚝하게 다그쳤다.
“정말 숨겨둔 돈이 하나도 없소?”
똑같이 반복되는 무의미한 질문에 나는 화가 치밀었다. 그는 그간 내 뒷조사를 했는지 자료들을 주섬주섬 내놓았다. 거기엔 나의 학창시절 성적증명서까지 있었다. 심지어 초등학교 때 것까지 샅샅이 조사해놨고, 틈틈이 기록해둔 일기장과 단상들을 적어둔 메모와 출가 후 절에서 봉급으로 받은 돈을 푼푼히 넣어둔 하나뿐인 통장까지 내놨다. 사실은 그 통장 하나가 내 재산의 전부였다. 아주 예전에 폐가 심각하게 나빠져 병원에 가려 했으나 은사 스님께선 기도로 병을 극복하라 하셨다. 그때 나는 약간의 돈을 모아둘 필요를 느낀 것이다. 늙어서 아프기라도 하면 치료비로 쓸 생각이었는데, 그들은 그 통장마저 압수해버렸다.
“우리 조실 스님이나 주지 만화 스님, 어떤 분들인지 모르시오? 그분들이 어떤 어르신들입니까? 한암 스님 밑에서 오직 용맹정진만 해 오신 분들 아니오. 그분들 무서운 분입니다. 그 분들 밑에서 살림을 살았는데 거기서 무슨 허튼 생각을 품겠소?”
그렇게 말하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조실 스님은 70이 가까웠고 은사 스님도 벌써 60이 넘으셨다. 그 어른들을 내가 뻔히 알지 않는가. 너무 기가 막혔다. 두 분 다 일제 강점기에 출가하여 6·25를 겪고 절이 아군에 의해 불타 없어지는 것을 고스란히 지켜본 분들이다. 조실 탄허 스님은 불교 인재를 양성하면서 한문 불전을 번역하는 일에 혼신을 쏟아 신화엄경론 40권을 비롯하여 287권에 이르는 문헌들을 취합하여 현토 번역 주석하신 분으로 그때 이미 세간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존경받는 대덕이셨고, 은사이신 만화 스님은 1938년 오대산으로 출가하여 탄허 스님을 은사로 모시면서 대중 외호에 전념했고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한암 스님이 모두 안전지대로 피하라고 했음에도, “조실 스님만 남겨두고 떠날 수 없다”면서 끝까지 남아 한암 스님의 좌탈입망을 지켜봤던 효법손이시다. 그분들을 모셔온 내가 이런 곳에서 이런 조사를 연거푸 받고 있다는 것은 그 어른들을 욕되게 하는 것만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차라리 승복을 벗고 리어카를 끌더라도 이 모욕을 그대로 참아 넘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벼락 같이 소리쳤다.
“여보시오! 나도 선방에 가서 용맹정진하고 싶어서 걸망을 싼 적이 한두 번이 아니오. 그럴 때마다 조실 스님이나 은사 스님이 너까지 가면 누가 절 살림을 하느냐고 붙잡았던 거요.”
나는 울분을 참을 수가 없어 책상을 뒤엎어버리면서 고함을 쳤다.
“맘대로 하시오. 죽이든지 가두든지 살리든지, 맘대로 하시오. 내가 뭘 잘못했다는 것인지 난 도대체 모르겠소.”
책상이 엎어지면서 바둑판에서 흘러내린 바둑알들이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굴러갔다. 박 중령이 정색을 하고 부하에게 대추차를 내오라 하였다.
“스님, 수고했습니다.”
이윽고 박 중령의 입에서 처음으로 스님이라는 말이 나온 거였다. 나는 뚜벅뚜벅 대공분실을 걸어 나왔다. 청렴결백하신 주지 만화 스님도 곧 풀려났지만, 총무 스님과 상원사 주지 스님은 삼청교육대로 끌려가고 말았다. 다시는 이와 같은 무력의 남용이 자행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내 육신에 가해진 그 무자비한 고문을 잊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수행에 전념하는 많은 성직자들에 대한 그들의 무차별한 폭력과 무례, 많은 대중들의 기도처인 큰 도량에 대한 그들의 무지막지한 만행을 용서할 수 없다. 바로 그 무례와 만행에 대한 기억을 역사의 저편에 그대로 묻어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불교닷컴 조현성 기자
2014.12.29.
-원행스님 수필집,
<<월정사 탑돌이>>(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