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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을 빚진 성도들(베드로전서 3:8~9)
2025년 3월 16일 성락교회 주일연합예배 설교: 김성현 감독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베드로전서 3:8~9)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주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는 다른 어떤 신이 줄 수 없는, 하나님 자신의 속성과 본질을, 그의 본성에 담긴 모든 참된 내용을 녹여 희생하심으로써 살리신 그 은혜가 우리에게 나누어진 것이며, 우리는 그 은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의 너그러움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것을 통해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고, 그 은혜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본질적인 은혜가 우리 안에 부어졌으며, 그것을 통해 변화되고, 그것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세상의 신들이 사람들에게 단순히 물질적인 것이나 획기적인 무언가를 제공해 주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우리는 신과 동질적인 어떤 특성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신적인 본질을 부여받았습니다.
에베소서를 비롯하여 성경 곳곳에서 강조되듯이, 우리는 신성을, 신적인 어떤 성질을, 신의 본성을 하나님으로부터 나누어 가진 자들로서 우리의 성분이 변화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경험하지 않고서는 이 세상 너머로 나아갈 수 없으며, 육신이 멸망하듯이 영혼 또한 영원히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모든 종교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그야말로 우리가 받은 그 특권은 가히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를 묘사한 그 묘사 그대로인 것을 우리는 실감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우리는 ‘기독교인’ 또는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으로 다소 겸손하게 불리고 있지만, 사실 이 단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급의 성질을 우리가 갖고 있고, 신분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부어진 신적인 본능은 단순히 인간을 높여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엄청난 미래와 그에 대한 확신을 주며, 끝없이 큰 꿈을 펼칠 수 있는 놀라운 행복이자 특권입니다. 이것은 애초에 우리가 그럴만한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이 사실은 너무나 충격적입니다.
다만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죄를 떠날 것을, 그리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은혜를 용납한다는 것을, 정말 아무 것도 아닌, 또 우리가 거의 할 것도 없는 그 조건만 가지고 크신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셨습니다.
우리는 단지 "이 마귀에게 노예가 되고 마귀의 자식이 되느니, 차라리 주님께 속하겠느냐? 주님의 종이 되겠느냐?"라는 질문 앞에서 "예"라고 대답했을 뿐인데, 주님께서는 우리를 받아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큰 은혜를 베푸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불쌍한 사람들이 많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단순히 불쌍한 처지에서 건져 주시는 정도가 아니라, 다시는 불쌍한 상태로 돌아가지 않도록 넘치도록 호화롭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너무나도 따뜻한 마음으로 많은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그리고 소망이 없는 이들에게 소망을 주고, 건강을 주며, 풍성함을 더해 주셨습니다. 성경이 계속해서 거듭 언급하고 증거하듯이, 그분은 매우 너그러우시고 따뜻하시며, 선하시고 겸손하시고, 긍휼이 많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분이 그리스도이심이 틀림없다.’라고 간접적으로 재확인할 수 있는 부분 중 하나는, 바로 그분이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상(像), 하나님이 말씀하신 거룩한 백성의 모습, 그리고 거룩한 인간상의 기준에 완전히 부합하고도 남는 분이셨다는 점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선한 것’이란, 또는 훌륭한 지도자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자신을 높이고 우쭐거리며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모든 영역에서 실권을 쥐고 패권을 누리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싸워서 권력을 차지하고 빼앗으며, 강자가 약자를 짓누르고 서로 피를 흘리는 그런 모습이 일반적인 지도자의 이미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스스로를 방어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진정으로 선한 모습을 보이셨기에, 당시 사람들은 그분의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그러한 모습만으로도 그를 따르게 되었으며, 심지어 제자들조차도 주님의 이러한 모습을 맞춰가지 못하고 당황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왜 그렇게 하셨냐면, 그는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방식대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자기 성품을 결정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그분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신 것이다.’라는 것이 우리가 2천 년 동안 늘 놀라고 있던 부분입니다. 그분은 하나님 모습 그대로, 하나님 성품을 그대로 지니고 이 땅에 오셔서 행하셨습니다.
그분은 병든 자들, 또 문둥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을 가까이에서 위로하시고, 소망 없는 자들을 위로하시며, 죽어가는 자녀를 둔 자들을 위로하셨습니다. 또한, 병을 고치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자들을 도우려 하시고, 약한 자들 편에 서서 도우려 하셨습니다.
그분이 주신 교훈 중에서도 겸손한 모습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오늘날에도 에베소서를 통해 많이 보고 있습니다. 이는 너무나도 중요한 말씀이며, 감동적인 말씀입니다. 하나님 그대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 4:32).
그래서 이런 말씀을 볼 때 우리는 굉장히 감동받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하나의 덕을, 선한 덕을, ‘웬만하면 권해드립니다. 좋은 것입니다.’라고 권장하는 정도의 말씀이 아니라, 이는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에 대한 본질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치 의로운 사람인 것처럼 자신을 표현하지만, 실제로는 차가운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것이 목사든, 다른 누구든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예수를 믿는다면, 맞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정말로 침례를 받고 완전히 변화되었어야 합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예수를 믿는 날부터, 그리고 성령으로 거듭난 이후부터 그 사람은 사실 천국을 소유한 자입니다. 왕자이거나 공주인 것이죠.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믿음에 턱없이 못 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회자라 하더라도 자신의 위신만 생각하며 머리를 굴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밖에서는 훌륭한 목사로 사람들이 생각하고 받들지만, 가정에서는 마치 자기가 임금처럼 군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너무나도 무정하고 심지어 난폭해서 가족들이 평생 그에게 시달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앙이 좋은 여러 성도들 중에서도 교회에서는 뜨겁게 열이 날 정도로 기도하는데 집에 가서는 가서는 매우 거칠고 사납습니다. 아내에게도 사납게 대하고, 자녀에게도 사납고,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날카로운 태도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삶이 주의 복음이 확장되는 데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자기를 구원하신 손은 따뜻하고 착하며 겸손한 손인데, 자기는 그런 손길로 구원받고도 여전히 옛 사람의 모습 그대로 있다면, 그의 신앙생활은 다른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전혀 미치지 못합니다. 날카롭고 이기적이며 투쟁적인 심리를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에, 교회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것들을 항상 이야기해 왔습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에 왔으면 예수로 완전히 깨진 사람, 앞서 부른 찬양의 가사처럼 예수로 충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 충만! 충만히 안 해!?”라고 외치면서 충만에 대해 오해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생각을, 예수님을 닮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충만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이 내게 이루어진다! 내게 이런 생각이 있지만, 주님 앞에서 내 생각을 내려놓겠습니다. 나는 이렇게 주장하지만, 우리 목사님이 아니라고 하시면 아닙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거 교회를 자세히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 하는 식으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자기 주장을 내세워 교회를 뜯어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곳은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곳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지배하는 곳입니다.
오늘 예수께서 나에게 오셔서 나를 살려주셨듯, 교회에 오면 나를 돕고, 나를 위로하며, 내게 용기를 주고, 우리가 하늘에 속한 존재임을 몸소 보여주는 사람들로 주위에 가득한, 그런 것이 우리는 너무나 절실히 필요합니다. 초대 교인들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에 교회가 많다 보니 교회가 그렇게 절실하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 익숙해지는 경우가 많죠.
또한 교회들이 교회를 어느 정도 유지하고 교인 수를 많이 확보하는 데 집중하다 보니, 교회에 악한 영향을 끼치는 사람들까지도 그냥 품어버리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물론 교회가 구원을 모르는 사람은 품어야 하지만,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을 품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우리 젊은 영혼들도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 해를 끼치는 사람은 품지 마십시오. 그것은 복음에 완전히 반대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교회를 공격하는 자들을 품지 않으셨으며, 오히려 저주하셨습니다. 물론 그들을 당장 해하지는 않으셨지만, 영원한 멸망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기를 "오늘 네가 내가 한 일들을 믿지 않으면 너는 네 죄 속에서 죽으리라."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도 이 세상에 와서 속이 타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 안에서 그는 평안하셨습니다. 또한 그는 없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셨는데,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어떤 이념식으로 나눠주는 것을 생각하고 그런 것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오해하지 말기 바랍니다. 저는 그런 데 완전히 관심 없습니다. 이곳은 사랑이 지배하는 곳, 긍휼이 지배하는 곳이 되기 원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겉모습은 다 갖추고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며 영적인 것을 주장합니다. 그런데 정작 사람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입니다. 사납습니다. 우리 교회 2천 년대 초 즈음에, 우리 교회 사람들의 성품을 보고 저는 여기가 하나님이 계신 곳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표현이 좀 강할 수도 있지만, 그때 사람들은 너무나도 차가웠습니다. 나는 그들의 사랑에 너무 목말랐고, 우리 가족 모두가 그랬습니다.
물론 우리가 오늘 많이 바뀌었지만, 각 예배당에서든 어디에서든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로 이렇게 살게 되었고, 영원한 꿈을 갖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주님을 닮은 자이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원을 받음 자들임이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겸손과 긍휼로서 행한 것은 우리가 받을 상급에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는 긍휼한 마음으로 교회를 사모하고 돕고, 내가 긍휼함으로써 교회에 기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내가 행하는 일입니다. 주를 위해 행한다는 것은 반드시 눈에 보이는 엄청난 일을 해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겸손하고 긍휼한 마음으로 교회를 위해 많이 품고 돕고, 교회를 풍성하게 하며, 교회를 사랑스럽고 평안하게 하는 것이 나의 참모습이며, 하나님께서 내게 요구하시는 모습입니다.
성경을 아무리 봐도, 나는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이 내게 원하는 것, 주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은 바로 내가 내 교회를 겸손히 사모하고, 섬기며,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나는 내 죄로 인해 결국 내 구주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삶까지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불만이 있을 수 없으며, 오직 감사할 뿐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든, 여기는 우리가 저 나라에 가기 위해 잠깐 거쳐 가는 곳입니다.
저는 가끔 지방 예배당의 영상을 보기도 하는데, 지역 예배당에는 성도들이 많지 않은 곳이 많습니다. 사태로 인해 성도들이 많이 떠났고, 원래도 교인이 많지 않은 곳도 있고. 그렇다고 풀이 죽어서 예배드릴 것이 아니라, 그곳의 목사님은 여기 센터에서 예배하는 것 이상으로 정말 주님을 믿는 기쁨에 미쳐 날뛰듯이 성도들에게 그 열정을 심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예배의 분위기가 살아나도록 미리 뜨겁게 달궈서, 성도들이 예배당에 들어오자마자 그 흐름에 휩쓸려 자연스럽게 같이 뜨겁게 찬양하면 좋겠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교회가 이렇게 얌전하게만 있는 것은 가톨릭적인 분위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기독교회를 품고 있었던 가톨릭적인 정서, 즉 권세로서 교회를 컨트롤하기 위한 영향이 남아 있는 것이죠.
그러나 원래 주님 안에서는 찬양하는 모습이 정말 열광하며 환호하는 사람처럼 나타나야 합니다. 글해서 모두가 힘을 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에 와서 ‘나 예수 믿는다’ 하는 표만 내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큰 긍휼을 받아 긍휼의 빚을 졌습니다. 내가 받은 이 긍휼을 내놓는 것이 바로 나와 우리 모두의 삶에 주신 의미입니다. 내가 불쌍히 여김으로써, 주께서 추진하시는 복음의 사역에 내가 기여하고, 복음의 진실을 나타내는 그 부분을 잘 해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도 나는 우리 성도들이 단지 겉으로만 ‘신앙신앙’ 하고, 겉으로만 열광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주님의 모습, 주님이 요구하시는 그런 교회의 모습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성도들 각자가 주의 사람이 되었지만, 세상 삶은 힘들죠. 내가 우리 성도들의 삶을 일일이 돌아볼 수는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쓰러지면, 그들까지 돌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돌볼 자도 없게 되는 것이고. 그러나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축복받으면, 인생도 능히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나는 저들의 영혼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성도들의 영혼이 잘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영혼이 축복받을 수 있도록 길을 자꾸 열어주려고 합니다. 자꾸 찾게 하고, 발견하게 하고, 하나님과의 연결을 더 깊이 맺을 수 있도록 계속해서 교섭을 추진하려 합니다.
주를 믿는 이런 믿음이 잘 돼야, 여러분의 다른 일들도 잘됩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인생이 교회로 인해 잘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 사는 다음 세대, 영원히 사는 삶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삶은 그저 지금 그 믿음으로 살기 위해 부차적으로 필요한 장치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결단을 잘해야 합니다. 신앙을 ‘이것은 영원한 삶의 일부다.’, ‘영원한 삶으로 도약하기 위한 발받침이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점프하기 위해서는 잠시 몸을 숙여야 될 수도 있습니다. 숙이는 것은 동력을 갖기 위해서인데, 선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신앙을 진짜 믿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 같습니다. 진짜 확신이 없는 것이죠. 그저 보험 들듯이 예수를 믿었던 것입니다.
만약 진짜로 예수를 믿는다면,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리스도의 피가 자기를 확실하게 덮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라는 것은 곧 죽음의 효력이 덮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죄의 강력한 권세를 끊어낸 법적 효력이 작용해서 덮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마귀가 뚫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보호하는 막이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이를 ‘주의 날개 아래 있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엄청난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으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 여러분께 말씀드리지만, 다음 세대가 걱정입니다. 지금은 내가 이렇게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으니까 못 하겠지만, 다음 세대에도 여전히 마귀 자식 같은 사람들이 와서 교회를 이용해 먹으려 할 것입니다. 그게 걱정입니다. 원수 같은 마귀가 원수의 일꾼으로 와서 교회를 갉아먹으려 할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다 야망이 있으니까요.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이적이 필요합니다. 우리 성도들 모두 각자의 삶도 어렵죠. 편안한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 목사님 가정은 평안하다.”라고 생각하시나요? ‘가정, 가정’ 하니까 벌써 졸음이 쏟아지는 것처럼 너무 평안할 것 같습니까? 저 역시 만만치 않은 굴곡진 삶을 살아왔습니다. 한번 겨뤄봅시다, 누가 이기는지. 물론 쓸데없는 싸움이겠지만요.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저는 여러분이 제가 섬기는 여러분도 그 예수님을, 그 주님을 섬기는 것이 가장 우선적이고 복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늘의 복을 여는 길이며, 우리의 가정에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오는 통로가 된다고 믿습니다.
평소에는 “목회자에게 잘하십시오.”라고 하지만, 도리어 합당하지 않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스스로 막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의 익숙한 세상 식의 계산법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저는 세상에 보이지 않는 계산 법으로, 하나님의 방법으로, 여러분께 우리 하나님의 음성을 반복해서 전하며, 여러분이 하나님의 복을 받을 길을 계속 열어가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을 보면,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영원토록 주님으로부터 받을 칭찬이 여기에 달려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와 긍휼, 그것을 모두 돌려드리고도 남을 만큼 큰 복을 받을 근거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1~2)
할렐루야!
저는 여러분이 이것부터 먼저 붙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을 보면, 세상의 삶에 찌들어 살면서도 서로에게 ‘선하게 하자.’, ‘서로 돌보라 하셨다.’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겉으로는 선하게 하는 듯한데 속으로는 자기 존귀함을 다 내려놓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서로를 섬겨야 합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주님께서 피 흘리시는 그 발을 닦아드리는 마음으로, 그 힘겨운 주님의 발을 씻겨 드리는 그런 자세로 선하게 자기를 낮춰놓고 겸손하게 서로를 대하기 바랍니다. 겸손한 자를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대적하신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이 말씀을 아무도 믿지 않으려 하지만, 여러분은 이 말씀을 붙잡고 주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가 복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를 찾아온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과 복을 받을 수 있도록, 이곳이 은혜가 충만하고 천국의 기쁨이 넘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위하는 일에 기여하시고, 교회를 더럽히는 일에 억울하게 사용되는 분들이 없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부터 기도할 때마다, 우리 월산을 뺏기지 않도록 지켜주시옵소서. 또한, 우리 신학교를 보호해 주시고 무너지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함께 간절히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긍휼을 빚진 자들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빚졌는지 알고, 그에 합당한 신앙생활을 하여서 성경이 말하는 주님이 요구하시는 심령, 삶의 자세를, 교회의 삶의 자세를 갖추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다 같이 주님의 도움을 구하여서, 우리가 주님이 원하시는 그 성품을 따라갈 수 있도록 다 같이 합심하여 기도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 들은 영혼들 다 도와주시고, 종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정말 마땅히 긍휼을 빚진 자로서 긍휼 베푸는 것이 우리의 할 바인 것을 선포했습니다. 주께서 도와주셔서 우리 성도들 다 순종하여서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시고, 주님을 닮은 교회, 주님의 그 우리를 살리신 그 하나님의 긍휼하신 은혜, 정말 인자하신 은혜가 역사하고 지배하는 교회 되게 하여 주시옵시고, 원수의 세계에 모든 영향력이 힘을 잃고 달아나는 곳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교회에 기여하고 사랑으로 또 겸손으로 긍휼로써 돌보려고 자신을 내어놓는 우리 모르는 성도들 복 주시고, 정말 저들의 영혼을 기억하시고, 저들의 삶을 도와주시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녹취: 성락교회 성락선교센터
[출처] 20250316 긍휼을 빚진 성도들(베드로전서 3:8~9) 성락교회 주일연합예배 김성현감독|작성자 태초에 말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