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짜기 들어와 이 글을 읽을 친구에게 | g1
작성자 : 김영순 (손님) (2001-06-17 오전 06:20 조회수 : 3)
Dear 영숙
숙아!!
지난날 여의도 광장에서 맛보았던 따끈따끈한 라면국물을 생각하며
비록 주머니 사정은 가벼웠지만
情 이라는 끈적거리는 덩어리로 엉켜 살았던 그 시절이
눈물나도록 진한 라면국물이 되어 내 목구멍을 적시는구나
난 역시-- 가난함과 너무 친해
그것의 불편함조차도 느끼지 못하는 가난 예찬론자가 되어
내 딸들에게 얘기한다 엄마 젊은 시절은 가난을 낭만으로 여겼노라고...
과연 우리 아이들이 그 낭만을 얼마나 이해 할까나?
계림동 자취방에서 즐겨 까먹던 땅콩의 기억을 잊지 못해
지금도 마켓에 가면 땅콩은 으레껏 껍데기 씌워진 것을 산다
고추볶음을 할 때는 마늘을 저며 넣어야 하고
콩나물은 삶아서 반은 국하고 반은 나물을 하라던
크고 작은 너의 가르침이 지금은 내것이 되었고
그것들을 요리할 때마다 네 생각을 한단다
호박죽도 너한테 배웠지만
지금은 호박죽 하면 영순 이잖니!!
나 역시 너와 똑같은 생각으로
이다음 얻어먹을 양 열심히 딸들에게 우리의 맛을 가르친다.
중국고사에 남의 집에 가서 유자를 대접받고(당시 상당히 귀한 것이었을)
어머니께 드리려고 품에 넣어 훔쳐 왔다는 효자가 있었고
조선시대 어떤 시인은 홍시감 대접을 받고
그걸 훔쳐가서 드릴 어머님이 안 계심을 슬퍼하는 시를 읊었다
부모형제 남편 자식 두루두루 알뜰살뜰 챙기며 사는 다부진 너의 삶을 보며
병중이신 친정 어머니께 향하는 마음 쓰린 아픔을 함께 아파하며
살아 계셔야 홍시던 유자던 훔쳐다 드릴게 아닌가 생각한다
거동 불편하신 네 어머님 살아계셔주심이 얼마나 고마운 일이더냐
난! 일찍 돌아가신 내 부모님이 가슴에 맺혀오기에
여고시절 교과서에 실려있던 시조를 떠 올려보았다
<반중 조홍 감이 고와도 보이 나다 <
유자이 아니라도 품엄직도 하건 만은
<품어가 드릴 이 없으니 그를 설워하노라
이 詩를 생각하며 나 또한 시를 짓는다
함께 어울릴 이 하나 없는 고립의 나날이 연속이기에 \
'제아무리 맛있는 게 있어도 함께 나눠 먹을 이 없으니
그를 설워하노라\' (엉터리 삼행시인 이 드디어 모방시인이 되는 순간이도다)
숙아! 잘 나가다가 옆길로 새버린 것 같지?
그냥 난 이렇게 산다
슬퍼지려하면 거기에 빠지지 않으려고 옆길이던 뒷길이던 새가면서
세월을 보내려 한다
잘 있거라 안녕.
덴버에서 영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