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잣집 무너지는 걸 보는 게 상당히 재미있다. 한마디로 오지다. 최모와 노모의 이혼 소송을 보며 우리 모두 체감하지 않았나. 세상에, 이혼 소송 위자료로 20억원을 판결하니 나흘 만에 휘리릭, 송금했단다. 그토록 '완전무결했던' 커플이 어디에 또 있을까?
지난 5일 넷플릭스에 올라온 니콜 키드먼 주연의 리미티드 시리즈 '완전무결한 커플'(6부작)을 일요일 오후에 몰아서 한 번에 봤다. 올해 들어 처음 있는 일이다. 블랙 코미디에 서스펜스 스릴러, 발리우드식 춤판을 어지중간하게 버무렸다. 누구는 키드먼의 캐릭터와 연기가 너무 익숙하다며 혹평을 날렸지만, 난 그 나이에도 여전히 늘씬하고 매력을 발산하는 키드먼이 너무 신기해 빠져들었다. 어떤 평을 보니 '새하얗고 예쁜 뱀파이어'라고 요약했던데 퍽 공감이 갔다.
낸터킷 섬이 무대다.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이프 코드에 있는 작은 섬이다. 미국의 내로라하는 부잣집들이 여름 별채로 애용하는 곳이다. 결혼식에 초청된 하객 모두가 용의선상에 오르고, 섬을 떠나기도 쉽지 않아 '고립된 곳에서 모두가 의심받는' 애거서 크리스티 류의 서스펜스 스릴러 배경으로 최적인 곳이다.
4000만 달러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소개되는 윈버리 저택에서 추리소설 작가 그리어 개리슨(니콜 키드먼)의 둘째 아들 벤지 (빌리 하울)가 결혼하게 돼 성대한 잔치를 준비한다. 벤지의 결혼 상대는 어밀리아 색스(이브 휴슨)인데 그녀는 평생의 짝을 찾았다는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끌려왔다. 시어머니는 세 아들이 가족 가운을 입고 집안을 돌아 다니게 할 정도로 깐깐한 가모장(?)이다. 남편 태그(리에브 슈라이버)는 지은 죄가 많아 아내가 소리를 버럭 지르면 죽어라 긴다.
남편 바람기에 마음고생을 하는 그리어는 자신이 쌓아올린 것을 지키기 위해 세세히 가족을 통제하는데 아들들과 남편은 한사코 뻘짓을 벌여 집안을 무너뜨리기에 여념이 없다. 어밀리아는 벤지의 절친이자 그리어가 아들처럼 아끼는 인도 청년 갑부 슈터 디벌(이샨 카타르)에게 마음이 흔들린다. 큰 아들 토마스(잭 레이너)는 임신한 아내 애비(다코타 패닝) 몰래 프랑스 아줌마 이사벨(이자벨 아자니)과 불륜을 저지른다. 어밀리아의 절친으로 들러리 대표가 된 메릿 모나코(메건 페이히)가 예식 날 아침에 주검으로 떠오르며 막장 드라마가 시작된다. 더 이상 언급하는 일 자체가 스포일러가 되겠다.
그리어의 음전한 척 가증스러운 가식과 애비의 신랄하면서도 점잖은 힐난이 상당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공항 터미널에서 사서 읽는" 추리소설을 쓴다고 그리어가 자조하는 장면도 나오고, 그리어가 겪은 이 난리 법석을 새로운 소설 소재로 삼고 싶다고 하는가 하면, 괜히 톰 울프의 '허영의 불꽃'이나 나이젤 니콜슨의 '결혼의 초상' 등을 언급하며 문학의 향기를 뿜어내는 척하지만 그냥 X막장 드라마일 뿐이다.
엘린 힐데브랜드의 2018년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소설 'The Perfect Couple'을 제나 라미아가 각색하고 수잔 비에르가 연출했다. 원작을 읽지 않아 뭐라고 하기가 그렇다. 읽은 이는 줄거리와 결말 모두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인 어 배러 월드'로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고 넷플릭스 영화 '버드 박스'를 성공시킨 뒤 '언두잉'과 '퍼스트 레이디' 등 TV드라마에 전념하는 비에르가 솜씨를 발휘한다. 조연 배우 겸 작가인 라미아는 '굿 걸스'와 '레지던트 이블'로 이름을 알렸다. 비에르는 여러 장르를 뒤섞은 이런 드라마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스타일이라고 했으니 소원을 푼 셈이 됐는지 모르겠는데 관객들 평은 좀 다를 듯하다.
가장 큰 약점은 아일랜드 밴드 U2의 리더 보노의 딸인 이브 휴슨과 빌리 하울의 연기 케미스트리가 시원찮다는 것이다. 대배우 이자벨 아자니의 최근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이들도 적지 않은 듯하다. 다코타 패닝의 연기는 합격점을 받을 만했다. 패닝이 임신 중에 촬영했나 의심될 정도로 자연스럽게 배가 부른 모습으로 나오는데 구글링으로는 진위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녀의 볼록한 배가 결정적 단서였다.
그리어 가문의 위세에 눌려서 그런 것이라 표현하고 싶었는지 몰라도 경찰 수사가 너무 엉성하고 끌려가는 느낌이다. 캐스팅이나 전개 방식에서 인도 영화의 장점을 흡수하려 한 것 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어지중간한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원작을 읽은 이들은 더욱 실망감이 큰 듯한데 이런 막장 드라마는 욕하면서도 보지 않는가? 일방적으로 형편 없다고 폄하하기엔 극본이 나름 촘촘해 혹평을 하기도 어렵다 싶다.
스트리밍한 뒤 유럽이나 미국으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몰아 감상하면 제격이다 싶다. 재미있긴 하다.
한편 키드먼은 전날 베니스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지만 모친이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다급히 떠나야 했다. 수상작은 '베이비 걸'인데 키드먼의 이름이 불린 상태에서 감독 핼리너 레인이 대신 나와 수상했다. 레인 감독은 "베니스에 도착한 뒤 어머니 자넬 앤 키드먼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면서 키드먼이 남긴 소감 '나는 충격을 받았고, 가족에게 가야 한다. 삶과 예술의 충돌은 가슴 아프고 내 마음은 찢어졌다'를 들려줬다.